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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피의 법칙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명환은 책상 위에 놓인 스케줄 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일이네…….”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는 혼잣말과 함께 그 옆에 놓인 파일까지 점검하듯 훑었다.
“안 가?”
다시 파일을 덮고 차 키를 집어 들자 실장인 진웅이 말을 건넸다.
“아니, 가야지. 근데 형은 퇴근 시간만 되면 말이 참 짧아진다.”
진웅은 학교 선배이자 친한 형으로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왔다.
그래서 둘만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곤 했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명환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왜 또 그러지? 오늘 그날이야?”
“됐어. 그냥 한 소리야. 나가자.”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말 속에 뼈가 섞인 거 같다.”
눈을 흘기는 진웅을 보며 명환은 눈꼬리를 반으로 접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 맘 알면서.”
“어우, 징그러. 빨리 가야겠다.”
“아이 참, 같이 가. 형!”
명환은 일에 관해선 냉정하고 올곧은 한 회사의 대표였지만 진웅 앞에서 만큼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조부모님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으며 반듯하게 자랐지만 명환은 늘 외로웠다.
다행히 크게 모가 난 성격은 아니었기에 삐뚤어지지 않고 학창 시절도 무난하게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허기가 진 듯한 허망함이 있었다.
진웅은 이런 명환에게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와 준 존재였다.
늘 혼자인 명환을 챙겨 주고 불편한 속마음까지도 보듬어 주었다. 진웅은 명환이 제일 좋아하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명환은 빠른 걸음을 걸으며 뒤를 힐끔거리는 진웅의 모습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 * *
타닥타닥. 고요한 방 안, 쉴 새 없이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가느다란 소음으로 울려 퍼졌다.
“아휴, 마무리가 왜 이렇게 엉성하지?”
곤두선 라희의 목소리가 뭔가 일이 풀리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내일 중요한 면접에 제출해야 할 원고를 몇 번이나 수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라희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라희는 조부모님 손에 자랐지만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두 분이 생계 유지를 위해 맞벌이를 하셨기에 라희는 혼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림을 그리고 혼자 동네 놀이터에도 나가는 등, 라희는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하고 가까워졌다.
예쁜 그림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 라희의 친구가 된 셈이다.
라희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배웠다. 그러면서 조용했던 라희는 수다쟁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밝고 활발한 아이로 변했다.
물론 조부모님의 역할도 컸다. 당근과 채찍을 확실히 하되 온몸으로 사랑을 주었고 라희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라희는 그 덕에 많이 외롭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그저 행복했다.
“오케이. 됐어. 이만하면 완벽하지. 근데 지금 몇 시……. 벌써 3시라고? 자기도 애매하네. 그냥 자지 말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바로 침대에 누워 피로를 풀었을 테지만 아침에 중요한 면접이 있는 터라 혹시 늦잠을 잘까 싶어 고민이 되었다.
한데 원고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쏟아졌다.
졸음을 깨기 위해 스트레칭도 하고 세수도 여러 번 했지만 도무지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라희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가 라희의 귀를 괴롭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뻗은 팔은 주위를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오만상을 구기며 알람을 꺼 버린 라희는 다시 고요해지자 구겼던 인상을 스르르 폈다.
“앗! 면접!”
라희는 감았던 눈을 번뜩이며 본능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 미리 알람을 맞춰 둔 시간에서 한참 지난 후였다.
“대체 언제 잠든 거야. 아니, 알람이 왜 이제 울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라희는 다급하게 화장실로 이동했다.
늦게 울린 알람을 탓할 시간조차 아쉬웠다. 중요한 면접이라 조금 신경 써서 치장도 하고 싶었는데 늦잠 덕에 무산되었다.
조급해진 라희는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던 라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어? 잠, 잠깐만요. 아저씨!”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녀의 달리기 실력으로 지나치는 버스를 붙잡긴 역부족이었다.
“하 씨, 안 되는데.”
라희는 자신의 무릎을 꽉 틀어쥐고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냉정하게 지나가 버린 버스의 뒤꽁무니를 한없이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 버스를 놓치면 못해도 10분 이상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Y미디어의 최종 면접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이런 시답잖은 이유로 그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라희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택시를 기다렸다. 한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오늘따라 택시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택시를 기다리다 버스가 올 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저 멀리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라희는 두 눈을 부릅뜨며 손을 흔들었고, 정차를 하려는 택시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 어쭈!”
