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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까지 저버리고 택시를 가로챘지만 라희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시간을 보아하니 면접 시간까지 간당간당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Y미디어 대표는 시간관념이 꽤 철저한 사람이라 했다.
첫 출근도 아니고 고작 면접인데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빤할 터, 라희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행히 도로가 꽉 막히진 않아 잘하면 시간 내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변수라는 것이 있을지 모르니 도착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면접에 나올 만한 질문들을 되뇌며 저 혼자 중얼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그런 라희를 이상하게 보던 택시 기사님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룸미러를 힐긋댔다.
“중요한 약속 있어요?”
기사님의 질문에 라희는 고개를 돌렸다.
“네? 아, 네. 면접이요.”
“아, 그래서 아까 급하게 동동거렸구나. 우리 딸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젊은 아가씨가 패기가 좋으네.”
알은척을 하는 기사님의 말에 라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네, 제가 사실은 Y미디어에 최종 면접을 보러 가거든요. 그래서 지금 무지 떨려요.”
“나야 뭐, Y미디어가 뭐 하는 회사인지는 잘 모르지만 꼭 붙었으면 좋겠네.”
라희는 기사님의 말에 빙긋 웃어 보였다.
“네, 그럼요. 사실 어르신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죠. 근데 저한텐 정말 꿈의 회사거든요.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작가가 될지도 모르니까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감동이에요.”
“어이고, 아가씨같이 열정 있는 사람을 그 회사에서도 못 알아보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잘은 모르지만 잘될 것 같네, 아가씨는.”
라희는 기사님의 긍정적인 응원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정말이요? 저 정말 붙었으면 좋겠어요.”
“잘될 거야. 아가씨가 인상도 좋고 밝아서 그런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같네. 내가 꼭 붙으라고 빌어 줄게.”
“와, 감사합니다. 저 기사님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어요.”
“하하, 다행이네.”
라희는 활짝 웃으며 자세를 다시 반듯하게 했다.
기사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나니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라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로 옆 울창한 나무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그녀는 눈꼬리를 반으로 접으며 숨을 크게 마셨다 내쉬었다.
왠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고생하세요.”
“그래요. 면접 잘 봐요.”
기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서 내린 라희는 시계를 힐끔 보곤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면접장까지 얼른 올라가야 했다.
“진짜 으리으리하네.”
Y미디어 회사 입구에 도착한 라희는 삐까번쩍하고 으리으리한 건물 외부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돈도 많고 잘나가는 회사라 그런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기가 팍 눌리는 기분이었다.
“큰 회사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
어쩌면 자신도 이 회사에 소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에 힘이 실린 라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 라희는 1층에 불이 켜지자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Y미디어는 7층. 층수가 하나씩 오를 때마다 긴장이 쌓이는 듯해 그녀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는 복도 벽면 중간중간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를 보며 떨리는 마음을 최대한 다스렸다.
Y미디어 문 앞에 도착해 다시 가슴을 들었다 내린 라희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저 실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이 라희를 쳐다보았다.
“예, 어떻게 오셨죠?”
“대표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면접 보기로 한 작가인데.”
라희가 멋쩍게 웃어 보이자 직원이 라희를 알은척했다.
“아, 작가님이시구나. 대표님께 말씀 들었어요.”
“네, 뭐…….”
“근데 이걸 어쩌죠. 대표님이 일이 생기셔서 조금 늦는다고 잠시 기다려 달라 하셨거든요.”
라희는 한쪽 눈썹을 위로 씰룩였다.
“아, 그래요? 늦으시는구나.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요?”
“아니요. 대표님 방으로 모실게요. 방으로 모시라고 하셔서. 이쪽으로 오세요.”
“네,”
뭐야, 이 사람. 시간 개념 철저하다고 하더니만 자기가 늦어. 괜히 아침부터 쇼했네.
라희는 속으로 볼멘소리를 읊조렸다.
늦을까 봐 아침부터 애먼 남자랑 실랑이까지 했는데 정작 대표가 늦으니 조금 허무했다.
하나 한편으로 긴장되었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적어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번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Y미디어 대표의 방은 굉장히 정갈하고 깔끔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을 보아 분명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소파에 앉아 사무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터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문밖으로 희미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대표가 도착한 모양이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시 긴장이 되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세도 바르게 정리한 라희는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맞잡고 대표를 기다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
“아닙니다. 별말…… 에?”
