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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파티?”
― 응. 클럽 파티라는데 나도 가 본 적은 없어. 근데 완전 괜찮대.
미진은 자기네 학교에 좀 잘사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 그 친구가 초대권을 줬다면서 장미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장미는 흥미가 생기질 않아 거절했다.
“귀찮아. 그냥 집에서 잘래.”
― 나 혼자 가긴 좀 그런데. 오늘만 같이 가 주라.
“안 갈래.”
― 그럼 이거 그냥 버려? 아깝게. 특급 호텔 라운지에서 하는 건데.
“넌 가. 나랑 같이 안 가도 되잖아.”
― 혼자선 어색하잖아.
“어색하기는. 대충 웃어 보이면서 구경하면 되지.”
문 앞에 선 장미는 열쇠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며 대꾸했다. 그녀의 낡은 자취집엔 지문 인식이나 키패드 같은 첨단 잠금장치가 존재하지 않아 매번 이렇게 귀찮은 과정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도 휴대폰 너머의 미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안 간다니까……. 어?”
― 갈 거야? 지금 간다고 한 거야?
장미는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아무리 휘저어도 나오지 않는 열쇠에 의아해하다 문득 아까 사무실에서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려 쏟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열쇠가 빠진 모양이었다. 장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은 여기서 15분 거리다. 물론 가깝긴 했지만 장미는 도로 열쇠 찾으러 가는 게 오늘따라 굉장히 귀찮았다. 근데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했다. 수화기 안에선 미진이 왜 대답 안 하냐면서 장미를 재촉했고 장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갈게.”
― 진짜?
“그래. 올나잇이야?”
― 응.
사실 올나잇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열쇠 핑계 댄 김에 찜질방에서 하루 정도 몸 지지는 것도 괜찮다 싶었으니까.
“알았어. 가자. 이때 아니면 그런 곳 언제 또 가 보겠어.”
―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근데 특급 호텔이면 뭐 드레스 코드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돈 많은 친구가 줬다며. 나 불안해. 드라마에서처럼 창피당하면 어떡해. 표독스러운 애가 막 머리에다 와인 쏟아붓고. 우린 구해 줄 재벌 남친이 없는데.”
장미의 말에 미진이 소리 내 웃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수화기 바깥까지 빠져나왔고 장미는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없어서 창피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진은 제 목소리가 커진 줄도 모르고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 역시 넌 내 친구다. 사실 나도 좀 불안해서 물어봤었거든. 근데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댔어. 편하게 입고 가도 된대.
“그래? 그럼 뭐…….”
그렇게 장미는 알았다고 말하며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미진과는 봉봉 비어 근처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났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미진이 장미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카드엔 우아하고 멋들어지게 휘어진 금박 무늬가 새겨져 있다. 장소는 서울 중심가의 다이아몬드 호텔 클럽 라운지.
둘은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호텔 입구에 도착해 직원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자 직원은 친절하게 둘을 라운지로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도착한 그곳엔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아.”
“오오.”
천장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조명이다. 눈부시지도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은 조명 빛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부를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중앙엔 넓은 댄스홀이 있었고 댄스홀 주변엔 드러누워도 편해 보이는 소파 의자와 테이블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림 같은 라운지엔 모델처럼 탄탄하고 잘빠진 미남 미녀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들은 유행에 익숙한 듯 멋스럽게 세팅한 헤어스타일과 자극적인 향수, 그리고 런웨이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고급 브랜드의 가지각색 패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슴이 훤히 파이고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입었음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자들과 날티를 풍기면서도 격식에 맞춘 슈트 차림의 남자들이 잔뜩 들끓는 광경에 장미와 미진은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로 멋지잖아?!
너무 잘난 사람들 틈에 끼어들자니 살짝 위축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으면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장미는 금방 긴장을 풀었다. 그러곤 아직도 정신을 부여잡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리는 미진을 툭 건드렸다.
