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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욱신거리는 팔뚝을 덜덜 떨고 있던 명운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황자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어쩌면 자신을 곱게 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희망 탓이었다.
“저하……?”
하여 그는 주태원이 채찍을 하늘 높이 쳐들어 그의 얼굴에 내리치려 들 때도 변변히 막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명운을 구한 것은 황자도,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도 아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일을 지켜보던 호연뿐이었다.
챙!
활 끝에 빗겨 맞고 바닥에 떨어지는 채찍을 뒤늦게 본 명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면 채찍에 얻어맞아 머리가 날아갔을 터였다.
“저, 저하!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발 살려 주소서!”
죽음 근처까지 다녀왔다는 걸 깨달은 그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쯤, 황자에게 활을 쏜 호연의 곁에도 병사들이 포진했다. 사냥에 나갔다 돌아온 이들까지 합하니 그 수는 근 사십 명에 가까웠다. 사위가 그리도 삼엄한데, 정작 이 같은 상황을 만든 주태원은 아주 신이 나서 입이 찢어진 채로 말에서 뛰어내려 호연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활을 잘 쏘는구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 보자.”
저이가 미친 것 같아 혼란스러운 호연과 달리 주태원은 내내 부채로 가린 너머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어이 라해와 병까지 밀쳐 낸 이가 그녀가 든 활 바로 앞에 몸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여기, 여길 한번 뚫어 봐라.”
손으로 톡톡 가리키는 것은 주태원의 이마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연이 활을 바닥에 내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무슨…….”
“그리 도망갈 것 없다. 활이 불편하면 다른 것을 써도 돼. 하니 내 몸에 생채기 한번 내 봐.”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진짜 광인인가? 친근하게 몰아붙이는 황자의 태도에 호연이 미간을 굳히며 바로 답했다.
“싫습니다.”
“왜? 난 아주 나쁜 놈이다. 네 말대로 새끼를 밴 짐승도 죽이려 했고 활 못 쏘는 저놈도 채찍으로 후려치려 했어. 한 대쯤 맞아도 괜찮지 않느냐.”
싱글벙글 웃는 주태원의 눈에는 미련이나 머뭇거림 따윈 일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제 몸을 상하게 하라 말했다는 걸 깨달은 호연이, 한층 더 삼엄하게 인상을 굳혔다.
“그래도 싫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 쓰라고 익힌 것 아니에요.”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배를 잡고 웃는다.
“누가 죽는데?”
“네?”
“간도 크구나. 날 죽이면 너도, 네 뒤에 있는 가마꾼들도 아마 곱게는 못 갈 텐데?”
이 여인의 정체가 황족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주태원의 심경은 날아다니는 새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분이 좋다 못해 하늘에 뜬 것 같은 지경이라 내도록 바위 같다 생각한 호연이 아담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생채기만 내 보라는 것이다. 확인할 게 있거든.”
어차피 구척장신이라 해 봤자 그보다는 작은 여인. 끌어안으면 이마가 그의 어깨뿐이 오지 않고, 넓게만 보였던 몸도 소담하여 한 팔에 안길 것 같다. 얼굴 있고, 팔다리 붙었고, 숨이나 제때 쉬고. 그만하면 충분하다 생각해 왔으니 양영 사람에 비해 사뭇 이질적인 호연의 외형도 문제 될 건 없다.
“허나 이마를 뚫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듯 긴 감상을 끝마쳤을 때, 혼자 생각을 거듭하던 호연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눈으로 그에게 답했다.
“사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그를 시키는 이와는 가까이하지도 않고요.”
말을 섞다 보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탓에 무시하고 떠날 수가 없어서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는데, 그사이 황자가 꽤나 은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가진 재주에 비해 성정이 모질지 못하구나.”
어쩐지 조금 전에 말했던 사내와도,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 말했던 사내와도 다른 것 같은 느낌.
“사실 나는 그런 이들을 아주 좋아해. 난 재주가 없는 통에 남의 재주를 사다 쓰는 사람이거든.”
이질감에 눈썹을 치켜뜰 무렵, 귓불 가까이 다가온 뜨거운 입술이 마치 독약 같은 말을 퍼부었다.
“저가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헐값으로 넘기는 이들은 모두 다 환영이지.”
