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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소년의 경고는 쓸데없는 참견도, 터무니없는 거짓도 아니었다.
션이 내민 계약서를 읽어 본 유은은 그대로 종이를 구겼다. 그리고 그것을 션의 얼굴에 던지고 뒤돌아섰다.
계약서엔 션이 그 무슨 짓을 해도 피고용자로서 따라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아주 길게도 적혀 있었다.
“차라리 노예를 사라.”
교묘한 짓거리에 속을 뻔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션이 말한 회사는 에릭 레드의 회사치고는 이름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곳의 모델 오디션에 통과되었다고 거액의 상금을 줄 리 없다.
애초에 이 파티도 수상했다. 에릭 레드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그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시종일관 그의 아들 션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다.
“바보, 멍청이.”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유은은 멍청한 자신을 욕하며 나왔다.
그러자 션이 문밖을 지키고 있던 덩치들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자들은 유은을 뒤따라 붙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좁은 복도에서 점점 빠르게 따라오는 그들 때문에 유은은 두려워졌다.
‘뭐야!’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자 뒤따라오는 덩치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유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인상을 구겼다.
“이, 씨!”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껏 션과 있었던 곳은 수영장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의 건물로 조경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영장이 있던 방향이 어디더라? 불빛을 쫓아가려 했지만 도무지 어두워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왜 따라오는 거야!」
유은이 달리면서 외치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냥이야!」
「웬만하면 타협하지 그래!」
「진지하게!」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
그들의 조롱 어린 외침에 유은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할수록 두려움만 커졌다.
더 빨리 도망쳐야 했다. 뛰다 보면 도롯가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하아, 하!”
드디어 빛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더는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로등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는 도로가 보였다.
“어?”
그런데 가로등 아래, 아까 그 긴 금발의 소년이 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기댄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유은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거봐.”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서둘러 운전석으로 향했다.
“타요.”
“나요?”
“그럼 당신이지, 누구겠어요?”
유은은 뒤따라오는 덩치들의 발걸음 소리에 다급해졌다.
급박한 상황은 판단력을 흩트렸다. 위기에 내몰린 존재는 본능적으로 덜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피하기 마련이었다.
“얼른.”
유은은 서둘러 소년의 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덩치들을 따돌리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젠장!」
「저 재수 없는 놈!」
덩치들의 욕설과 고함이 텅 빈 하늘에 퍼졌다.
* * *
여름 별장이 멀어져 갔다.
유은은 이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쫓겨서 이름도 모르는 소년의 차에 비키니 차림으로 몸을 실었지만, 황당할 따름이었다.
……왜 이러고 있을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사람의 집에서 굳이 도망을 가야 하는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신고를 하면 그만이었다. 법은 그러라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면 곤란하단 생각도 있었다.
좋지 않은 일로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게 들키는 건 싫었다.
사촌 오빠 유진도 마음에 걸렸다. 미국에 온 사촌 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긴 했지만, 늘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괜한 소식으로 실망을 안기긴 싫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은은 바로 뒤에 차 두 대가 따라붙는 것을 보았다.
“저기, 뒤에서 따라와요.”
“알아요.”
집요하게 거리를 좁혀 오는 그것은 필시 션의 패거리였다.
소년이 속도를 더욱 높였다.
유은은 초조함에 핸드폰을 켰다.
도망가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가는지는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 * *
션. 에릭 레드의 아들.
굵직한 뉴스에는 주로 에릭 레드의 사업만 다뤄져서 그런지 그 아들인 션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현지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서 션은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사업체 이미지를 밝게 바꿔 보려는 아버지 에릭 레드의 노력을 션은 언제나 짓뭉갰다.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한 매춘, 마약 거래, 심지어 살인까지. 모든 더럽고 흉흉한 소문과 사건에 그의 이름이 한 번씩은 나왔다. 동양인이라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몹쓸 버릇도 있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쓰레기였다.
그러고 보니 모델 오디션부터 정체성이 불분명했다. 에릭 레드의 사업체 중 하나가 개최한다는 공지만 눈여겨보아서 잘 몰랐는데, 오디션 내내 모델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밝혀진 게 없었다.
