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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련(初戀) 5화
1장 (5)
아랫도리를 깨끗하게 한 후 환복을 끝낸 정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침의와 속곳은 봉춘을 시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빨래를 하라고 지시한 참이었다. 저가 간밤 몽색 탓에 바지에 실례를 했다는 것을 성안 가솔들이 알 필요는 없지.
정윤은 심란할 때마다 곰방대를 무는 스승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문밖에 서 있는 궁관에게 심신을 가라앉히는 차를 내오라 이른 정윤은 근래 배우고 있는 군사학 서책을 펼쳤다. 잠도 오지 않는데 공부나 하자는 생각이었지만, 글자 하나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던 정윤은 궁관이 차를 내오자 책을 덮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제기랄, 괜히 뜨거운 차를 마셨다. 심신이 가라앉기는 개뿔, 애꿎은 몸만 더 뜨거워졌다.
“당장 가서 냉수 한 잔 떠 와라. 방 안이 왜 이리 더워?”
정윤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손부채질까지 해 댔다. 주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니, 아랫것들은 머리를 숙이고 이리저리 곁눈질을 하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럴 땐 항상 소왕의 몸종 봉춘이 바가지를 벅벅 긁히며 중간에서 막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어딜 간 건지 봉춘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으니 애꿎은 불똥이 튈까 봐 문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궁관들은 털을 바짝 세우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을까,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원일입니다.”
“들어와.”
원일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꼭대기 층에 자리한 정윤의 침실 툇마루를 지나 창을 통해 들어오려면 처마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이목을 피해 명을 따를 때에는 이런 식으로 은밀히 침실에 들어오곤 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오게 되면 직속 호위 무사인 그가 소왕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가솔들에게 들키기 때문이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깨어 계시지. 창 너머 얼핏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말을 올렸던 원일은 최대한 조용히, 숨어들 듯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원일에게 정윤은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알아낸 건?”
“송구합니다.”
명목이 없다는 듯 원일이 말끝을 흐리자 정윤은 짧게 혀를 찼다. 아주 오래전 일이니 그리 쉽게 알아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건만, 일의 진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느렸다. 자신의 주군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온 원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만 가서 쉬어라. 그리고 오시(午時)에 동행해라.”
“예.”
하지만 원일은 제 측근 중에서 정윤이 가장 신뢰하는 이였다. 원일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정윤은 단 한 번도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캐내기 힘든 형님의 속사정에 한탄할 뿐.
원일이 제 처소로 짧은 휴식을 취하려 물러가자 정윤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성안의 어른들에게 아침 문안을 올릴 시간이었다. 여관들을 불러 채비를 마친 정윤은 명을 받아 은밀한 빨래를 끝낸 후 헐레벌떡 뛰어오는 봉춘을 데리고 성의 본관이자 아비의 거처인 지천각으로 향했다.
아비의 거처로 향하는 내내 정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궁궐이 너무 넓다는 생각을 했다. 모름지기 신하는 주군보다 넓은 성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 함은 황궁은 얼마나 크다는 거지?
그런 의미 없는 번뇌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지천각에 도착해 있었다. 정윤을 알아본 무관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송구하나, 전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 이른 시간에? 왜?”
“그것까지는 저도 잘…….”
말끝을 흐리는 시종에게 알겠다, 단답한 정윤은 아비의 집무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반상도 들지 않으셨을 터인 때아닌 이 시간에 웬 집무실? 정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미간을 좁혔다.
아비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정윤은 짧게 목례를 했다. 간밤 평온하였느냐는 아주 형식적인 아들의 문안 인사에 진초왕 또한 ‘그래, 너도 평온하였느냐’ 하고 되물었다. 그렇다 대답한 정윤에게 진초왕은 되물었다.
“아침 식사는 아직인 것이냐.”
“예, 아버님.”
“그럼 오랜만에 같이하자꾸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정윤은 속으로 짧게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아비와 겸상을 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은 탓이었다. 아비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권고 시간이 된다.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진초왕은 잔소리도 심했다. 이리해야 한다, 저리해야 한다 나름 아비로서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을 하는 것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자식, 그것도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인 정윤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낱 잔소리일 뿐이었다.
아침상이 차려지고 진초왕이 젓가락을 들자 정윤 또한 따라서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좋아하고 대식가라 소문난 아비의 아침상은 거북하리만치 호화스러웠다. 이리 기름진 음식들을 아침에 드시다니…….