말을 끝낸 주태원이 천천히 사이를 벌려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말로 돌아갈 때까지, 그리고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평야를 떠날 때까지 호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주님, 여기 사람들은 다 저럴까요?”
가마꾼 중 제일 막내인 열이 묻는다. 그 말에 양영에 오기 전, 죽연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라비는 양영의 모든 것이 척국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너 같은 아이가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까지 호연이 양영에 가길 바라지 않던 오라비라 험담만 일삼는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죄다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이는 하나도 없어.”
호연은 활을 주우며 짤막하게 답했다. 그런 호연의 등 뒤로 따라붙은 라해와 병은, 멀어지는 황자의 행렬을 보며 칼자루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담비는 서른 마리가 잡혔다. 평소 성격이라면 쉰 마리를 잡을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사람을 달달 볶아 댔을 주태원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으며 병사들에게 금 한 덩어리씩을 하사하고 빠르게 판을 접었다. 특히나 힘줄이 끊어지도록 활을 당긴 명운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받아 조금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태원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마차에 오른 주태원이 턱을 괴고 평야를 바라봤다. 원하던 이를 이렇게 한순간에 만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 발로 자신에게 열심히 다가와 주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채찍을 막은 걸 보면 눈치는 없어도 경계심은 있는 모양인데…….”
속마음은 언제나 남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속삭이는 주태원의 습성상, 지금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지경인 걸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말이 흙먼지를 만들 때쯤 주태원의 입술이 또다시 움직였다.
“그걸 어떻게 잡아 둔담…….”
들뜬 기색이 완연한 시작의 말. 이번에도 훔쳐 들은 것은 평야를 타고 흐르는 바람뿐이었다.
***
호연의 일행은 서북문 앞의 평야를 떠난 뒤 꼬박 사흘이 지나서야 양영 도성에 입성했다. 그들이 객점에 짐을 푼 것은 사영궁 앞에서 간택에 필요한 칙서를 나눠 준다고 고지했던 날의 바로 전날이었는데, 그 날 칙서에 도장을 받아야 이틀 뒤 사영궁에 들어가고 거기서 쉰 명, 그리고 중간인 자정영에서 서른 명. 그 뒤 간택의 마지막인 낙영궁에서 일곱 명을 고른다고 했다.
“정말 칠간택에 참여하는 분이시오?”
하여 호연은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새벽, 칙서를 받기 위해 홀로 사영궁을 찾았다. 하루 종일 걸어와 땅거미가 깔린 궁문 앞에 도착하자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룬 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기다리는 이도 도장을 찍어 주는 이도 전부 지친 기색이 만연했던 터라, 호연은 양영 땅에 들어오기까지 궁문을 넘을 때마다 내도록 들었던 소리를 인내심 있게 참아 넘기며 짧게 답했다.
“그렇소.”
척국의 국경에서 양영의 국경으로 넘어왔던 날, 그녀는 어떻게 국경 하나를 맞대고 있는 땅이 이토록 다를 수 있는 것인지 경탄했다. 동토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선 아직도 척국의 내음이 나는데, 보이는 양영의 풍토만은 꼭 바다나 하늘 위로 올라간 것처럼 전혀 다른 색채를 풍겼기 때문이다.
“허, 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아마 그때 호연이 느꼈던 이질감을 지금 양영 도성의 관리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마차 수나 입고 있는 옷만 보아도 그냥 넘어가면서, 호연의 차례만 되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다 퍼부은 뒤에야 다음 관리로 넘어가는 걸 보니.
“진정 혼자 오셨소?”
말 한 필, 가마 하나 없이 문 앞에 덜렁 와서 선 그녀를 보고 다들 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밀려 있는 사람들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것에, 호연은 일일이 대꾸하는 대신 빨리 도장이나 찍으라며 종이를 들이밀었다.
‘정말 혼자 가신다고요?’
‘응, 괜찮다.’
오늘 새벽, 허리 끈을 단단히 묶고 떠나는 호연을 보며 열이 걱정스레 물었었다. 초행길을 홀로 가려니 호연도 불안한 마음이긴 했지만,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한 방에 몸을 구겨 넣고 피곤에 절어 코를 골아 대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차마 간택연에 데려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걱정되는데요.’
