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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배가 아프냐며 첫마디를 건넸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전화가 사흘 연거푸 오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임신이었다.
생리를 했으니 임신이 아닌 것 아니냐는 진의 말에, 확신할 수 없는 거라고. 그래서 다음 생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안도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그가 무척이나 두려워했다는 것을 진은 깨달았다.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도 어리고, 자신도 어려서라고 자위했다.
임신이 아닌 것이 확인되는 한 달 동안 닉은 테니스 경기를 이유로 주말마다 더닝튼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빅토리아와 공작 부인이 나누는 얘기에서 테니스 대회는 이미 끝났고 닉이 지역 대학교 부분에서 우승을 한 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아팠다. 대회가 끝났는데도 어째서 주말에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당연히 그에게 묻지 못했다.
그것이 이후로 그가 그녀의 몸속에 사정을 하지 않는 것에 크게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때처럼 그가 또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그가 오지 않으면 자신은 그에게로 가지 못하니까. 더닝튼 공작의 아들인 더닝튼 후작과 고용인 딸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일종의 거부라 할 수 있지만, 입 밖에 내어 불평해서는 안 되는 종류였다. 며칠 동안이나 배를 움켜쥔 채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지독한 생리통보다 그의 그런 거부가 더 아팠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진은 지금도 그 흔적을 냉정히 외면하고는 벤치를, 그리고 오랑주리를 떠났다.
3. 그 애가 그렇게 춥고 축축한 채인 것은 싫었다
할머니……?
자신은 다시 어려져 있었다. 시선이 버스 좌석의 등받이보다도 더 아래인 것을 보면 분명했다.
그 높은 등받이 사이로 보니, 할머니가 버스 차창 너머로 옆 버스에 오르고 계셨다. 흰머리에 옥색 저고리를 입으신 자신의 할머니. 화장실 가신다고 하셨는데, 왜 다른 버스에 타시는 거지?
그때 자신이 탄 버스의 문이 닫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이대로라면 어린 자신은 미아가 될 것을 알았기에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그래서 진은 그런 제 목을 쥐어뜯으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때 불길이 보였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빠……?!
「안 돼……!」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데, 그때 어떤 속삭임이 들려왔다.
「우리 진이, 할머니 모시고 잘 갔다 와∼」
희미하지만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그렇게 상냥하게 속삭이는데, 순간 가슴이 견딜 수 없이 아파서 퍼뜩 눈이 뜨여졌다.
눈앞에 보이는 이는 양어머니 에밀리였다. 진을 흔들어 깨우는 참이었는지, 그녀의 두 팔을 잡은 채로 잔뜩 염려스러운 표정이었다. 에밀리의 갈색 머리가, 평소와 같은 그 머리가 어쩐지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원래는 좀 더 진한 검은색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전처럼 기억은 순식간에 달아나 버리고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에밀리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또 꿈을 꿨나 봐요.”
진은 자신이 또 한국말을 했나 보다 짐작했다. 꿈결인지 잠결인지 몇 마디 해 놓고는 그 꿈처럼 제가 뱉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에밀리에게서 전해 들었었지만, 역시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말이었다.
제가 뱉었다는 그 말과 비슷한 발음의 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양어머니를 이름인 에밀리로 부르고 있는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다감하지만 물을 만지는 일이 많은 탓에 늘 까끌하게 건조한 손이 다가와 진의 눈가를 살며시 문질렀다. 울기도 했나 보다. 하지만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인데 뭘.
웃어 보이려는데 저도 모르게 코가 훌쩍여졌다. 마치 한참이나 운 것처럼.
에밀리가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토요일인데 오늘은 뭘 할 거니?”
진이 당황한 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화제를 돌린 것이다.
진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날아갔다. 오전 6시 3분. 꿈 때문에 조금 일찍 깼지만, 상관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진이 개운하게 말했다.
“오전에는 숲에 갈래요.”
닉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도 책과 물병을 앞 바구니에 담은 채 자전거로 숲을 쏘다니는 것은 진의 일상이었으니 에밀리에게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어제는 늦게까지 일이 많으셨죠?”
“뭘. 파티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었지.”
