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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과 나-너에게로 가기까지
<일러두기>
본문 중에 영어 대화는 “ ”로 한국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1화
1.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밖에 들리지 않을걸?
오늘 드레스의 컨셉이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었는지, 파티에 참석한 여자애들 모두 어깨를 드러낸 아이보리색 공단 드레스 차림이었다.
게다가 닉 앞에 선 여자애는 남자인 그보다 더 넓은 어깨를 드러낸 것으로도 모자라 네크라인까지 끌어 내려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라, 가뜩이나 지루하던 닉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자애에게 억지 미소와 함께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목을 축이는 찰나 튜더 양식의 크고 긴 창밖으로 희끗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가 어둠이 내리깔린 더닝튼 성의 넓은 정원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도 모자라, 흰 드레스 셔츠와 검은 나비넥타이로 조여진 목을 비스듬히 기울이면서까지 그 움직임을 쫓던 닉의 입가가 슬며시 당겨 올라갔다. 맞은편에 섰던 여자애는 자기에게 보내는 미소로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잔을 다시금 부딪쳐 왔다.
닉이 중얼거렸다.
“실례.”
그러고는 밤 10시가 넘은 시각인 지금까지 내내 그러했듯,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또다시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도록 베란다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나섰다.
조금 전 주시하던 방향을 훑으니, 유령처럼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건물 모퉁이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잔을 베란다의 육중한 돌난간에 내려놓은 그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쭉 뻗은 다리로 긴 회장을 지나 건물 모퉁이를 도니, 반대편 모퉁이 끝에 자리한 오랑주리의 문이 닫히는 것이 시선 끝에 잡혔다.
열대 기후가 아닌 영국에서 오렌지를 비롯한 열대 과일을 키울 수 있게 만든 온실인 오랑주리는 낮의 기온이 아직 남아 포근할 테니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꼬마 유령이 향하기에 딱 맞춤인 곳이다.
회랑을 벗어나 잔디밭으로 들어서니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오렌지 나무 사이에 숨은 누군가는 그가 이렇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쿵.
달칵.
내부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 위에 설치한 강력한 도어 클로저 때문에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했고 이어 그가 잠금 버튼까지 누르자, 어딘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작고 여린 목울대가 꼴깍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의 입가가 옆으로 길게 당겨 올라가며 오늘 파티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절제되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가지런한 이를 환히 드러내고 수려한 눈가도 한껏 접히는.
이윽고 그가 다니는 런던 기숙학교의 나름 조신하다는 여자애들이 가장 육감적이라고 투표한 입술도 기꺼이 열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이 콩닥거리는 검은 머리의 작은 소녀는 어디 있을까?”
놀리듯, 혹은 노래하듯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꼬마 유령의 흰 잠옷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안 그래도 그의 어깨에 미치지도 못하는 키로 더 꼭꼭 숨기 위해 숨까지 죽이고 있을 터. 그마저도 긴장될 지경이었다.
아직 온도 조절기가 켜지기 전이지만, 역시나 내부 기온은 낮에 달궈진 기운이 남아 있어 그런지 꽤 높았다. 닉은 나비넥타이를 끌러 내고 재킷을 벗은 뒤, 드레스 셔츠의 단추까지 두어 개 풀어내야 했지만, 꼬마 유령은 춥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온통 휘황찬란한 빛이 밝혀진 성에서 흘러나온 빛이 오랑주리의 유리 천장을 통해 스며든 탓에 대낮처럼 밝지는 않아도 어둡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물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 안에서 열대 과일들이 뿜어내는 달착지근한 향들은 자잘한 물방울에 스며들어 그의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아찔한 향은 썩 취향에 맞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곳은 그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꼬마 유령과 함께라면.
“여기 있나?”
바나나 나무의 큰 이파리를 건드려 보는 척하자, 저쪽에서 부스럭하며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풀에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겠지. 그의 미소가 커지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깨 높이를 넘는 오렌지 나무 그림자에 군더더기가 붙어 있었다. 마치 그 뒤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오호라. 거기 있었군.
어느 쪽을 향해 앉아 있는지는 구분이 가지 않아, 잠시 고민했다. 어느 쪽이든 어설픈 유령 흉내를 내는 꼬맹이는 100프로 놀랄 것이니 상관없을 테지만.
