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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여전히 꿈을 꾼다

1화

Prologue. 붉은 별의 아이



유년 시절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통은 점차 희미해진다고 하던데…….

나는 뚜렷한 끝을 만난다. 어딘가 단절된, 일부러 잘라 버린 듯한 날카로운 선. 그것은 내 기억의 처음이자 끝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내 과거 중 최초의 순간.

그 기억은 조금 흐릿하지만 이렇게 시작한다.



걷는다. 조금 더 빠르게 걷는다. 더, 더 빠르게!

네 개의 발이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둘은 어른의 것, 나머지 둘은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의 것. 그러나 2명분의 발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단지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상황의 긴박함을 알려 준다.

겨우 어른의 허리춤까지 오는 조그마한 여자아이. 그 작은 손을 붙잡은 여자는 아마도 아이의 어머니. 그녀는 두 팔을 벌려도 다 안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나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제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가, 넌 여기에 있어선 안 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마녀를 잡아라!]

멀리서 들려온 그 소리는 두려움이라는 케케묵은, 그러나 어딘지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서 여길 떠나는 게 좋겠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게.

일순간 바람이 불었다.

휘잉,

머리카락을 높이 날리는 매서운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얽매일 수밖에 없는 3차원의 제약을 가뿐히 무시하고 둘은 낯선 도시에 와 있었다. 해는 어느새 사라지고 깜깜한 어둠이 자신들을 반길 뿐이었다.

말라빠져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나무는 보이지 않고, 대신 축축한 풀 내음이 코끝을 찌른다. 아직 생명력을 가득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의 어딘가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녀를 잡으라고 외치며 뒤쫓던 자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무서운 발걸음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으나, 낯선 세계는 또 다른 두려움을 주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있다가 품에 안겨 들었다. 가쁜 호흡 아래로 느껴지는 거친 심장 박동은 오로지 작은 아이의 몫. 어머니의 것은 평온하기만 하여 의문이었다. 머리 위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별의 운명은 어쩔 수 없어.

무슨 소리냐고 물어도, 어미는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뱉을 뿐이었다.

―이대로 사느니 차라리 이 나라를 뒤엎어 버리는 게 나아. 그게 네 역할이란다.

각성한 마녀들만이 가지는 은색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어머니가 아닌 마녀의 목소리로써.

뜨겁고 아름다운 불길이 일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붉은색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재빨리 달려가 인영을 급히 붙잡았으나 남은 것은 그저 싸늘한 공기.

그리고 남겨진 아이.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멍하니 “가지 말아요.”라는 말을 외쳤다. 어쩌다 버림받게 되었던가? 백치가 된 기분만 들었다. 참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몸이 부르르 떨리는 힘든 감정이 아이를 덮쳤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차가움만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그래, 저 나약한 아이는 나다. 여기는 그 이후로 십 년도 넘게 살았던 익히 잘 아는 곳이다. 아를루 제국의 변방 도시 하르멜.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홀로 버려져 아득한 절망감에 삼켜지는 와중에 현재의 내 스승, 로아가 뒤에서 나를 불렀었다.

―너구나? 그런 선물을 주고 나를 불러내게 한 원인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었다.

―와, 마력을 갖고 있네. 역시 넌 마녀의 아이인가 보지?

―으아아앙!

―그만 좀 울어! 그나저나 큰일이야. 이미 선금을 받았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이거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에 단단히 코 꿰였네.

―엄마, 엄마아. 흐어엉!

대답하지 않고 계속 울어 대는 날 두고 로아는 곤란하다는 소리만 계속 중얼거렸다.

―근데 너 이름은 뭐니?

―아가.

―아니 그런 거 말고 이름 말이야.

―아가라고.

―뭐야. 너 이름이 없니?

―아가-아!

한참을 고민하던 로아는 내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네 눈동자 색을 보니 적당한 게 떠올랐어.

오늘은 마침 정원에 제비꽃이 만개한 날이라고 하면서 ‘아나이스 비올레트(Anais Violet)’라는 이름을 바로…….


RECIPE 01. 그 물약 상점의 마녀



아를루(Arlelue) 제국은 마법사의 나라.

