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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 *
추위는 갈수록 심해졌다. 날씨가 추운 게 아니라 감기라도 걸리려는 모양이었다.
갈수록 몸을 웅크리게 되고 잠을 설쳤다.
결국 자정에 완전히 깨어났다.
“아, 깼네.”
소년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유은의 몸 위에 또 다른 옷가지를 얹어 주려던 참이었다.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고 아주 꼼꼼히도 덮어 주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유은은 추위에 덜덜 떠는 턱을 겨우 움직여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내려 보며 대답했다.
“많이 떨길래. 여기, 난방 설비가 고장 난 지 오래고 고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뒀는데 아쉽네요. 어쨌든 해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이번엔 진짜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유은은 잠시 고민했다.
그때 창문에서 어떤 소리가 났다.
탁탁, 탁.
‘설마 비? 비는 거의 안 온다던 이곳에?’
비가 세찬 바람을 타고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였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축축한 공기와 빗방울이 흘러들어 왔다.
“어, 음.”
그게 신경 쓰인 소년은 창가로 가 창문을 닫아 주었다. 덕분에 빗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단지 창문이 닫힌 것만으로도 한결 더 아늑해진 기분.
유은은 다시 몸을 움츠렸다. 아까는 추워서였다면, 지금은 아늑한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소년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중얼거리며 그는 유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한 유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흐엣취!”
하필이면 그 순간 기침이 터졌다.
피식, 유은은 소년이 기침 소리에 웃는 것을 보았다.
소년이 이마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감기네요. 저런.”
걱정해 주는 투가 유은에겐 어쩐지 불편했다. 자기 전에 나누었던 그와의 불쾌한 대화를 떠올리면, 지금 이런 말은 좀 어울리지 않았다.
“젖은 몸으로 도망쳐서 그런 걸 거예요. 분명.”
“신경 끄고 그냥 자.”
“에이. 그럴 수 있나요. 나 같은 착한 사람이.”
“하.”
자꾸 착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니 나쁜 인간이 틀림없어.
유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열제가 어디 있더라…….”
소년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가 해열제랍시고 가져온 것은 그것과 아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참된 이슬이라 적힌 초록색의 병이었다.
“이거 소주인데?”
“네. 소주죠. 아쉽게도 고춧가루는 없네요. 이거라도 마셔요.”
머그잔에 소주를 담아 건네는 그를 보고 유은은 황당해했다.
“술 먹을 나이는 아니지 않나?”
“이거 술 아닌데. 약이잖아요. 몰라요? 한국식 감기약.”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 감기에 걸렸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마시고 자면 낫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이었다.
그걸 진짜인 것처럼 여기는 그는 어쩌면 한국말만 잘하고 한국을 잘 모르는 건지도 몰랐다.
“안 마셔요?”
“아, 이건 좀.”
“싫으면 그냥 버리…….”
“아니, 이리 줘요.”
술이라도 마시면 몸에 온기가 좀 더 돌고 잠도 잘 오지 않을까 싶어서 유은은 잔을 받아 들었다.
덜덜 떠는 입술로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다. 달고 뜨거운 기운이 목을 기분 좋게 데웠다. 술이 들어가니 갑자기 입안에 뭔가를 더 넣고 싶어졌다.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소파로 가려는 그를 잡았다.
“어, 저기.”
“……?”
“뭐 먹을 거 없어요?”
* * *
새벽 2시가 코앞이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유은은 온몸에 옷가지를 칭칭 둘러싼 채로 술을 홀짝였고, 소년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따금 대답만 했다.
“당신이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나한테 그래선 안 되지.”
“네.”
“너무 막말이었잖아.”
“네에.”
“솔직한 건 좋지만, 그것도 분위기에 맞춰야 하는 거고. 안 그래?”
“아아. 그렇죠.”
혼자만 마시기 무안한 유은이 술을 권해도 소년은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 결과, 주정은 유은의 몫이 되었고 그걸 들어 주는 건 소년의 일이 되었다.
“……그런데 참 염치없는 건 알겠는데, 가서 가방은 꼭 가져와 줘. 그거 우리 엄마가 나 스무 살 생일 때 사 준 거거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챙겨야…….”
술병은 바닥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유일한 안주인 시리얼은 그중에 말린 과일만 쏙 빼먹은 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유은은 취했는지 했던 말을 또 했다.
“내가 정말 아끼는 거니까…….”
“그래요. 챙겨 줄게요. 꼭.”
“으응.”
“이제 자요.”
소년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꽤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유은은 별말 없이 누웠다.
그의 말대로 자야 했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다. 자꾸 그를 관찰하듯 보게 되었다.
