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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머니가 빅토리아의 투덜거림을 가만히 들어 주시는 이유는, 그 억지에 동조한다기보다는 파티 중간에 나가 어디에 있었는지 마찬가지로 궁금해서일 것이다.
“네 말대로 지루해서 빠져나갔다면 설마 네게 들킬 곳에 숨었을 것 같아? 내가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곳인데?”
그건 그렇네― 라는 얼굴로 빅토리아가 입을 비죽였다.
“그래서―”
빵에 버터를 바르시던 어머니께서 그제야 입을 여셨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는 있었니?”
살짝 내리뜬 시선에는 아닌 척하시지만 지대한 관심이 묻어 있었다.
닉이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중간에 나갔으려고요.”
“지성에 외모까지 갖춘 아가씨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우리 후작께서는 눈높이가 상당한 게로구나.”
가문과 재력이 아리따웠다는 것이겠지요. 속마음과 달리 그는 시니컬하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라는 게 더 웃기죠. 다 오래된 관습일 뿐이에요. 저도 아직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아니라 와닿지도 않고요. 한 10년 후라면 모를까.”
진이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 애들보다 훨씬 더 어릴 적이긴 하지만 괜찮다. 가식은 영국 귀족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니까.
“그 10년 후를 위해 어제 같은 파티를 마련한 것이지 않니. 좋은 아가씨를 택해서 천천히 보다가 그때쯤 결혼식을 하라고 말이다.”
마침 식사를 가져온 메이드 때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메이드가 나가자마자, 빅토리아가 눈치 없이 계속했지만.
“난 레이디 셀린이 좋던데. 영지도 이웃에 있고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랐잖아.”
더더구나 셀린이라니.
제 동생이지만, 저런 말을 할 때면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셀린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알고 일부러 비위를 맞추려는 것인지, 아니면 저하고 쿵짝이 잘 맞아 그런지. 닉은 그 두 경우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바였다.
“방금 전만 해도 하워드가 좋다고 하더니, 이제는 셀린이 좋다고? 레즈비언이 될 셈이야?”
닉은 속이 뒤틀렸지만 짐짓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여동생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셀린을 결혼 상대자로 택할 생각은 없었고 빅토리아 또한 그런 강요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빅토리아는 제 오지랖이 넓은 것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굉장한 모욕을 당했다는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편을 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러시기 전에 닉이 선수를 쳤다.
“지금은 그저 학업에 열중하고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 과정의 MBA를 제대로 끝내려면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송이버섯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것은, 이만 식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왕성하게 씹고 있노라니, 의도대로 어머니께서 말씀을 이을 타이밍이 지나갔다. 하지만 완벽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드시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제게 향해 있는 것을 알았다.
“학교생활은 그만하면 잘하고 있는 것이니 걱정 않는다. 외할아버지 바람대로 케임브리지도 무난히 들어갔으니 MBA도 잘 해내겠지.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에는 여행을 좀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니? 스키를 좀 타도 괜찮고. 작년에는 MBA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치고,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하고도 지난여름 방학에도 내내 더닝튼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답답하지 않니? 견문도 좀 넓혀야지.”
그전에는 이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주말 방학에조차 여기저기 다니기를 즐겨 했는데, 작년부터 시간만 났다 하면 더닝튼 성에서 꼼짝 않고 지낸 것을 꿰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견문은 말 그대로의 여행이 아니라 어젯밤 파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니스의 해변에 가도 스위스의 스키장에서도 어김없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귀족가의 아가씨들과 마주칠 테니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우연을 가장해 말이다.
“나중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난 네가 지나치게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그게 아니면 운동이고. 보세요, 어머니. 식당에 승마 장갑까지 들고 왔잖아요. 오빠는 여자애들에게는 영 관심이 없다니까요.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오빠는 게이도 아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불쌍한 사람이야.”
빅토리아가 톡 하니 끼어드는 것이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주 짧은 한숨과 함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드셨으니까.
“이제 식사들 하자.”
대화가 끝나 다행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좀 더 진지한 대화를 계획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10년이 지나기 전에 말이다. 닉 자신도 더닝튼 후작으로서의 의무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결코 어기고 싶지 않은 선약이 있는 오늘 아침은 아닐 테니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증이 심해진 탓이었다. 오렌지주스를 두 잔이나 마셨지만 그런 것으로 풀릴 만한 종류의 갈증이 아니니 당연했다.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에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데 오후에 타시지요, 후작님.”