진이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던 에밀리가 시트 끄트머리에 붙은 잔디 두어 개를 여상하게 털어 내는 것을, 기지개를 펴던 진은 보지 못했다.
“점심 먹기 전에 돌아올 거지?”
그렇게 묻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었으니 당연했다.
“음…… 글쎄요.”
샌드위치를 싸 갈까 잠시 고민했다. 닉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닉이 일찍 온다면 점심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그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닉까지 먹으려면 1인분보다 훨씬 더 많이 준비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뭐라고 둘러대지? 로라와 함께 간다고 할까? 한참 먹을 때이니 많이 싸 달라고?
“그 전에 돌아오렴. 숲은 연약한 여자애에게 늘 다정한 것만은 아니니.”
에밀리는 진이 숲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늘 염려하곤 했다. 가끔 떠돌이 개 같은 것들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기는 하지만, 이쪽에서 알아서 피하면 강간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런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전한 곳인데. 그나마 아예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진도 적당한 선에서 응하곤 했다.
“혹시 비가 온다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샌드위치를 싸 주시면 감사하고요. 넉넉하게요.”
“알았다.”
“토마토 빼고요.”
“물론 토마토 빼고. 참.”
기분 좋게 욕실로 향하던 진이 에밀리를 돌아보았다.
“12학년 마지막 시험은 어땠어? 이번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니?”
아. 참담했던 결과가 떠올라 차마 말로 답하지 못한 진이 낙담한 모습으로 가방째 집어 들어 건넸더니, 에밀리는 싱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나는 네가 공부까지 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잘하고 싶어요. 로라네 오빠는 늘 탑을 유지하는데 그게 로라네 엄마의 최고 자랑거리래요.”
“공부는 잘해도 그 애는 천식이 있다며.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거야. 난 네가 씩씩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단다.”
에밀리의 다감한 미소를 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받았다.
“씩씩도 하고 공부도 잘하면 좋겠죠.”
“그럼 일단 씩씩한 것에 감사하고 공부는 차차 하도록 하자.”
“벌써 13학년인데, 이래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들어갈 방법이 있긴 할까요?”
다음 주면 벌써 13학년이 시작되는 가을 학기인데,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것이 한탄스러워 하는 말이었다. 진은 창밖으로 올해 케임브리지의 MBA 과정에 진학한 닉과의 약속 장소인 작은 집이 있는 숲을 바라보며 자조하느라 양어머니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어 드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노력하면 되지. 나는 널 믿는단다.”
“세상에서 에밀리만 날 믿나 봐요.”
“또 누가 믿어 줬으면 좋겠니?”
생각해 둔 사람이 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에밀리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래서 에둘러 말했다.
“누구에게나 신뢰 가는 사람이란 좋은 거니까. 예를 들면― 니콜라스처럼?”
“후작님은 그렇지.”
고용인들은 꼭 앞에서가 아니라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늘 존칭을 붙여야 하는 것이 이 성의 전통이지만, 에밀리는 진이 이름만 불러도 그냥 두었다. 고용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딱히 다른 누군가에게 그를 언급할 필요가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성이 웨즐리인 사람들 앞에서는 꼭 존칭을 붙이라는 얘기만 한 번 들었고 진이 굳게 고개를 끄덕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당연하게 닉이라는 호칭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름을 그렇게 줄여 부르는 것을 질색하는 그가 진, 자신에게만 허락했으니 남들 앞에서는 꼭 니콜라스라고 불러야 한다.
“얼른 씻으렴.”
어영부영 대화를 끝내며 에밀리가 나가자 진은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 건너편 자신의 방으로 건너간 뒤에야 에밀리는 창밖으로 잔뜩 구름이 낀 탓에 해가 떠도 우중충할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쉬고는 일하러 내려갈 채비를 서둘렀다.
* * *
“귀족가의 아가씨가 스캔들 따위에 신경을 쓰다니, 바람직하지 않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하던 닉은 식당 입구에 다가갈 즈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말씀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와 빅토리아에게 늘 단정하고 도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분이라 지저분한 스캔들에 귀를 어지럽히는 걸 싫어하시는데. 아마도 아침부터 빅토리아가 무슨 얘기를 꺼낸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궁금하지 않아요? 대체 누가 감히 우리 오랑주리에서―”
아. 빅토리아가 하려는 이야기를 눈치챈 닉은 빅토리아의 말을 끊듯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그의 등장에 우아한 귀부인인 어머니는 옆에 앉아 속살거리던 빅토리아에게 눈치를 주어 입을 다물게 하셨다.