깜짝깜짝 잘 놀라는 것은 심장이 약해서라며 그 애의 엄마이자 성 안 살림의 총책임자인 에반스 부인은 걱정하곤 했다. 하지만 닉은 그 애가 놀랄 때 외치는 비명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악!’, 또는 ‘흐익!’. 혹은 아무 소리도 없이 크게 숨만 들이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 반응들은 늘 그를 잔뜩 흥분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열여덟 살 때 이미 6피트(180cm)를 넘어선 키를 더 늘여서는 오렌지 나무 뒤를 넘겨다보니, 꼬맹이는 잔뜩 웅크리고 앉은 채였다. 흰 잠옷 차림으로 등을 동그랗게 말고 말이다.
그는 팔을 들어 오렌지 나무 너머로 뻗었다. 움직임을 따라 천이 스치는 희미한 소리는 9월의 풀벌레 소리에 묻혀 티도 나지 않았다. 바닥만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손이 가냘픈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는 그림자를 담을 뿐.
방향이 달라 소녀가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림자의 손이 소녀의 머리에 닿자― 그는 손끝에서 순간적으로 펄떡거림을 느꼈다.
“히엑……!”
놀란 꼬마 유령은 그의 예상대로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제야 닉은 낮게 쿡쿡거리며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꼬마 유령도 웃음을 터뜨렸다. 놀래 주려다가 오히려 제가 당한 것이 어이없으면서도 즐겁고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높은 웃음소리라니. 그건 역시나 그를 흥분시켰다.
아쉽게도 그 웃음소리는 화급히 입을 틀어막은 작은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 표정을 지으니, 입을 막지 않은 한 손으로 성 쪽을 가리킨다. 파티 때문에 조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정말?”
그가 전혀 줄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니, 꼬마 유령도 안심했는지 속삭임으로 시작된 목소리의 끝이 조금 더 크고 길게 올라갔다.
“물론. 보여 주지.”
그는 두 손을 내밀어 꼬마 유령의 엉덩이와 등을 받쳐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이 제 몸에 와 닿는 동시에 가는 다리가 제 허리에 둘러졌다. 순식간에 족쇄를 채우듯 제 허리를 돌아가는 그 움직임이 더 자극적인지, 들춰진 잠옷 자락 아래의 엉덩이와 그의 손바닥 사이에 겨우 얇은 팬티 한 장만 자리한 것이 더 자극적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얄팍한 어깨에 입술을 살짝 누르니, 가슴이 저릴 만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루하고 번거롭던 파티에서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꼬마 유령을 더욱 품어 안으며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가니, 오렌지 나무로 둘러싸인 나무 벤치가 나왔다. 금속 주조로 팔걸이를 두른 벤치로 어머니인 더닝튼 공작 부인께서 딱딱함을 보완하기 위해 레이스 달린 푹신한 쿠션을 늘어놓은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꼬마 유령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려 했지만, 그의 허리에 감긴 다리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 탓에 몸을 일으키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하체가 들렸고 이제 꼬마 유령은 벤치에 앉은 것이 아니라 등을 대고 누운 모양새가 되었다. 흰 쿠션 위에 흐트러진 검은 단발머리가, 언젠가 영화에서 본 물속 인어의 그것처럼 흐트러졌다.
닉의 푸른 눈에 붉은 불꽃이 스쳐 갔다.
쯧.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막 열일곱 살이 된 열댓 명의 소녀들이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듯 신랑 후보를 찾아 눈알들을 굴려 대는 지루한 파티로 서둘러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 천천히 여유 있게 즐기다 가도 되는 건데 말이다.
꼬맹이의 무릎께에 걸린 잠옷 자락을 위쪽으로 밀어 젖히니, 여전히 제 허리를 감고 있느라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한 연한 색 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팬티 위쪽으로 그가 손가락으로 즐겨 찌르는 배꼽이 자리한 납작한 배와 더 위로는 막 돋아나기 시작해서 브래지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일 정도로 풋내 나는 가슴까지 들여다보였지만, 그건 나중이고. 그의 시선이 다시 팬티로 내려왔다. 어둠 때문에 잠옷 그림자 아래의 팬티 색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새로 샀는지 본 적이 없는 것이기도 했고.
“분홍이야, 하늘이야?”
“노랑.”
종알거린 꼬마 유령이 그걸 못 맞히냐는 듯 눈을 흘긴다. 그러고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는데, 그 미소가 사라질 때까지 홀린 듯 바라보던 닉이 손을 움직였다. 허리에서부터 가는 허벅지를 훑다가 이윽고 그 사이에 자리한 작은 팬티 위에 가서 멈추었다.
두근. 맥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제 손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꼬마 유령에게서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치 않았다. 곧 한 몸이 되고 나면 동시에 뛰게 될 테니까.