마구간을 돌보는 이가 권했지만 닉은 머리를 저으며 서둘러 장갑을 꼈다. 자신이 비를 맞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젯밤에 자신이 오전이라 했으니 진은 벌써 출발했을 텐데. 느려 터진 자전거로 한 세월 갈 테니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쯤 그 애도 비를 만났을 거라는 말이 된다. 제길.
비가 그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몇 시간이나 젖은 채로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숲속의 집에 있는 동안은 벗고 있는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될 때는 축축한 옷을 입고 와야 한다. 아무리 온화한 9월이라 해도 영국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으니 오한을 경험하기 십중팔구다. 그 애가 그렇게 춥고 축축하게 있는 것은 그가 싫었다.
서둘러 말에 올라타서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얼른 따라잡아 하다못해 1초라도 비를 덜 맞게 하고 싶어서였다. 테니스 대회에서 지역 결선에 올랐을 때보다도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성의 많은 유리창 중 하나에서 내다보는 이가 있었다. 검은 메이드복에 흰 앞치마 차림의 에밀리였다. 그녀는 검은 말을 탄 후작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위로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하는 먹구름을 다시 근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닉은 오늘만큼 속도를 높여 말을 달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나 잔디 위에서는 말발굽에 잔디가 패는 것이 싫어서 빅토리아처럼 말을 빨리 달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숲으로 접어들 때쯤 비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위험해 조금 줄였던 말의 속도는, 저 앞 나무 사이로 온통 녹색이어야 할 숲에서 보일 리 없는 붉은 빛깔을 언뜻 발견하고는 다시 빨라졌다.
나뭇잎을 때리는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가 지척에 다다르고 나서야 붉은 옷자락을 머리에 뒤집어쓴 고개가 뒤를 돌아본다.
제길.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벌써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로록 움직여 오는 검은 눈망울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번져 났다. 하지만 닉은 기쁘기는커녕 가뜩이나 악물고 있던 입매가 더욱 단단해졌다.
유인원들 중 인간만이 눈에 흰자가 노출되어 있는 이유는 시선 교류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즉 자신의 감정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그 눈이 누구를 보는지, 누구를 향하는지 상대에게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론에 따르면 같은 흰 바탕에 올려진 것이라면 그 차이가 더 극명한 검은 눈동자가 더욱 감정을 잘 드러내 주게 되는 것 아닐까.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이 회색이나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보다 인간으로서 더 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은 동양인이 덜 진화된 종족이라며 원숭이니 뭐니 해 가며 비웃는 빅토리아 같은 서양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닉은 그 검은 눈망울이 자신에게 똑바로 향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달갑지 않았다. 가슴에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제게 썩 달가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후작의 신분이었고 그 외 모든 면에서도 역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누리며 살아온 그가 그런 극도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되지만, 그렇게 외면하는 건 더 힘들었다. 결국 다시 시선을 주게 되는데, 진의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지 않으면 또 다른 불편한 느낌이 들곤 했다.
즉, 진이 자신을 봐도 그렇지 않아도 모두 싫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마음 상태를 알아보고자 심리학책을 뒤져 봤지만,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했고 증상은 계속됐다. 진을 처음 본 12년 전부터.
적어도 지금은 비 때문에 그 시선을 피할 겨를이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제길. 비가 점점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멈춰 선 자전거 옆에 말을 세움과 동시에 진의 겨드랑이 아래로 두 손을 넣어 단번에 안아 올렸다. 보통 성인 남성보다 키와 덩치가 월등한 그의 입장에서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린 탓에 진은 마치 헝겊 인형처럼 공중에서 흔들렸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얼른 제 앞에 앉혔다. 급한 움직임에 옷자락이 아예 얼굴에 푹 씌워졌다. 그것을 걷어 내려는 손길을 저지하고는 대신 안장 머리의 고리를 잡게 했더니, 반항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응……!”
“가만있어! 젖는다고!”
수긍하지 않고 다시 옷자락을 젖히려는 이유를 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겠지.
그래서 닉은 그 고개를 억지로 제 턱 밑에 가두고는 말을 다시 출발시켰다. 품 안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도록 제 고개와 어깨를 잔뜩 숙인 채 말의 배를 연거푸 걷어찼다. 젖은 풀들이 말발굽에 거세게 채여 흩날리는 뒤로, 쓰러진 자전거만이 쏟아지는 빗속에 남았다.