“곧 있을 네 탄일 말이다.”
“예.”
“네 어미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 열일곱 번째 탄일이라면서 말이다.”
예에…….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정윤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만경은 자식의 나이 약관까지 오 년을 채울 때마다 다섯 해를 잘 버텼으며 나머지 다섯 해도 잘 버티라는 의미에서 액을 쫒는 의식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먼 옛날, 길어지는 전쟁과 기근 탓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자 아이들은 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때문에 시작된 풍습이 바로 춘오제(春五祭)였다. 특히 각 지역의 제후들은 제 자손이 춘오제를 보낼 때마다 그 달의 조세를 거두지 않고 도리어 일정 금액을 돌려주었으며 큰 잔치를 염으로써 액을 쫒았다. 나랏일을 하는 대인은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지 말아야 삶이 평탄하다는 속설 덕이었다.
귀족가 자제들은 열다섯 생일날 지내는 춘오제에 정혼자를 정하는 것이 대다수였는데, 정윤은 그보다 두 살이 많은 열일곱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혼자가 없었다.
정윤은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잔치에서 네 신붓감을 정하고자 하니 그리 알고 있거라.”
“예?”
예상치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아비의 말에 정윤은 수저질을 멈추며 되물었다.
“어허, 이놈이 예는 무슨 예야. 네 나이도 이제 열일곱이 아니더냐. 정혼자를 아직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나 아버님. 저는 아직 혼인을 치를 마음이 없습니다.”
진지한 어투로 반문했으나, 진초왕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네 혼인에 네 마음이 중요하다 보느냐.”
“…….”
“전부터 거듭 일렀지만, 정윤아. 너는 저잣거리에서 구르는 천출이 아니다. 대업을 이룰 군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내 뭐라고 하였느냐?”
“포기해야 하는 것 또한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정윤이 다급히 진초왕을 불렀지만, 진초왕은 짧은 눈짓 하나로 아들의 입을 막았다. 정윤은 제 아비의 젓가락이 접시에서 고기, 채소와 나물 등을 덜어가는 것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이 말없이 식탁 위만 바라보고 있자, 진초왕은 짧게 혀를 차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비도 네 마음 다 안다. 그래서 네게 직접 고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진초왕은 거듭 ‘좌승상의 맏딸과 북쪽 변방의 실세인 화경궁주의 둘째 딸 또한 참석하게 되었다’느니, ‘곤범을 충분히 갖추었는지, 장차 만경의 국모가 될 그릇인지 유심히 살펴보고 결정하라’느니,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그 속이 비었으면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라느니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진초왕의 계속되는 충고에도 정윤의 입은 꾹 다물린 채 벌어지지 않았다. 줄줄이 말을 읊다 못한 진초왕이 ‘듣고 있는 것이냐’고 탐탁찮은 어조로 물음을 던지자 그제야 ‘예’ 하고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
“꿈자리 한번 사납군. 귀접(鬼接)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귀, 귀접이라니요?”
정윤은 오늘따라 유난히 축 처진 듯했다. 필사를 하다 말고 턱을 괴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하는 말이 귀접이니 뭐니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라니. 누가 들을까 두렵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인 나리께서 근 몽색을 하는 일이 잦았다. 덩달아 몰래 빨랫감을 들고 두문불출할 일이 많아진 봉춘 또한 고역이었다. 열일곱은 한창 쑥쑥 커 가며 성에 눈을 뜨는 시기다.
돈 많은 대가댁 도령들이 기방에서 사고를 가장 많이 치는 때가 딱 이 시기이기도 했다. 한데 우리 소왕께선 너무도 성에 무관심하시다 싶었는데,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기방에 가서 여인이라도 취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색욕도 너무 참으면 병이 된다 들었는데.”
“여인은 그다지 당기질 않아.”
그럼 제발 자기 위로라도 하시란 말입니다. 몸종에게 속곳 빨래를 시키는 게 낯 뜨겁지도 않으신가요……. 봉춘은 정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울먹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꿈에서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난잡한 정사를 즐겼단 말이지. 근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야.”
“명월이 아닙니까? 도련님이 경험하신 여인이라면 명월이밖에 더 있나요.”
“명월이는 아냐.”
명월은 정윤의 나이 열셋에 방중술을 가르치는 데에 공헌한 기녀였다. 그녀는 총 스무 번의 정윤과의 정사 끝에 불임 약을 먹고 기루로 돌아가 금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낙적과 함께 평생 먹고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한 건 그녀였다.