손바닥으로 노란색 팬티 전체를 품듯이 덮자, 벤치 위로 늘어져 있던 작은 손이 바르르 떨리더니 공작 부인의 레이스를 비틀었다.
“좋아?”
나직이 묻자, 꼬마 유령,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이 다시 움직였다.
진의 엉덩이 아래쯤에 자리한 그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 건 당연했지만, 그걸 알아챈 꼬마 유령이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릴 줄은 몰랐다. 성에 눈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의 수줍음이 묻어나는 그 웃음은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이럴 때면 정말 꼬맹이라는 애칭에 걸맞게 몇 살이나 어리게 느껴진다. 한 열세 살쯤으로. 동양인 중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키로 5피트가 간신히 넘는 데다가 마른 편이라 더 그럴지도. 진은 두 살이 더 어린 동급생들조차 자신을 어리게 본다며 투덜대곤 했다. 그들은 꼬맹이의 이런 웃음을 본 적 없을 텐데 뭘 보고 그러는지.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랑 까진 또래들보다 순진해 터져서 평소에는 맹하다 싶을 지경이었지만, 이렇게 그를 바라볼 때면 마냥 급해져서 생각 따위를 오래 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 주는 톰이 몇 번이나 네 치마를 들췄지?”
진이 학교에 들어가던 날부터 짓궂게 괴롭히던 녀석인데, 10년이 넘도록 여전했다. 고등학생이라면 그런 장난을 접을 만도 한데.
이제는 한국에서 영국으로 입양되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당황스러워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애는 아니니, 제법 쌀쌀맞게 대처도 할 줄 안다지만, 뒤에서 다가와 불시에 치마를 들추고 도망가는 데에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녀석의 행태에 진은 늘 분해했지만, 닉은 나서 주기는커녕 도리어 유쾌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녀석이 진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여전히 유아적으로 표현하는 모양인데, 진은 진저리를 치곤 하니 말이다. 아마도 녀석이 진에게 고백하고 쫓아다녔다면 닉도 진작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백만 번.”
“설마.”
양 눈썹을 들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그의 손가락은 팬티 아래로 느릿느릿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초조한 듯, 설레는 듯 진이 꽃잎 같은 작은 입술을 축이며 다급히 말했다.
“정말이야.”
“그러게 내버려 둔 거야?”
<일러두기>
본문 중에 영어 대화는 “ ”로 한국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1화
1.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밖에 들리지 않을걸?
오늘 드레스의 컨셉이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었는지, 파티에 참석한 여자애들 모두 어깨를 드러낸 아이보리색 공단 드레스 차림이었다.
게다가 닉 앞에 선 여자애는 남자인 그보다 더 넓은 어깨를 드러낸 것으로도 모자라 네크라인까지 끌어 내려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라, 가뜩이나 지루하던 닉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자애에게 억지 미소와 함께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목을 축이는 찰나 튜더 양식의 크고 긴 창밖으로 희끗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가 어둠이 내리깔린 더닝튼 성의 넓은 정원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도 모자라, 흰 드레스 셔츠와 검은 나비넥타이로 조여진 목을 비스듬히 기울이면서까지 그 움직임을 쫓던 닉의 입가가 슬며시 당겨 올라갔다. 맞은편에 섰던 여자애는 자기에게 보내는 미소로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잔을 다시금 부딪쳐 왔다.
닉이 중얼거렸다.
“실례.”
그러고는 밤 10시가 넘은 시각인 지금까지 내내 그러했듯,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또다시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도록 베란다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나섰다.
조금 전 주시하던 방향을 훑으니, 유령처럼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건물 모퉁이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잔을 베란다의 육중한 돌난간에 내려놓은 그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쭉 뻗은 다리로 긴 회장을 지나 건물 모퉁이를 도니, 반대편 모퉁이 끝에 자리한 오랑주리의 문이 닫히는 것이 시선 끝에 잡혔다.
열대 기후가 아닌 영국에서 오렌지를 비롯한 열대 과일을 키울 수 있게 만든 온실인 오랑주리는 낮의 기온이 아직 남아 포근할 테니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꼬마 유령이 향하기에 딱 맞춤인 곳이다.
회랑을 벗어나 잔디밭으로 들어서니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오렌지 나무 사이에 숨은 누군가는 그가 이렇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쿵.
달칵.
내부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 위에 설치한 강력한 도어 클로저 때문에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했고 이어 그가 잠금 버튼까지 누르자, 어딘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작고 여린 목울대가 꼴깍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의 입가가 옆으로 길게 당겨 올라가며 오늘 파티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절제되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가지런한 이를 환히 드러내고 수려한 눈가도 한껏 접히는.