어머니가 빅토리아의 투덜거림을 가만히 들어 주시는 이유는, 그 억지에 동조한다기보다는 파티 중간에 나가 어디에 있었는지 마찬가지로 궁금해서일 것이다.
“네 말대로 지루해서 빠져나갔다면 설마 네게 들킬 곳에 숨었을 것 같아? 내가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곳인데?”
그건 그렇네― 라는 얼굴로 빅토리아가 입을 비죽였다.
“그래서―”
빵에 버터를 바르시던 어머니께서 그제야 입을 여셨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는 있었니?”
살짝 내리뜬 시선에는 아닌 척하시지만 지대한 관심이 묻어 있었다.
닉이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중간에 나갔으려고요.”
“지성에 외모까지 갖춘 아가씨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우리 후작께서는 눈높이가 상당한 게로구나.”
가문과 재력이 아리따웠다는 것이겠지요. 속마음과 달리 그는 시니컬하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라는 게 더 웃기죠. 다 오래된 관습일 뿐이에요. 저도 아직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아니라 와닿지도 않고요. 한 10년 후라면 모를까.”
진이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 애들보다 훨씬 더 어릴 적이긴 하지만 괜찮다. 가식은 영국 귀족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니까.
“그 10년 후를 위해 어제 같은 파티를 마련한 것이지 않니. 좋은 아가씨를 택해서 천천히 보다가 그때쯤 결혼식을 하라고 말이다.”
마침 식사를 가져온 메이드 때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메이드가 나가자마자, 빅토리아가 눈치 없이 계속했지만.
“난 레이디 셀린이 좋던데. 영지도 이웃에 있고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랐잖아.”
더더구나 셀린이라니.
제 동생이지만, 저런 말을 할 때면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셀린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알고 일부러 비위를 맞추려는 것인지, 아니면 저하고 쿵짝이 잘 맞아 그런지. 닉은 그 두 경우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바였다.
“방금 전만 해도 하워드가 좋다고 하더니, 이제는 셀린이 좋다고? 레즈비언이 될 셈이야?”
닉은 속이 뒤틀렸지만 짐짓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여동생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셀린을 결혼 상대자로 택할 생각은 없었고 빅토리아 또한 그런 강요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빅토리아는 제 오지랖이 넓은 것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굉장한 모욕을 당했다는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편을 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러시기 전에 닉이 선수를 쳤다.
“지금은 그저 학업에 열중하고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 과정의 MBA를 제대로 끝내려면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송이버섯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것은, 이만 식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왕성하게 씹고 있노라니, 의도대로 어머니께서 말씀을 이을 타이밍이 지나갔다. 하지만 완벽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드시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제게 향해 있는 것을 알았다.
“학교생활은 그만하면 잘하고 있는 것이니 걱정 않는다. 외할아버지 바람대로 케임브리지도 무난히 들어갔으니 MBA도 잘 해내겠지.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에는 여행을 좀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니? 스키를 좀 타도 괜찮고. 작년에는 MBA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치고,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하고도 지난여름 방학에도 내내 더닝튼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답답하지 않니? 견문도 좀 넓혀야지.”
그전에는 이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주말 방학에조차 여기저기 다니기를 즐겨 했는데, 작년부터 시간만 났다 하면 더닝튼 성에서 꼼짝 않고 지낸 것을 꿰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견문은 말 그대로의 여행이 아니라 어젯밤 파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니스의 해변에 가도 스위스의 스키장에서도 어김없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귀족가의 아가씨들과 마주칠 테니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우연을 가장해 말이다.
“나중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난 네가 지나치게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그게 아니면 운동이고. 보세요, 어머니. 식당에 승마 장갑까지 들고 왔잖아요. 오빠는 여자애들에게는 영 관심이 없다니까요.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오빠는 게이도 아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불쌍한 사람이야.”
빅토리아가 톡 하니 끼어드는 것이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주 짧은 한숨과 함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드셨으니까.
“이제 식사들 하자.”
대화가 끝나 다행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좀 더 진지한 대화를 계획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10년이 지나기 전에 말이다. 닉 자신도 더닝튼 후작으로서의 의무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결코 어기고 싶지 않은 선약이 있는 오늘 아침은 아닐 테니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증이 심해진 탓이었다. 오렌지주스를 두 잔이나 마셨지만 그런 것으로 풀릴 만한 종류의 갈증이 아니니 당연했다.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에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데 오후에 타시지요, 후작님.”
