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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 1권
1화
1.
양영의 북쪽 변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유목민들이 국가를 재건했다며 국호를 붙여 주길 청한 것은 칠십 년 전 일이었다. 당시 양영의 군주였던 효천 황제는 글도 없는 나라에서 사신을 보낸 것이 우습고 기특하다며 ‘척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봄에만 잠깐 싹이 나는 쇳빛 땅에서 지독히 오래 살아남은 척국 민족은 모두 다른 피, 다른 얼굴을 갖고 다른 언어를 썼다.
칠십 년간 척국의 초대 황제와 두 번째 황제는 양영의 수도에도 못 미치는 인구의 백성들을 죽지 않게 먹이고, 서로 말을 알아듣게 하고, 간혹 그 나라에 귀의하기를 원하는 타민족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다 생을 마감했다. 십여 년 전, 지금 황제인 죽연이 즉위하고 나서야 타국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지리상으로 척국의 바로 밑을 차지하고 있는 양영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없는 터라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수도가 척국의 국토보다 큰 양영은 거대한 땅 위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음에도 제 나라의 것을 타국에 넘기는 데 지독히 배타적이었다. 대륙의 열네 개 속국 중 양영 다음으로 땅이 큰 효방도 언제나 양영의 눈치를 보고 있는 판국에 북방으로 떠밀려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척국이 양영 땅을 지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척국 신하들의 소극적인 사고방식 역시 문제였는데, 척국의 조례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굳이’였기 때문이다.
‘굳이 이 추운 겨울에 한 가정의 장정들을 모두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쌀을 먹어야 합니까? 보리가 더 잘 나는데요.’
‘굳이 비단옷을 입어야 할까요? 지금 있는 옷도 충분히 따뜻한데.’
대화가 이렇게 끝난 것이 무려 십 년이다. 맑은 물 한 잔이 돌산에서 나는 보석보다 귀한 나라였기 때문에 가진 것에 만족할 뿐, ‘더 편리하고 좋은 것’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국경을 코앞에 둔 양영 땅이 눈부시게 발전을 이루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넘어갈 생각을 ‘굳이’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이처럼 주워진 것에만 만족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열여덟 살이 된 척국의 공주 호연은, 조금 생각이 달랐나 보다. 봄꽃이 필 무렵 양영의 황태자가 태자비를 간택한다는 매우 형식적인 문서가 척국에 도착했을 때 평상시 조례에 잘 나오지 않던 호연이 간결한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의복을 입고 참석했다.
“태자비 간택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해가 바로, 신하 수가 사십 명밖에 안 되던 척국에 외부대신이 열두 명이나 생긴 유일한 때였다.
***
양영의 태자가 태자비 간택에 타국의 여인들도 참여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를 막기 위해 자국의 대신들이 내놓은 자녀의 수만 팔십 명이 넘었으니 그들의 반발과 경악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비 간택에 관한 문서가 기어이 국경을 넘어간 이유는 이번 대의 태자인 주태원의 고집이 황소보다 질기기 때문이었다.
늘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주태원은 똑똑하나 방탕하고, 어릴 적부터 보약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약골이었으나 승부욕과 집착만은 강해 사냥을 나가면 편법을 써서라도 승리를 갈취하는 사나운 면모가 있는 이였다. 그런 이가 태자비 간택의 규칙을 정하고 승인을 받을 때까지 3년간 했던 짓을 나열하자면 말 그대로 끝이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조르기도 하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하루에도 기분이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거려 연적과 벼루가 바닥으로, 신하들의 머리로, 심지어는 제 분을 못 이긴 황자 자신의 몸으로까지 향했다. 원하는 여인이 아니면 취하지도 않겠다며 혀를 깨물 기세로 버티는 황자의 모습에 결국 황제는 수백 년간 지켜 오던 혈통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아비와는 척을 졌고 모후인 황후마저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건만 오직 궁에서 주태원 홀로 매일매일 봄바람이었다.
간택의 절차가 이보다 파격으로 변할 수 있나 싶을 만큼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대신들 역시 사방팔방 할 일투성이인 봄을 보내야 했다. 제일 일이 많은 곳은 국경이었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열네 개국의 사절단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신분을 일일이 대조하여 맞는 이가 아니면 들이지 말란 황명에 누구 하나 제대로 잠을 자는 인물이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양영 국경의 열두 개의 문에서 일제히 사람을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
궁인이며 병사들이 전부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내달 보름 전엔 일이 끝나지 않을까?
