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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 *
“어때요, 린? 맛있어요?”
“그냥 그래요.”
“너무한다. 하룻밤 신세 진 게 고마워서 처음으로 밥해 본 건데.”
“나도 처음으로 밥을 이렇게 먹어 봐서 솔직히 맛을 잘 모르겠어요.”
유은은 린에게 처음으로 전기 압력 밥솥으로 밥을 해 주었다. 반찬은 통조림 햄을 데운 것과 셀러리를 파프리카 가루에 무친 게 전부였다.
린은 솔직히 맛을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유은에게도 맛이 썩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처음으로 그럴듯하게 차린 밥상이었다.
“많이 먹어요. 린.”
“네에.”
“밥 계속 씹고 있으면 달거든요. 그때까지 씹어 봐요.”
“네에, 그럴게요.”
유은은 성실하게 밥을 씹는 그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러곤 데운 햄을 입에 가져갔다.
출출해서 입에 넣곤 있지만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았다.
지금, 어쩌다 보니 이 집에서 머물며 그와 식사까지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계속, 린과 함께였다.
‘입술 터진 거 치료해야죠. 가요, 밴드 사러.’
‘사람 사는 집에 왜 이불이 없어요? 사러 가요. 가는 김에 침대 커버도 사고. 커튼도 너무 얇아서 바꿔야겠던데.’
‘뭐? 한 번도 집에서 밥해 먹은 적 없다고요?’
그러다 보니 없는 전기밥솥도 사고, 그 밥솥이 잘되는가 보자며 이렇게 처음으로 밥도 차려 봤다. 밥을 담을 예쁜 그릇을 고른 것도 그녀였다.
린이 돈을 훔쳐 온 날 말한 게 있었다.
‘이 돈, 진짜 피해 보상금이니까 어떻게든 그쪽이 다 써요.’
그 돈을 결국 이 휑한 집을 채우는 일에 쓴 듯했다.
물론 그런데도 아직 돈은 많이 남아 있었다.
“라디에이터도 고치죠?”
“뭐 하러요. 여기선 의미 없어요.”
“여기 날씨 대부분 따뜻한 거 나도 알아요. 그래도 고쳐 두는 게 낫지 않나?”
“음…….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요, 그럼.”
유은은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두었다. 그러곤 욕실로 가서 양치질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이 집에서 할 것이 없었다.
유은은 양치질했던 칫솔의 물을 잘 닦아서 가지고 나왔다. 오늘 산 것이라 다음에도 쓸 생각으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문득 식탁에서 묵묵히 밥을 먹는 린에게 시선이 갔다.
희한한 남자였다.
구해 줄 땐 고마웠다가, 멍청이라고 할 땐 쥐어박고 싶게 얄미웠다.
얻어맞으면서까지 가방을 가져왔을 땐 솔직히 미안했고, 돈을 훔쳐 왔을 땐 솔직히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쇼핑하러 가잔 말에 묵묵히 운전사 역할을 해 주며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땐 참 순해 보였다.
그러다가 이따금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냐며 진짜 멍청이라 비꼴 때는 다시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밥알을 차분히 오랫동안 씹는 것을 보면 또 귀여웠다.
한국에서 너무 단조로운 생활을 했던 걸까?
그는 같은 또래지만, 한국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타입이었다.
외모도, 대화 방식도, 성격도.
어쨌거나 이제 여기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고마워요. 잘 있어요.”
인사한 유은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린이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어디 가요?”
유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하면 되는데 왠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현관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집에요.”
“집? 누구 집요?”
“누구긴요. 말했잖아요. 사촌 오빠 집이 이 근처라고.”
“…….”
“사실 진작 가야 했어요. 연락도 해야 했고. 아무튼 이래저래 혼나게 생겼거든요.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솔직히 좀 무섭네요.”
린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유은이 그를 보았다.
단단히 입을 다문 그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밥을 건드렸다.
계속 묵묵히 식사할 것처럼.
떠나는 사람을 보지 않을 것처럼.
이대로 떠나는 사람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은은 왠지 서운했다.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웃겨. 모르는 인간한테 뭘 사정을 일일이 말하고 있어, 너도.’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은은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한국 속담에…….”