그가 자신의 자리인 긴 테이블의 한쪽 끝에 앉자, 메이드가 오렌지주스를 들고 다가들었다. 쪼르륵. 맛깔나는 빛깔의 액체가 유리잔에 담기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다른 종류의 갈증이 일었다. 지난밤 시간이 부족해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 탓이었다. 마음이 자못 급해졌다.
아침 메뉴 중에 송이버섯을 곁들인 오믈렛을 주문받은 메이드가 물러서자, 어머니께 자리에 안 계신 아버지에 대해 여쭈었다.
“조찬 모임이 있어 일찍 나가셨다.”
주스 잔을 집어 드는 그에게 답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궁금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닉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일어나기는 글렀다.
“파티는 어땠니, 니콜라스?”
그 질문에 빅토리아까지 호기심 어린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제가 아니라, 사교계에 데뷔한 빅토리아에게 하실 질문인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단박에 얼굴을 찡그린 빅토리아는 스무 살로 어젯밤 사교계에 데뷔했다. 원래대로라면 3년 전에 데뷔했어야 마땅하지만, 파티를 앞두고 갑자기 수두에 걸리는 바람에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그래서 이번 파티를 두고 몇 달 전부터 법석이었다.
친애하는 동생의 데뷔가 새삼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어머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였을 뿐.
“중간에 없어진 오빠를 찾느라고 하워드 경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뭐 그렇게 지루하다고 중간에 한참이나 사라진 거야?!”
머금은 오렌지주스를 삼킨 닉이 입매를 닦고는 중얼거렸다.
“네가 에드워드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어째서 내 탓이라는 거지?”
“난 안면이 없잖아. 오빤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레 자리를 마련해 주기를 기대했다고.”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배가 아프냐며 첫마디를 건넸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전화가 사흘 연거푸 오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임신이었다.
생리를 했으니 임신이 아닌 것 아니냐는 진의 말에, 확신할 수 없는 거라고. 그래서 다음 생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안도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그가 무척이나 두려워했다는 것을 진은 깨달았다.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도 어리고, 자신도 어려서라고 자위했다.
임신이 아닌 것이 확인되는 한 달 동안 닉은 테니스 경기를 이유로 주말마다 더닝튼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빅토리아와 공작 부인이 나누는 얘기에서 테니스 대회는 이미 끝났고 닉이 지역 대학교 부분에서 우승을 한 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아팠다. 대회가 끝났는데도 어째서 주말에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당연히 그에게 묻지 못했다.
그것이 이후로 그가 그녀의 몸속에 사정을 하지 않는 것에 크게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때처럼 그가 또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그가 오지 않으면 자신은 그에게로 가지 못하니까. 더닝튼 공작의 아들인 더닝튼 후작과 고용인 딸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일종의 거부라 할 수 있지만, 입 밖에 내어 불평해서는 안 되는 종류였다. 며칠 동안이나 배를 움켜쥔 채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지독한 생리통보다 그의 그런 거부가 더 아팠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진은 지금도 그 흔적을 냉정히 외면하고는 벤치를, 그리고 오랑주리를 떠났다.
3. 그 애가 그렇게 춥고 축축한 채인 것은 싫었다
할머니……?
자신은 다시 어려져 있었다. 시선이 버스 좌석의 등받이보다도 더 아래인 것을 보면 분명했다.
그 높은 등받이 사이로 보니, 할머니가 버스 차창 너머로 옆 버스에 오르고 계셨다. 흰머리에 옥색 저고리를 입으신 자신의 할머니. 화장실 가신다고 하셨는데, 왜 다른 버스에 타시는 거지?
그때 자신이 탄 버스의 문이 닫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이대로라면 어린 자신은 미아가 될 것을 알았기에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그래서 진은 그런 제 목을 쥐어뜯으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때 불길이 보였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빠……?!