그는 침대 위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차분한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심술을 일으켰다.
“그런데 있잖아.”
“네.”
“이름이 뭐야?”
꼭 알아야 할 건 아니었다. 그래도 구해 준 사람인데, 알고 있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린이요. 린 문 레드.”
쉽게 대답을 들으니, 다음 질문도 쉬워졌다.
“몇 살이야?”
“적어도 당신한테 반말을 들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난 스물.”
“같군요.”
“그럼 반말해도 되네, 뭐. 그런데 어째…… 나한테 한 번도 미안하다고 안 하네.”
멍청이란 욕이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유은은 자신에게 이렇게 꽁한 성격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그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는 시리얼 봉투를 밀봉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태연히 대답했다.
“사과는.”
“응.”
“당신이 멍청이에서 벗어나면 그때 할게요.”
“이……!”
“어차피 취했잖아요. 지금 사과를 들어도 내일 기억이나 하겠어요?”
“그래도 해.”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지금.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또 빈정거린다.
나른하고 부드러운 말투지만, 내용이 얄미웠다.
그게 그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잊고 있었던 처지를 떠올린 유은은 그와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워 팔짱을 꼈다.
왠지 아까보다 더 춥고 서러웠다. 맨정신에 주르르 흘렀던 눈물이 취하니까 더 굵게 흘러나왔다.
유진 오빠에겐 뭐라고 하나?
엄마가 보고 싶어.
막막한 생각에 애처럼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흐아음.”
그가 또 하품하며 정리를 마무리했다.
하품은 전염성이 있어서, 유은도 울다가 하품했다.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웃었다. 울다가 웃고, 또 웃다가 울었다.
“하아, 참.”
그걸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던 린은 그녀에게 다시 티슈를 건넸다.
술을 마시기 전과 다르게, 유은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훌쩍이던 그녀는 그가 건네는 티슈를 받아 눈물을 말끔히 닦아 냈다.
그 모습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소파로 가지 않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 물었다.
“추워요?”
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어쩐다.”
중얼거린 린은 주방을 또 돌아다니다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끓인 물은 그대로 트라이탄 보틀에 담겼고, 그는 그것을 수건에 싸서 유은에게 건넸다.
“안고 자요.”
그것도 모자라 그는 유은의 이마를 잠시 확인하더니 수건에 찬물을 적셔 대 주었다.
그 모든 걸 마쳤을 즈음, 바깥에선 비가 그쳤다.
유은은 품 안에 안긴 따뜻한 보틀을 꼭 끌어안으며 그를 보고 웃었다.
실로 묘했다. 미운 감정이 있는 만큼 고마움도 있었다.
“너…… 착하네.”
“그럼요.”
유은은 소파에 가서 몸을 눕히는 그를 보고 웃었다.
눈물은 이미 다 마른 후였다.
* * *
유은은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툭.
눈앞에 물건이 내려놓였다. 생일 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방이었다.
“뭐예요, 이거?”
린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대답했다.
“뭐긴 뭐예요. 그쪽이 가져다 달라고 했잖아요.”
유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뺨엔 세게 맞은 자국이 있었고 입술도 터졌다. 가방을 가지러 갔다가 운 나쁘면 걸려서 얻어터질 수도 있다더니, 정말로 운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누가 그런 거예요?”
“누구겠어요?”
유은은 도무지 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남의 가방 좀 가져가겠다는데 동생을 패요?”
“딱히 가방을 가져가서 팬다기보다, 그냥 그놈 특유의 칭얼거림이죠.”
“못됐다. 아프진 않아요?”
“안 아플 수가 있겠어요?”
“어쨌든 고마워요.”
린은 가방을 꼭 끌어안는 유은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제와는 태도가 다른 그녀가 재미있었다.
“참 적응 안 되네. 어제는 말 놓더니 오늘은 왜 그래요?”
“고마우니까요.”
“그럼 어제는 안 고마웠어요?”
“어쨌든 그런 나쁜 형은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려요.”
“신고하면 내가 잡혀갈걸요.”
“네?”
린은 웃으며 또 하나의 가방을 침대 아래서 끌어와 올렸다. 그건 아주 평범한 백팩이었다.
린이 그 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기 전까지는.
백팩 속을 꽉 채운 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유은에게 그가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알렸다.
“이 착한 내가 당신 피해 보상금을 대신 좀 훔쳐 왔거든요.”
그 돈은 오디션 상금으로 걸린 돈보다는 적었지만, 큰 금액이었다. 그 또래의 사람들이 가지기엔 확실히.