유은은 문득 그의 패거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냥이야!」
이제 보니 맞는 말이다. 오디션도, 파티도, 말도 안 되는 계약서도 다 션의 음습한 욕망이 만든 사냥놀이에 불과했다.
한순간에 단꿈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실망과 두려움과 초조함에 온몸이 떨렸다.
그때, 운전하던 소년이 차의 히터와 열선을 켰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좌석도 따뜻해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어차피 저러다 말 테니까.”
그의 말대로 복잡한 도심에 들어서자 차들이 따라붙지 않았다.
유은은 문득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소년의 물음에 그녀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
“…….”
“당신 진짜 착한 사람 같아서요.”
피식. 유은은 직접 보지 않았지만, 소년이 그렇게 웃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 * *
사촌 오빠 유진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비키니 차림에다 가방도 두고 온 지금 이 꼴로 집에 들어갔다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꼴로 다른 곳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는 유은을 보고 소년이 제의했다.
“내가 사는 데로 갈래요?”
“네?”
“어차피 그 꼴로 돌아다니진 못하잖아요.”
“아, 그렇죠. 그럼요.”
“허락으로 들을게요.”
어쩔 수 없이 유은은 소년의 집으로 갔다.
도심에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가 보였다. 주방과 이어진 거실에 패브릭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고, 문이 열린 침실엔 매트리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휑한 풍경을 보며 유은은 몸을 떨었다. 젖은 비키니가 마르면서 더 추워졌다.
유은은 여기까지 안내한 소년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옷을 가져다준다면?
“저, 죄송한데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뭔데요.”
“혹시 다시 거기 가서 제 옷이랑 가방 좀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나중에 사례는 해 드릴…….”
“가능하긴 한데, 지금은 아니에요.”
유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런 상태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한단 말인가.
소년은 추위에 떠는 그녀를 보고는 벽장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옷가지를 빼내 유은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
“저기서 씻고 갈아입어요.”
남성용 셔츠에 반바지였다. 그래도 유은은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유은은 그것을 챙겨 들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 * *
씻는 시간이 꽤 길었다.
사실은 운다고 욕실 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흑…….”
태어나서 처음으로 둥지를 떠났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멋진 삶을 동경해 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허무하고 부끄럽게도 결과가 이랬다.
“멍청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느냐보다, 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견딜 수 없었다.
허탈함에 축 늘어진 몸으로 욕실을 나왔다.
소년이 싱크대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늦게 나와서 걱정했어요.”
“원래 좀 오래 씻거든요.”
“……좋네요.”
“뭐가요?”
“당신이.”
유은은 귀를 의심했다. 얼굴을 빤히 보며 좋다고 말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씻으면서 잠잠해졌던 두려움이 다시 들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셈인가.
그래. 이 녀석 역시 션의 패거리와 함께 있었던 남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이 떨렸다.
그때, 소년이 싱크대 선반을 손가락으로 그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충격받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돼요.”
유은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러니까 들은 것을 다시 종합해 보자면, 당신이 생각보다 충격받지 않은 게 안심돼서 좋다는 말……인가.
“하아. 저기.”
“……?”
웬만하면 말을 끊어서 하지 말죠.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목에서 그 말이 걸려 나오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구해 준 사람에게 날 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데나 편히 앉아요.”
그의 권유에 유은은 소파에 대충 앉았다. 그가 끓는 물에 티백을 넣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허브의 한 종류인 듯했다.
“마셔요.”
유은은 잔을 받으려다 멈칫했다. 왠지 이걸 마셔도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 속을 느꼈는지, 소년이 한숨과 함께 알려 주었다.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 건데.”
그제야 유은은 잔을 받았다.
“고마워요.”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때도 우울함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따끈한 차에서 모락모락 나는 허브 향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도 아직 바로 마시면 뜨겁겠지? 그런 생각에 유은은 차를 후후 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네?”
“찬물을 좀 탔거든요.”
유은은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가져갔다. 미지근함과 따뜻함 그 사이의 온도였다.
좋았다.
“고마워요.”
“아까 들었잖아요. 같은 말 두 번 듣기, 좀 그런데.”