「안 돼……!」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데, 그때 어떤 속삭임이 들려왔다.
「우리 진이, 할머니 모시고 잘 갔다 와∼」
희미하지만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그렇게 상냥하게 속삭이는데, 순간 가슴이 견딜 수 없이 아파서 퍼뜩 눈이 뜨여졌다.
눈앞에 보이는 이는 양어머니 에밀리였다. 진을 흔들어 깨우는 참이었는지, 그녀의 두 팔을 잡은 채로 잔뜩 염려스러운 표정이었다. 에밀리의 갈색 머리가, 평소와 같은 그 머리가 어쩐지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원래는 좀 더 진한 검은색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전처럼 기억은 순식간에 달아나 버리고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에밀리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또 꿈을 꿨나 봐요.”
진은 자신이 또 한국말을 했나 보다 짐작했다. 꿈결인지 잠결인지 몇 마디 해 놓고는 그 꿈처럼 제가 뱉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에밀리에게서 전해 들었었지만, 역시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말이었다.
제가 뱉었다는 그 말과 비슷한 발음의 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양어머니를 이름인 에밀리로 부르고 있는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다감하지만 물을 만지는 일이 많은 탓에 늘 까끌하게 건조한 손이 다가와 진의 눈가를 살며시 문질렀다. 울기도 했나 보다. 하지만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인데 뭘.
웃어 보이려는데 저도 모르게 코가 훌쩍여졌다. 마치 한참이나 운 것처럼.
에밀리가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토요일인데 오늘은 뭘 할 거니?”
진이 당황한 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화제를 돌린 것이다.
진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날아갔다. 오전 6시 3분. 꿈 때문에 조금 일찍 깼지만, 상관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진이 개운하게 말했다.
“오전에는 숲에 갈래요.”
닉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도 책과 물병을 앞 바구니에 담은 채 자전거로 숲을 쏘다니는 것은 진의 일상이었으니 에밀리에게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어제는 늦게까지 일이 많으셨죠?”
“뭘. 파티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었지.”
진이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던 에밀리가 시트 끄트머리에 붙은 잔디 두어 개를 여상하게 털어 내는 것을, 기지개를 펴던 진은 보지 못했다.
“점심 먹기 전에 돌아올 거지?”
그렇게 묻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었으니 당연했다.
“음…… 글쎄요.”
샌드위치를 싸 갈까 잠시 고민했다. 닉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닉이 일찍 온다면 점심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그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닉까지 먹으려면 1인분보다 훨씬 더 많이 준비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뭐라고 둘러대지? 로라와 함께 간다고 할까? 한참 먹을 때이니 많이 싸 달라고?
“그 전에 돌아오렴. 숲은 연약한 여자애에게 늘 다정한 것만은 아니니.”
에밀리는 진이 숲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늘 염려하곤 했다. 가끔 떠돌이 개 같은 것들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기는 하지만, 이쪽에서 알아서 피하면 강간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런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전한 곳인데. 그나마 아예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진도 적당한 선에서 응하곤 했다.
“혹시 비가 온다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샌드위치를 싸 주시면 감사하고요. 넉넉하게요.”
“알았다.”
“토마토 빼고요.”
“물론 토마토 빼고. 참.”
기분 좋게 욕실로 향하던 진이 에밀리를 돌아보았다.
“12학년 마지막 시험은 어땠어? 이번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니?”
아. 참담했던 결과가 떠올라 차마 말로 답하지 못한 진이 낙담한 모습으로 가방째 집어 들어 건넸더니, 에밀리는 싱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나는 네가 공부까지 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잘하고 싶어요. 로라네 오빠는 늘 탑을 유지하는데 그게 로라네 엄마의 최고 자랑거리래요.”
“공부는 잘해도 그 애는 천식이 있다며.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거야. 난 네가 씩씩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단다.”
에밀리의 다감한 미소를 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받았다.
“씩씩도 하고 공부도 잘하면 좋겠죠.”
“그럼 일단 씩씩한 것에 감사하고 공부는 차차 하도록 하자.”
“벌써 13학년인데, 이래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들어갈 방법이 있긴 할까요?”