유은의 걸음이 멈췄다.
린은 젓가락을 든 채로 밥알을 하나하나 건드리며 천천히,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있대요.”
“뭐가요?”
유은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매를 나중에 맞는 게 좋다는 속담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는 게 맞는 말 아닌가?
유은은 알고 있던 말이 낯설어질 정도로 혼란이 왔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린이 젓가락으로 돈이 든 가방을 가리켰다.
“저 돈 다 쓰고 가야 하지 않아요, 이왕이면?”
“그건 그냥…….”
“같이 써요. 나랑.”
“…….”
“오늘처럼요.”
“하지만…….”
“멍청이라고 한 건 사과할 테니까.”
“……!”
“내일도 나랑 놀아요.”
짧은 사과에 유은은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션에게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훔친 돈을 쓰며 놀았지만, 그런 이유를 빼고 생각해 보았다.
그와 놀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논단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놀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그래 왔잖아? 안 될 게 뭐야?
마음이 자꾸 그와 놀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방끈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는 손이 멈췄다.
결국, 유은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슴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두근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애써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며 덤덤히 말했다.
“흠. 그럼 그럴까요?”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느린 걸음이었지만, 눈빛만은 확실히 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탈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 * *
식사 후, 린이 그릇을 챙겨 들었다.
“설거지하고 있을 테니까 옷 편한 거로 갈아입어요.”
유은은 자신의 차림을 보았다. 티셔츠와 스커트가 몸에 딱 달라붙어 답답했다. 감기 기운으로 으슬으슬해서 입은 재킷도 좀 불편했다.
‘역시 집에선 이거지.’
가방에서 편안한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상의는 그가 주었던 커다란 셔츠로 다시 입었다. 아까보단 한결 편했지만, 감기 몸살 기운 때문인지 여전히 으슬으슬했다.
문득 침대에 시선이 갔다. 오늘 커버를 샀지만, 매트리스는 여전히 커버를 씌우지 않은 상태였다.
유은은 포장을 뜯어 새 커버를 매트리스 위에 씌웠다. 그리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좋네.”
침대를 탁탁 두드리다가 앞을 보니, 설거지하는 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손이 느린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릇을 헹구는 속도가 느렸다.
물 아까운데.
유은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릇.”
그 목소리에 그가 손을 멈췄다.
“너무 오래 헹구는 거 아니에요?”
“아.”
“물 아깝잖아요.”
“……그러네요.”
그제야 린은 그릇을 헹구는 시간을 줄였다. 어쩐지 설거지를 단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같았다.
설거지를 마친 그가 물을 끓였다.
궁금증에 유은이 물었다.
“물은 또 왜 끓여요?”
“왜겠어요?”
그가 되물으며 곁에 있던 트라이탄 보틀을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식은 물이 들어 있었다. 지난밤 추위에 떨었던 유은의 몸을 데워 준 고마운 것이다.
그는 이제는 쓸모를 다한 물을 싱크대에 버린 후, 빈 병을 다시 챙겼다.
서서히 유은은 그가 물을 끓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맙긴 했지만 괜스레 투덜거리는 말이 나왔다.
“그냥 난방 설비 손 좀 보면 되지 않아요?”
“글쎄요. 사실 여기서 자주 지내지 않는 편이라.”
그래서 이불도, 침대 커버도 없었던 건가? 자주 머무는 집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용도인지? 그리고 평소엔 주로 어디서 지내는지? 역시나 션이 있던 그 별장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은은 하품이 나왔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에 식곤증이 몰아쳤다.
“혹시 물 남으면요.”
“네.”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원두가 없는데.”
“그럼 차라도…….”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유은은 상큼하고 향긋한 향기에 기분 좋게 눈을 떴고, 재채기가 나왔다.
“히취!”
일어나려 하는데, 품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보틀이었다. 그리고 몸 위엔 새로 산 이불이 새것 특유의 냄새를 내며 덮여 있었다.
그의 배려에 미소가 그려지던 그 순간…….
“……!”