‘괜찮다니까. 할 일도 많은데,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야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른 근육으로 가득한 호연의 몸은 평범한 여인들에 비해 월등히 무거웠다. 척국의 사내들 역시 힘이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것을 알아도 호위를 위해 중간부터 네 명이 짊어졌어야 할 가마를 둘이 지고 왔으니 삭신이 쑤시는 것이야 저이들이 더할 것이다. 이번 간택에 참여한 인원이 족히 일백은 넘는다 하였는데 그럼 다저녁때도 궁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 애당초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나섰을 때부터 양영에 오는 것이 중요했지 간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니 더는 같은 일로 일행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시비도 없이 혼자 오셨습니까?”
마지막 문을 넘을 때가 돼서야 대신들이 호연에게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간택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황족도 있고, 귀족도 있어 누구에게 어떤 존칭을 쓰느냐에 따라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공주이고 아니고를 떠나 출신부터 의심받던 호연은 무례한 말, 반말, 존칭, 극존칭의 순서대로 대우를 받으며 이곳까지 왔는데 거의 모든 말을 귓등으로 들었기 때문에 반말을 지껄이든 말든 무엄하다 소리 한 번을 안 쳤다. 아마 그런 태도가 호연의 신분에 대한 의심에 불을 지핀 모양이다.
“종잇장 한 장 받아 가는 데 시비가 필요한가?”
“그를 들고 가셔야지요.”
“내게도 손이 있네만.”
대답을 하니 모두들 별 이상한 이 다 보겠다는 눈을 한다. 물론 호연 역시 세상천지 뭐 이렇게 게으른 족속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앞을 봤다. 이곳 여인들은 인장을 찍든 부채를 부치든 하다못해 물 한 잔을 마신다 하여도 누구 하나 제 손을 쓰질 않는다. 황제가 계신 곳에선 말도 가마도 안 된다고 하여 다들 바닥으로 내려올 때도 누가누가 늦게 내려오는가를 가지고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대체 팔다리는 왜 달고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 이들뿐이니 이들을 데리고 척국에 가서 겨울 한 철만 살아 보게 한다면 반절은 죽어 나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황족이시니 사영궁까지는 가겠지만 시비도 없고 옷도 그러셔서야, 절대 자정영에 가실 수 없을 겁니다.”
패악을 떠는 다른 귀족들에 비해 묵묵히 할 것을 하는 호연을 좋게 보았는지, 돌아갈 채비를 도와주던 궁인 하나가 흘리듯 말한다. 그 말에 자신의 옷을 훌쩍 내려 보며 막막히 머리를 긁적였다. 궁문만 넘을 수 있으면 되니 가장 수수한 옷으로 달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히려 이리 한 탓에 눈에 띄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름이 무엇이냐?”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여는 호연의 말에 보따리를 싸 주던 손이 딱 멎는다. 그리고 곧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무례를 범한 죄, 백번 사죄드릴 테니……!”
못지않게 당황한 호연이 궁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 해코지를 하려 한 게 아니다. 괜찮으니 일어나.”
놀란 아이를 달래듯 어깨를 토닥토닥거리니 계속 굳어만 있던 여인이 움칠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쳐다본 호연의 얼굴에 걱정만 서린 것을 알고서는 어, 하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린다.
“……정말 황족이 맞으십니까?”
우습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여 호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 황족이다. 무례하다며 소리치지 않으니 위신이 안 서느냐?”
이놈, 하고 혼이라도 내야 하나. 속삭이듯 하는 말이, 아무리 봐도 자신을 어린애로 보고 혼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궁인의 목이 서서히 풀렸다. 반쯤 싸다 만 보따리를 꽁꽁 여미고 어깨에 둘러멘 채 떠나는 호연에게 궁인이 급히 말했다.
“여리입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가 돌아본다. 그에 홀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천민이라 성은 없고,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여리라고 불렸습니다.”
여리, 입 안에서 이름을 굴리던 호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양영은 사람 이름까지 곱구나.”
사방이 꽃잎처럼 화려한 옷뿐이었다. 그 가운에 목화로 된 옷을 입은 뒷모습 하나. 반듯하게 서서 가는 견고한 등이 여리의 시선을 빼앗았다.
