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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밤

:별을 찾아가는 길



·일러두기

본문 중에 외국어 대화는 「」로 표기했습니다.



1화



격투 대회 PFC(Premier fighting championship)의 선수, 린 문 레드.

잘생긴 외모와 깔끔한 경기 매너로 유명한 그가 어젯밤 반칙을 연속으로 저질렀다. 작정이나 한 듯 상대에게 하면 안 되는 짓만 골라서 했다.

쓰러뜨리고, 목을 조르듯 붙잡고, 깨물고,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 이미 이긴 싸움이 분명한데도 멈추지 않는 그것은 분노의 몸짓이었다.

케이지 안에서 그랬다면 정말 반칙이었다.

그러나 모든 행위가 침대 위에서 이뤄졌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동의가 있었고, 몇 번의 밀어가 속삭여졌다는 점에서 반칙의 의미는 묘하게 변했다.

상대는 그의 첫사랑인 유은이었다.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으면서 오랫동안 그를 버려둔 무심한 여자였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안고 또 안는 것으로 지난 시간을 보상받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격하게 탐해도 깊이 쌓인 애증을 단 한 번의 밤으로 다 위로하기에는 부족했다.

유은은 그를 견뎠다. 견뎌 주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즐겼는지도 몰랐다.



* * *



잠에서 깨어난 유은은 온몸을 뒤덮는 무기력과 통증에 걱정이 들었다.

‘아, 출근 어쩌지?’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긴 거울에 비친 나신은 밤새도록 시달린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마치 짐승에게 물린 것인 양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특히나 목이 심했다. 이 더운 날씨에 스카프를 하고 나가게 생겼다.

“흐으, 망할.”

곁에 누워 있는 린은 아주 잘 자고 있었다. 남의 잔잔한 일상을 뒤흔들어 버린 주제에 고른 숨소리를 내며 편히도 잤다.

“미치겠네.”

유은에게 린은 과거의 남자였다.

스무 살. 꿈은 크지만 충동에도 쉽게 휘둘리던, 또 그만큼 실수 가득한 날의 파편이었다. 어린 날에 우연히 인연이 닿아 일탈을 즐겼던 상대였다.

그 시절 딱 한 번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가 도와주었다. 도움을 주고받다 보니 서로에게 끌렸다. 극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어린 양들은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나 된 듯 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고 별 시답잖은 말을 참 많이도 했다. 첫사랑이라는 둥, 운명이라는 둥, 떨어지면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둥, 그러니 아예 결혼이나 해 버리자는 둥.

그러나 일탈은 어디까지나 일탈일 뿐이었다.

무거운 현실이 유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을 생각하면 린과 함께했던 시간과 약속들은 다 뜬구름일 뿐이었다.

유은은 떠난다는 말도 없이 도망쳤다. 마지막 인사조차 그녀에겐 사치였으니까.

그리고 그와 함께한 나날은 힘든 세상살이에 지쳐 금세 잊혔다.

하지만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은퇴 발표 후 한 달 만에 한국에 온 그는 가장 먼저 유은을 찾아왔다.

유은은 죄책감에 그를 쫓아내지 못했다. 사실은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알게 모르게 쌓인 외로움을 그를 통해 해소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미친 밤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유은은 복잡한 마음으로 린을 보았다.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에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자면서 짓는 미소가 해맑고 부드러웠다. 어젯밤의 행위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기억 속 소년은 짐승으로 변했다.

선이 여리고 입술이 붉어 예쁘장했던 얼굴은 굵어진 뼈대와 살짝 돋은 수염으로 완전히 남자다운 인상을 풍겼다. 긴 금발도 짧게 친 검은 머리로 변했다.

하얀 피부는 그을었으며 굵어진 뼈대 전부를 단단한 근육이 뒤덮었다. 그 위 무수한 상처는 격투기 선수로서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실감케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격투에 열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되는대로 선택한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사업으로 시작해 격투 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이룬 에릭 레드의 아들이 이 남자 하나만 남았다는 점에서, 이미 격투기 챔피언이란 타이틀은 린을 수식하는 화려한 배경 중 하나로 전락할 뿐이었다.

미련 없이 격투기 선수 생활을 놓은 건지 한 달 전부터 그의 은퇴 기사가 떴다. 유은은 그가 아버지를 도와 경영에 열중할 것으로 생각했다. 첫사랑 따위를 찾아 이곳까지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 때문에 한국에 들렀다가 가볍게 하룻밤 몸을 겹칠 관계를 원했다면 차라리 말이 더 되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경고를 떠올리면 정말 장난이 아닌 듯했다.



‘물고, 뜯고, 삼키고, 아예 먹어 버리는 것도 좋겠다. 그럼 안심이 좀 될 거야. 그러다 보면 당신도 알겠죠.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또 얼마나…… 원망했는지.’



벌써 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시까지 놔주지 않았던 린 때문에 유은은 잠이 극히 부족했지만, 그래도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욕실로 간 그녀는 물을 틀었다. 새하얀 안개처럼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를 집에 다시 들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억은 먼 곳으로 되돌아갔다.

린과 처음 만났던 스무 살 그 시절로.



* * *



‘천국이야.’

유은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그렇게 믿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의 집도 그리 작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집은 아예 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유명한 에릭 레드의 여름 별장이었다.

에릭 레드는 유은이 알기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계의 거물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사업체 하나에서 큰 상금을 걸고 모델을 뽑는다며 오디션을 열었고, 돈이 필요한 유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가했다.

한때 아이돌을 꿈꿨고 대형 기획사 오디션에도 붙은 적이 있었다. 내심 동양인 모델은 외면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안 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적이었다. 에릭 레드의 아들인 션이 가장 후한 점수를 주어 그녀를 뽑았다.