갓난쟁이 때부터 기루에 버려져 피붙이도 없고, 기루가 제 세상의 전부라 그곳을 떠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라며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닌, 금을 타는 금기로서의 삶을 살게 해 달라 청했다.
귀족가 공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받는 밤 교육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도, 찾아간 적도 없었다. 그리고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명월인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꿈이 뭐 중요합니까. 현실이 중요하지.”
봉춘의 대꾸에도 정윤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모양인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실까. 분명 서책을 읽고 계시겠지? 중반은 거르지 않고 드셨을까. 또 체기가 들진 않으셨을까.
조만간 원일을 시켜 기력에 좋은 약재를 보내야겠다. 넋을 놓고 소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정윤은 난데없이 봉춘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자님, 손이 멈춰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안에 다 끝내실 수는 있겠어요? 하고 되묻는 봉춘의 물음에 정윤은 짜증이 치미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야?”
“왜긴요. 본인 생일잔치 초대장이니 공자님이 쓰셔야죠.”
그딴 생일잔치, 해 달라 청한 적도 없거니와 하고 싶어 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느냔 말이다. 정윤은 붓을 내팽개치곤 양손을 깍지를 껴 뒷머리를 감싸고 다리를 꼬았다. 흐트러진 자세로 다리를 까딱거리는 주인을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봉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체 이걸 왜 해야 하느냐고? 그걸 누가 할 소린데…….
“이렇게 많이 써야 할 거면 차라리 목판을 새기는 게 낫겠다.”
“그러게요. 전하께 한번 청해 보시든가요. 아버님, 소자 초대장을 쓰는 게 너무 귀찮으니 목판으로 만들어 주십사 간곡히 청하옵니다, 하고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나불대던 봉춘은 갑자기 싸늘해지는 주변 공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살벌하게 내리뜬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주인이 시야에 가득 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봉춘은 입을 꾹 다물고 헐레벌떡 붓을 쥔 손을 고쳐 잡고 열심히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윤은 나름 근엄한 말투로 봉춘을 괴롭혔다.
“티 안 나게, 꼼꼼히 해라. 어허, 손이 떨리는구나? 그래 가지고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겠느냐아.”
아무리 목소리 깔고 부왕 전하 말투 따라 하셔 봤자 하나도 안 어울립니다! 봉춘은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아랫것의 설움을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부지런히 붓질했다.
이렇게 착취당할 줄 알았으면 자신의 필체를 익히라는 명을 따르지 않는 건데. 아무리 따라 해도 못하겠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건데. 쓸데없이 웃전 명을 열심히 따른 대가가 노동 착취라니, 아이고 내 팔자야.
“봉춘아.”
“예.”
“넌 어찌 생각하느냐?”
“무엇을요?”
눈치를 보며 봉춘이 되묻자 정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뭐긴 뭐냐. 내 생일잔치를 빙자한 마누라 후보 경연 대회 말이다.”
“아아.”
그제야 웃전의 물음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봉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라 후보 경연 대회라니. 어찌 말도 저리 경망스럽게 하시는지. 비마마와 전하께서 들으셨다면 기함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뭐, 엄연히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초대장에 일일이 여식의 이름을 덧붙여 꼭 참석해 주십사 청한다고 적으니, 이건 뭐 잔치에 초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붓감을 정하는 자리에 초대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뭘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시고 마음에 드는 낭자가 있으면 그분과 혼인을 하면 되는 일이지요. 천하의 소왕(素王) 전하를 마다할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으면?”
“예?”
봉춘이 정윤에게 항상 멍청한 얼굴이라고 타박당할 때의 표정을 짓자 정윤은 다소 날이 선 말투로 덧붙였다.
“맘에 드는 여자가 없으면 말이다.”
“음…….”
봉춘은 필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대며 한참 동안 생각하던 봉춘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내년 잔치 때 다른 처자를 초대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됐다. 칠푼이한테 물은 내가 팔푼이지.”
칠푼이라니. 칠푼이라니! 기껏 생각해서 답했건만 돌아오는 취급은 칠푼이라니. 봉춘은 진심으로 입을 쭉 내밀었다. 글공부라곤 해 보지도 못한 몸종치고 대필 실력이 이리 뛰어난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라.