마구간을 돌보는 이가 권했지만 닉은 머리를 저으며 서둘러 장갑을 꼈다. 자신이 비를 맞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젯밤에 자신이 오전이라 했으니 진은 벌써 출발했을 텐데. 느려 터진 자전거로 한 세월 갈 테니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쯤 그 애도 비를 만났을 거라는 말이 된다. 제길.
비가 그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몇 시간이나 젖은 채로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숲속의 집에 있는 동안은 벗고 있는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될 때는 축축한 옷을 입고 와야 한다. 아무리 온화한 9월이라 해도 영국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으니 오한을 경험하기 십중팔구다. 그 애가 그렇게 춥고 축축하게 있는 것은 그가 싫었다.
서둘러 말에 올라타서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얼른 따라잡아 하다못해 1초라도 비를 덜 맞게 하고 싶어서였다. 테니스 대회에서 지역 결선에 올랐을 때보다도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성의 많은 유리창 중 하나에서 내다보는 이가 있었다. 검은 메이드복에 흰 앞치마 차림의 에밀리였다. 그녀는 검은 말을 탄 후작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위로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하는 먹구름을 다시 근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닉은 오늘만큼 속도를 높여 말을 달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나 잔디 위에서는 말발굽에 잔디가 패는 것이 싫어서 빅토리아처럼 말을 빨리 달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숲으로 접어들 때쯤 비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위험해 조금 줄였던 말의 속도는, 저 앞 나무 사이로 온통 녹색이어야 할 숲에서 보일 리 없는 붉은 빛깔을 언뜻 발견하고는 다시 빨라졌다.
나뭇잎을 때리는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가 지척에 다다르고 나서야 붉은 옷자락을 머리에 뒤집어쓴 고개가 뒤를 돌아본다.
제길.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벌써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로록 움직여 오는 검은 눈망울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번져 났다. 하지만 닉은 기쁘기는커녕 가뜩이나 악물고 있던 입매가 더욱 단단해졌다.
유인원들 중 인간만이 눈에 흰자가 노출되어 있는 이유는 시선 교류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즉 자신의 감정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그 눈이 누구를 보는지, 누구를 향하는지 상대에게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론에 따르면 같은 흰 바탕에 올려진 것이라면 그 차이가 더 극명한 검은 눈동자가 더욱 감정을 잘 드러내 주게 되는 것 아닐까.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이 회색이나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보다 인간으로서 더 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은 동양인이 덜 진화된 종족이라며 원숭이니 뭐니 해 가며 비웃는 빅토리아 같은 서양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닉은 그 검은 눈망울이 자신에게 똑바로 향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달갑지 않았다. 가슴에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제게 썩 달가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후작의 신분이었고 그 외 모든 면에서도 역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누리며 살아온 그가 그런 극도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되지만, 그렇게 외면하는 건 더 힘들었다. 결국 다시 시선을 주게 되는데, 진의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지 않으면 또 다른 불편한 느낌이 들곤 했다.
즉, 진이 자신을 봐도 그렇지 않아도 모두 싫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마음 상태를 알아보고자 심리학책을 뒤져 봤지만,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했고 증상은 계속됐다. 진을 처음 본 12년 전부터.
적어도 지금은 비 때문에 그 시선을 피할 겨를이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제길. 비가 점점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멈춰 선 자전거 옆에 말을 세움과 동시에 진의 겨드랑이 아래로 두 손을 넣어 단번에 안아 올렸다. 보통 성인 남성보다 키와 덩치가 월등한 그의 입장에서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린 탓에 진은 마치 헝겊 인형처럼 공중에서 흔들렸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얼른 제 앞에 앉혔다. 급한 움직임에 옷자락이 아예 얼굴에 푹 씌워졌다. 그것을 걷어 내려는 손길을 저지하고는 대신 안장 머리의 고리를 잡게 했더니, 반항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응……!”
“가만있어! 젖는다고!”
수긍하지 않고 다시 옷자락을 젖히려는 이유를 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겠지.
그래서 닉은 그 고개를 억지로 제 턱 밑에 가두고는 말을 다시 출발시켰다. 품 안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도록 제 고개와 어깨를 잔뜩 숙인 채 말의 배를 연거푸 걷어찼다. 젖은 풀들이 말발굽에 거세게 채여 흩날리는 뒤로, 쓰러진 자전거만이 쏟아지는 빗속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