다음 주면 벌써 13학년이 시작되는 가을 학기인데,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것이 한탄스러워 하는 말이었다. 진은 창밖으로 올해 케임브리지의 MBA 과정에 진학한 닉과의 약속 장소인 작은 집이 있는 숲을 바라보며 자조하느라 양어머니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어 드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노력하면 되지. 나는 널 믿는단다.”
“세상에서 에밀리만 날 믿나 봐요.”
“또 누가 믿어 줬으면 좋겠니?”
생각해 둔 사람이 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에밀리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래서 에둘러 말했다.
“누구에게나 신뢰 가는 사람이란 좋은 거니까. 예를 들면― 니콜라스처럼?”
“후작님은 그렇지.”
고용인들은 꼭 앞에서가 아니라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늘 존칭을 붙여야 하는 것이 이 성의 전통이지만, 에밀리는 진이 이름만 불러도 그냥 두었다. 고용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딱히 다른 누군가에게 그를 언급할 필요가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성이 웨즐리인 사람들 앞에서는 꼭 존칭을 붙이라는 얘기만 한 번 들었고 진이 굳게 고개를 끄덕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당연하게 닉이라는 호칭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름을 그렇게 줄여 부르는 것을 질색하는 그가 진, 자신에게만 허락했으니 남들 앞에서는 꼭 니콜라스라고 불러야 한다.
“얼른 씻으렴.”
어영부영 대화를 끝내며 에밀리가 나가자 진은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 건너편 자신의 방으로 건너간 뒤에야 에밀리는 창밖으로 잔뜩 구름이 낀 탓에 해가 떠도 우중충할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쉬고는 일하러 내려갈 채비를 서둘렀다.
* * *
“귀족가의 아가씨가 스캔들 따위에 신경을 쓰다니, 바람직하지 않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하던 닉은 식당 입구에 다가갈 즈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말씀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와 빅토리아에게 늘 단정하고 도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분이라 지저분한 스캔들에 귀를 어지럽히는 걸 싫어하시는데. 아마도 아침부터 빅토리아가 무슨 얘기를 꺼낸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궁금하지 않아요? 대체 누가 감히 우리 오랑주리에서―”
아. 빅토리아가 하려는 이야기를 눈치챈 닉은 빅토리아의 말을 끊듯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그의 등장에 우아한 귀부인인 어머니는 옆에 앉아 속살거리던 빅토리아에게 눈치를 주어 입을 다물게 하셨다.
그가 자신의 자리인 긴 테이블의 한쪽 끝에 앉자, 메이드가 오렌지주스를 들고 다가들었다. 쪼르륵. 맛깔나는 빛깔의 액체가 유리잔에 담기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다른 종류의 갈증이 일었다. 지난밤 시간이 부족해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 탓이었다. 마음이 자못 급해졌다.
아침 메뉴 중에 송이버섯을 곁들인 오믈렛을 주문받은 메이드가 물러서자, 어머니께 자리에 안 계신 아버지에 대해 여쭈었다.
“조찬 모임이 있어 일찍 나가셨다.”
주스 잔을 집어 드는 그에게 답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궁금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닉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일어나기는 글렀다.
“파티는 어땠니, 니콜라스?”
그 질문에 빅토리아까지 호기심 어린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제가 아니라, 사교계에 데뷔한 빅토리아에게 하실 질문인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단박에 얼굴을 찡그린 빅토리아는 스무 살로 어젯밤 사교계에 데뷔했다. 원래대로라면 3년 전에 데뷔했어야 마땅하지만, 파티를 앞두고 갑자기 수두에 걸리는 바람에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그래서 이번 파티를 두고 몇 달 전부터 법석이었다.
친애하는 동생의 데뷔가 새삼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어머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였을 뿐.
“중간에 없어진 오빠를 찾느라고 하워드 경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뭐 그렇게 지루하다고 중간에 한참이나 사라진 거야?!”
머금은 오렌지주스를 삼킨 닉이 입매를 닦고는 중얼거렸다.
“네가 에드워드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어째서 내 탓이라는 거지?”
“난 안면이 없잖아. 오빤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레 자리를 마련해 주기를 기대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