유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 * *
“어때요, 린? 맛있어요?”
“그냥 그래요.”
“너무한다. 하룻밤 신세 진 게 고마워서 처음으로 밥해 본 건데.”
“나도 처음으로 밥을 이렇게 먹어 봐서 솔직히 맛을 잘 모르겠어요.”
유은은 린에게 처음으로 전기 압력 밥솥으로 밥을 해 주었다. 반찬은 통조림 햄을 데운 것과 셀러리를 파프리카 가루에 무친 게 전부였다.
린은 솔직히 맛을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유은에게도 맛이 썩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처음으로 그럴듯하게 차린 밥상이었다.
“많이 먹어요. 린.”
“네에.”
“밥 계속 씹고 있으면 달거든요. 그때까지 씹어 봐요.”
“네에, 그럴게요.”
유은은 성실하게 밥을 씹는 그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러곤 데운 햄을 입에 가져갔다.
출출해서 입에 넣곤 있지만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았다.
지금, 어쩌다 보니 이 집에서 머물며 그와 식사까지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계속, 린과 함께였다.
‘입술 터진 거 치료해야죠. 가요, 밴드 사러.’
‘사람 사는 집에 왜 이불이 없어요? 사러 가요. 가는 김에 침대 커버도 사고. 커튼도 너무 얇아서 바꿔야겠던데.’
‘뭐? 한 번도 집에서 밥해 먹은 적 없다고요?’
그러다 보니 없는 전기밥솥도 사고, 그 밥솥이 잘되는가 보자며 이렇게 처음으로 밥도 차려 봤다. 밥을 담을 예쁜 그릇을 고른 것도 그녀였다.
린이 돈을 훔쳐 온 날 말한 게 있었다.
‘이 돈, 진짜 피해 보상금이니까 어떻게든 그쪽이 다 써요.’
그 돈을 결국 이 휑한 집을 채우는 일에 쓴 듯했다.
물론 그런데도 아직 돈은 많이 남아 있었다.
“라디에이터도 고치죠?”
“뭐 하러요. 여기선 의미 없어요.”
“여기 날씨 대부분 따뜻한 거 나도 알아요. 그래도 고쳐 두는 게 낫지 않나?”
“음…….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요, 그럼.”
유은은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두었다. 그러곤 욕실로 가서 양치질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이 집에서 할 것이 없었다.
유은은 양치질했던 칫솔의 물을 잘 닦아서 가지고 나왔다. 오늘 산 것이라 다음에도 쓸 생각으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문득 식탁에서 묵묵히 밥을 먹는 린에게 시선이 갔다.
희한한 남자였다.
구해 줄 땐 고마웠다가, 멍청이라고 할 땐 쥐어박고 싶게 얄미웠다.
얻어맞으면서까지 가방을 가져왔을 땐 솔직히 미안했고, 돈을 훔쳐 왔을 땐 솔직히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쇼핑하러 가잔 말에 묵묵히 운전사 역할을 해 주며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땐 참 순해 보였다.
그러다가 이따금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냐며 진짜 멍청이라 비꼴 때는 다시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밥알을 차분히 오랫동안 씹는 것을 보면 또 귀여웠다.
한국에서 너무 단조로운 생활을 했던 걸까?
그는 같은 또래지만, 한국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타입이었다.
외모도, 대화 방식도, 성격도.
어쨌거나 이제 여기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고마워요. 잘 있어요.”
인사한 유은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린이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어디 가요?”
유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하면 되는데 왠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현관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집에요.”
“집? 누구 집요?”
“누구긴요. 말했잖아요. 사촌 오빠 집이 이 근처라고.”
“…….”
“사실 진작 가야 했어요. 연락도 해야 했고. 아무튼 이래저래 혼나게 생겼거든요.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솔직히 좀 무섭네요.”
린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유은이 그를 보았다.
단단히 입을 다문 그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밥을 건드렸다.
계속 묵묵히 식사할 것처럼.
떠나는 사람을 보지 않을 것처럼.
이대로 떠나는 사람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은은 왠지 서운했다.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웃겨. 모르는 인간한테 뭘 사정을 일일이 말하고 있어, 너도.’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은은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한국 속담에…….”