문을 열고 들어온 대표의 말을 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희는 수그렸던 고개를 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젠장…….’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사고 회로가 정지되기라도 한 듯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하…… 일단 앉으세요.”
“……네.”
놀란 눈을 바로 거두며 침묵을 깬 건 대표였다.
무슨 인연이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건지, 대표라는 남자는 아까 택시를 두고 실랑이를 했던 그 남자였다.
굳어진 라희의 얼굴이 대표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표정이 영 안 좋으시네요. 왜요? 곧 유명을 달리할 지인 걱정이라도 하는 겁니까?”
“…….”
다짜고짜 내뱉은 그의 말은 아까의 실랑이를 염두에 둔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듣기 좋은 말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탄로 난 마당에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라희는 미간을 찌푸리다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요.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대표님이신 줄 알았다면 그런 무례함은 없었을 거예요.”
라희가 최대한 조신하게 먼저 숙이고 들어가자 Y미디어의 대표 명환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알면서도 그랬다면 진짜 문제인 거죠. 뭐, 좋습니다. 서로가 모르고 했던 일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죠.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도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요.”
“네, 감사…….”
“됐으니 이제 사적인 얘기는 그만합시다. 원고 준비해 오셨죠?”
“네? 아, 여기.”
라희는 명환의 싸늘한 태도에 주눅 들어 버렸다.
사과도 받을 생각 없는 듯 말을 막으며 원고부터 보자는 그에게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라희가 조심스레 원고를 내밀자 명환은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곤 원고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와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소리만 주위를 맴돌았다.
분위기는 라희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성 들인 시놉시스가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기본적인 원고를 준비하면서 라희는 설렘으로 기분 좋게 작업을 했다.
일단 시놉시스를 좋게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의 기대를 할 수 있었기에 나름 즐거운 상상도 했었다.
한데 작품을 보여 주기도 전에 실랑이를 한 남자가 하필 대표라니, 라희는 말없이 원고를 훑고 있는 명환을 힐끔거리며 다 틀렸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좋네요.”
“네?”
“스토리가 생각보다 특색이 있어서 좋다고요. 문제 있어요?”
“아, 아니요. 감사…… 합니다.”
라희는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 터라 명환의 칭찬을 믿기 어려웠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첫인상이 별로였기에 제 원고에도 영향을 줄 줄 알았건만 그는 의외로 공과 사가 분명했다.
왠지 아까의 제 행동이 더 미안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택시를 명환이 타고 본인이 늦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칭찬은 꼬여 버린 일들에 가라앉았던 라희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희는 이제야 활짝 눈꼬리를 접고 기분 좋게 명환을 마주했다.
* * *
아침부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멀쩡했던 명환의 차가 말썽을 부렸다.
면접 때문에 서둘러야 했지만 출발 직전 퍼져 버린 차 때문에 괜한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 대중교통을 선택했다.
마침 택시가 오는 것이 보여 도로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설상가상으로 웬 여자가 나타나 택시를 가로챘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양보했을 테지만 시간이 촉박해 물러설 수 없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는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는지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힘으로 밀어붙였다.
얼떨결에 택시를 빼앗기고 약속 시간도 늦어 기분이 별로였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여자가 저와 면접을 약속한 작가였다니, 명환은 무슨 인연이 이러나 싶어 조금 당황했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원고를 검토했다. 그녀의 첫인상과는 별개로 들어온 것 중 가장 맘에 든 시놉시스였던 만큼 초고도 꽤 괜찮았다.
명환은 글에 작가의 성격이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 얼마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기 위하여 굳이 작가들과 대면을 하곤 했다.
그녀의 원고는 당돌한 성격만큼 통통 튀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무가내로 택시를 빼앗은 그녀와의 첫 만남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작품은 명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원고에 대한 칭찬을 했지만 그녀는 아까 일을 마음에 둔 건지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그 일로 좋은 작품을 놓칠 순 없었다.
그녀가 도덕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얼굴로 주눅 들어 있는 그녀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작품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있는 것 같아 명환의 선택은 긍정적이었다.
“문제가 없다면 계약 진행을 했으면 하는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