그런 허튼 기대를 갖고 있던 이들은 제일 처음 동문을 넘은 효방이 고관대신들의 마중이 아니면 마차에서 한 발짝도 내리지 않겠다며 콧대를 세운 후부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륙에서 양영 다음으로 큰 국가여서인지, 교역이나 국경의 문제가 아닌 간택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것임에도 서릿발을 날리는 게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은 예부대신까지 나선 다음에야 끝을 맺어, 꼬박 사흘간 열아홉 대의 마차를 멈춰 있게 한 여인이 양영 땅에 발을 디딜 때쯤엔 십수 명이 넘는 신하들이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진풍경이 탄생했다.
소식을 들은 황후는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정작 이 일의 주범이나 다름없는 주태원은 여인 성품이 대쪽 같은 게 마음에 든다며 실없이 웃어 댔다. 말을 전하는 내관은 효방의 여인이 박색이었어도 저런 답을 하셨을까, 속으로 발칙한 생각을 했다. 그리 까탈을 부리며 들어온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옹주의 미색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양영의 여인에게 질리신 나머지 간택이란 핑계로 타국의 공물을 받고 계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한 마당이었다. 태자비 하나와 후궁 여섯. 고작 그에 만족하실 분이 아니니 이번만큼은 수십의 여인이 뽑혀 황궁에 남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며, 기루마다 농을 지껄이기 일쑤였다. 양영은 주태원의 부왕이신 현 황제 때 가장 많은 무역로를 개척했고, 열네 개 속국이 일제히 덤빈다 하여도 막아 낼 만한 군병을 갖췄다. 쏟아지는 재물을 쓸 일이 없어 간택에 공을 들인다는 소문 역시 불같은 마당에, 정말로 미색만 보고 비를 뽑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무럭무럭 치솟는 것은 마차를 타고 경쟁적으로 달려오는 여인이나, 걱정 어린 시선으로 태자를 주목하는 양영의 사람들이나 매한가지였다.
“이것이 마지막인가?”
조정에서 할 일을 죄다 뺏기고 서북문에 주저앉아 있는 문우대신 이정우 역시, 그 기대의 희생양이 된 가엾은 문관 중 하나였다. 눈 밑이 시커매진 채 단내가 나는 입을 열어 말하자 앞서 문을 살피고 온 병졸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직 안 온 나라가 있습니다.”
그 말에 이정우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침침하게 변했다. 열 명의 문우대신이 북문과 남문을 제외한 모든 곳에 배치된 지 벌써 팔 일째였다. 명단을 죽 훑어보니 아직 오지 않은 나라는 척국 하나. 오는 이가 있다면 기한 같은 것은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받으라는 태자의 명에 따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이다만, 이건 상대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질 않다. 효천 황제께서 나라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이유로 대신들만 알고 있다 뿐이지 도성에 살고 있는 어지간한 세도가조차 어디 박혀 있는지 모르는 나라 아닌가. 태자가 서고의 지도와 문서까지 뒤져 가며 하나하나 명단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나라인데, 그놈의 황소고집이 기어이 이 사달을 만든다.
“그만 문을 닫읍세.”
반나절이 넘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서북문을 지키고 있자니 자꾸만 아내가 보고 싶고 울화도 치밀고 그러느라 밥도 못 먹은 이정우는 문을 닫을 시각이 반 각 남은 때가 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암만 개나 소나 다 들어오는 간택연이라도 척국까지는 아닐 테니. 간택은 고사하고 그 나라에 글을 읽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뭘.”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자야겠다며 등을 돌린 이정우의 귓가에 ‘두두두두’ 하는 땅울림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문을 쳐다보자 가늘어진 문 틈새로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곧, 막 닫히려는 문 사이로 기다란 창이 쑥 들어왔다.
“히이익!”
코끝에서 멈춘 칼날에 거품을 무는 상관을 보며 모두 얼른 문을 열어젖혔다. 당연히 마차일 것이라 생각한 울림은 믿어지지 않게도 가마였다. 바꿔 말해, 지척의 나무까지 흔들어 대던 발걸음은 말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었단 소리다.
“늦었습니까?”
체통도 잊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정우의 앞에 문이 열린 가마가 보이고 그 안에서 긴 창을 들고 있는 여인도 보였다. 창을 든 여인의 무표정한 기세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마, 맙소사.”
가마가 땅에 닫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리는 몸이 가볍다. 새카만 머리 역시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것이 아니라 높게 묶어 둘둘 말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양영에서는 시비들도 입지 않는 무명천을 걸친 채 화장수 냄새 대신 풀잎과 흙냄새를 풍기는 여인. 귀걸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찢긴 것까지 본 이정우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척국의 사신단입니까?”