분명 라희가 잡은 택시였다. 아니 사실은 온 신경을 택시에만 집중한 터라 그녀는 제 앞에 있던 다른 이를 보지 못했다.
웬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라희가 잡은 택시의 뒷문을 스스럼없이 열었다.
“저기요!”
너무 다급했던 터라 체면이고 도덕이고 다 내팽개친 그녀는 무작정 택시로 돌진했다.
“미안합니다.”
“……!”
문을 연 남자를 밀어내고 택시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남자가 라희의 옷 끝자락을 강하게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남자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이없단 얼굴이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너무 급해서요. 죄송하지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아…… 네?”
그는 상당히 단호했다. 도덕적으로 라희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무 매몰찬 남자에게 조금은 당황했다.
“아니, 이해는 하는데요. 제가 진짜 너무 급해서 그래요. 이러고 실랑이할 시간도 없어요. 한 번만요.”
“그건 그쪽 사정이죠.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니요. 우리가 두 번 볼 사이입니까?”
“…….”
이 남자,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라희는 조급해졌다. 물론 옳지 않은 행동인건 알지만 이 정도로 사정 얘기를 하면 보통은 마지못해 양보하지 않나? 라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예, 그쪽 말이 다 맞아요. 제가 지금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압니다. 근데요! 만약 그쪽이 누군가가 죽어 간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저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 도덕적인 것을 운운할 수 있을까요?”
“…….”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라희는 이제 괜찮겠지 하는 안도의 마음으로 다시 택시에 올라타려 했다.
“아, 또 왜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만하시죠.”
“…….”
진짜 강적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만 가고 라희의 인내심도 바닥이었다.
“저기 진짜 미안해요. 나중에 꼭 복 받을 거예요. 먼저 갑니다.”
“이봐요! 야!”
남자를 휙 밀쳐 낸 라희는 그렇게 택시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주저앉아 버린 명환은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떠나간 택시를 어이없게 바라만 보았다.
“뭐야, 저 여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다급한 상황에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지만 저보다 족히 15센티는 작아 보이는 여자에게 힘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명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차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명환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택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저에게 향한 눈초리를 뒤늦게 인지했다.
“하아…… 그 여자, 진짜.”
차마 고개를 빳빳이 들지 못한 명환은 오만상을 구기며 택시를 기다렸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명환은 책상 위에 놓인 스케줄 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일이네…….”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는 혼잣말과 함께 그 옆에 놓인 파일까지 점검하듯 훑었다.
“안 가?”
다시 파일을 덮고 차 키를 집어 들자 실장인 진웅이 말을 건넸다.
“아니, 가야지. 근데 형은 퇴근 시간만 되면 말이 참 짧아진다.”
진웅은 학교 선배이자 친한 형으로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왔다.
그래서 둘만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곤 했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명환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왜 또 그러지? 오늘 그날이야?”
“됐어. 그냥 한 소리야. 나가자.”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말 속에 뼈가 섞인 거 같다.”
눈을 흘기는 진웅을 보며 명환은 눈꼬리를 반으로 접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 맘 알면서.”
“어우, 징그러. 빨리 가야겠다.”
“아이 참, 같이 가. 형!”
명환은 일에 관해선 냉정하고 올곧은 한 회사의 대표였지만 진웅 앞에서 만큼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조부모님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으며 반듯하게 자랐지만 명환은 늘 외로웠다.
다행히 크게 모가 난 성격은 아니었기에 삐뚤어지지 않고 학창 시절도 무난하게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허기가 진 듯한 허망함이 있었다.
진웅은 이런 명환에게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와 준 존재였다.
늘 혼자인 명환을 챙겨 주고 불편한 속마음까지도 보듬어 주었다. 진웅은 명환이 제일 좋아하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명환은 빠른 걸음을 걸으며 뒤를 힐끔거리는 진웅의 모습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 * *
타닥타닥. 고요한 방 안, 쉴 새 없이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가느다란 소음으로 울려 퍼졌다.
“아휴, 마무리가 왜 이렇게 엉성하지?”
곤두선 라희의 목소리가 뭔가 일이 풀리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내일 중요한 면접에 제출해야 할 원고를 몇 번이나 수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라희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라희는 조부모님 손에 자랐지만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두 분이 생계 유지를 위해 맞벌이를 하셨기에 라희는 혼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림을 그리고 혼자 동네 놀이터에도 나가는 등, 라희는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하고 가까워졌다.
예쁜 그림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 라희의 친구가 된 셈이다.
