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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나쁜 놈한테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든 멍청한 여자 구해 주는 거, 일단 멋있고 극적이잖아요. 꽤 자극적이고.”

하지만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엔 흥미나 흥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은 초점을 잃어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오해하진 마요. 당신한테 흥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상황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유은은 그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자극적인 게 좋다고 해도 남의 위기나 즐긴다니. 위기에 빠져들었던 입장에서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괜히 빈정거림이 나왔다.

“인생 참 지루한가 보네요.”

“뭐, 그런 편이죠.”

“그래서 지금까지 자주 구해 줬나 봐요? 극적인 흥분에 취해서?”

“맞혀 봐요. 얼마나 구해 줬을지.”

“음. 많이?”

“귀찮게. 사람 봐 가면서 구해 줘야죠. 그놈한테 일부러 접근하는 인간들도 있는데 뭐 하러요. 불에 타 죽는 게 좋다고 달려드는 멍청이들 구해 주는 취미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유은은 이어질 말에 왠지 모르게 집중하는 자신을 느꼈다.

“멍청이 중에서도 상 멍청이라.”

입속에서 차가 싸늘히 식으며 유은의 얼굴도 굳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 같아서.”

유은은 시선을 천천히 내리다 결국 눈을 감았다. 턱이 간지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아, 뭐지. 이거.’

아까 욕실에서 다 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의 말이 아팠다. 반박할 수 없는 말들이 그러잖아도 위축된 마음을 창처럼 찔렀다.

소년은 조용히 눈물 흘리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잔인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약한 사람일수록 구하는 재미가 있는 법이죠.”

“…….”

“돈에 미치는 것도 좋지만, 다음엔 좀 잴 건 재고 따질 건 따져요.”

유은은 티슈를 받으려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그 순간 린은 보았다. 그녀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을.

그는 결국 티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유은은 찻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지금 들은 말 중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사람 잘못 봤어요. 돈에 미친 건 아니에요.”

“아하…….”

“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돈에 미친 건 아니었다고요.”

폭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마리오네트처럼 살 바에야, 이렇게 스스로 뭐라도 개척하려는 자세가 훨씬 낫다.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막 세상에 나온 스무 살이 그렇듯 좀 경솔했던 것뿐이었다. 사촌 오빠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면 당장 큰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오디션을 본 것뿐이었다.

“그리고 날 다른 여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거, 실례예요.”

“아하. 그럼 좀 특별한가 보죠?”

놀란 척 되묻는 모습이 여전히 깔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별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랬을 뿐이에요. 돈이 필요했다고요.”

“누구나 그렇죠. 이왕이면 많은 돈이 필요해서 그런 미끼를 물곤 하죠.”

“아니, 나는…….”

“사연 없는 멍청이는 없더라.”

매도가 한계를 넘어섰다. 정신이 아찔해져 유은은 잔을 내려놓았다.

자기가 뭔데 그렇게 지껄이는가. 남의 사연은 하나도 모르면서 막말하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단지 구해 줬다는 이유로 저런 독한 말을 할 권리는 없었다.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좀 거슬렸나 봐요? 어떤 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 멍청이? 다 틀린 말이 아닌데?”

“닥쳐, 인마.”

사나운 말에 소년의 미소가 더 짓궂은 빛을 띠었다.

“성질까지 더럽군요.”

“더러울 수밖에. 하나 묻자. 너 타던 차랑 여기 집, 누구 거야? 누가 줬어?”

“받았죠. 부모한테.”

“예상대로네. 다 의존해 사는 주제에 나처럼 뭐라도 스스로 가져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 까는 거야?”

“노력도 때가 있는 법이에요. 둥지에서 나갈 땐 나가더라도 나는 법은 익혀야죠.”

“둥지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다시 찻잔을 잡은 손은 금방이라도 소년을 향해 찻물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소년은 소파에 몸을 기울여 앉은 뒤 팔짱을 꼈다. 씩씩거리는 유은을 아래서 위로 훑어보는 시선은 여전히 사람을 깔보는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구해 주고 조언도 해 줬는데 혼나다니.”

“……!”

“뭐 어쨌든 나한텐 손해가 생길 일이에요. 용돈도 끊기고 재수 없으면 이 집과 타고 온 차까지 빼앗길지도. 그 쓰레기가 내 형이거든요.”

유은은 놀랐다. 알려진 바로는 에릭 레드는 백인이었고, 그러므로 그 아들 션도 마찬가지였다.

