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



“억지를 써도 정도가 있습니다, 태자.”

고요하던 황후궁의 한복판에서 쇳소리가 났다. 주인의 성미를 닮아 늘 정갈하고 고즈넉하던 황후궁의 오후. 오늘도 여전히 평화로울 예정이었던 그곳은, 칠간택을 시행하기까지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던 황자와 황후가 차담 시간을 가진 이후로 살얼음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제가 언제 정도 차리고 억지 쓰는 것 보셨습니까.”

모후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묻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주태원은 단 한 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황후의 고고한 이마 위로 핏대가 선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게요?”

폐위를 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지독했던 칠간택의 고집이 지나갔으니 그래도 한동안은 얌전할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다. 양영의 수도로 열네 개국의 사신단을 불러 모으는 난리를 펴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 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겠다고 말하는 입을 이제는 진정 꿰매 버리고 싶었다.

“황족만 해도 일백이 넘는답니다. 모두 밀어 넣으면 하나라도 될 성싶었는지 한 나라에서 열다섯이 넘는 공주가 온 곳도 있어요. 거리에 나가면 이곳이 도성인지 기루인지 모를 만큼 색향 짙은 여인들이 판을 치게 만들고, 뭐요? 척국? 그게 대체 어디 붙어 있는 나라랍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놈의 칠간택 때문에 무역이 막히고 국경에서 은근히 전쟁을 벌이던 나라들마저 칼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대륙이 양영의 노름판 위에 각기 판돈을 걸고 커다란 장을 펼친 것 같으니, 질서를 중시하는 현 황제의 심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제가 칠간택을 이리 바꾸면서 뭐라고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뿐인 태자는 안 그래도 예민하던 부왕이 이제는 불면증까지 달고 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이참에 무시하려 작정을 한 것인지, 같지도 않은 요구를 들고 와서 자신을 괴롭힌다. 싸매고 있던 이마를 팩 하니 들자 찻잔을 내려놓은 주태원이 빙긋 웃는 게 보였다.

“마음에 맞지 않는 이와 일평생 사는 금수 같은 짓은 하기 싫다고 했었습니다. 맞지요?”

그래, 맞다. 저 말 한 마디로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부자간의 화를 아예 터지게 만들었던 그날을 어찌 잊을까. 살면서 소리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현 황제가 ‘그럼 네 어미와 내가 금수라는 게냐!’라는 고함을 내지르며 주태원의 머리에 옥새를 집어 던졌다. 얻어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주태원은 ‘아니십니까? 하면 왜 저보고만 금수마냥 얼굴도 보지 못한 이와 혼인하라 하십니까.’라며 실실 웃었다. 지켜보던 자신이 아찔했으니 그 답을 면전에서 받아 낸 현 황제의 신경 줄은 그야말로 불에 탄 듯 작렬했고, 뒷목을 잡고 쓰러진 후 이레 만에 깨어난 황제는, 네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유언 같은 말과 함께 태자의 문안 인사마저 거부하는 중이었다.

“뭡니까, 태자. 설마하니 척국의 공주와 정분이라도 나셨다는 게요?”

그런 식의 신경전을 바로 옆에서 내도록 지켜본 황후다. 그 탓에 이런 태자의 고집에도 비꼬듯 되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이 상황에 가당치도 않을 만큼 명랑했다.

“서북문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흉악한 도적 떼에게 철퇴를 맞고 죽을 뻔한 저를 그이가 구해 줬습니다.”

황후는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처럼 방실거리며 웃는, 심지어 그 사이사이로 꽃까지 보이는 주태원의 모습이 경악스레 눈앞을 메웠다.

“활을 어찌나 잘 쏘는지 그 먼 거리에서도 백발백중인 데다 흩날리는 머리칼이 마치 천녀의 것 같아서 한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 여인에게 단단히 반한 듯해요.”

말을 들을수록 기가 차다. 흉악한 도적 떼라니. 천녀라니. 설령 연옥에서 괴수가 올라왔다 해도 겁먹었다 소리는 못 할 성품인데. 거기에 더해 여인에게 천녀라며 입발림 소리는 더욱 못 할 성품이고.

“대체 뭘 잘못 먹고 이러시는 거요?”

오늘만큼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의 생각을 알 수 없는 때는 처음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단 한 사람에게 집착하거나 정을 쏟을 수 있는 성정이 아니다. 세상에 여인이 백이라면 그 백을 다 맛봐야 만족할 사내. 어린아이 때부터 양손에 당과를 쥐고 멀리 있는 엿가락마저 내놓으라며 패악을 떨던 태자 때문에 유모들의 남모를 고충이 많았다.

“이리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할 것이면 나가시오. 태자가 한 번이라도 이 어미 말을 들어준 적이 있습니까? 어차피 원하는 건 다 하실 거면서 왜 날 찾아와서 이리 귀찮게 하는 겝니까?”