대놓고 웃전에게 따질 엄두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꿍얼대던 봉춘은 정윤이 ‘봉춘아, 손이 멈췄다?’ 하고 타박하자 서둘러 붓을 고쳐 잡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천것으로 태어난 태생이 죄다, 죄. 다음 생에는 부디 저 잘난 왕자님을 아들로 둔 제왕으로 태어났으면 소원이 없겠다.
“혼인이 하기 싫으십니까? 허나, 다른 가문의 공자님 또래 자제분들은 대부분 정혼자가 계시던데요? 태어나기도 전에 아비가 정혼자를 정해 놓은 분도 계시던데, 공자님은 복 받은 것이지요. 직접 마음에 드는 분을 선택할 기회가 있으시잖아요.”
봉춘의 말이 맞았다. 이번 잔치에 초대한 여식들 중 마음에 드는 자를 고르라는 선택지를 준 것은 분명 아비의 자비고 아량이다. 아들의 마음 따위는 두 번째로 제쳐 두고 가문만을 생각했다면 진즉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과 인척의 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하지 않고 혼기에 들어섰을 때에 정혼자를 직접 택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아비가 아닌 군후로서는 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정윤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비가 백번 양보했고, 그렇다 함은 자신 또한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일생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혼인이라는 벽이 난데없이 높기만 하다.
“걱정 마십시오. 분명 좋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네가 말하는 좋은 분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데?”
정윤이 묻자, 봉춘은 제가 생각한 것을 아주 솔직하게 답했다.
“뭐…… 고운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곱고, 행실이 바르고 지혜로이 제 낭군을 보필할 그릇이 되기에 충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골반도 중요하지.”
“예, 골반도 중요…… 예?”
뜬금없이 분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윤은 고개를 돌렸다. 아랫것이 문을 열자마자 봉춘은 헐레벌떡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비켜섰다. 정윤 또한 꼰 다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여인네라면 모름지기 골반이란다, 아들아.”
“……예?”
아들자식의 처소에 오자마자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발언이란 말인가? 정윤은 미간을 좁히며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자 당수연은 정윤의 양어깨를 붙잡고 눈에 불을 켰다.
“골반! 두말할 것 없이 골반! 여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아느냐? 얼굴? 아니! 고운 마음씨? 아니! 지혜로움? 뭐, 그건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치 않아.”
“…….”
“아들을 잘 낳을 수 있는 우람한 골반!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암. 아무리 아름답고, 착하고, 지혜로워도 비쩍 마르고 차가운 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때문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는 내자로서의 책임을 못 다한 것이다. 이 어미의 뜻을 이해하겠느냐?”
“……어머니. 주책입니다.”
정윤은 제 어미의 골반예찬론을 듣다못해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당수연은 호호- 하고 웃으며 손에 쥔 부채를 펼쳤다. 거상(踞床)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고 부채질을 하며 그녀는 아들에게 거듭 말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자연히 느는 것이 주책이란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리 연통도 없이.”
“아들 처소에 오는 데에 연통이 뭐 필요한가? 아니 그러냐, 봉춘아?”
“그,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당수연은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봉춘과 제 아들, 그리고 옥안 위를 쭉 훑었다. 두 사람의 몫임이 분명한 필사의 흔적을 확인한 당수연은 짧게 혀를 차며 뻔히 알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네 아버지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걱정 마십시오. 모르십니다.”
정윤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수연은 부채로 하관을 가리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부채 안에 얼굴 절반을 숨긴 채 그녀는 제 아들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아주 예뻤는데, 지금은 사내 느낌이 물씬 풍겨 온다.
워낙 훤칠하니 높은 집안 규수들이 앞다퉈 눈에 들려고 할 것임이 분명하겠군. 처음 색을 알고 난 이후에 홍등가에 출석 도장을 찍고 계집질로 부모 속을 썩이는 도령들이 그리 많다 들었다. 그에 비해 우리 아드님은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이거야말로 효자 중의 효자가 아니던가.
“한데, 정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당수연은 무뚝뚝한 아들의 물음에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궁관들을 안에 불러들였다.
“말끔한 옷으로 환복 한 후 채비하거라. 초상화를 그릴 것이다.”
“초……상화요?”
“그래. 새로 그릴 때가 되었으니. 뭣들 하고 있느냐? 얼굴이 화사해 보이는 옷들을 내어 오지 않고.”