‘형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 소년은 완전히 한국인으로 보였다. 하얀 피부와 금발 그리고 깊은 눈매의 예쁜 얼굴 때문에 이국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또렷한 발음은 그가 한국인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왠지 복잡한 가정사가 느껴졌다.

“참. 옷이랑 가방도 가져다 달랬죠? 사실 나야 착하니까 얼마든지 가져다줄 수 있죠. 하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에요. 운 나쁘면 걸려서 얻어터지고 아주 말도 아니지. 그놈은 내키는 대로 살거든요.”

유은은 침묵했다. 그에게 더 신세 지기 싫어졌다.

그러고 보니 가방에 든 게 뭐였더라. 옷과 화장품이 다였다. 까짓것 나중에 다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사 준 가방은 가격이 좀 나가는 거라, 외면하기 어려웠다.

“……네가 가져올 필요 없어. 부탁은 취소야.”

“그럼요? 어쩌시려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는 코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어려울걸요. 성가시고.”

“…….”

“짜증 나는 놈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은 알겠지만, 그런 마음은 도움이 안 돼요. 해 뜨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이제 잠이나 자요.”

유은은 차를 마시려고 잔에 입술을 댔다. 그러나 차를 마시기는커녕 찻잔을 이로 악물었다.

여우 같은 남자의 말이 얄미웠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렵다니. 그래 놓고 결국엔 자기가 그 어려운 걸 다 해 주겠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소파에서 못 자겠으면 내 침대에서 자든가.”

게다가 그의 배려가 당황스러웠다. 모르는 남자의 집에 와서 자는 것도, 그 남자의 유일한 잠자리인 매트리스를 빌리게 되는 것도 전부 심란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배려가 아니라 다른 삿된 욕구를 품었을 수도 있었다.

그를 보는 유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 수작을.”

“멋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착한 사람이란 건 기억해 줬으면 좋겠네요.”

“……그럼 당신은 어디서 자?”

“여기서 자죠.”

그가 가리킨 곳은 소파였다.

유은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지친 몸을 눕히고 싶었다.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말이 나왔다.

“흠. 그럼.”

그러고는 바로 그의 어두운 침실로 향했다. 사실 침대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큰 매트리스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아.”

힘없이 털썩 누운 유은은 소파에 있는 소년을 의식해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눈을 감으려는데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르게 긴장된다.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던 그가 혹시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는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씻으러 가는 듯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에 유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샤워 소리가 거슬려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일교차가 큰 곳이라 그런지 밤이 좀 쌀쌀한 편이었는데, 덮을 만한 이불도 없으니 잠이 더 달아났다.

그렇게 덜덜 떨며 잠이 오길 기다렸다.

철컥.

얼마 후 소년이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에 유은은 다시 눈을 떴다. 경계심 때문인지 고개를 돌려 소년을 확인하듯 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소년은 유은 쪽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젖은 나신으로 나온 그는 샤워 가운부터 두르고 소파로 향했다.

잠깐 본 몸이었지만 선이 예뻤다. 등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 덕분에 더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아직 완전히 굵어지지 않은 골격, 그런데도 잔 근육이 박혀 있어 보기 좋았다.

말하는 버릇이 나빠서 그렇지 외모는 괜찮은 편이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자.’

자꾸 보다 보면 들킬 것 같다. 유은은 다시 벽 쪽을 보았다. 그러곤 잠을 청해 보았다.

쉽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움직이는 편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 아주 희미한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소리만으로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그려졌다.

그는 스킨로션을 바르지 않았다. 옷만 갈아입을 뿐.

머리도 말리지 않았다. 긴 머리를 말리려면 꽤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잠든 손님이 시끄러울까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고요해졌다.

긴장감이 유은을 덮쳤다. 그는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조용한 걸까.

설마 씻자마자 잠이 든 건가?

하지만 그가 소파에 눕는 기척은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성큼성큼 났다.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

어깨를 움츠리던 유은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뒤돌아 누워서 그가 뭘 하려고 다가오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몸에 뭔가가 내려앉았다.

그의 외투였다. 가볍고 넉넉해서 이불로 쓰기 괜찮았다.

간이 이불을 만들어서 덮어 준 그가 뒤돌아서서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

“이불 사는 걸 깜빡해서.”

“아…….”

유은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왠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까 했던 아픈 말들이 여전히 가슴에 맺힌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배려는 배려였다. 유은은 아까보다는 덜 추워진 느낌에 눈을 감았다.

점점 밤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