차라리 그러는 편이 되도 않는 사랑 놀음을 듣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름이 오소소 올라온 것을 세게 문지르고 한숨을 쉬던 황후가 아직도 나가지 않고 버티는 주태원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봤다.

“태자?”

“그이가 칠간택에 데려온 수족이 몇인 줄 아십니까?”

대번 눈살부터 찌푸리게 된다. 듣기 싫어도 이번 간택연에 여인들이 머릿수로 하던 대거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탓이었다.

“왜요, 효방의 그 어이없는 옹주보다 더한 인사가 왔답니까? 아니, 이름 한 번 들어 보지 못한 나라인데 대체 얼마나 국고를 쥐어짜 가며…….”

“넷입니다.”

“뭐요?”

귀를 의심하게 하는 숫자에 더는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으려던 황후의 미간에 다시금 힘줄이 솟았다.

“무에 그리 맹랑한 계집이 있답니까! 양영을 우습게 보아도 정도가 있지, 어찌 시비를 넷뿐이……!”

“가마꾼만 넷입니다.”

이번엔 아예 입이 딱 벌어졌다. 주태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배를 붙잡고 쿡쿡거리고 있었다.

“우습지요? 황후께선 우습지 않으십니까? 저는 듣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척국에서 양영까지 달려오는 동안 말 한 필 없이 발로만 오고, 시비는커녕 시중을 도와줄 여인 하나 없었답니다. 우락부락한 사내 넷이 그이의 호위를 맡고 발이 되고 치장까지 해 주는 판국이니, 제가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요.”

“태자는, 그대는 이것이 진정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효방 여인의 기고만장함보다 더욱 무례한 일을 겪고도 웃음이 나오시오? 이건 칠간택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서서히, 황후의 목청이 낮아졌다.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리고 눈에서 서릿발이 날렸다. 주태원은 차게 가라앉은 공기를 읽고도 모른 척,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니 됩니다.”

“황후마마.”

“당장 국경 밖으로 내치세요. 간택에 참여하고자 온 이들이 아닙니다. 무슨 속내를 품고 왔는지 모르나 이리 알았으니 됐어요. 하루속히 양영 땅에서 몰아내세요.”

척국의 공주를 낙영궁까지 오르게 해 달라는 청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고집 센 태자의 변덕이라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세상천지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곁에 들이는 인물만큼 멍청한 이는 없는 법이고, 궁 안에서 평생의 반을 살아온 황후는 그를 너무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이나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예 옆으로 돌아앉은 황후를 보고 주태원이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한순간도 제 눈을 피하지 않던 이였습니다. 허름하게 차려입었으나 온몸에서 총기가 흘렀어요. 황태자의 직위에 오른 뒤 머리에 지푸라기만 넣은 머저리들만 보다가 그이를 봤을 때,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모른 척 눈을 감고 싶어도 이미 꿀에 절어 버린 듯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렸다.

“그이가 척국의 공주라 간택에 참여하려 먼 길을 달려온 것을 알았을 땐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고, 사실 속내는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땐 진흙탕에 처박히는 것 같았습니다. 예, 황후께서 바로 보셨습니다. 그이는 칠간택에 나설 생각이 없어요. 사영궁까지는 억지로 와 앉아 있겠지만 그 후엔 바로 달아나 버릴 텐데, 저는 그것이 싫습니다.”

“…….”

“절대로 그리 못 해요.”

기어이,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렀다. 애정하여 그런다는 말은 도무지 믿어지질 않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집착하고 있단 것만은 알겠다. 감히 저를 기망한 것에 대한 노기일 수도 있고 제 품에서 달아나려는 것에 유달리 악을 쓰던 태자의 성정 때문일 수도 있다.

“태자, 척국입니다. 효천 황제께서 국호를 주신 후에도 열네 개국 어느 곳과도 연통하지 않던 미개한 족속이에요. 낙영궁은커녕 자정영에 올리는 것조차 힘이 들 겁니다.”

쓰디쓴 어조로 말을 잇자, 영민한 모후를 보는 주태원의 눈에 잠시 만족감이 맴돌았다. 역시나, 척국이 어느 땅에 있는지, 그곳의 황족이 어떤 이들인지 모른 척하시는 것뿐이었다. 사내만큼이나 또렷한 이지(理智)로 황제에게 금군까지 하사받은 황후다. 열이 쉽게 오르는 성품이시긴 하나 현 황제께서 유일하게 정을 준 여인. 처음부터 호연이 간택을 치르는 데 아마 황후만큼 큰 걸림돌이 없을 것 같기에, 미리 그물을 던지러 이곳에 온 것이다.

