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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곳에 온 여인 중 반절만 척국에 있었어도 아이들이 그리 적게 태어나진 않을 텐데. 척박한 땅이라 죽어 나가는 여인이 너무 많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차가운 동토를 오갈 때 얼어 죽는 일이 태반이었다. 죽연에게 누이가 자신 하나뿐인 것도 위에 있던 둘의 수명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열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닙니다.”
제일 나이 많은 병이 말을 하는 것에 호연도 고개를 들었다. 원체 말이 없는 녀석이니 저 말 한마디 하기까지 고민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닐 텐데도 여전히 조심스레 말한다.
“도성이 너무 넓어 일주일 안에 다 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자정영까지만 가 주셔도 여유가 생길 것 같기는 한데.”
방 안에 침묵이 오갔다. 걱정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라 머리를 긁적였다. 죽연이 올 수 있었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을 텐데 양영은 득이 되지 않을 자가 국경을 넘는 것에는 지독히 인색했다. 그래서 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영 땅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황족이 아니었다면 사영궁까지도 못 갔을 텐데 무슨 재주로. 우선은 되는 때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위험한 곳으로 가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일을 벌일 것이면 더 많은 사람을 데려가라는 죽연의 말에 호연은 고개를 저었었다. 일단 돈이 너무 없었다. 양영의 주화 하나를 사려면 척국의 돈으로는 바가지 하나만큼의 주화가 필요했다. 만약을 대비해 챙긴 광물은 까딱하면 사기당하기 십상인 저자의 풍속을 보고 팔지 말라 당부를 해 뒀다.
결국 이곳에 있는 동안 허리를 동여매고 있을 판국이니 괜한 일은 안 만드는 게 상책이었다. 위험한 일에 많은 사람을 데리고 움직이다가 다 죽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머리 좋은 사람이 적은 척국에 큰 타격이 될 터였다.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 이번 칠간택행을 택하며 호연의 목적은 그 하나였다.
“악착같이 어떤 것을 빼내 오려 하지 마. 그러다 다친다. 자칫 모르는 풍토에 죄를 지어 척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여기 오기까지 노력한 이들의 수고가 다 헛것이 돼 버려. 이 일은 우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 조급해하지 마라.”
결국엔 덩치 큰 사내들을 다섯 살배기 어린애들처럼 어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 호연을 보며 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죽연의 비가 몸이 약하여 그동안 척국의 어머니 노릇을 한 호연의 성정은 완전히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이 중에는 어려서부터 무뚝뚝했던 공주님을 어깨에 얹어 목마를 태워 준 이도 있는데 저런 걱정이라니.
“네, 모두 조급해하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겠습니다.”
병을 대신해 산이 답했다. 초저녁이면 잠을 자는 호연은 답을 듣고 만족했는지 곧 안으로 들어가 이내 새근새근 숨을 골랐다.
“우리 공주님 신경 줄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다룰 때 보면 어미 같고, 먹고 잘 때 보면 아직도 어린애 그대로이신 것 같고, 근데 활을 쏘거나 대거리를 할 때는 또 제 나이 같단 말이죠. 공주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요?”
열이 호연의 자리를 봐 주고 나오며 말했다. 병은 짤막하게 답했다.
“딱 하나뿐이지. 척국.”
고개를 갸웃거리는 열과 달리 산과 라해는 그 말에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지었다.
여명이 터 올 무렵, 일찍 잠든 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묵는 객점에서 사영궁까지의 거리는 호연의 걸음으로 꼬박 하루가 걸렸다. 지금 출발하면 줄의 마지막 정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혼자 가십니까?”
가서 신을 꽃신을 챙기고 가죽신에 발을 넣는 호연의 등 뒤에서 열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더 자도 된다.”
“공주님께서 이리 바쁘게 움직이시는데 저희도 게으름 피우면 안 되죠. 오늘은 새벽부터 움직이자고 다들 말했었습니다.”