“정신 차려.”
“아……. 어, 와우.”
미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파티의 규모와 수준에 놀란 듯 약간 얼떨떨하게 웃었다가 곧 긴장을 풀고 평소대로 돌아왔다. 잠시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곧 초대장을 준 친구를 찾아보고 오겠다며 장미에게 잠깐만 혼자 놀고 있으라고 했다.
미진이 자리를 뜨자 장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예쁜 디저트와 음료가 잔뜩 놓인 푸드 테이블로 다가갔다. 손님들이 거기서 음식을 가져가 먹는 것을 보고 장미도 그중 노란색의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고 이어서 망고주스가 담긴 컵을 집어 들려고 했을 때였다.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예쁜 여자가 장미가 잡으려는 컵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손가락만 스치고 사라진 주스 컵에 장미의 손이 움찔 떨렸다. 이 많은 것 중에 굳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시비가 분명해서 장미는 의아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너 나 아니?’라고 표정으로 묻는 장미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여자는 날치기한 주스를 마시지도 않고 들고만 서선 톡 쏘아붙였다.
“여긴 손님이 쓰는 테이블이야. 직원이 먹는 게 아니라고.”
‘뭐, 직원?’
장미는 어이없이 여자를 바라보다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흰 블라우스에 청치마. 장미는 비록 자기가 그녀처럼 화려하고 고급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깔끔하고 무난하다고 여겼다. 근데 직원이라니.
허망해하던 장미는 이내 삐죽 심술이 돋았다.
‘내가 직원이었으면 이렇게 당당하게 먹고 있었겠어?’
분명 알고도 시비 건 게 분명하다. 장미는 여자가 제게서 빼앗은 주스를 오만한 자태로 입에 가져가고 있는 걸 뚱하니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상냥하게 뒤바꾸고 시비 건 여자에게 말했다.
“저어, 손님.”
여자는 대꾸 없이 눈썹만 까딱 움직였다. 뭐냐고 묻는 듯하다. 장미는 더욱 눈가를 가늘이고 입가를 올렸다.
“그거 누가 토한 거 담아 놓은 컵인데요.”
“푸웃―! 뭐? 뭐?”
“치워 드리겠습니다.”
장미는 캑캑거리는 여자에게서 잽싸게 컵을 빼앗아 들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여자가 금세 어처구니없어할 게 뻔했지만 어쨌든 이 틈바귀에서 자신을 다시 찾긴 어려울 테니까.
굳이 찾는다고 해도 뭐 어쩔 건데 하고 상대 안 하면 결국 본인 시간 낭비나 하는 거였다. 뭐 자기 시간 망치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지. 장미는 입을 삐쭉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승부욕으로 주스를 도로 뺏긴 했지만 모르는 여자가 마시던 주스에 딱히 입 댈 생각은 없었다. 컵을 대충 한쪽에 밀어 둔 장미는 또 다른 푸드 테이블에서 마카롱 접시를 가져다 하나씩 집어 먹으며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마카롱이 입에 맞는다고 생각하며 걷던 장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려는 듯 조명이 훅 어두워지며 소란스러운 음악이 틀어졌다. 사람들은 금세 댄스홀에 몰려 춤을 추기 시작했고 장미는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카롱만 주워 먹었다.
‘춤추네.’
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추는 건 내키지 않았다.
‘여기선 먹는 게 남는 거지 뭐. 근데 얜 어디까지 간 거야?’
파티가 시작되고도 돌아오지 않는 미진을 찾아 장미는 마카롱을 우물대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직접 찾아 나서기를 한참, 드디어 장미는 어떤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미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장미가 보기에 그 둘의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해 보였다.
‘어머. 뭐야?’
대화 중 손짓과 웃음이 많아진 미진을 보아하니 그저 친구를 대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혹시 지금 저 남자랑 썸 타는 건가? 미진의 볼이 빨갛게 보이는 건 어쩌면 조명 때문이거나 또는 손에 들고 있는 칵테일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장미는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후후 웃었다.