“게다가 나는 도저히, 그이가 양영에 들어온 이유를 모르겠어요. 꿍꿍이가 있는 이들은 딱 질색입니다. 해서 태자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차디찬 기세로 말을 뱉는 황후를 잠시 관망하던 주태원이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럼 제 첫정은 이대로 무참히 짓밟혀야 하는 겁니까?”

황후의 이가 뿌득 갈렸다. 마음 같아선 저기 앉아 속을 긁는 자식 놈을 우물에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면 어쩔 수 없이 저는 이대로 그이에게 가 연심을 고백하고 밤을 보내는…….”

그러나 다음 순간 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조금 전 했던 결심을 모조리 잊고 비명처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자정영까집니다!”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경고가 담긴 외침에, 장지문으로 향하던 주태원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낙영궁까집니다.”

그 말에 황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양보하지 않으면 태자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내칠 게요.”

“그럼 칠간택을 잠시 미루고 척국에 가서 그이의 마음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네요. 모후께서 갖은 방해를 다 할 테니 제발 나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간택연에 열심을 다해 달라고.”

황후는 지금 와서야 현 황제의 인내심과 자제력이 부처와 비슷한 경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웃으며 속을 뒤틀어 대는 저 얼굴을 보면서도 욕지거리 한 번, 대단한 발길질 한 번 하지 않은 채 3년을 보낸 것을 보면 죽을 때 사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정영까집니다.”

나름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말한 것인데 계속 버티는 모후를 보니 여간해선 허락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태원은 일이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나 웃는 낯은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넉 달 후에 뵙겠습니다.”

비 후보들이 마지막 관문인 낙영궁에 들어갈 때까지의 기간. 그사이 주인 없는 동화당을 한번 잘 꾸려 보라는 덕담을 날리는 모습에, 황후가 도끼눈을 치떴다.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나가려던 주태원의 발치에 호통이 떨어졌다. 역시나 돌부처 같은 현 황제에 비해 다루기 쉬운 모후셨다. 쳐다보니 이마를 누르며 쥐어짜 내듯 말한다.

“낙영궁에 가기 전까지, 둘 중 하나라도 내게 보이세요. 진정 둘 사이에 연정이 있어 후궁으로라도 남을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양영에 들어온 것이 순수하게 간택을 위한 것이 맞는지.”

“보이면요?”

“……최소한 방해는 안 하리다.”

톡, 톡. 쥐고 있던 문고리를 두드리며 고민하는 척하던 그가 싱긋 웃었다. 이만하면 원하던 것을 거의 다 쟁취했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 없었다.

“역시 모후께선 현명하십니다.”

일 다 봤다는 표정으로 나가 버리는 태자를 보며 황후는 벌써부터 미간 사이가 아려 오는 것 같았다. 칠간택을 열기만 하면 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간택이 끝날 때까지 이 두통이 사라질 날은 없을 것 같았다.



***



“하면 앞으로 어찌 되는 겁니까?”

호연이 사영궁에서 인장을 받고, 필요한 것들을 저 혼자 가서 찾아오는 사이 남아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은 하루 종일 도성을 곳곳을 둘러보고 왔다. 오자마자 그녀를 반긴 이들이 고할 것을 다 고한 뒤 묻자, 오늘도 죽 한 그릇을 빼고 나머지는 다 그들에게 양보한 호연이 죽연에게 보낼 서신을 쓰면서 무뚝뚝하게 답했다.

“사영궁까지는 가야겠지.”

“혼자 가시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띌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시비를 하나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짐을 싸 주던 산이 말한다. 사실은 호연도 오늘 몇 번이고 붙잡혀 질문을 받으며 생각했던 바이긴 하다. 비웃듯 바라보는 시선이나 의심스런 눈초리, 피곤할 만치 쏟아지던 압박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게 쌓여서 사람들의 관심 한복판에 있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시비를 살 돈이 없다.”

그럼에도 현실에 부딪히니 고민한 것은 다 도루묵이다.

“사영궁에서 칠 일이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시킨 것이나 잘 해 놓으면 돼.”

묵묵한 호연의 답에, 서신을 새의 다리에 매달아 밤하늘로 날리고 온 열이 말했다.

“그래도 공주님, 혹시 압니까? 이러다 낙영궁까지 가게 될지. 그때 가서 시비를 사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을까요?”

나이가 가장 어려서인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해 댄다. 열의 형인 라해가 동생의 뺨을 죽, 꼬집었다.

“신소리할 거면 잠이나 자. 오늘도 네놈이 제일 느려 터졌었다.”

덩치가 크고 힘도 제일 좋아서 데려오긴 했는데 양영의 번쩍이는 밤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단속 단단히 시켜야 할 것 같았다. 호연은 투닥거리는 형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돌아보고도 모르느냐? 여긴 꽃밭이다. 나 같은 이는 금세 잊혀져 도성 밖으로 나가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