아침잠이 제일 많은 열이 일어난 것을 보니 다른 이들은 곧 채비를 마치고 나올 터였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가는구나 싶어 작게 웃었다. 떨어져 있는 기간은 칠 일. 할 일을 생각하면 속절없이 짧은데 그 기간 동안 홀로 있을 생각을 하니 쓸쓸했다. 열이 형들을 대신하여 손을 흔들며 웃었다.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누가 괴롭히면 저희가 궁궐 담이라도 넘을 테니 연통하시고요.”
“내 걱정은 말고 괜한 사고나 치지 마.”
꿋꿋하게 걸어가는 등 뒤로, 그사이 채비를 마치고 나온 세 명의 사내가 함께 선다. 부디 분란 없이 조용히 다녀오시기를. 기도하는 마음만은 넷 다 매한가지였다.
***
주태원은 망루에 앉아 하나의 궁인, 수십의 시비들로 무장한 여인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칼만 들지 않았지 저곳의 공기는 실로 전장이었다. 저희들끼리 하는 기 싸움이 보고 싶어 거대한 광장을 빙 둘러 방을 만들고 그곳이 훤히 보이는 누각까지 지은 사치를 부렸지만, 지금 보니 마냥 사치만도 아니었다.
“꽃향기가 여기까지 나는구나.”
어지간한 미색은 다 봤다고 생각했던 그의 좁은 식견을 깨부술 만한 여인들 천지였다. 모두들 양영에서 미인의 덕목으로 치는 흰 얼굴, 버들가지 같은 몸, 젓가락 한 번 들어 본 적 없을 것같이 가느다란 손과 부러질 듯한 목, 크고 도도한 눈을 가졌다. 타고나길 그러한 이도 있고 그리 꾸민 이들도 있다. 색색의 비단까지 더해지니 여기가 꽃밭인가 싶어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턱을 괴고 황홀경에 빠진 태자의 모습이 민망했던 관리들만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때.
“근데 내 토끼는 어디로 갔담.”
웃는 목소리 안에 뒤틀린 기색이 여실한 한 줄의 말이 주태원의 입을 빠져나왔다.
“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문우대신이 ‘음?’ 하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태껏 자리에 앉아 있던 태자가 난간까지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고 멀리, 아주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하면서 주변 공기가 위협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하, 혹 불편하신 것이라도…….”
“꽃만 가져다 놔서 오기 싫었나. 이런, 먹을 만한 풀이라도 곁에 좀 둬 줬어야 하는 건데.”
“……?”
망루 아래의 짙은 색향이 이곳까지 올라오는 것 같다. 초봄의 알맞은 날씨에 오늘은 입고 계신 옷이며 입에 넣는 다식까지 맘에 쏙 드는 것으로만 가져와 꽃놀이를 즐기셨다. 어딜 돌아봐도 거슬릴 게 없어야 맞는 마당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길 가다 뺨 맞는 격으로 주태원의 짜증을 받아 내던 신하들은 이 침묵에 살이 떨렸다. 난간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던 태자가 사영궁의 문이 닫히자마자 아예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후로는 이까지 달달 떨리는 것을 어떻게든 악물고 있는 판국이었다.
“문우대신.”
“예, 옛! 문우대신 이병우……!”
“됐으니, 지금 문을 닫는 병사들에게 가서 닫지 말라고 전해라.”
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자가 한층 구겨진 인상으로 뒤를 돌아봤다. 현 황제가 고요하고도 서슬 퍼런 기세로 사람을 잡아 대는 것과 달리 태자는 수틀리면 이 망루에서 자신을 걷어차 떨어뜨릴 수 있는 성품임을 알기에 고개를 딱 숙이고 바로 답했다.
“네, 명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그리고 돌아서는 문우대신의 축 처진 어깨를 모두가 불쌍하다는 낯으로 쳐다봤다. 아마 어디서든 벌을 받긴 할 텐데 태자의 손에 받느니 차라리 호조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저리로 가는 것 같았다.