욱신거리는 팔뚝을 덜덜 떨고 있던 명운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황자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어쩌면 자신을 곱게 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희망 탓이었다.
“저하……?”
하여 그는 주태원이 채찍을 하늘 높이 쳐들어 그의 얼굴에 내리치려 들 때도 변변히 막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명운을 구한 것은 황자도,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도 아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일을 지켜보던 호연뿐이었다.
챙!
활 끝에 빗겨 맞고 바닥에 떨어지는 채찍을 뒤늦게 본 명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면 채찍에 얻어맞아 머리가 날아갔을 터였다.
“저, 저하!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발 살려 주소서!”
죽음 근처까지 다녀왔다는 걸 깨달은 그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쯤, 황자에게 활을 쏜 호연의 곁에도 병사들이 포진했다. 사냥에 나갔다 돌아온 이들까지 합하니 그 수는 근 사십 명에 가까웠다. 사위가 그리도 삼엄한데, 정작 이 같은 상황을 만든 주태원은 아주 신이 나서 입이 찢어진 채로 말에서 뛰어내려 호연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활을 잘 쏘는구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 보자.”
저이가 미친 것 같아 혼란스러운 호연과 달리 주태원은 내내 부채로 가린 너머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어이 라해와 병까지 밀쳐 낸 이가 그녀가 든 활 바로 앞에 몸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여기, 여길 한번 뚫어 봐라.”
손으로 톡톡 가리키는 것은 주태원의 이마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연이 활을 바닥에 내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무슨…….”
“그리 도망갈 것 없다. 활이 불편하면 다른 것을 써도 돼. 하니 내 몸에 생채기 한번 내 봐.”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진짜 광인인가? 친근하게 몰아붙이는 황자의 태도에 호연이 미간을 굳히며 바로 답했다.
“싫습니다.”
“왜? 난 아주 나쁜 놈이다. 네 말대로 새끼를 밴 짐승도 죽이려 했고 활 못 쏘는 저놈도 채찍으로 후려치려 했어. 한 대쯤 맞아도 괜찮지 않느냐.”
싱글벙글 웃는 주태원의 눈에는 미련이나 머뭇거림 따윈 일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제 몸을 상하게 하라 말했다는 걸 깨달은 호연이, 한층 더 삼엄하게 인상을 굳혔다.
“그래도 싫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 쓰라고 익힌 것 아니에요.”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배를 잡고 웃는다.
“누가 죽는데?”
“네?”
“간도 크구나. 날 죽이면 너도, 네 뒤에 있는 가마꾼들도 아마 곱게는 못 갈 텐데?”
이 여인의 정체가 황족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주태원의 심경은 날아다니는 새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분이 좋다 못해 하늘에 뜬 것 같은 지경이라 내도록 바위 같다 생각한 호연이 아담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생채기만 내 보라는 것이다. 확인할 게 있거든.”
어차피 구척장신이라 해 봤자 그보다는 작은 여인. 끌어안으면 이마가 그의 어깨뿐이 오지 않고, 넓게만 보였던 몸도 소담하여 한 팔에 안길 것 같다. 얼굴 있고, 팔다리 붙었고, 숨이나 제때 쉬고. 그만하면 충분하다 생각해 왔으니 양영 사람에 비해 사뭇 이질적인 호연의 외형도 문제 될 건 없다.
“허나 이마를 뚫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듯 긴 감상을 끝마쳤을 때, 혼자 생각을 거듭하던 호연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눈으로 그에게 답했다.
“사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그를 시키는 이와는 가까이하지도 않고요.”
말을 섞다 보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탓에 무시하고 떠날 수가 없어서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는데, 그사이 황자가 꽤나 은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가진 재주에 비해 성정이 모질지 못하구나.”
어쩐지 조금 전에 말했던 사내와도,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 말했던 사내와도 다른 것 같은 느낌.
“사실 나는 그런 이들을 아주 좋아해. 난 재주가 없는 통에 남의 재주를 사다 쓰는 사람이거든.”
이질감에 눈썹을 치켜뜰 무렵, 귓불 가까이 다가온 뜨거운 입술이 마치 독약 같은 말을 퍼부었다.
“저가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헐값으로 넘기는 이들은 모두 다 환영이지.”
