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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환 정혼자 도라희





프롤로그







적막한 분위기 속 노년에 가까운 두 중년 신사는 굳은 얼굴로 서로의 술잔에 말없이 술을 따랐다.

차가운 공기, 한기마저 감도는 싸늘한 분위기에 두 사람의 잔은 쉴 새 없이 가득 채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희끗희끗한 머리칼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한 신사가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대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상대는 제 옆에 곤히 잠든 작고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글쎄. 힘들겠지만 버릴 수야 있겠는가.”

그러자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린 신사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함께 잠이 든 남자아이를 보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자네 말이 맞구먼.”

“…….”

두 사람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싸늘한 공기를 함께 공유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괴로움과 슬픔이 사그라들지 않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날한시에 하나뿐인 자식 부부를 동시에 잃었다.

거기다 그 충격과 고통을 감내할 시간도 없이 남겨진 손주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손주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외롭고 슬프지 않게 하려면 제 부모만큼은 못하더라도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부어야 했다. 자신은 없지만 나약해질 수 없었다.

술을 기울이는 두 신사들은 절실한 서로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저 말없이 감정을 공유했다.

“우리 새끼들 괜찮겠지?”

여자아이를 바라보던 신사 도진필이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여자아이와 정수리를 맞대고 자고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던 유현철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겠지. 그나저나 라희가 더 걱정이네. 우리 명환이보다 너무 어리니까.”

현철은 제 손주인 명환을 힐끔거리다 진필의 손녀딸을 걱정했다.

명환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라희보다는 좀 더 컸기에 여린 라희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진필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진필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철은 어깨를 으쓱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이 녀석들 맺어 주는 게 어떠한가.”

“……!”

진필은 두 눈을 번뜩였다. 맺어 주자니, 정략결혼이라도 시키자는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결혼이라도 시키자고?”

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짝을 찾아 주는 것까지 우리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녀석들이 반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이 좀 그럴지 몰라도 한날한시 부모를 똑같이 잃은 게 어디 흔한 우연인가. 분명 이 녀석들에게 인연이라는 게 있을 거야.”

“…….”

진필은 가만히 현철을 말을 귀담아 들으며 자고 있는 라희를 힐끔 바라봤다.

아직 초등학생도 안 된 어린 손녀딸의 인생에 가장 의미가 있을지 모르는 중대사를 이렇게 결정해도 되는지 조금은 망설여졌다.

“생각이 필요한 것인가?”

현철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술김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아닌 것 같았기에 진필은 작은 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글쎄. 조금 섣부르지 않나 싶기도 하네.”

“이해하네. 사실 나도 쉽게 꺼낸 말은 아니야. 이 녀석들이 훗날 어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근데 말이야, 나는 꼭 이 아이들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네.”

“…….”

진필은 계속 망설여졌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 오랜 친구가 남겨진 손주들을 별 의미 없이 생각하진 않았을 테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을 보았던 터였다.

“그래, 좋네. 자네가 어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던가.”

진필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현철은 그제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고맙긴…….”

두 중년 신사는 남겨진 어린 손주들을 보며 미래를 약속했다. 훗날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진필과 현철은 꽤 진지했다.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얼마나 외로워할지, 지금 하는 이 약속이 그 허한 마음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진필과 현철은 그저 손주인 라희와 명환이 상처 받지 않고 잘 자라길 바랄 뿐이었다.

내일이면 하나뿐인 자식 부부를 진짜로 떠나보내야 한다.

술잔에 술이 한 잔 두 잔 채워지는 게 왜 이리 가슴이 미어지는지,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두 중년 신사는 한동안 말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두 사람은 아픔과 슬픔을 오늘로써 종지부 찍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었다.



***



“라희야, 울지 마.”

“으앙, 엄마…….”

“흑…….”

발인이 시작되자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던 라희가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바라보던 이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차마 아이를 보지 못했고, 이를 악물고 버티던 명환이 라희를 위로했다.

라희와 명환은 조부모의 품에 안겨 서럽게 눈물을 쏟으며 부모님의 발인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라희보다 네 살 많은 명환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기에 조금은 어른스럽게 굴었다.

라희는 진필의 품에 안겨 계속 엄마를 찾으며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진필과 현철은 제 손주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고, 여리고 어린 두 아이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발인이 모두 끝나고 너무 많이 울어서 지친 라희에게 명환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라희야, 이거 먹어.”

명환이 내민 것은 오랜 시간 손에 쥐고 있어서 포장 상태도 엉망이고 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초콜릿이었다.

라희는 고개를 살며시 들고 명환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고마워.”

수줍음이 워낙 많아 평소에는 뭘 받아도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라희였다.

명환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라희의 입에서 바른 인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내가 까 줄까? 다 녹아서 손에 묻을 텐데.”

라희는 받은 초콜릿을 다시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명환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는 제 손에 묻는 초콜릿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스레 포장을 뜯어 라희에게 건넸다.

“아, 해. 입에 넣어 줄게.”

조금 낯설었지만 명환의 호의가 싫지 않은 라희는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

“다음에 또 줄게. 안 녹은 걸로.”

“…….”

라희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입안에 들어온 초콜릿의 달콤함보다 명환의 눈웃음이 더 위안이 되었다. 라희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는 왜 안 울어? 안 슬퍼? 이모가 그랬는데 이제 엄마 아빠 못 본대. 하늘나라 간 거래.”

라희의 진심 어린 질문에 명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울었어. 그리고 너무 슬퍼. 근데 나중에 다시 만나면 된대.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 내가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있으면 꼭 다시 만난대.”

“진짜?”

“응, 난 믿어.”

“…….”

명환은 라희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래 봐야 명환도 아직 초등학생. 슬프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철이 일찍 든 그는 어린 라희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라희는 명환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훗날 거짓말을 한 명환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명환은 지금 라희가 조금이라도 덜 슬프다면 그걸로 되었다 생각했다.

명환과 라희는 마치 오랜 벗처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꼈다. 오늘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슬픔을 함께 나눴다.



“라희야!”

“명환아!”

“네!”

한창 주변을 탐색하며 뛰어놀던 두 아이를 진필과 현철이 불렀다. 동시에 대답을 하고 서로의 조부에게 향한 아이들은 함께 놀던 시간이 무색하게 조부의 뒤에 숨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조만간 다시 봄세. 건강 챙기고.”

현철은 마주 선 진필에게 악수를 건네며 먼저 인사했다.

“그러지. 자네도 몸 건강하게. 아! 라희야, 너도 인사해야지.”

“…….”

라희는 진필의 말에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현철과 명환은 그런 라희를 이해하는 듯 설핏 미소 지으며 진필을 바라봤다.

“그냥 놔두게. 쑥스러운 모양이야. 고생했네. 조심히 들어가고. 명환아, 인사해라. 가자.”

“안녕히 계세요.”

라희와 달리 의젓하게 인사하는 명환을 보며 진필은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아프지 말아라. 또 보자.”

“네.”

명환은 진필과 인사를 하며 라희를 힐끔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라희는 한참 잘 놀아 놓고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진필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라희야, 이제 가자.”

그렇게 라희와 명환은 각자의 조부 손을 붙잡고 걸음을 달리했다. 인사는 못 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았던 라희는 걸음을 옮기면서 힐끔 뒤를 돌아봤다.

“……!”

순간 라희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저를 보고 있던 명환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명환은 말없이 웃으며 라희에게 손을 흔들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라희는 얼른 시선을 피했지만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라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명환. 라희는 결국 수줍게 올린 손을 명환을 향해 흔들었다.

라희와 명환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조부들의 약속이 무색하게 그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