“설마 벌써 간 것은 아니겠지…….”
다시 의자에 앉아 기둥에 기댄 주태원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또다시 속삭이다 사라지는 말.
태자의 입 안에서 구르는 말은 늘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다. 이번에도 귀를 쫑긋했을 때는 이미 입술을 굳게 다무신 지 오래. 하여 애석한 입맛을 머금던 이들은, 이내 먼저 간 문우대신의 명복만을 빌며 귀를 닫기 시작했다.
***
“어, 다시 열리는 것 같은데요?”
업혀 있는 아이가 호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닫혔던 사영궁의 문이 열리고 있다.
“공주님, 빨리 들어가세요, 빨리.”
낑낑대며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절뚝거리는 발로 호연의 등을 떠민다. 사영궁을 코앞에 둔 대로 위에서 마주친 아이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맞아 죽을 판이라 하여 도와주다 궁문이 닫히는 시간을 놓쳐 버렸다. 가뜩이나 황망한 이 와중에 담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고, 꽉 닫힌 문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차피 닫힌 문이니 아이는 집에 데려다줘야겠단 마음이 들어 함께 길을 나서는 길이었다.
“알았으니 밀지 마. 그러다 나도 다칠라.”
“다치더라도 사영궁 안에 가서 다치셔야죠!”
아이는 느긋느긋 걷는 호연을 보며 도리어 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양영에 처음 들어올 때도 그러더니, 어째 일찍 온다고 서둘러도 이곳에선 모든 일을 아슬아슬하게 해치우게 된다. 그건 일을 당하는 호연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보는 이들의 복장도 함께 터뜨리는 일이기에, 아이의 낯빛은 파랗다 못해 숫제 시커멀 지경이었다.
“남 걱정하다 쫄딱 망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신가 봐요? 이리 태연하신 걸 보니.”
기껏해야 열 살 정도밖에 안 됐을 사내 녀석이 말하는 건 보통 새침한 게 아니다. 업히라는 말에 넙죽 업힐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본인이 간택에 참여한 양 채근하다니. 객잔으로 가 달라고 한 걸 봐선 집이 장사라도 하는 모양인데 어른인 체 휘두르는 세 치 혀가 죽연의 것과 비견될 만큼 예리하다.
“글쎄…… 여태껏 망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신기하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다. 이제야 제 나이 같아서 설풋 웃었다.
“아직은 착한 사람이 해를 보는 때는 아니야.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값 따라 종종거리기는.”
그리 말하고 등을 보이려던 호연은 뚱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아이를 보고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장사를 하려면 셈이 빨라야지. 거상이 되겠구나.”
달래 봐야 표정의 변화가 없다. 열이 어렸을 때도 제 무심한 말에 몇 번이고 삐치곤 했던 것을 기억한 호연이 아이의 손에 당과까지 쥐여 줬다. 사실은 작은 것도, 어린것도 좋아하는데 이 목석같은 성정 탓에 생전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엔 글러 먹은 듯하다.
“나중에 궁에서 나오면 객잔에나 들르세요. 일호라고 써져 있는 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땐 이 당과보다 훨씬 맛있는 것으로 한 상 대접할 테니까.”
입술이 툭 나온 아이가 손을 흔들고는 반대편으로 절뚝거리며 간다. 호방한 뒤태를 보며 호연이 이마를 긁적였다.
“……나 글 못 읽는데.”
저기도 아슬아슬 가게 되려나. 생각에 잠겨 있던 머리를 흔들며 창을 든 병사들이 즐비한 궁문 앞에 다가갔다. 활짝 열려 있어야 할 문이 반밖에 열려 있지 않은 것에 아무 의심도 품지 않은 호연이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여기 칙서를…….”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담장 하나 넘어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에 아주 조금, 눈을 크게 떴다.
***
사영궁은 바닥.
처음 내궁을 지을 때 병졸들끼리 우스개로 뱉었던 말이다.