여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품을 뒤적이더니 양영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들이밀면서. 마차를 열아홉 대씩 끌고 온 효방도 있는데 이들은 가마 하나에 다 합해야 고작 다섯이 왔다.
“세상에, 여기서 도성까지도 한참인데 그 안에 흉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어울리지도 않게 오지랖을 떨어 보던 이정우는 땅에 박힌 나무처럼 서 있는 척국의 사내들을 보고 그 말이 쑥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척국 사내 하나에 양영의 비실한 사내 셋을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튼실함이 엿보인 탓이다.
“흠흠, 그나저나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아무리 태자께서 간택 후보가 국경 문을 통과하는 것에 기한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이러면 관리들이 많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행여 문을 일찍 닫은 죄를 물을까 지레 눈치를 보는 그에게 여인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북문 앞에서 사흘간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지 않기에 이쪽으로 왔소.”
“……사흘이요?”
“그렇소. 사흘.”
“…….”
사흘. 사흘이라. 그러니까 사흘간 기다렸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아 저리 말처럼 달려 이곳으로 왔다, 이 말이지?
동토(凍土)로 향한 북문에는 사람이 오지 않을 것이라며 자기들 멋대로 인사를 이동한 죄까지 묻게 생겼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하다. 간택 후보를 받기 시작한 지가 오늘로 팔 일째가 아니던가. 그럼 북문에서 서북문까지, 그것도 저 조막만 한 가마 하나 들고 닷새 만에 왔다는 건데.
“……혹 제가 도울 것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명제가 사실이라면, 눈앞에 흉흉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서 있는 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을 쳐 죽인다 해도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세상을 뜰 판이었다.
“도울 것이라.”
찬찬히 무언가 살피는 여인의 눈은 양영에서 보기 힘든 짙은 색이었다. 행색이 초라하긴 하나 그래도 황족임이 분명한 여인.
“나는 호연이라 합니다.”
그런 여인이 저렇게나 똑바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곱아드는 손을 펴고 있던 이정우의 귓가로 다시금 말소리가 울렸다.
“네?”
“내 이름은 단호연이라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표정이 끔벅끔벅, 개구리처럼 변했다. 호연. 그래, 이 사내 못지않게 건장한 여인 이름이 호연이구나.
“…….”
한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이지?
“그대는 이름이 뭡니까?”
살다 살다 황족이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자못 신기하다 못해 조금은 신비하기까지 한 광경에 머리를 맹렬히 굴리고 있자니 다음과 같은 물음이 돌아왔다. 그때가 돼서야 이정우의 안색도 푸르러졌다. 이런. 정체를 들켰다간 나중에 죄를 물어 문초를 당해도 어찌할 바가 없는데.
“……저는 양영의 문우대신 이정우라고 합니다.”
분명 그런 고민을 했는데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순순하다. 왠지 이 여인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문우대신 이정우.”
눈치로 이 자리까지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정우가, 자신의 이름을 입 안에서 읊조리는 여인의 마른 입술을 쳐다봤다. 들었으니 잊지 않아야 한다 생각했는지, 한참을 곱씹다 이내 미련 없이 가마로 걸어 들어가는 발.
“창을 겨눠 미안했소. 다시 척국으로 돌아갈 땐 꼭 늦지 않게 오리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두두두두 뛰어 사라지는 가마의 뒷모습이 이내 점처럼 사라졌다. 혀를 차던 이정우는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입 안으로 이름을 훑었다.
“호연이라 했지.”
저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게 먼저 이름을 말하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는 공주라니. 양영에서 간택을 자행하는 황자의 성미를 생각하면 실상 칠간택의 처음도 통과하지 못한 채 사라질 이름이 분명한데…….
“……호연.”
한데도 이정우는 어쩐지, 이 이름이 꽤나 오랫동안 양영 땅에서 울릴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
요즘 양영에서 가장 살판나고 행복한 이를 꼽으라면 바로 태자인 주태원이었다. 3년을 벼르고 벼르다 황실의 모든 이를 꺾은 뒤 간택연을 열고, 그 흥을 이기지 못해 날이면 날마다 사냥을 나서는 황자께선, 늘 밑에 있는 군병을 부려 원하는 짐승만 잡는 손쉬운 사냥법으로 서북문 일대에 유명세를 떨치고 계셨다.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맘에 든다.”