* * *
추위는 갈수록 심해졌다. 날씨가 추운 게 아니라 감기라도 걸리려는 모양이었다.
갈수록 몸을 웅크리게 되고 잠을 설쳤다.
결국 자정에 완전히 깨어났다.
“아, 깼네.”
소년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유은의 몸 위에 또 다른 옷가지를 얹어 주려던 참이었다.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고 아주 꼼꼼히도 덮어 주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유은은 추위에 덜덜 떠는 턱을 겨우 움직여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내려 보며 대답했다.
“많이 떨길래. 여기, 난방 설비가 고장 난 지 오래고 고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뒀는데 아쉽네요. 어쨌든 해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이번엔 진짜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유은은 잠시 고민했다.
그때 창문에서 어떤 소리가 났다.
탁탁, 탁.
‘설마 비? 비는 거의 안 온다던 이곳에?’
비가 세찬 바람을 타고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였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축축한 공기와 빗방울이 흘러들어 왔다.
“어, 음.”
그게 신경 쓰인 소년은 창가로 가 창문을 닫아 주었다. 덕분에 빗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단지 창문이 닫힌 것만으로도 한결 더 아늑해진 기분.
유은은 다시 몸을 움츠렸다. 아까는 추워서였다면, 지금은 아늑한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소년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중얼거리며 그는 유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한 유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흐엣취!”
하필이면 그 순간 기침이 터졌다.
피식, 유은은 소년이 기침 소리에 웃는 것을 보았다.
소년이 이마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감기네요. 저런.”
걱정해 주는 투가 유은에겐 어쩐지 불편했다. 자기 전에 나누었던 그와의 불쾌한 대화를 떠올리면, 지금 이런 말은 좀 어울리지 않았다.
“젖은 몸으로 도망쳐서 그런 걸 거예요. 분명.”
“신경 끄고 그냥 자.”
“에이. 그럴 수 있나요. 나 같은 착한 사람이.”
“하.”
자꾸 착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니 나쁜 인간이 틀림없어.
유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열제가 어디 있더라…….”
소년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가 해열제랍시고 가져온 것은 그것과 아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참된 이슬이라 적힌 초록색의 병이었다.
“이거 소주인데?”
“네. 소주죠. 아쉽게도 고춧가루는 없네요. 이거라도 마셔요.”
머그잔에 소주를 담아 건네는 그를 보고 유은은 황당해했다.
“술 먹을 나이는 아니지 않나?”
“이거 술 아닌데. 약이잖아요. 몰라요? 한국식 감기약.”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 감기에 걸렸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마시고 자면 낫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이었다.
그걸 진짜인 것처럼 여기는 그는 어쩌면 한국말만 잘하고 한국을 잘 모르는 건지도 몰랐다.
“안 마셔요?”
“아, 이건 좀.”
“싫으면 그냥 버리…….”
“아니, 이리 줘요.”
술이라도 마시면 몸에 온기가 좀 더 돌고 잠도 잘 오지 않을까 싶어서 유은은 잔을 받아 들었다.
덜덜 떠는 입술로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다. 달고 뜨거운 기운이 목을 기분 좋게 데웠다. 술이 들어가니 갑자기 입안에 뭔가를 더 넣고 싶어졌다.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소파로 가려는 그를 잡았다.
“어, 저기.”
“……?”
“뭐 먹을 거 없어요?”
* * *
새벽 2시가 코앞이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유은은 온몸에 옷가지를 칭칭 둘러싼 채로 술을 홀짝였고, 소년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따금 대답만 했다.
“당신이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나한테 그래선 안 되지.”
“네.”
“너무 막말이었잖아.”
“네에.”
“솔직한 건 좋지만, 그것도 분위기에 맞춰야 하는 거고. 안 그래?”
“아아. 그렇죠.”
혼자만 마시기 무안한 유은이 술을 권해도 소년은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 결과, 주정은 유은의 몫이 되었고 그걸 들어 주는 건 소년의 일이 되었다.
“……그런데 참 염치없는 건 알겠는데, 가서 가방은 꼭 가져와 줘. 그거 우리 엄마가 나 스무 살 생일 때 사 준 거거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챙겨야…….”
술병은 바닥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유일한 안주인 시리얼은 그중에 말린 과일만 쏙 빼먹은 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유은은 취했는지 했던 말을 또 했다.
“내가 정말 아끼는 거니까…….”
“그래요. 챙겨 줄게요. 꼭.”
“으응.”
“이제 자요.”
소년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꽤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유은은 별말 없이 누웠다.
그의 말대로 자야 했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다. 자꾸 그를 관찰하듯 보게 되었다.