그중에서도 북궁은 더욱 바닥.
이 역시 이제는 저자의 어린아이까지 노래처럼 부르며 떠드는 말이고.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간택연의 시작은 자정영부터라고 했다. 사영궁에서 자정영에 올라가는 시험은 아무도 내용을 모르고, 어차피 백여 명에 이르는 후보 중에 비빈이 될 이를 칠 일 만에 골라내겠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모두들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었다. 보아하니 태자가 미색으로 절반을 쳐 내려는 모양인데, 사실은 그중에서 문벌 귀족과 육진은 벌써 이름을 올려 사영궁에 하룻밤 머무는 것조차 안 한다고 하더라. 동서남북 네 줄로 늘어진 방에 여인들이 묵고 있으면 태자가 지나가며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이들만 뽑혀 간다고 하더라.
낭설이 파다한 중에 사영궁은 바닥이란 말이 생겼고, 쓰이는 자재와 함께 묵는 시비들의 방 수가 현저히 다른 것을 보고 북궁이 더욱 바닥이란 말이 생겼다.
“이미 다 찼다니까!”
궁문을 지키던 문우대신들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싸움질 중이었다. 이병우가 태자의 명을 받잡아 내려온 후부터 박 터져라 핏대를 세우는 중인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눈이 충혈될 만큼 보고 또 본 명단이 달라질 리 있냐는 문간의 대신들과 태자 저하의 명을 지금 뉘 집 개가 짖는 줄 알고 무시하냐며, 이 일에 목숨이 걸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이병우의 싸움이었다.
“궁문을 닫지 말라고 하셨으니 열어야 합니다! 저 문 하나 여는 일로 다섯 목숨 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
“타종이 끝난 지 한 시각이 넘었습니다! 아무리 간택연의 법도가 파격이라 해도 사영궁은 궁이 아니랍니까? 궁에 사는 황족만 대체 몇인데 열두 개 문을 계속 열어 두었다가 자객이라도 들어오면 어쩌라는 겁니까!”
이곳에 온 여인 중 반절만 척국에 있었어도 아이들이 그리 적게 태어나진 않을 텐데. 척박한 땅이라 죽어 나가는 여인이 너무 많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차가운 동토를 오갈 때 얼어 죽는 일이 태반이었다. 죽연에게 누이가 자신 하나뿐인 것도 위에 있던 둘의 수명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열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닙니다.”
제일 나이 많은 병이 말을 하는 것에 호연도 고개를 들었다. 원체 말이 없는 녀석이니 저 말 한마디 하기까지 고민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닐 텐데도 여전히 조심스레 말한다.
“도성이 너무 넓어 일주일 안에 다 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자정영까지만 가 주셔도 여유가 생길 것 같기는 한데.”
방 안에 침묵이 오갔다. 걱정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라 머리를 긁적였다. 죽연이 올 수 있었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을 텐데 양영은 득이 되지 않을 자가 국경을 넘는 것에는 지독히 인색했다. 그래서 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영 땅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황족이 아니었다면 사영궁까지도 못 갔을 텐데 무슨 재주로. 우선은 되는 때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위험한 곳으로 가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일을 벌일 것이면 더 많은 사람을 데려가라는 죽연의 말에 호연은 고개를 저었었다. 일단 돈이 너무 없었다. 양영의 주화 하나를 사려면 척국의 돈으로는 바가지 하나만큼의 주화가 필요했다. 만약을 대비해 챙긴 광물은 까딱하면 사기당하기 십상인 저자의 풍속을 보고 팔지 말라 당부를 해 뒀다.
결국 이곳에 있는 동안 허리를 동여매고 있을 판국이니 괜한 일은 안 만드는 게 상책이었다. 위험한 일에 많은 사람을 데리고 움직이다가 다 죽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머리 좋은 사람이 적은 척국에 큰 타격이 될 터였다.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 이번 칠간택행을 택하며 호연의 목적은 그 하나였다.