1화
1.
양영의 북쪽 변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유목민들이 국가를 재건했다며 국호를 붙여 주길 청한 것은 칠십 년 전 일이었다. 당시 양영의 군주였던 효천 황제는 글도 없는 나라에서 사신을 보낸 것이 우습고 기특하다며 ‘척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봄에만 잠깐 싹이 나는 쇳빛 땅에서 지독히 오래 살아남은 척국 민족은 모두 다른 피, 다른 얼굴을 갖고 다른 언어를 썼다.
칠십 년간 척국의 초대 황제와 두 번째 황제는 양영의 수도에도 못 미치는 인구의 백성들을 죽지 않게 먹이고, 서로 말을 알아듣게 하고, 간혹 그 나라에 귀의하기를 원하는 타민족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다 생을 마감했다. 십여 년 전, 지금 황제인 죽연이 즉위하고 나서야 타국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지리상으로 척국의 바로 밑을 차지하고 있는 양영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없는 터라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수도가 척국의 국토보다 큰 양영은 거대한 땅 위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음에도 제 나라의 것을 타국에 넘기는 데 지독히 배타적이었다. 대륙의 열네 개 속국 중 양영 다음으로 땅이 큰 효방도 언제나 양영의 눈치를 보고 있는 판국에 북방으로 떠밀려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척국이 양영 땅을 지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척국 신하들의 소극적인 사고방식 역시 문제였는데, 척국의 조례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굳이’였기 때문이다.
‘굳이 이 추운 겨울에 한 가정의 장정들을 모두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쌀을 먹어야 합니까? 보리가 더 잘 나는데요.’
‘굳이 비단옷을 입어야 할까요? 지금 있는 옷도 충분히 따뜻한데.’
대화가 이렇게 끝난 것이 무려 십 년이다. 맑은 물 한 잔이 돌산에서 나는 보석보다 귀한 나라였기 때문에 가진 것에 만족할 뿐, ‘더 편리하고 좋은 것’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국경을 코앞에 둔 양영 땅이 눈부시게 발전을 이루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넘어갈 생각을 ‘굳이’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이처럼 주워진 것에만 만족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열여덟 살이 된 척국의 공주 호연은, 조금 생각이 달랐나 보다. 봄꽃이 필 무렵 양영의 황태자가 태자비를 간택한다는 매우 형식적인 문서가 척국에 도착했을 때 평상시 조례에 잘 나오지 않던 호연이 간결한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의복을 입고 참석했다.
“태자비 간택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해가 바로, 신하 수가 사십 명밖에 안 되던 척국에 외부대신이 열두 명이나 생긴 유일한 때였다.
***
양영의 태자가 태자비 간택에 타국의 여인들도 참여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를 막기 위해 자국의 대신들이 내놓은 자녀의 수만 팔십 명이 넘었으니 그들의 반발과 경악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비 간택에 관한 문서가 기어이 국경을 넘어간 이유는 이번 대의 태자인 주태원의 고집이 황소보다 질기기 때문이었다.
늘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주태원은 똑똑하나 방탕하고, 어릴 적부터 보약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약골이었으나 승부욕과 집착만은 강해 사냥을 나가면 편법을 써서라도 승리를 갈취하는 사나운 면모가 있는 이였다. 그런 이가 태자비 간택의 규칙을 정하고 승인을 받을 때까지 3년간 했던 짓을 나열하자면 말 그대로 끝이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조르기도 하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하루에도 기분이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거려 연적과 벼루가 바닥으로, 신하들의 머리로, 심지어는 제 분을 못 이긴 황자 자신의 몸으로까지 향했다. 원하는 여인이 아니면 취하지도 않겠다며 혀를 깨물 기세로 버티는 황자의 모습에 결국 황제는 수백 년간 지켜 오던 혈통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아비와는 척을 졌고 모후인 황후마저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건만 오직 궁에서 주태원 홀로 매일매일 봄바람이었다.
간택의 절차가 이보다 파격으로 변할 수 있나 싶을 만큼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대신들 역시 사방팔방 할 일투성이인 봄을 보내야 했다. 제일 일이 많은 곳은 국경이었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열네 개국의 사절단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신분을 일일이 대조하여 맞는 이가 아니면 들이지 말란 황명에 누구 하나 제대로 잠을 자는 인물이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양영 국경의 열두 개의 문에서 일제히 사람을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
궁인이며 병사들이 전부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내달 보름 전엔 일이 끝나지 않을까?