말을 끝낸 주태원이 천천히 사이를 벌려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말로 돌아갈 때까지, 그리고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평야를 떠날 때까지 호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주님, 여기 사람들은 다 저럴까요?”
가마꾼 중 제일 막내인 열이 묻는다. 그 말에 양영에 오기 전, 죽연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라비는 양영의 모든 것이 척국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너 같은 아이가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까지 호연이 양영에 가길 바라지 않던 오라비라 험담만 일삼는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죄다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이는 하나도 없어.”
호연은 활을 주우며 짤막하게 답했다. 그런 호연의 등 뒤로 따라붙은 라해와 병은, 멀어지는 황자의 행렬을 보며 칼자루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담비는 서른 마리가 잡혔다. 평소 성격이라면 쉰 마리를 잡을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사람을 달달 볶아 댔을 주태원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으며 병사들에게 금 한 덩어리씩을 하사하고 빠르게 판을 접었다. 특히나 힘줄이 끊어지도록 활을 당긴 명운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받아 조금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태원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마차에 오른 주태원이 턱을 괴고 평야를 바라봤다. 원하던 이를 이렇게 한순간에 만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 발로 자신에게 열심히 다가와 주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채찍을 막은 걸 보면 눈치는 없어도 경계심은 있는 모양인데…….”
속마음은 언제나 남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속삭이는 주태원의 습성상, 지금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지경인 걸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말이 흙먼지를 만들 때쯤 주태원의 입술이 또다시 움직였다.
“그걸 어떻게 잡아 둔담…….”
들뜬 기색이 완연한 시작의 말. 이번에도 훔쳐 들은 것은 평야를 타고 흐르는 바람뿐이었다.
***
호연의 일행은 서북문 앞의 평야를 떠난 뒤 꼬박 사흘이 지나서야 양영 도성에 입성했다. 그들이 객점에 짐을 푼 것은 사영궁 앞에서 간택에 필요한 칙서를 나눠 준다고 고지했던 날의 바로 전날이었는데, 그 날 칙서에 도장을 받아야 이틀 뒤 사영궁에 들어가고 거기서 쉰 명, 그리고 중간인 자정영에서 서른 명. 그 뒤 간택의 마지막인 낙영궁에서 일곱 명을 고른다고 했다.
“정말 칠간택에 참여하는 분이시오?”
하여 호연은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새벽, 칙서를 받기 위해 홀로 사영궁을 찾았다. 하루 종일 걸어와 땅거미가 깔린 궁문 앞에 도착하자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룬 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기다리는 이도 도장을 찍어 주는 이도 전부 지친 기색이 만연했던 터라, 호연은 양영 땅에 들어오기까지 궁문을 넘을 때마다 내도록 들었던 소리를 인내심 있게 참아 넘기며 짧게 답했다.
“그렇소.”
척국의 국경에서 양영의 국경으로 넘어왔던 날, 그녀는 어떻게 국경 하나를 맞대고 있는 땅이 이토록 다를 수 있는 것인지 경탄했다. 동토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선 아직도 척국의 내음이 나는데, 보이는 양영의 풍토만은 꼭 바다나 하늘 위로 올라간 것처럼 전혀 다른 색채를 풍겼기 때문이다.
“허, 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아마 그때 호연이 느꼈던 이질감을 지금 양영 도성의 관리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마차 수나 입고 있는 옷만 보아도 그냥 넘어가면서, 호연의 차례만 되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다 퍼부은 뒤에야 다음 관리로 넘어가는 걸 보니.
“진정 혼자 오셨소?”
말 한 필, 가마 하나 없이 문 앞에 덜렁 와서 선 그녀를 보고 다들 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밀려 있는 사람들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것에, 호연은 일일이 대꾸하는 대신 빨리 도장이나 찍으라며 종이를 들이밀었다.
‘정말 혼자 가신다고요?’
‘응, 괜찮다.’
오늘 새벽, 허리 끈을 단단히 묶고 떠나는 호연을 보며 열이 걱정스레 물었었다. 초행길을 홀로 가려니 호연도 불안한 마음이긴 했지만,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한 방에 몸을 구겨 넣고 피곤에 절어 코를 골아 대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차마 간택연에 데려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걱정되는데요.’