“악착같이 어떤 것을 빼내 오려 하지 마. 그러다 다친다. 자칫 모르는 풍토에 죄를 지어 척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여기 오기까지 노력한 이들의 수고가 다 헛것이 돼 버려. 이 일은 우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 조급해하지 마라.”
결국엔 덩치 큰 사내들을 다섯 살배기 어린애들처럼 어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 호연을 보며 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죽연의 비가 몸이 약하여 그동안 척국의 어머니 노릇을 한 호연의 성정은 완전히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이 중에는 어려서부터 무뚝뚝했던 공주님을 어깨에 얹어 목마를 태워 준 이도 있는데 저런 걱정이라니.
“네, 모두 조급해하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겠습니다.”
병을 대신해 산이 답했다. 초저녁이면 잠을 자는 호연은 답을 듣고 만족했는지 곧 안으로 들어가 이내 새근새근 숨을 골랐다.
“우리 공주님 신경 줄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다룰 때 보면 어미 같고, 먹고 잘 때 보면 아직도 어린애 그대로이신 것 같고, 근데 활을 쏘거나 대거리를 할 때는 또 제 나이 같단 말이죠. 공주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요?”
열이 호연의 자리를 봐 주고 나오며 말했다. 병은 짤막하게 답했다.
“딱 하나뿐이지. 척국.”
고개를 갸웃거리는 열과 달리 산과 라해는 그 말에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지었다.
여명이 터 올 무렵, 일찍 잠든 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묵는 객점에서 사영궁까지의 거리는 호연의 걸음으로 꼬박 하루가 걸렸다. 지금 출발하면 줄의 마지막 정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혼자 가십니까?”
가서 신을 꽃신을 챙기고 가죽신에 발을 넣는 호연의 등 뒤에서 열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더 자도 된다.”
“공주님께서 이리 바쁘게 움직이시는데 저희도 게으름 피우면 안 되죠. 오늘은 새벽부터 움직이자고 다들 말했었습니다.”
아침잠이 제일 많은 열이 일어난 것을 보니 다른 이들은 곧 채비를 마치고 나올 터였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가는구나 싶어 작게 웃었다. 떨어져 있는 기간은 칠 일. 할 일을 생각하면 속절없이 짧은데 그 기간 동안 홀로 있을 생각을 하니 쓸쓸했다. 열이 형들을 대신하여 손을 흔들며 웃었다.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누가 괴롭히면 저희가 궁궐 담이라도 넘을 테니 연통하시고요.”
“내 걱정은 말고 괜한 사고나 치지 마.”
꿋꿋하게 걸어가는 등 뒤로, 그사이 채비를 마치고 나온 세 명의 사내가 함께 선다. 부디 분란 없이 조용히 다녀오시기를. 기도하는 마음만은 넷 다 매한가지였다.
***
주태원은 망루에 앉아 하나의 궁인, 수십의 시비들로 무장한 여인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칼만 들지 않았지 저곳의 공기는 실로 전장이었다. 저희들끼리 하는 기 싸움이 보고 싶어 거대한 광장을 빙 둘러 방을 만들고 그곳이 훤히 보이는 누각까지 지은 사치를 부렸지만, 지금 보니 마냥 사치만도 아니었다.
“꽃향기가 여기까지 나는구나.”
어지간한 미색은 다 봤다고 생각했던 그의 좁은 식견을 깨부술 만한 여인들 천지였다. 모두들 양영에서 미인의 덕목으로 치는 흰 얼굴, 버들가지 같은 몸, 젓가락 한 번 들어 본 적 없을 것같이 가느다란 손과 부러질 듯한 목, 크고 도도한 눈을 가졌다. 타고나길 그러한 이도 있고 그리 꾸민 이들도 있다. 색색의 비단까지 더해지니 여기가 꽃밭인가 싶어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턱을 괴고 황홀경에 빠진 태자의 모습이 민망했던 관리들만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때.
“근데 내 토끼는 어디로 갔담.”