그런 허튼 기대를 갖고 있던 이들은 제일 처음 동문을 넘은 효방이 고관대신들의 마중이 아니면 마차에서 한 발짝도 내리지 않겠다며 콧대를 세운 후부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륙에서 양영 다음으로 큰 국가여서인지, 교역이나 국경의 문제가 아닌 간택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것임에도 서릿발을 날리는 게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은 예부대신까지 나선 다음에야 끝을 맺어, 꼬박 사흘간 열아홉 대의 마차를 멈춰 있게 한 여인이 양영 땅에 발을 디딜 때쯤엔 십수 명이 넘는 신하들이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진풍경이 탄생했다.
소식을 들은 황후는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정작 이 일의 주범이나 다름없는 주태원은 여인 성품이 대쪽 같은 게 마음에 든다며 실없이 웃어 댔다. 말을 전하는 내관은 효방의 여인이 박색이었어도 저런 답을 하셨을까, 속으로 발칙한 생각을 했다. 그리 까탈을 부리며 들어온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옹주의 미색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양영의 여인에게 질리신 나머지 간택이란 핑계로 타국의 공물을 받고 계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한 마당이었다. 태자비 하나와 후궁 여섯. 고작 그에 만족하실 분이 아니니 이번만큼은 수십의 여인이 뽑혀 황궁에 남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며, 기루마다 농을 지껄이기 일쑤였다. 양영은 주태원의 부왕이신 현 황제 때 가장 많은 무역로를 개척했고, 열네 개 속국이 일제히 덤빈다 하여도 막아 낼 만한 군병을 갖췄다. 쏟아지는 재물을 쓸 일이 없어 간택에 공을 들인다는 소문 역시 불같은 마당에, 정말로 미색만 보고 비를 뽑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무럭무럭 치솟는 것은 마차를 타고 경쟁적으로 달려오는 여인이나, 걱정 어린 시선으로 태자를 주목하는 양영의 사람들이나 매한가지였다.
“이것이 마지막인가?”
조정에서 할 일을 죄다 뺏기고 서북문에 주저앉아 있는 문우대신 이정우 역시, 그 기대의 희생양이 된 가엾은 문관 중 하나였다. 눈 밑이 시커매진 채 단내가 나는 입을 열어 말하자 앞서 문을 살피고 온 병졸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직 안 온 나라가 있습니다.”
그 말에 이정우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침침하게 변했다. 열 명의 문우대신이 북문과 남문을 제외한 모든 곳에 배치된 지 벌써 팔 일째였다. 명단을 죽 훑어보니 아직 오지 않은 나라는 척국 하나. 오는 이가 있다면 기한 같은 것은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받으라는 태자의 명에 따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이다만, 이건 상대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질 않다. 효천 황제께서 나라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이유로 대신들만 알고 있다 뿐이지 도성에 살고 있는 어지간한 세도가조차 어디 박혀 있는지 모르는 나라 아닌가. 태자가 서고의 지도와 문서까지 뒤져 가며 하나하나 명단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나라인데, 그놈의 황소고집이 기어이 이 사달을 만든다.
“그만 문을 닫읍세.”
반나절이 넘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서북문을 지키고 있자니 자꾸만 아내가 보고 싶고 울화도 치밀고 그러느라 밥도 못 먹은 이정우는 문을 닫을 시각이 반 각 남은 때가 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암만 개나 소나 다 들어오는 간택연이라도 척국까지는 아닐 테니. 간택은 고사하고 그 나라에 글을 읽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뭘.”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자야겠다며 등을 돌린 이정우의 귓가에 ‘두두두두’ 하는 땅울림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문을 쳐다보자 가늘어진 문 틈새로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곧, 막 닫히려는 문 사이로 기다란 창이 쑥 들어왔다.
“히이익!”
코끝에서 멈춘 칼날에 거품을 무는 상관을 보며 모두 얼른 문을 열어젖혔다. 당연히 마차일 것이라 생각한 울림은 믿어지지 않게도 가마였다. 바꿔 말해, 지척의 나무까지 흔들어 대던 발걸음은 말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었단 소리다.
“늦었습니까?”
체통도 잊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정우의 앞에 문이 열린 가마가 보이고 그 안에서 긴 창을 들고 있는 여인도 보였다. 창을 든 여인의 무표정한 기세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마, 맙소사.”