당수연이 거듭 명하자 여관들은 고개를 숙여 대답한 후 물러갔다. 여관들이 내어 온 의복들을 몇 번이고 고쳐 보던 그녀는 끝내 푸른 저고리를 골랐다. 정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장 (5)
아랫도리를 깨끗하게 한 후 환복을 끝낸 정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침의와 속곳은 봉춘을 시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빨래를 하라고 지시한 참이었다. 저가 간밤 몽색 탓에 바지에 실례를 했다는 것을 성안 가솔들이 알 필요는 없지.
정윤은 심란할 때마다 곰방대를 무는 스승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문밖에 서 있는 궁관에게 심신을 가라앉히는 차를 내오라 이른 정윤은 근래 배우고 있는 군사학 서책을 펼쳤다. 잠도 오지 않는데 공부나 하자는 생각이었지만, 글자 하나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던 정윤은 궁관이 차를 내오자 책을 덮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제기랄, 괜히 뜨거운 차를 마셨다. 심신이 가라앉기는 개뿔, 애꿎은 몸만 더 뜨거워졌다.
“당장 가서 냉수 한 잔 떠 와라. 방 안이 왜 이리 더워?”
정윤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손부채질까지 해 댔다. 주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니, 아랫것들은 머리를 숙이고 이리저리 곁눈질을 하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럴 땐 항상 소왕의 몸종 봉춘이 바가지를 벅벅 긁히며 중간에서 막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어딜 간 건지 봉춘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으니 애꿎은 불똥이 튈까 봐 문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궁관들은 털을 바짝 세우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을까,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원일입니다.”
“들어와.”
원일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꼭대기 층에 자리한 정윤의 침실 툇마루를 지나 창을 통해 들어오려면 처마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이목을 피해 명을 따를 때에는 이런 식으로 은밀히 침실에 들어오곤 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오게 되면 직속 호위 무사인 그가 소왕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가솔들에게 들키기 때문이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깨어 계시지. 창 너머 얼핏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말을 올렸던 원일은 최대한 조용히, 숨어들 듯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원일에게 정윤은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알아낸 건?”
“송구합니다.”
명목이 없다는 듯 원일이 말끝을 흐리자 정윤은 짧게 혀를 찼다. 아주 오래전 일이니 그리 쉽게 알아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건만, 일의 진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느렸다. 자신의 주군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온 원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만 가서 쉬어라. 그리고 오시(午時)에 동행해라.”
“예.”
하지만 원일은 제 측근 중에서 정윤이 가장 신뢰하는 이였다. 원일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정윤은 단 한 번도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캐내기 힘든 형님의 속사정에 한탄할 뿐.
원일이 제 처소로 짧은 휴식을 취하려 물러가자 정윤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성안의 어른들에게 아침 문안을 올릴 시간이었다. 여관들을 불러 채비를 마친 정윤은 명을 받아 은밀한 빨래를 끝낸 후 헐레벌떡 뛰어오는 봉춘을 데리고 성의 본관이자 아비의 거처인 지천각으로 향했다.
아비의 거처로 향하는 내내 정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궁궐이 너무 넓다는 생각을 했다. 모름지기 신하는 주군보다 넓은 성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 함은 황궁은 얼마나 크다는 거지?
그런 의미 없는 번뇌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지천각에 도착해 있었다. 정윤을 알아본 무관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송구하나, 전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 이른 시간에? 왜?”
“그것까지는 저도 잘…….”
말끝을 흐리는 시종에게 알겠다, 단답한 정윤은 아비의 집무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반상도 들지 않으셨을 터인 때아닌 이 시간에 웬 집무실? 정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미간을 좁혔다.
아비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정윤은 짧게 목례를 했다. 간밤 평온하였느냐는 아주 형식적인 아들의 문안 인사에 진초왕 또한 ‘그래, 너도 평온하였느냐’ 하고 되물었다. 그렇다 대답한 정윤에게 진초왕은 되물었다.
“아침 식사는 아직인 것이냐.”
“예, 아버님.”
“그럼 오랜만에 같이하자꾸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정윤은 속으로 짧게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아비와 겸상을 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은 탓이었다. 아비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권고 시간이 된다.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진초왕은 잔소리도 심했다. 이리해야 한다, 저리해야 한다 나름 아비로서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을 하는 것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자식, 그것도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인 정윤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낱 잔소리일 뿐이었다.
아침상이 차려지고 진초왕이 젓가락을 들자 정윤 또한 따라서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좋아하고 대식가라 소문난 아비의 아침상은 거북하리만치 호화스러웠다. 이리 기름진 음식들을 아침에 드시다니…….
“곧 있을 네 탄일 말이다.”