이윽고 그가 다니는 런던 기숙학교의 나름 조신하다는 여자애들이 가장 육감적이라고 투표한 입술도 기꺼이 열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이 콩닥거리는 검은 머리의 작은 소녀는 어디 있을까?”
놀리듯, 혹은 노래하듯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꼬마 유령의 흰 잠옷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안 그래도 그의 어깨에 미치지도 못하는 키로 더 꼭꼭 숨기 위해 숨까지 죽이고 있을 터. 그마저도 긴장될 지경이었다.
아직 온도 조절기가 켜지기 전이지만, 역시나 내부 기온은 낮에 달궈진 기운이 남아 있어 그런지 꽤 높았다. 닉은 나비넥타이를 끌러 내고 재킷을 벗은 뒤, 드레스 셔츠의 단추까지 두어 개 풀어내야 했지만, 꼬마 유령은 춥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온통 휘황찬란한 빛이 밝혀진 성에서 흘러나온 빛이 오랑주리의 유리 천장을 통해 스며든 탓에 대낮처럼 밝지는 않아도 어둡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물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 안에서 열대 과일들이 뿜어내는 달착지근한 향들은 자잘한 물방울에 스며들어 그의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아찔한 향은 썩 취향에 맞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곳은 그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꼬마 유령과 함께라면.
“여기 있나?”
바나나 나무의 큰 이파리를 건드려 보는 척하자, 저쪽에서 부스럭하며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풀에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겠지. 그의 미소가 커지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깨 높이를 넘는 오렌지 나무 그림자에 군더더기가 붙어 있었다. 마치 그 뒤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오호라. 거기 있었군.
어느 쪽을 향해 앉아 있는지는 구분이 가지 않아, 잠시 고민했다. 어느 쪽이든 어설픈 유령 흉내를 내는 꼬맹이는 100프로 놀랄 것이니 상관없을 테지만.
깜짝깜짝 잘 놀라는 것은 심장이 약해서라며 그 애의 엄마이자 성 안 살림의 총책임자인 에반스 부인은 걱정하곤 했다. 하지만 닉은 그 애가 놀랄 때 외치는 비명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악!’, 또는 ‘흐익!’. 혹은 아무 소리도 없이 크게 숨만 들이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 반응들은 늘 그를 잔뜩 흥분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열여덟 살 때 이미 6피트(180cm)를 넘어선 키를 더 늘여서는 오렌지 나무 뒤를 넘겨다보니, 꼬맹이는 잔뜩 웅크리고 앉은 채였다. 흰 잠옷 차림으로 등을 동그랗게 말고 말이다.
그는 팔을 들어 오렌지 나무 너머로 뻗었다. 움직임을 따라 천이 스치는 희미한 소리는 9월의 풀벌레 소리에 묻혀 티도 나지 않았다. 바닥만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손이 가냘픈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는 그림자를 담을 뿐.
방향이 달라 소녀가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림자의 손이 소녀의 머리에 닿자― 그는 손끝에서 순간적으로 펄떡거림을 느꼈다.
“히엑……!”
놀란 꼬마 유령은 그의 예상대로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제야 닉은 낮게 쿡쿡거리며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꼬마 유령도 웃음을 터뜨렸다. 놀래 주려다가 오히려 제가 당한 것이 어이없으면서도 즐겁고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높은 웃음소리라니. 그건 역시나 그를 흥분시켰다.
아쉽게도 그 웃음소리는 화급히 입을 틀어막은 작은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 표정을 지으니, 입을 막지 않은 한 손으로 성 쪽을 가리킨다. 파티 때문에 조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정말?”
그가 전혀 줄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니, 꼬마 유령도 안심했는지 속삭임으로 시작된 목소리의 끝이 조금 더 크고 길게 올라갔다.
“물론. 보여 주지.”