“드디어 솔로 탈출하는구나.”
저도 애인 없는 주제에 미진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장미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혼자선 어색해서 못 오겠네 어쩌네 하고는 자길 이렇게 버려둔 미진에게 아주 살짝 괘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내 너그럽게 미진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솔탈하면 좋은 거지.’
그저 미진이 잘 되기를 응원하며 돌아서려던 차였다. 그때 마침 장미는 미진이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상대편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걸 보게 되었다.
“……!”
그 순간 장미는 태생적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저 남자는 동족이야!’
맙소사. 당황으로 제 얼굴이 빨개진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손에 든 접시를 내려놓고 일단 평정을 찾기 위해 잠시 호흡을 골랐다. 얼마 후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든 장미는 걱정스럽게 미진과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성실히 미진과의 대화에 임하는 뱀파이어의 의도는 명확했다.
‘미진이를 사냥감으로 찍었어.’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근처의 주스 잔을 집어 든 장미는 두 사람에게로 성큼 걸어갔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소파 의자에 앉아 있는 미진의 옷에 주스를 뿌렸다. 미진의 밝은 색 원피스에 검붉은 포도주스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
미진은 그사이 칵테일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털었다. 장미는 미진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미진은 금세 장미를 알아보았다.
“응? 장미……?”
“응. 나야. 미안. 실수였어. 얼른 화장실 가서 물로 닦아 봐.”
“응? 응…… 아라써.”
발음이 약간 뭉개진 미진은 비틀거리며 발을 뗐다. 장미는 미진이 무사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미진과 함께 있던 뱀파이어에게 말했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장미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곧바로 장미의 손목을 잡아채 붙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파이어는 놀란 장미를 향해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춤이라도 춰.”
“네? 아니, 저는 춤은…….”
“춤은 싫어? 그럼 그냥 같이 놀아도 되고.”
“앗, 저기……!”
“파티?”
― 응. 클럽 파티라는데 나도 가 본 적은 없어. 근데 완전 괜찮대.
미진은 자기네 학교에 좀 잘사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 그 친구가 초대권을 줬다면서 장미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장미는 흥미가 생기질 않아 거절했다.
“귀찮아. 그냥 집에서 잘래.”
― 나 혼자 가긴 좀 그런데. 오늘만 같이 가 주라.
“안 갈래.”
― 그럼 이거 그냥 버려? 아깝게. 특급 호텔 라운지에서 하는 건데.
“넌 가. 나랑 같이 안 가도 되잖아.”
― 혼자선 어색하잖아.
“어색하기는. 대충 웃어 보이면서 구경하면 되지.”
문 앞에 선 장미는 열쇠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며 대꾸했다. 그녀의 낡은 자취집엔 지문 인식이나 키패드 같은 첨단 잠금장치가 존재하지 않아 매번 이렇게 귀찮은 과정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도 휴대폰 너머의 미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안 간다니까……. 어?”
― 갈 거야? 지금 간다고 한 거야?
장미는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아무리 휘저어도 나오지 않는 열쇠에 의아해하다 문득 아까 사무실에서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려 쏟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열쇠가 빠진 모양이었다. 장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은 여기서 15분 거리다. 물론 가깝긴 했지만 장미는 도로 열쇠 찾으러 가는 게 오늘따라 굉장히 귀찮았다. 근데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했다. 수화기 안에선 미진이 왜 대답 안 하냐면서 장미를 재촉했고 장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갈게.”
― 진짜?
“그래. 올나잇이야?”
― 응.
사실 올나잇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열쇠 핑계 댄 김에 찜질방에서 하루 정도 몸 지지는 것도 괜찮다 싶었으니까.
“알았어. 가자. 이때 아니면 그런 곳 언제 또 가 보겠어.”