“예.”
“네 어미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 열일곱 번째 탄일이라면서 말이다.”
예에…….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정윤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만경은 자식의 나이 약관까지 오 년을 채울 때마다 다섯 해를 잘 버텼으며 나머지 다섯 해도 잘 버티라는 의미에서 액을 쫒는 의식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먼 옛날, 길어지는 전쟁과 기근 탓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자 아이들은 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때문에 시작된 풍습이 바로 춘오제(春五祭)였다. 특히 각 지역의 제후들은 제 자손이 춘오제를 보낼 때마다 그 달의 조세를 거두지 않고 도리어 일정 금액을 돌려주었으며 큰 잔치를 염으로써 액을 쫒았다. 나랏일을 하는 대인은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지 말아야 삶이 평탄하다는 속설 덕이었다.
귀족가 자제들은 열다섯 생일날 지내는 춘오제에 정혼자를 정하는 것이 대다수였는데, 정윤은 그보다 두 살이 많은 열일곱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혼자가 없었다.
정윤은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잔치에서 네 신붓감을 정하고자 하니 그리 알고 있거라.”
“예?”
예상치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아비의 말에 정윤은 수저질을 멈추며 되물었다.
“어허, 이놈이 예는 무슨 예야. 네 나이도 이제 열일곱이 아니더냐. 정혼자를 아직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나 아버님. 저는 아직 혼인을 치를 마음이 없습니다.”
진지한 어투로 반문했으나, 진초왕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네 혼인에 네 마음이 중요하다 보느냐.”
“…….”
“전부터 거듭 일렀지만, 정윤아. 너는 저잣거리에서 구르는 천출이 아니다. 대업을 이룰 군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내 뭐라고 하였느냐?”
“포기해야 하는 것 또한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정윤이 다급히 진초왕을 불렀지만, 진초왕은 짧은 눈짓 하나로 아들의 입을 막았다. 정윤은 제 아비의 젓가락이 접시에서 고기, 채소와 나물 등을 덜어가는 것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이 말없이 식탁 위만 바라보고 있자, 진초왕은 짧게 혀를 차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비도 네 마음 다 안다. 그래서 네게 직접 고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진초왕은 거듭 ‘좌승상의 맏딸과 북쪽 변방의 실세인 화경궁주의 둘째 딸 또한 참석하게 되었다’느니, ‘곤범을 충분히 갖추었는지, 장차 만경의 국모가 될 그릇인지 유심히 살펴보고 결정하라’느니,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그 속이 비었으면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라느니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진초왕의 계속되는 충고에도 정윤의 입은 꾹 다물린 채 벌어지지 않았다. 줄줄이 말을 읊다 못한 진초왕이 ‘듣고 있는 것이냐’고 탐탁찮은 어조로 물음을 던지자 그제야 ‘예’ 하고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
“꿈자리 한번 사납군. 귀접(鬼接)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귀, 귀접이라니요?”
정윤은 오늘따라 유난히 축 처진 듯했다. 필사를 하다 말고 턱을 괴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하는 말이 귀접이니 뭐니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라니. 누가 들을까 두렵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인 나리께서 근 몽색을 하는 일이 잦았다. 덩달아 몰래 빨랫감을 들고 두문불출할 일이 많아진 봉춘 또한 고역이었다. 열일곱은 한창 쑥쑥 커 가며 성에 눈을 뜨는 시기다.
돈 많은 대가댁 도령들이 기방에서 사고를 가장 많이 치는 때가 딱 이 시기이기도 했다. 한데 우리 소왕께선 너무도 성에 무관심하시다 싶었는데,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기방에 가서 여인이라도 취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색욕도 너무 참으면 병이 된다 들었는데.”
“여인은 그다지 당기질 않아.”
그럼 제발 자기 위로라도 하시란 말입니다. 몸종에게 속곳 빨래를 시키는 게 낯 뜨겁지도 않으신가요……. 봉춘은 정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울먹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꿈에서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난잡한 정사를 즐겼단 말이지. 근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야.”
“명월이 아닙니까? 도련님이 경험하신 여인이라면 명월이밖에 더 있나요.”
“명월이는 아냐.”
명월은 정윤의 나이 열셋에 방중술을 가르치는 데에 공헌한 기녀였다. 그녀는 총 스무 번의 정윤과의 정사 끝에 불임 약을 먹고 기루로 돌아가 금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낙적과 함께 평생 먹고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한 건 그녀였다.