웃는 목소리 안에 뒤틀린 기색이 여실한 한 줄의 말이 주태원의 입을 빠져나왔다.
“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문우대신이 ‘음?’ 하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태껏 자리에 앉아 있던 태자가 난간까지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고 멀리, 아주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하면서 주변 공기가 위협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하, 혹 불편하신 것이라도…….”
“꽃만 가져다 놔서 오기 싫었나. 이런, 먹을 만한 풀이라도 곁에 좀 둬 줬어야 하는 건데.”
“……?”
망루 아래의 짙은 색향이 이곳까지 올라오는 것 같다. 초봄의 알맞은 날씨에 오늘은 입고 계신 옷이며 입에 넣는 다식까지 맘에 쏙 드는 것으로만 가져와 꽃놀이를 즐기셨다. 어딜 돌아봐도 거슬릴 게 없어야 맞는 마당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길 가다 뺨 맞는 격으로 주태원의 짜증을 받아 내던 신하들은 이 침묵에 살이 떨렸다. 난간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던 태자가 사영궁의 문이 닫히자마자 아예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후로는 이까지 달달 떨리는 것을 어떻게든 악물고 있는 판국이었다.
“문우대신.”
“예, 옛! 문우대신 이병우……!”
“됐으니, 지금 문을 닫는 병사들에게 가서 닫지 말라고 전해라.”
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자가 한층 구겨진 인상으로 뒤를 돌아봤다. 현 황제가 고요하고도 서슬 퍼런 기세로 사람을 잡아 대는 것과 달리 태자는 수틀리면 이 망루에서 자신을 걷어차 떨어뜨릴 수 있는 성품임을 알기에 고개를 딱 숙이고 바로 답했다.
“네, 명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그리고 돌아서는 문우대신의 축 처진 어깨를 모두가 불쌍하다는 낯으로 쳐다봤다. 아마 어디서든 벌을 받긴 할 텐데 태자의 손에 받느니 차라리 호조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저리로 가는 것 같았다.
“설마 벌써 간 것은 아니겠지…….”
다시 의자에 앉아 기둥에 기댄 주태원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또다시 속삭이다 사라지는 말.
태자의 입 안에서 구르는 말은 늘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다. 이번에도 귀를 쫑긋했을 때는 이미 입술을 굳게 다무신 지 오래. 하여 애석한 입맛을 머금던 이들은, 이내 먼저 간 문우대신의 명복만을 빌며 귀를 닫기 시작했다.
***
“어, 다시 열리는 것 같은데요?”
업혀 있는 아이가 호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닫혔던 사영궁의 문이 열리고 있다.
“공주님, 빨리 들어가세요, 빨리.”
낑낑대며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절뚝거리는 발로 호연의 등을 떠민다. 사영궁을 코앞에 둔 대로 위에서 마주친 아이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맞아 죽을 판이라 하여 도와주다 궁문이 닫히는 시간을 놓쳐 버렸다. 가뜩이나 황망한 이 와중에 담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고, 꽉 닫힌 문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차피 닫힌 문이니 아이는 집에 데려다줘야겠단 마음이 들어 함께 길을 나서는 길이었다.
“알았으니 밀지 마. 그러다 나도 다칠라.”
“다치더라도 사영궁 안에 가서 다치셔야죠!”
아이는 느긋느긋 걷는 호연을 보며 도리어 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양영에 처음 들어올 때도 그러더니, 어째 일찍 온다고 서둘러도 이곳에선 모든 일을 아슬아슬하게 해치우게 된다. 그건 일을 당하는 호연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보는 이들의 복장도 함께 터뜨리는 일이기에, 아이의 낯빛은 파랗다 못해 숫제 시커멀 지경이었다.
“남 걱정하다 쫄딱 망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신가 봐요? 이리 태연하신 걸 보니.”