“……그놈과는 어떤 사이예요?”
유은은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물어봤다.
소년이 션과 무슨 관계이며 어떠한 이유로 그 별장에 머물렀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션이 고용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션과 좀 찬바람이 불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그게 중요해요?”
“네? 아니, 저는…….”
“무사히 도망쳤으면 됐지, 그놈과 내가 무슨 사이인지 몰라도 돼요.”
“네. 뭐, 물론 그렇지만.”
착각인가? 소년의 말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사한 게 중요하지, 구해 준 사람이 그놈과 무슨 관계인가 하는 건 쓸데없는 관심일 뿐이다.
“당신 같은 여자 많이 봤죠.”
소년이 찻잔을 내려 두며 팔짱을 꼈다. 시선을 유은이 아닌 허공에 둔 채로 시니컬한 표정이었다.
“나 같은 여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레드라는 이름만 보고 달려드는 인간들. 돈벌레들.”
그의 적나라한 비하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유은은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돈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아들놈이 제 아버지 이름 하나 믿고 까부는 줄도 모르고 다들 속아서 진창에 구르곤 하죠.”
그의 말만 들으면 여태 션의 곁에서 그런 꼴을 아주 많이 본 듯했다.
“그런데 당신은…….”
“…….”
“빠지고 구르기에는 너무 어려요.”
침울하게 말을 듣던 유은은 황당했다. 자신을 어리다고 말하는 소년도 아주 어려 보였다. 갓 운전면허를 딴, 한국 나이로 치자면 열일곱 살, 열여덟 살로 보였다.
“그럼 내가 단지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구해 준 거예요?”
진지하게 알고 싶었다. 생판 남인데. 별장에서 경고해 준 것도 그렇고 왜 도와줬을까? 역시나 본인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여겨서?
유은이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소년은 허공에 멈춰 있던 시선을 유은에게로 옮겼다.
웃음에 인색한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입을 벌리고 웃지 않아도 보조개가 예쁘게 파였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네? 그럼요.”
“흥분되거든.”
“……!”
소년의 경고는 쓸데없는 참견도, 터무니없는 거짓도 아니었다.
션이 내민 계약서를 읽어 본 유은은 그대로 종이를 구겼다. 그리고 그것을 션의 얼굴에 던지고 뒤돌아섰다.
계약서엔 션이 그 무슨 짓을 해도 피고용자로서 따라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아주 길게도 적혀 있었다.
“차라리 노예를 사라.”
교묘한 짓거리에 속을 뻔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션이 말한 회사는 에릭 레드의 회사치고는 이름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곳의 모델 오디션에 통과되었다고 거액의 상금을 줄 리 없다.
애초에 이 파티도 수상했다. 에릭 레드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그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시종일관 그의 아들 션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다.
“바보, 멍청이.”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유은은 멍청한 자신을 욕하며 나왔다.
그러자 션이 문밖을 지키고 있던 덩치들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자들은 유은을 뒤따라 붙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좁은 복도에서 점점 빠르게 따라오는 그들 때문에 유은은 두려워졌다.
‘뭐야!’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자 뒤따라오는 덩치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유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인상을 구겼다.
“이, 씨!”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껏 션과 있었던 곳은 수영장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의 건물로 조경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영장이 있던 방향이 어디더라? 불빛을 쫓아가려 했지만 도무지 어두워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왜 따라오는 거야!」
유은이 달리면서 외치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냥이야!」
「웬만하면 타협하지 그래!」
「진지하게!」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
그들의 조롱 어린 외침에 유은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할수록 두려움만 커졌다.
더 빨리 도망쳐야 했다. 뛰다 보면 도롯가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하아, 하!”
드디어 빛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더는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로등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는 도로가 보였다.
“어?”
그런데 가로등 아래, 아까 그 긴 금발의 소년이 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기댄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유은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거봐.”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서둘러 운전석으로 향했다.
“타요.”
“나요?”
“그럼 당신이지, 누구겠어요?”
유은은 뒤따라오는 덩치들의 발걸음 소리에 다급해졌다.