갓난쟁이 때부터 기루에 버려져 피붙이도 없고, 기루가 제 세상의 전부라 그곳을 떠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라며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닌, 금을 타는 금기로서의 삶을 살게 해 달라 청했다.
귀족가 공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받는 밤 교육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도, 찾아간 적도 없었다. 그리고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명월인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꿈이 뭐 중요합니까. 현실이 중요하지.”
봉춘의 대꾸에도 정윤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모양인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실까. 분명 서책을 읽고 계시겠지? 중반은 거르지 않고 드셨을까. 또 체기가 들진 않으셨을까.
조만간 원일을 시켜 기력에 좋은 약재를 보내야겠다. 넋을 놓고 소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정윤은 난데없이 봉춘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자님, 손이 멈춰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안에 다 끝내실 수는 있겠어요? 하고 되묻는 봉춘의 물음에 정윤은 짜증이 치미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야?”
“왜긴요. 본인 생일잔치 초대장이니 공자님이 쓰셔야죠.”
그딴 생일잔치, 해 달라 청한 적도 없거니와 하고 싶어 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느냔 말이다. 정윤은 붓을 내팽개치곤 양손을 깍지를 껴 뒷머리를 감싸고 다리를 꼬았다. 흐트러진 자세로 다리를 까딱거리는 주인을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봉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체 이걸 왜 해야 하느냐고? 그걸 누가 할 소린데…….
“이렇게 많이 써야 할 거면 차라리 목판을 새기는 게 낫겠다.”
“그러게요. 전하께 한번 청해 보시든가요. 아버님, 소자 초대장을 쓰는 게 너무 귀찮으니 목판으로 만들어 주십사 간곡히 청하옵니다, 하고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나불대던 봉춘은 갑자기 싸늘해지는 주변 공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살벌하게 내리뜬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주인이 시야에 가득 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봉춘은 입을 꾹 다물고 헐레벌떡 붓을 쥔 손을 고쳐 잡고 열심히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윤은 나름 근엄한 말투로 봉춘을 괴롭혔다.
“티 안 나게, 꼼꼼히 해라. 어허, 손이 떨리는구나? 그래 가지고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겠느냐아.”
아무리 목소리 깔고 부왕 전하 말투 따라 하셔 봤자 하나도 안 어울립니다! 봉춘은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아랫것의 설움을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부지런히 붓질했다.
이렇게 착취당할 줄 알았으면 자신의 필체를 익히라는 명을 따르지 않는 건데. 아무리 따라 해도 못하겠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건데. 쓸데없이 웃전 명을 열심히 따른 대가가 노동 착취라니, 아이고 내 팔자야.
“봉춘아.”
“예.”
“넌 어찌 생각하느냐?”
“무엇을요?”
눈치를 보며 봉춘이 되묻자 정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뭐긴 뭐냐. 내 생일잔치를 빙자한 마누라 후보 경연 대회 말이다.”
“아아.”
그제야 웃전의 물음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봉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라 후보 경연 대회라니. 어찌 말도 저리 경망스럽게 하시는지. 비마마와 전하께서 들으셨다면 기함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뭐, 엄연히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초대장에 일일이 여식의 이름을 덧붙여 꼭 참석해 주십사 청한다고 적으니, 이건 뭐 잔치에 초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붓감을 정하는 자리에 초대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뭘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시고 마음에 드는 낭자가 있으면 그분과 혼인을 하면 되는 일이지요. 천하의 소왕(素王) 전하를 마다할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으면?”
“예?”
봉춘이 정윤에게 항상 멍청한 얼굴이라고 타박당할 때의 표정을 짓자 정윤은 다소 날이 선 말투로 덧붙였다.
“맘에 드는 여자가 없으면 말이다.”
“음…….”
봉춘은 필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대며 한참 동안 생각하던 봉춘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내년 잔치 때 다른 처자를 초대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됐다. 칠푼이한테 물은 내가 팔푼이지.”
칠푼이라니. 칠푼이라니! 기껏 생각해서 답했건만 돌아오는 취급은 칠푼이라니. 봉춘은 진심으로 입을 쭉 내밀었다. 글공부라곤 해 보지도 못한 몸종치고 대필 실력이 이리 뛰어난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라.