‘괜찮다니까. 할 일도 많은데,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야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른 근육으로 가득한 호연의 몸은 평범한 여인들에 비해 월등히 무거웠다. 척국의 사내들 역시 힘이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것을 알아도 호위를 위해 중간부터 네 명이 짊어졌어야 할 가마를 둘이 지고 왔으니 삭신이 쑤시는 것이야 저이들이 더할 것이다. 이번 간택에 참여한 인원이 족히 일백은 넘는다 하였는데 그럼 다저녁때도 궁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 애당초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나섰을 때부터 양영에 오는 것이 중요했지 간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니 더는 같은 일로 일행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시비도 없이 혼자 오셨습니까?”
마지막 문을 넘을 때가 돼서야 대신들이 호연에게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간택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황족도 있고, 귀족도 있어 누구에게 어떤 존칭을 쓰느냐에 따라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공주이고 아니고를 떠나 출신부터 의심받던 호연은 무례한 말, 반말, 존칭, 극존칭의 순서대로 대우를 받으며 이곳까지 왔는데 거의 모든 말을 귓등으로 들었기 때문에 반말을 지껄이든 말든 무엄하다 소리 한 번을 안 쳤다. 아마 그런 태도가 호연의 신분에 대한 의심에 불을 지핀 모양이다.
“종잇장 한 장 받아 가는 데 시비가 필요한가?”
“그를 들고 가셔야지요.”
“내게도 손이 있네만.”
대답을 하니 모두들 별 이상한 이 다 보겠다는 눈을 한다. 물론 호연 역시 세상천지 뭐 이렇게 게으른 족속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앞을 봤다. 이곳 여인들은 인장을 찍든 부채를 부치든 하다못해 물 한 잔을 마신다 하여도 누구 하나 제 손을 쓰질 않는다. 황제가 계신 곳에선 말도 가마도 안 된다고 하여 다들 바닥으로 내려올 때도 누가누가 늦게 내려오는가를 가지고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대체 팔다리는 왜 달고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 이들뿐이니 이들을 데리고 척국에 가서 겨울 한 철만 살아 보게 한다면 반절은 죽어 나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황족이시니 사영궁까지는 가겠지만 시비도 없고 옷도 그러셔서야, 절대 자정영에 가실 수 없을 겁니다.”
패악을 떠는 다른 귀족들에 비해 묵묵히 할 것을 하는 호연을 좋게 보았는지, 돌아갈 채비를 도와주던 궁인 하나가 흘리듯 말한다. 그 말에 자신의 옷을 훌쩍 내려 보며 막막히 머리를 긁적였다. 궁문만 넘을 수 있으면 되니 가장 수수한 옷으로 달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히려 이리 한 탓에 눈에 띄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름이 무엇이냐?”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여는 호연의 말에 보따리를 싸 주던 손이 딱 멎는다. 그리고 곧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무례를 범한 죄, 백번 사죄드릴 테니……!”
못지않게 당황한 호연이 궁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 해코지를 하려 한 게 아니다. 괜찮으니 일어나.”
놀란 아이를 달래듯 어깨를 토닥토닥거리니 계속 굳어만 있던 여인이 움칠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쳐다본 호연의 얼굴에 걱정만 서린 것을 알고서는 어, 하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린다.
“……정말 황족이 맞으십니까?”
우습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여 호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 황족이다. 무례하다며 소리치지 않으니 위신이 안 서느냐?”
이놈, 하고 혼이라도 내야 하나. 속삭이듯 하는 말이, 아무리 봐도 자신을 어린애로 보고 혼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궁인의 목이 서서히 풀렸다. 반쯤 싸다 만 보따리를 꽁꽁 여미고 어깨에 둘러멘 채 떠나는 호연에게 궁인이 급히 말했다.
“여리입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가 돌아본다. 그에 홀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천민이라 성은 없고,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여리라고 불렸습니다.”
여리, 입 안에서 이름을 굴리던 호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양영은 사람 이름까지 곱구나.”
사방이 꽃잎처럼 화려한 옷뿐이었다. 그 가운에 목화로 된 옷을 입은 뒷모습 하나. 반듯하게 서서 가는 견고한 등이 여리의 시선을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