급박한 상황은 판단력을 흩트렸다. 위기에 내몰린 존재는 본능적으로 덜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피하기 마련이었다.
“얼른.”
유은은 서둘러 소년의 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덩치들을 따돌리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젠장!」
「저 재수 없는 놈!」
덩치들의 욕설과 고함이 텅 빈 하늘에 퍼졌다.
* * *
여름 별장이 멀어져 갔다.
유은은 이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쫓겨서 이름도 모르는 소년의 차에 비키니 차림으로 몸을 실었지만, 황당할 따름이었다.
……왜 이러고 있을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사람의 집에서 굳이 도망을 가야 하는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신고를 하면 그만이었다. 법은 그러라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면 곤란하단 생각도 있었다.
좋지 않은 일로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게 들키는 건 싫었다.
사촌 오빠 유진도 마음에 걸렸다. 미국에 온 사촌 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긴 했지만, 늘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괜한 소식으로 실망을 안기긴 싫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은은 바로 뒤에 차 두 대가 따라붙는 것을 보았다.
“저기, 뒤에서 따라와요.”
“알아요.”
집요하게 거리를 좁혀 오는 그것은 필시 션의 패거리였다.
소년이 속도를 더욱 높였다.
유은은 초조함에 핸드폰을 켰다.
도망가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가는지는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 * *
션. 에릭 레드의 아들.
굵직한 뉴스에는 주로 에릭 레드의 사업만 다뤄져서 그런지 그 아들인 션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현지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서 션은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사업체 이미지를 밝게 바꿔 보려는 아버지 에릭 레드의 노력을 션은 언제나 짓뭉갰다.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한 매춘, 마약 거래, 심지어 살인까지. 모든 더럽고 흉흉한 소문과 사건에 그의 이름이 한 번씩은 나왔다. 동양인이라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몹쓸 버릇도 있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쓰레기였다.
그러고 보니 모델 오디션부터 정체성이 불분명했다. 에릭 레드의 사업체 중 하나가 개최한다는 공지만 눈여겨보아서 잘 몰랐는데, 오디션 내내 모델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밝혀진 게 없었다.
유은은 문득 그의 패거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냥이야!」
이제 보니 맞는 말이다. 오디션도, 파티도, 말도 안 되는 계약서도 다 션의 음습한 욕망이 만든 사냥놀이에 불과했다.
한순간에 단꿈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실망과 두려움과 초조함에 온몸이 떨렸다.
그때, 운전하던 소년이 차의 히터와 열선을 켰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좌석도 따뜻해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어차피 저러다 말 테니까.”
그의 말대로 복잡한 도심에 들어서자 차들이 따라붙지 않았다.
유은은 문득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소년의 물음에 그녀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
“…….”
“당신 진짜 착한 사람 같아서요.”
피식. 유은은 직접 보지 않았지만, 소년이 그렇게 웃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 * *
사촌 오빠 유진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비키니 차림에다 가방도 두고 온 지금 이 꼴로 집에 들어갔다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꼴로 다른 곳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는 유은을 보고 소년이 제의했다.
“내가 사는 데로 갈래요?”
“네?”
“어차피 그 꼴로 돌아다니진 못하잖아요.”
“아, 그렇죠. 그럼요.”
“허락으로 들을게요.”
어쩔 수 없이 유은은 소년의 집으로 갔다.
도심에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가 보였다. 주방과 이어진 거실에 패브릭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고, 문이 열린 침실엔 매트리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휑한 풍경을 보며 유은은 몸을 떨었다. 젖은 비키니가 마르면서 더 추워졌다.
유은은 여기까지 안내한 소년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옷을 가져다준다면?
“저, 죄송한데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뭔데요.”
“혹시 다시 거기 가서 제 옷이랑 가방 좀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나중에 사례는 해 드릴…….”
“가능하긴 한데, 지금은 아니에요.”
유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런 상태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한단 말인가.
소년은 추위에 떠는 그녀를 보고는 벽장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옷가지를 빼내 유은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
“저기서 씻고 갈아입어요.”
남성용 셔츠에 반바지였다. 그래도 유은은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유은은 그것을 챙겨 들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 * *
씻는 시간이 꽤 길었다.