대놓고 웃전에게 따질 엄두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꿍얼대던 봉춘은 정윤이 ‘봉춘아, 손이 멈췄다?’ 하고 타박하자 서둘러 붓을 고쳐 잡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천것으로 태어난 태생이 죄다, 죄. 다음 생에는 부디 저 잘난 왕자님을 아들로 둔 제왕으로 태어났으면 소원이 없겠다.
“혼인이 하기 싫으십니까? 허나, 다른 가문의 공자님 또래 자제분들은 대부분 정혼자가 계시던데요? 태어나기도 전에 아비가 정혼자를 정해 놓은 분도 계시던데, 공자님은 복 받은 것이지요. 직접 마음에 드는 분을 선택할 기회가 있으시잖아요.”
봉춘의 말이 맞았다. 이번 잔치에 초대한 여식들 중 마음에 드는 자를 고르라는 선택지를 준 것은 분명 아비의 자비고 아량이다. 아들의 마음 따위는 두 번째로 제쳐 두고 가문만을 생각했다면 진즉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과 인척의 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하지 않고 혼기에 들어섰을 때에 정혼자를 직접 택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아비가 아닌 군후로서는 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정윤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비가 백번 양보했고, 그렇다 함은 자신 또한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일생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혼인이라는 벽이 난데없이 높기만 하다.
“걱정 마십시오. 분명 좋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네가 말하는 좋은 분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데?”
정윤이 묻자, 봉춘은 제가 생각한 것을 아주 솔직하게 답했다.
“뭐…… 고운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곱고, 행실이 바르고 지혜로이 제 낭군을 보필할 그릇이 되기에 충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골반도 중요하지.”
“예, 골반도 중요…… 예?”
뜬금없이 분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윤은 고개를 돌렸다. 아랫것이 문을 열자마자 봉춘은 헐레벌떡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비켜섰다. 정윤 또한 꼰 다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여인네라면 모름지기 골반이란다, 아들아.”
“……예?”
아들자식의 처소에 오자마자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발언이란 말인가? 정윤은 미간을 좁히며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자 당수연은 정윤의 양어깨를 붙잡고 눈에 불을 켰다.
“골반! 두말할 것 없이 골반! 여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아느냐? 얼굴? 아니! 고운 마음씨? 아니! 지혜로움? 뭐, 그건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치 않아.”
“…….”
“아들을 잘 낳을 수 있는 우람한 골반!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암. 아무리 아름답고, 착하고, 지혜로워도 비쩍 마르고 차가운 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때문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는 내자로서의 책임을 못 다한 것이다. 이 어미의 뜻을 이해하겠느냐?”
“……어머니. 주책입니다.”
정윤은 제 어미의 골반예찬론을 듣다못해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당수연은 호호- 하고 웃으며 손에 쥔 부채를 펼쳤다. 거상(踞床)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고 부채질을 하며 그녀는 아들에게 거듭 말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자연히 느는 것이 주책이란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리 연통도 없이.”
“아들 처소에 오는 데에 연통이 뭐 필요한가? 아니 그러냐, 봉춘아?”
“그,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당수연은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봉춘과 제 아들, 그리고 옥안 위를 쭉 훑었다. 두 사람의 몫임이 분명한 필사의 흔적을 확인한 당수연은 짧게 혀를 차며 뻔히 알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네 아버지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걱정 마십시오. 모르십니다.”
정윤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수연은 부채로 하관을 가리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부채 안에 얼굴 절반을 숨긴 채 그녀는 제 아들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아주 예뻤는데, 지금은 사내 느낌이 물씬 풍겨 온다.
워낙 훤칠하니 높은 집안 규수들이 앞다퉈 눈에 들려고 할 것임이 분명하겠군. 처음 색을 알고 난 이후에 홍등가에 출석 도장을 찍고 계집질로 부모 속을 썩이는 도령들이 그리 많다 들었다. 그에 비해 우리 아드님은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이거야말로 효자 중의 효자가 아니던가.
“한데, 정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당수연은 무뚝뚝한 아들의 물음에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궁관들을 안에 불러들였다.
“말끔한 옷으로 환복 한 후 채비하거라. 초상화를 그릴 것이다.”
“초……상화요?”
“그래. 새로 그릴 때가 되었으니. 뭣들 하고 있느냐? 얼굴이 화사해 보이는 옷들을 내어 오지 않고.”
당수연이 거듭 명하자 여관들은 고개를 숙여 대답한 후 물러갔다. 여관들이 내어 온 의복들을 몇 번이고 고쳐 보던 그녀는 끝내 푸른 저고리를 골랐다. 정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