기껏해야 열 살 정도밖에 안 됐을 사내 녀석이 말하는 건 보통 새침한 게 아니다. 업히라는 말에 넙죽 업힐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본인이 간택에 참여한 양 채근하다니. 객잔으로 가 달라고 한 걸 봐선 집이 장사라도 하는 모양인데 어른인 체 휘두르는 세 치 혀가 죽연의 것과 비견될 만큼 예리하다.
“글쎄…… 여태껏 망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신기하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다. 이제야 제 나이 같아서 설풋 웃었다.
“아직은 착한 사람이 해를 보는 때는 아니야.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값 따라 종종거리기는.”
그리 말하고 등을 보이려던 호연은 뚱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아이를 보고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장사를 하려면 셈이 빨라야지. 거상이 되겠구나.”
달래 봐야 표정의 변화가 없다. 열이 어렸을 때도 제 무심한 말에 몇 번이고 삐치곤 했던 것을 기억한 호연이 아이의 손에 당과까지 쥐여 줬다. 사실은 작은 것도, 어린것도 좋아하는데 이 목석같은 성정 탓에 생전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엔 글러 먹은 듯하다.
“나중에 궁에서 나오면 객잔에나 들르세요. 일호라고 써져 있는 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땐 이 당과보다 훨씬 맛있는 것으로 한 상 대접할 테니까.”
입술이 툭 나온 아이가 손을 흔들고는 반대편으로 절뚝거리며 간다. 호방한 뒤태를 보며 호연이 이마를 긁적였다.
“……나 글 못 읽는데.”
저기도 아슬아슬 가게 되려나. 생각에 잠겨 있던 머리를 흔들며 창을 든 병사들이 즐비한 궁문 앞에 다가갔다. 활짝 열려 있어야 할 문이 반밖에 열려 있지 않은 것에 아무 의심도 품지 않은 호연이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여기 칙서를…….”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담장 하나 넘어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에 아주 조금, 눈을 크게 떴다.
***
사영궁은 바닥.
처음 내궁을 지을 때 병졸들끼리 우스개로 뱉었던 말이다.
그중에서도 북궁은 더욱 바닥.
이 역시 이제는 저자의 어린아이까지 노래처럼 부르며 떠드는 말이고.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간택연의 시작은 자정영부터라고 했다. 사영궁에서 자정영에 올라가는 시험은 아무도 내용을 모르고, 어차피 백여 명에 이르는 후보 중에 비빈이 될 이를 칠 일 만에 골라내겠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모두들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었다. 보아하니 태자가 미색으로 절반을 쳐 내려는 모양인데, 사실은 그중에서 문벌 귀족과 육진은 벌써 이름을 올려 사영궁에 하룻밤 머무는 것조차 안 한다고 하더라. 동서남북 네 줄로 늘어진 방에 여인들이 묵고 있으면 태자가 지나가며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이들만 뽑혀 간다고 하더라.
낭설이 파다한 중에 사영궁은 바닥이란 말이 생겼고, 쓰이는 자재와 함께 묵는 시비들의 방 수가 현저히 다른 것을 보고 북궁이 더욱 바닥이란 말이 생겼다.
“이미 다 찼다니까!”
궁문을 지키던 문우대신들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싸움질 중이었다. 이병우가 태자의 명을 받잡아 내려온 후부터 박 터져라 핏대를 세우는 중인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눈이 충혈될 만큼 보고 또 본 명단이 달라질 리 있냐는 문간의 대신들과 태자 저하의 명을 지금 뉘 집 개가 짖는 줄 알고 무시하냐며, 이 일에 목숨이 걸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이병우의 싸움이었다.
“궁문을 닫지 말라고 하셨으니 열어야 합니다! 저 문 하나 여는 일로 다섯 목숨 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
“타종이 끝난 지 한 시각이 넘었습니다! 아무리 간택연의 법도가 파격이라 해도 사영궁은 궁이 아니랍니까? 궁에 사는 황족만 대체 몇인데 열두 개 문을 계속 열어 두었다가 자객이라도 들어오면 어쩌라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