오디션 후 유은은 션의 사적인 파티에 초대되었다. 그게 지금 이 자리였다.

이곳엔 정말 사람이 많았다. 드라마에서 봤던 배우, 래퍼, 오디션 후 초대된 여자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까지, 모두 션의 친구들인 듯했다.

하나같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분위기는 한없이 들뜨고 즐거웠다. 밤하늘 아래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멋지고 큰 풀에서 마시는 무알코올 칵테일은 지금껏 마신 그 어떤 음료수보다 달콤했다.

션에게서 가벼운 파티라는 말을 들었지만, 천만에. 유은이 알기엔 인생 최고의 파티였다.

유은은 기뻤다.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이 더 기뻤다.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드디어 자립의 길에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그러면 예전처럼 고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더는 억눌려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버지는 고리타분하며 독재자였다. 남들에겐 사람 좋은 변호사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사실은 알코올 중독에 집안에서는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려 드는 폭군이었다.

고교생 딸이 몰래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봤다는 이유로 자퇴를 시키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너 같은 건 그냥 가둬 놔야 해. 말 안 듣는 것들은 짐승 취급 받아도 싸지.’

‘아빠가 뭔데 날 가둬? 무슨 자격으로? 또 지긋지긋한 공부나 하라고? 내가 로봇이야? 싫어. 어차피 그래 봤자 아빠처럼 술독에 빠져 살 거라면, 차라리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이게……!’



그날 유은은 얼굴이 붓도록 맞았고 머리칼도 모조리 밀렸다. 이후엔 집에서 과외 선생만 만나며 공부해야 했다. 그렇게 대입에만 매달려 결국 독재자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유은은 그대로 순응하며 살기 싫었다. 다만 당장 아무런 힘이 없었기에 포기한 척 숨죽이며 지냈던 것뿐이었다.

스무 살의 여름, 이 시간을 기점으로 더는 독재자에게 얽매이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에서 좀 멀어졌지만, 모델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다 보면 원하던 자유로운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들뜬 마음에 유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너무 웃어서 바보처럼 보일까 봐 그녀는 이따금 물속 깊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푸하!”

입 밖으로 수영장 물이 흘렀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감각이 미치는지 물이 달았다. 몸도 아주 가벼웠다. 볼륨 있는 몸매를 꽉 죄는 비키니 차림인데도 알몸인 듯 가뿐하게 날아갈 것 같았다.



* * *



파티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유은은 핸드폰부터 챙겼다. 사촌 오빠 유진에게 연락해야 했다.

유진은 여기서 한 시간은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공부 겸 개인 사업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바쁜데, 한국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사촌 동생을 지금껏 여러모로 도와준 든든한 존재였다.

‘말해야 해. 나 오디션 붙었다고.’

그리고 당분간은 이곳 숙소에서 지내게 될 거라는 것도 알려야 했다.

‘에릭 레드의 오디션이었다고 하면 진짜 엄청 놀랄 거야.’

유은은 조용한 곳에서 통화하려고 숙소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때, 수영복 차림의 한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은!」

션이었다. 오디션에서 뽑아 준 사람이니 유은에겐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에릭 레드의 장남으로 이번 파티에서 가장 말이 많고 유쾌하며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얼굴 한번 보이지 않는 에릭을 대신해 이 파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은이라는 이름을 알면서도 ‘은’이라고만 불렀다. 그게 발음하기 편한 모양이었다.

「가서 이야기 좀 나눌까요? 우리, 진지한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은데.」

「진지한 시간요?」

「네.」

「지금 바로요?」

「물론.」

유은은 의아했다. 지금은 서로 수영복 차림이라, 이런 차림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엔 좀 불편할 것 같았다.

‘왠지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냐. 여태 일 얘기는 한 적이 없잖아. 차림이 이러면 뭐 어때.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야기하자면 좋은 거지.’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유은에게 경고했다.

“그만둬요.”

“……?”

“가면 큰일 날 테니까.”

익숙한 한국어였다. 그리고 지독히 굵은 저음이었다.

유은은 그를 보려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목소리만 들었을 땐 몸집이 큰 남자일 것 같았는데, 키는 크지만 몸매는 날씬한 소년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을 가졌지만, 검은 눈동자와 쌍꺼풀 없는 눈과 또렷한 발음이 그가 한국인이란 걸 알려 주는 듯했다.

“저 인간이 말하는 진지한 시간이란.”

“네?”

“당신이 저 인간한테 잡아먹힌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계약 기간 내내 말이죠.”

유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잡아먹힌다고? 잘못 들은 건가?

소년은 지금 에릭 레드의 장남 션이 일을 미끼로 모델에게 위험한 일을 저지를 거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인데, 신기하네요. 보통은 다 알고 오거든.”

유은의 바로 뒤에서 소년이 멈춰 섰다. 그러자 션도 점점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유은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션이 소년의 한국어를 알아듣는지 아닌지 유은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구겨진 표정으로 보건대 그가 소년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말은 무시해요.」

션의 말에 소년이 맞섰다.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따라가죠. 따라가서 바보같이 당하고 울더라. 당할 땐 모르다가 지나고 나면 속았다는 걸 알게 되거든. 놈이 좀 변태여야 말이지.”

유은은 이 말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변태요?”

“어쨌든 참견은 여기까지예요. 어디 자신 있으면 걸려들어 봐요. 아니면 여기서 얌전히 귀가하고.”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돌연 션에게 중지를 세워 보인 후 뒤돌아섰다.

「또, 또 심술부린다.」

션이 소년을 향해 그렇게 말하곤 유은에게로 좀 더 다가왔다.

찝찝해진 유은은 션이 다가올수록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저 멀찍이 걸어가는 소년에게 외쳤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말해 주는 거예요?”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내가 착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