유은의 걸음이 멈췄다.
린은 젓가락을 든 채로 밥알을 하나하나 건드리며 천천히,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있대요.”
“뭐가요?”
유은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매를 나중에 맞는 게 좋다는 속담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는 게 맞는 말 아닌가?
유은은 알고 있던 말이 낯설어질 정도로 혼란이 왔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린이 젓가락으로 돈이 든 가방을 가리켰다.
“저 돈 다 쓰고 가야 하지 않아요, 이왕이면?”
“그건 그냥…….”
“같이 써요. 나랑.”
“…….”
“오늘처럼요.”
“하지만…….”
“멍청이라고 한 건 사과할 테니까.”
“……!”
“내일도 나랑 놀아요.”
짧은 사과에 유은은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션에게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훔친 돈을 쓰며 놀았지만, 그런 이유를 빼고 생각해 보았다.
그와 놀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논단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놀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그래 왔잖아? 안 될 게 뭐야?
마음이 자꾸 그와 놀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방끈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는 손이 멈췄다.
결국, 유은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슴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두근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애써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며 덤덤히 말했다.
“흠. 그럼 그럴까요?”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느린 걸음이었지만, 눈빛만은 확실히 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탈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 * *
식사 후, 린이 그릇을 챙겨 들었다.
“설거지하고 있을 테니까 옷 편한 거로 갈아입어요.”
유은은 자신의 차림을 보았다. 티셔츠와 스커트가 몸에 딱 달라붙어 답답했다. 감기 기운으로 으슬으슬해서 입은 재킷도 좀 불편했다.
‘역시 집에선 이거지.’
가방에서 편안한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상의는 그가 주었던 커다란 셔츠로 다시 입었다. 아까보단 한결 편했지만, 감기 몸살 기운 때문인지 여전히 으슬으슬했다.
문득 침대에 시선이 갔다. 오늘 커버를 샀지만, 매트리스는 여전히 커버를 씌우지 않은 상태였다.
유은은 포장을 뜯어 새 커버를 매트리스 위에 씌웠다. 그리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좋네.”
침대를 탁탁 두드리다가 앞을 보니, 설거지하는 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손이 느린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릇을 헹구는 속도가 느렸다.
물 아까운데.
유은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릇.”
그 목소리에 그가 손을 멈췄다.
“너무 오래 헹구는 거 아니에요?”
“아.”
“물 아깝잖아요.”
“……그러네요.”
그제야 린은 그릇을 헹구는 시간을 줄였다. 어쩐지 설거지를 단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같았다.
설거지를 마친 그가 물을 끓였다.
궁금증에 유은이 물었다.
“물은 또 왜 끓여요?”
“왜겠어요?”
그가 되물으며 곁에 있던 트라이탄 보틀을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식은 물이 들어 있었다. 지난밤 추위에 떨었던 유은의 몸을 데워 준 고마운 것이다.
그는 이제는 쓸모를 다한 물을 싱크대에 버린 후, 빈 병을 다시 챙겼다.
서서히 유은은 그가 물을 끓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맙긴 했지만 괜스레 투덜거리는 말이 나왔다.
“그냥 난방 설비 손 좀 보면 되지 않아요?”
“글쎄요. 사실 여기서 자주 지내지 않는 편이라.”
그래서 이불도, 침대 커버도 없었던 건가? 자주 머무는 집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용도인지? 그리고 평소엔 주로 어디서 지내는지? 역시나 션이 있던 그 별장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은은 하품이 나왔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에 식곤증이 몰아쳤다.
“혹시 물 남으면요.”
“네.”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원두가 없는데.”
“그럼 차라도…….”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유은은 상큼하고 향긋한 향기에 기분 좋게 눈을 떴고, 재채기가 나왔다.
“히취!”
일어나려 하는데, 품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보틀이었다. 그리고 몸 위엔 새로 산 이불이 새것 특유의 냄새를 내며 덮여 있었다.
그의 배려에 미소가 그려지던 그 순간…….
“……!”
유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