사실은 운다고 욕실 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흑…….”
태어나서 처음으로 둥지를 떠났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멋진 삶을 동경해 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허무하고 부끄럽게도 결과가 이랬다.
“멍청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느냐보다, 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견딜 수 없었다.
허탈함에 축 늘어진 몸으로 욕실을 나왔다.
소년이 싱크대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늦게 나와서 걱정했어요.”
“원래 좀 오래 씻거든요.”
“……좋네요.”
“뭐가요?”
“당신이.”
유은은 귀를 의심했다. 얼굴을 빤히 보며 좋다고 말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씻으면서 잠잠해졌던 두려움이 다시 들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셈인가.
그래. 이 녀석 역시 션의 패거리와 함께 있었던 남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이 떨렸다.
그때, 소년이 싱크대 선반을 손가락으로 그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충격받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돼요.”
유은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러니까 들은 것을 다시 종합해 보자면, 당신이 생각보다 충격받지 않은 게 안심돼서 좋다는 말……인가.
“하아. 저기.”
“……?”
웬만하면 말을 끊어서 하지 말죠.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목에서 그 말이 걸려 나오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구해 준 사람에게 날 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데나 편히 앉아요.”
그의 권유에 유은은 소파에 대충 앉았다. 그가 끓는 물에 티백을 넣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허브의 한 종류인 듯했다.
“마셔요.”
유은은 잔을 받으려다 멈칫했다. 왠지 이걸 마셔도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 속을 느꼈는지, 소년이 한숨과 함께 알려 주었다.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 건데.”
그제야 유은은 잔을 받았다.
“고마워요.”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때도 우울함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따끈한 차에서 모락모락 나는 허브 향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도 아직 바로 마시면 뜨겁겠지? 그런 생각에 유은은 차를 후후 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네?”
“찬물을 좀 탔거든요.”
유은은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가져갔다. 미지근함과 따뜻함 그 사이의 온도였다.
좋았다.
“고마워요.”
“아까 들었잖아요. 같은 말 두 번 듣기, 좀 그런데.”
“……그놈과는 어떤 사이예요?”
유은은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물어봤다.
소년이 션과 무슨 관계이며 어떠한 이유로 그 별장에 머물렀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션이 고용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션과 좀 찬바람이 불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그게 중요해요?”
“네? 아니, 저는…….”
“무사히 도망쳤으면 됐지, 그놈과 내가 무슨 사이인지 몰라도 돼요.”
“네. 뭐, 물론 그렇지만.”
착각인가? 소년의 말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사한 게 중요하지, 구해 준 사람이 그놈과 무슨 관계인가 하는 건 쓸데없는 관심일 뿐이다.
“당신 같은 여자 많이 봤죠.”
소년이 찻잔을 내려 두며 팔짱을 꼈다. 시선을 유은이 아닌 허공에 둔 채로 시니컬한 표정이었다.
“나 같은 여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레드라는 이름만 보고 달려드는 인간들. 돈벌레들.”
그의 적나라한 비하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유은은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돈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아들놈이 제 아버지 이름 하나 믿고 까부는 줄도 모르고 다들 속아서 진창에 구르곤 하죠.”
그의 말만 들으면 여태 션의 곁에서 그런 꼴을 아주 많이 본 듯했다.
“그런데 당신은…….”
“…….”
“빠지고 구르기에는 너무 어려요.”
침울하게 말을 듣던 유은은 황당했다. 자신을 어리다고 말하는 소년도 아주 어려 보였다. 갓 운전면허를 딴, 한국 나이로 치자면 열일곱 살, 열여덟 살로 보였다.
“그럼 내가 단지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구해 준 거예요?”
진지하게 알고 싶었다. 생판 남인데. 별장에서 경고해 준 것도 그렇고 왜 도와줬을까? 역시나 본인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여겨서?
유은이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소년은 허공에 멈춰 있던 시선을 유은에게로 옮겼다.
웃음에 인색한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입을 벌리고 웃지 않아도 보조개가 예쁘게 파였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네? 그럼요.”
“흥분되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