가마가 땅에 닫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리는 몸이 가볍다. 새카만 머리 역시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것이 아니라 높게 묶어 둘둘 말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양영에서는 시비들도 입지 않는 무명천을 걸친 채 화장수 냄새 대신 풀잎과 흙냄새를 풍기는 여인. 귀걸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찢긴 것까지 본 이정우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척국의 사신단입니까?”
여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품을 뒤적이더니 양영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들이밀면서. 마차를 열아홉 대씩 끌고 온 효방도 있는데 이들은 가마 하나에 다 합해야 고작 다섯이 왔다.
“세상에, 여기서 도성까지도 한참인데 그 안에 흉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어울리지도 않게 오지랖을 떨어 보던 이정우는 땅에 박힌 나무처럼 서 있는 척국의 사내들을 보고 그 말이 쑥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척국 사내 하나에 양영의 비실한 사내 셋을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튼실함이 엿보인 탓이다.
“흠흠, 그나저나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아무리 태자께서 간택 후보가 국경 문을 통과하는 것에 기한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이러면 관리들이 많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행여 문을 일찍 닫은 죄를 물을까 지레 눈치를 보는 그에게 여인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북문 앞에서 사흘간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지 않기에 이쪽으로 왔소.”
“……사흘이요?”
“그렇소. 사흘.”
“…….”
사흘. 사흘이라. 그러니까 사흘간 기다렸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아 저리 말처럼 달려 이곳으로 왔다, 이 말이지?
동토(凍土)로 향한 북문에는 사람이 오지 않을 것이라며 자기들 멋대로 인사를 이동한 죄까지 묻게 생겼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하다. 간택 후보를 받기 시작한 지가 오늘로 팔 일째가 아니던가. 그럼 북문에서 서북문까지, 그것도 저 조막만 한 가마 하나 들고 닷새 만에 왔다는 건데.
“……혹 제가 도울 것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명제가 사실이라면, 눈앞에 흉흉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서 있는 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을 쳐 죽인다 해도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세상을 뜰 판이었다.
“도울 것이라.”
찬찬히 무언가 살피는 여인의 눈은 양영에서 보기 힘든 짙은 색이었다. 행색이 초라하긴 하나 그래도 황족임이 분명한 여인.
“나는 호연이라 합니다.”
그런 여인이 저렇게나 똑바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곱아드는 손을 펴고 있던 이정우의 귓가로 다시금 말소리가 울렸다.
“네?”
“내 이름은 단호연이라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표정이 끔벅끔벅, 개구리처럼 변했다. 호연. 그래, 이 사내 못지않게 건장한 여인 이름이 호연이구나.
“…….”
한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이지?
“그대는 이름이 뭡니까?”
살다 살다 황족이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자못 신기하다 못해 조금은 신비하기까지 한 광경에 머리를 맹렬히 굴리고 있자니 다음과 같은 물음이 돌아왔다. 그때가 돼서야 이정우의 안색도 푸르러졌다. 이런. 정체를 들켰다간 나중에 죄를 물어 문초를 당해도 어찌할 바가 없는데.
“……저는 양영의 문우대신 이정우라고 합니다.”
분명 그런 고민을 했는데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순순하다. 왠지 이 여인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문우대신 이정우.”
눈치로 이 자리까지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정우가, 자신의 이름을 입 안에서 읊조리는 여인의 마른 입술을 쳐다봤다. 들었으니 잊지 않아야 한다 생각했는지, 한참을 곱씹다 이내 미련 없이 가마로 걸어 들어가는 발.
“창을 겨눠 미안했소. 다시 척국으로 돌아갈 땐 꼭 늦지 않게 오리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두두두두 뛰어 사라지는 가마의 뒷모습이 이내 점처럼 사라졌다. 혀를 차던 이정우는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입 안으로 이름을 훑었다.
“호연이라 했지.”
저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게 먼저 이름을 말하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는 공주라니. 양영에서 간택을 자행하는 황자의 성미를 생각하면 실상 칠간택의 처음도 통과하지 못한 채 사라질 이름이 분명한데…….
“……호연.”
한데도 이정우는 어쩐지, 이 이름이 꽤나 오랫동안 양영 땅에서 울릴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
요즘 양영에서 가장 살판나고 행복한 이를 꼽으라면 바로 태자인 주태원이었다. 3년을 벼르고 벼르다 황실의 모든 이를 꺾은 뒤 간택연을 열고, 그 흥을 이기지 못해 날이면 날마다 사냥을 나서는 황자께선, 늘 밑에 있는 군병을 부려 원하는 짐승만 잡는 손쉬운 사냥법으로 서북문 일대에 유명세를 떨치고 계셨다.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