―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근데 특급 호텔이면 뭐 드레스 코드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돈 많은 친구가 줬다며. 나 불안해. 드라마에서처럼 창피당하면 어떡해. 표독스러운 애가 막 머리에다 와인 쏟아붓고. 우린 구해 줄 재벌 남친이 없는데.”
장미의 말에 미진이 소리 내 웃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수화기 바깥까지 빠져나왔고 장미는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없어서 창피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진은 제 목소리가 커진 줄도 모르고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 역시 넌 내 친구다. 사실 나도 좀 불안해서 물어봤었거든. 근데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댔어. 편하게 입고 가도 된대.
“그래? 그럼 뭐…….”
그렇게 장미는 알았다고 말하며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미진과는 봉봉 비어 근처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났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미진이 장미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카드엔 우아하고 멋들어지게 휘어진 금박 무늬가 새겨져 있다. 장소는 서울 중심가의 다이아몬드 호텔 클럽 라운지.
둘은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호텔 입구에 도착해 직원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자 직원은 친절하게 둘을 라운지로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도착한 그곳엔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아.”
“오오.”
천장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조명이다. 눈부시지도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은 조명 빛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부를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중앙엔 넓은 댄스홀이 있었고 댄스홀 주변엔 드러누워도 편해 보이는 소파 의자와 테이블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림 같은 라운지엔 모델처럼 탄탄하고 잘빠진 미남 미녀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들은 유행에 익숙한 듯 멋스럽게 세팅한 헤어스타일과 자극적인 향수, 그리고 런웨이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고급 브랜드의 가지각색 패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슴이 훤히 파이고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입었음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자들과 날티를 풍기면서도 격식에 맞춘 슈트 차림의 남자들이 잔뜩 들끓는 광경에 장미와 미진은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로 멋지잖아?!
너무 잘난 사람들 틈에 끼어들자니 살짝 위축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으면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장미는 금방 긴장을 풀었다. 그러곤 아직도 정신을 부여잡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리는 미진을 툭 건드렸다.
“정신 차려.”
“아……. 어, 와우.”
미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파티의 규모와 수준에 놀란 듯 약간 얼떨떨하게 웃었다가 곧 긴장을 풀고 평소대로 돌아왔다. 잠시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곧 초대장을 준 친구를 찾아보고 오겠다며 장미에게 잠깐만 혼자 놀고 있으라고 했다.
미진이 자리를 뜨자 장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예쁜 디저트와 음료가 잔뜩 놓인 푸드 테이블로 다가갔다. 손님들이 거기서 음식을 가져가 먹는 것을 보고 장미도 그중 노란색의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고 이어서 망고주스가 담긴 컵을 집어 들려고 했을 때였다.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예쁜 여자가 장미가 잡으려는 컵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손가락만 스치고 사라진 주스 컵에 장미의 손이 움찔 떨렸다. 이 많은 것 중에 굳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시비가 분명해서 장미는 의아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너 나 아니?’라고 표정으로 묻는 장미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여자는 날치기한 주스를 마시지도 않고 들고만 서선 톡 쏘아붙였다.
“여긴 손님이 쓰는 테이블이야. 직원이 먹는 게 아니라고.”
‘뭐, 직원?’
장미는 어이없이 여자를 바라보다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흰 블라우스에 청치마. 장미는 비록 자기가 그녀처럼 화려하고 고급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깔끔하고 무난하다고 여겼다. 근데 직원이라니.
허망해하던 장미는 이내 삐죽 심술이 돋았다.
‘내가 직원이었으면 이렇게 당당하게 먹고 있었겠어?’
분명 알고도 시비 건 게 분명하다. 장미는 여자가 제게서 빼앗은 주스를 오만한 자태로 입에 가져가고 있는 걸 뚱하니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상냥하게 뒤바꾸고 시비 건 여자에게 말했다.
“저어, 손님.”
여자는 대꾸 없이 눈썹만 까딱 움직였다. 뭐냐고 묻는 듯하다. 장미는 더욱 눈가를 가늘이고 입가를 올렸다.