라희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배웠다. 그러면서 조용했던 라희는 수다쟁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밝고 활발한 아이로 변했다.
물론 조부모님의 역할도 컸다. 당근과 채찍을 확실히 하되 온몸으로 사랑을 주었고 라희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라희는 그 덕에 많이 외롭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그저 행복했다.
“오케이. 됐어. 이만하면 완벽하지. 근데 지금 몇 시……. 벌써 3시라고? 자기도 애매하네. 그냥 자지 말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바로 침대에 누워 피로를 풀었을 테지만 아침에 중요한 면접이 있는 터라 혹시 늦잠을 잘까 싶어 고민이 되었다.
한데 원고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쏟아졌다.
졸음을 깨기 위해 스트레칭도 하고 세수도 여러 번 했지만 도무지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라희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가 라희의 귀를 괴롭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뻗은 팔은 주위를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오만상을 구기며 알람을 꺼 버린 라희는 다시 고요해지자 구겼던 인상을 스르르 폈다.
“앗! 면접!”
라희는 감았던 눈을 번뜩이며 본능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 미리 알람을 맞춰 둔 시간에서 한참 지난 후였다.
“대체 언제 잠든 거야. 아니, 알람이 왜 이제 울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라희는 다급하게 화장실로 이동했다.
늦게 울린 알람을 탓할 시간조차 아쉬웠다. 중요한 면접이라 조금 신경 써서 치장도 하고 싶었는데 늦잠 덕에 무산되었다.
조급해진 라희는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던 라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어? 잠, 잠깐만요. 아저씨!”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녀의 달리기 실력으로 지나치는 버스를 붙잡긴 역부족이었다.
“하 씨, 안 되는데.”
라희는 자신의 무릎을 꽉 틀어쥐고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냉정하게 지나가 버린 버스의 뒤꽁무니를 한없이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 버스를 놓치면 못해도 10분 이상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Y미디어의 최종 면접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이런 시답잖은 이유로 그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라희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택시를 기다렸다. 한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오늘따라 택시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택시를 기다리다 버스가 올 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저 멀리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라희는 두 눈을 부릅뜨며 손을 흔들었고, 정차를 하려는 택시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 어쭈!”
분명 라희가 잡은 택시였다. 아니 사실은 온 신경을 택시에만 집중한 터라 그녀는 제 앞에 있던 다른 이를 보지 못했다.
웬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라희가 잡은 택시의 뒷문을 스스럼없이 열었다.
“저기요!”
너무 다급했던 터라 체면이고 도덕이고 다 내팽개친 그녀는 무작정 택시로 돌진했다.
“미안합니다.”
“……!”
문을 연 남자를 밀어내고 택시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남자가 라희의 옷 끝자락을 강하게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남자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이없단 얼굴이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너무 급해서요. 죄송하지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아…… 네?”
그는 상당히 단호했다. 도덕적으로 라희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무 매몰찬 남자에게 조금은 당황했다.
“아니, 이해는 하는데요. 제가 진짜 너무 급해서 그래요. 이러고 실랑이할 시간도 없어요. 한 번만요.”
“그건 그쪽 사정이죠.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니요. 우리가 두 번 볼 사이입니까?”
“…….”
이 남자,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라희는 조급해졌다. 물론 옳지 않은 행동인건 알지만 이 정도로 사정 얘기를 하면 보통은 마지못해 양보하지 않나? 라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예, 그쪽 말이 다 맞아요. 제가 지금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압니다. 근데요! 만약 그쪽이 누군가가 죽어 간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저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 도덕적인 것을 운운할 수 있을까요?”
“…….”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라희는 이제 괜찮겠지 하는 안도의 마음으로 다시 택시에 올라타려 했다.
“아, 또 왜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만하시죠.”
“…….”
진짜 강적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만 가고 라희의 인내심도 바닥이었다.
“저기 진짜 미안해요. 나중에 꼭 복 받을 거예요. 먼저 갑니다.”
“이봐요! 야!”
남자를 휙 밀쳐 낸 라희는 그렇게 택시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주저앉아 버린 명환은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떠나간 택시를 어이없게 바라만 보았다.
“뭐야, 저 여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다급한 상황에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지만 저보다 족히 15센티는 작아 보이는 여자에게 힘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명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차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명환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택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저에게 향한 눈초리를 뒤늦게 인지했다.
“하아…… 그 여자, 진짜.”
차마 고개를 빳빳이 들지 못한 명환은 오만상을 구기며 택시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