그는 침대 위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차분한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심술을 일으켰다.
“그런데 있잖아.”
“네.”
“이름이 뭐야?”
꼭 알아야 할 건 아니었다. 그래도 구해 준 사람인데, 알고 있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린이요. 린 문 레드.”
쉽게 대답을 들으니, 다음 질문도 쉬워졌다.
“몇 살이야?”
“적어도 당신한테 반말을 들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난 스물.”
“같군요.”
“그럼 반말해도 되네, 뭐. 그런데 어째…… 나한테 한 번도 미안하다고 안 하네.”
멍청이란 욕이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유은은 자신에게 이렇게 꽁한 성격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그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는 시리얼 봉투를 밀봉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태연히 대답했다.
“사과는.”
“응.”
“당신이 멍청이에서 벗어나면 그때 할게요.”
“이……!”
“어차피 취했잖아요. 지금 사과를 들어도 내일 기억이나 하겠어요?”
“그래도 해.”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지금.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또 빈정거린다.
나른하고 부드러운 말투지만, 내용이 얄미웠다.
그게 그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잊고 있었던 처지를 떠올린 유은은 그와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워 팔짱을 꼈다.
왠지 아까보다 더 춥고 서러웠다. 맨정신에 주르르 흘렀던 눈물이 취하니까 더 굵게 흘러나왔다.
유진 오빠에겐 뭐라고 하나?
엄마가 보고 싶어.
막막한 생각에 애처럼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흐아음.”
그가 또 하품하며 정리를 마무리했다.
하품은 전염성이 있어서, 유은도 울다가 하품했다.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웃었다. 울다가 웃고, 또 웃다가 울었다.
“하아, 참.”
그걸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던 린은 그녀에게 다시 티슈를 건넸다.
술을 마시기 전과 다르게, 유은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훌쩍이던 그녀는 그가 건네는 티슈를 받아 눈물을 말끔히 닦아 냈다.
그 모습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소파로 가지 않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 물었다.
“추워요?”
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어쩐다.”
중얼거린 린은 주방을 또 돌아다니다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끓인 물은 그대로 트라이탄 보틀에 담겼고, 그는 그것을 수건에 싸서 유은에게 건넸다.
“안고 자요.”
그것도 모자라 그는 유은의 이마를 잠시 확인하더니 수건에 찬물을 적셔 대 주었다.
그 모든 걸 마쳤을 즈음, 바깥에선 비가 그쳤다.
유은은 품 안에 안긴 따뜻한 보틀을 꼭 끌어안으며 그를 보고 웃었다.
실로 묘했다. 미운 감정이 있는 만큼 고마움도 있었다.
“너…… 착하네.”
“그럼요.”
유은은 소파에 가서 몸을 눕히는 그를 보고 웃었다.
눈물은 이미 다 마른 후였다.
* * *
유은은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툭.
눈앞에 물건이 내려놓였다. 생일 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방이었다.
“뭐예요, 이거?”
린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대답했다.
“뭐긴 뭐예요. 그쪽이 가져다 달라고 했잖아요.”
유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뺨엔 세게 맞은 자국이 있었고 입술도 터졌다. 가방을 가지러 갔다가 운 나쁘면 걸려서 얻어터질 수도 있다더니, 정말로 운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누가 그런 거예요?”
“누구겠어요?”
유은은 도무지 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남의 가방 좀 가져가겠다는데 동생을 패요?”
“딱히 가방을 가져가서 팬다기보다, 그냥 그놈 특유의 칭얼거림이죠.”
“못됐다. 아프진 않아요?”
“안 아플 수가 있겠어요?”
“어쨌든 고마워요.”
린은 가방을 꼭 끌어안는 유은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제와는 태도가 다른 그녀가 재미있었다.
“참 적응 안 되네. 어제는 말 놓더니 오늘은 왜 그래요?”
“고마우니까요.”
“그럼 어제는 안 고마웠어요?”
“어쨌든 그런 나쁜 형은 그냥 경찰에 신고해 버려요.”
“신고하면 내가 잡혀갈걸요.”
“네?”
린은 웃으며 또 하나의 가방을 침대 아래서 끌어와 올렸다. 그건 아주 평범한 백팩이었다.
린이 그 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기 전까지는.
백팩 속을 꽉 채운 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유은에게 그가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알렸다.
“이 착한 내가 당신 피해 보상금을 대신 좀 훔쳐 왔거든요.”
그 돈은 오디션 상금으로 걸린 돈보다는 적었지만, 큰 금액이었다. 그 또래의 사람들이 가지기엔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