“그거 누가 토한 거 담아 놓은 컵인데요.”
“푸웃―! 뭐? 뭐?”
“치워 드리겠습니다.”
장미는 캑캑거리는 여자에게서 잽싸게 컵을 빼앗아 들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여자가 금세 어처구니없어할 게 뻔했지만 어쨌든 이 틈바귀에서 자신을 다시 찾긴 어려울 테니까.
굳이 찾는다고 해도 뭐 어쩔 건데 하고 상대 안 하면 결국 본인 시간 낭비나 하는 거였다. 뭐 자기 시간 망치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지. 장미는 입을 삐쭉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승부욕으로 주스를 도로 뺏긴 했지만 모르는 여자가 마시던 주스에 딱히 입 댈 생각은 없었다. 컵을 대충 한쪽에 밀어 둔 장미는 또 다른 푸드 테이블에서 마카롱 접시를 가져다 하나씩 집어 먹으며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마카롱이 입에 맞는다고 생각하며 걷던 장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려는 듯 조명이 훅 어두워지며 소란스러운 음악이 틀어졌다. 사람들은 금세 댄스홀에 몰려 춤을 추기 시작했고 장미는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카롱만 주워 먹었다.
‘춤추네.’
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추는 건 내키지 않았다.
‘여기선 먹는 게 남는 거지 뭐. 근데 얜 어디까지 간 거야?’
파티가 시작되고도 돌아오지 않는 미진을 찾아 장미는 마카롱을 우물대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직접 찾아 나서기를 한참, 드디어 장미는 어떤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미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장미가 보기에 그 둘의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해 보였다.
‘어머. 뭐야?’
대화 중 손짓과 웃음이 많아진 미진을 보아하니 그저 친구를 대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혹시 지금 저 남자랑 썸 타는 건가? 미진의 볼이 빨갛게 보이는 건 어쩌면 조명 때문이거나 또는 손에 들고 있는 칵테일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장미는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후후 웃었다.
“드디어 솔로 탈출하는구나.”
저도 애인 없는 주제에 미진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장미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혼자선 어색해서 못 오겠네 어쩌네 하고는 자길 이렇게 버려둔 미진에게 아주 살짝 괘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내 너그럽게 미진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솔탈하면 좋은 거지.’
그저 미진이 잘 되기를 응원하며 돌아서려던 차였다. 그때 마침 장미는 미진이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상대편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걸 보게 되었다.
“……!”
그 순간 장미는 태생적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저 남자는 동족이야!’
맙소사. 당황으로 제 얼굴이 빨개진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손에 든 접시를 내려놓고 일단 평정을 찾기 위해 잠시 호흡을 골랐다. 얼마 후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든 장미는 걱정스럽게 미진과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성실히 미진과의 대화에 임하는 뱀파이어의 의도는 명확했다.
‘미진이를 사냥감으로 찍었어.’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근처의 주스 잔을 집어 든 장미는 두 사람에게로 성큼 걸어갔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소파 의자에 앉아 있는 미진의 옷에 주스를 뿌렸다. 미진의 밝은 색 원피스에 검붉은 포도주스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
미진은 그사이 칵테일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털었다. 장미는 미진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미진은 금세 장미를 알아보았다.
“응? 장미……?”
“응. 나야. 미안. 실수였어. 얼른 화장실 가서 물로 닦아 봐.”
“응? 응…… 아라써.”
발음이 약간 뭉개진 미진은 비틀거리며 발을 뗐다. 장미는 미진이 무사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미진과 함께 있던 뱀파이어에게 말했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장미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곧바로 장미의 손목을 잡아채 붙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파이어는 놀란 장미를 향해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춤이라도 춰.”
“네? 아니, 저는 춤은…….”
“춤은 싫어? 그럼 그냥 같이 놀아도 되고.”
“앗,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