그는 두 손을 내밀어 꼬마 유령의 엉덩이와 등을 받쳐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이 제 몸에 와 닿는 동시에 가는 다리가 제 허리에 둘러졌다. 순식간에 족쇄를 채우듯 제 허리를 돌아가는 그 움직임이 더 자극적인지, 들춰진 잠옷 자락 아래의 엉덩이와 그의 손바닥 사이에 겨우 얇은 팬티 한 장만 자리한 것이 더 자극적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얄팍한 어깨에 입술을 살짝 누르니, 가슴이 저릴 만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루하고 번거롭던 파티에서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꼬마 유령을 더욱 품어 안으며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가니, 오렌지 나무로 둘러싸인 나무 벤치가 나왔다. 금속 주조로 팔걸이를 두른 벤치로 어머니인 더닝튼 공작 부인께서 딱딱함을 보완하기 위해 레이스 달린 푹신한 쿠션을 늘어놓은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꼬마 유령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려 했지만, 그의 허리에 감긴 다리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 탓에 몸을 일으키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하체가 들렸고 이제 꼬마 유령은 벤치에 앉은 것이 아니라 등을 대고 누운 모양새가 되었다. 흰 쿠션 위에 흐트러진 검은 단발머리가, 언젠가 영화에서 본 물속 인어의 그것처럼 흐트러졌다.
닉의 푸른 눈에 붉은 불꽃이 스쳐 갔다.
쯧.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막 열일곱 살이 된 열댓 명의 소녀들이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듯 신랑 후보를 찾아 눈알들을 굴려 대는 지루한 파티로 서둘러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 천천히 여유 있게 즐기다 가도 되는 건데 말이다.
꼬맹이의 무릎께에 걸린 잠옷 자락을 위쪽으로 밀어 젖히니, 여전히 제 허리를 감고 있느라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한 연한 색 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팬티 위쪽으로 그가 손가락으로 즐겨 찌르는 배꼽이 자리한 납작한 배와 더 위로는 막 돋아나기 시작해서 브래지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일 정도로 풋내 나는 가슴까지 들여다보였지만, 그건 나중이고. 그의 시선이 다시 팬티로 내려왔다. 어둠 때문에 잠옷 그림자 아래의 팬티 색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새로 샀는지 본 적이 없는 것이기도 했고.
“분홍이야, 하늘이야?”
“노랑.”
종알거린 꼬마 유령이 그걸 못 맞히냐는 듯 눈을 흘긴다. 그러고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는데, 그 미소가 사라질 때까지 홀린 듯 바라보던 닉이 손을 움직였다. 허리에서부터 가는 허벅지를 훑다가 이윽고 그 사이에 자리한 작은 팬티 위에 가서 멈추었다.
두근. 맥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제 손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꼬마 유령에게서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치 않았다. 곧 한 몸이 되고 나면 동시에 뛰게 될 테니까.
손바닥으로 노란색 팬티 전체를 품듯이 덮자, 벤치 위로 늘어져 있던 작은 손이 바르르 떨리더니 공작 부인의 레이스를 비틀었다.
“좋아?”
나직이 묻자, 꼬마 유령,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이 다시 움직였다.
진의 엉덩이 아래쯤에 자리한 그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 건 당연했지만, 그걸 알아챈 꼬마 유령이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릴 줄은 몰랐다. 성에 눈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의 수줍음이 묻어나는 그 웃음은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이럴 때면 정말 꼬맹이라는 애칭에 걸맞게 몇 살이나 어리게 느껴진다. 한 열세 살쯤으로. 동양인 중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키로 5피트가 간신히 넘는 데다가 마른 편이라 더 그럴지도. 진은 두 살이 더 어린 동급생들조차 자신을 어리게 본다며 투덜대곤 했다. 그들은 꼬맹이의 이런 웃음을 본 적 없을 텐데 뭘 보고 그러는지.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랑 까진 또래들보다 순진해 터져서 평소에는 맹하다 싶을 지경이었지만, 이렇게 그를 바라볼 때면 마냥 급해져서 생각 따위를 오래 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 주는 톰이 몇 번이나 네 치마를 들췄지?”
진이 학교에 들어가던 날부터 짓궂게 괴롭히던 녀석인데, 10년이 넘도록 여전했다. 고등학생이라면 그런 장난을 접을 만도 한데.
이제는 한국에서 영국으로 입양되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당황스러워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애는 아니니, 제법 쌀쌀맞게 대처도 할 줄 안다지만, 뒤에서 다가와 불시에 치마를 들추고 도망가는 데에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녀석의 행태에 진은 늘 분해했지만, 닉은 나서 주기는커녕 도리어 유쾌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녀석이 진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여전히 유아적으로 표현하는 모양인데, 진은 진저리를 치곤 하니 말이다. 아마도 녀석이 진에게 고백하고 쫓아다녔다면 닉도 진작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백만 번.”
“설마.”
양 눈썹을 들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그의 손가락은 팬티 아래로 느릿느릿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초조한 듯, 설레는 듯 진이 꽃잎 같은 작은 입술을 축이며 다급히 말했다.
“정말이야.”
“그러게 내버려 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