강한 마력을 지닌 자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으므로 마법사라는 작자들은 태생 때부터 힘을 가진 존재.

운이 좋아 마력을 타고났다 해도 마법을 배우지 못하면 마법사가 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황립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갈 재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마력이 있는 인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제국에서 황족은 혜택받은 혈통의 최고봉. 다시 말해, 권력과 실질적인 마법 능력을 모두 가진 절대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는 바로 황태자.

그는 타고난 태생만큼이나 굉장한 마력을 가졌다. 강력한 마법 능력, 비상한 머리에 잘생긴 외모라는 자랑거리를 가지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완벽!

……할 수 있었으나, 그는 알 수 없는 기행을 일삼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고작 젊은 나이에 정치판에 뛰어들어 빨리 늙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하여간 궁정 회의는 정말 쓸데없는 안건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마력이 눈에 띄게 많은 여자를 어떻게 찾아오라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황족도 아닌데 마력이 어떻게 많을 수가 있겠어.”

그 말을 꺼내는 황태자는 마침 본인이 황족이기에 투덜댈 근거라도 있었다.

“여자 마법사가 안 나오는 이유가 뭐겠어? 툭하면 이렇게 마녀사냥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

황태자 본인은 마녀사냥에 참여한 적이 없었으나 딱히 반대한 적도 없었다. 늘 멀찍이 지켜보면서 혀를 찰 뿐이었다.

비록 아를루가 마법사의 나라라곤 해도 발에 챌 만큼 마법사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는 한정된 마력 덕에 실질적인 제약도 많고.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마녀에 비한다면 피라미에 불과하다만, 그들의 존재는 능력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상징이었다.

덕분에 웃기게도, 마법사란 대체로 마녀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을 가진 작자들이기도 했다.

그 사실이 너무도 웃겼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황제가 그런 자부심을 가진 마법사였기에 황태자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웃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아버지도 참. 또 쓸데없이 마녀를 잡고 싶은가 봐. 누가 또 에스테반 2세와 비교를 한 건가? 마녀에게 당했던 과거는 다 잊어버린 역대 황제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군!”

이런, 누가 들었으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황태자는 황궁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순서대로 정렬했을 때 가장 하위에 있을 ‘황제 흉보기’라는 일을 자유롭게 하는 중이었다. 알고 보면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혼잣말을 한 것이고.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었어도 사실 황태자 제디스 에스테반은 나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룰루~ 랄랄라.

그는 외출에 앞서 자신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 빛이 눈부시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왠지 모를 의욕이 샘솟는다. 그동안 미뤄 왔던 일에 도전해 봐도 좋겠어.

금실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 정복을 벗고 조금 평범해 보이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해도 타고난 기품을 다 감추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고개를 조아릴 정도는 아니게 된다.

뭐, 그래도 잘생긴 얼굴은 가릴 수 없겠지. 하여간 아버지가 외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물려주셨단 말이야. 들키기 전에 슬슬 출발해 볼까?

막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거기 서 보세요!”

젠장, 걸렸군. 작게 혀를 찬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 얼굴이 그렇게 화사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에게 붙는 ‘작은 태양’이라는 존칭에 걸맞은 반짝임이었다.

“아니, 찾는 게 있어서 말이야. 잠깐만 나갔다 올게.”

“흐음, 저번에도 아침 정무가 끝나자마자 나가시더니 이번에도 그러십니까? 또 늦게 들어오시면 처리할 서류들이 쌓일 테고 태자님 일을 제가 해 드릴 수는 없잖아요.”

“왜 못해? 내가 마법 인장을 두고 갈 테니 대신 서명만 해 주면 되는걸.”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어디 감히 시종이 황태자의 서류에 손을…….”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주문을 외우자 놓여 있던 깃털 펜에 마법의 힘이 깃들며 서류 위에서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허공을 유영하는 그것은 아주 정확한 필체로 제디스 에스테반(Jedith Esteban)이라는 잉크의 자취를 남겼다. 바로 아를루 제국 유일한 황태자의 이름을.

“자, 그럼 잉크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서류만 제때 잘 바꿔 주면 돼.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아니, 잠깐만요!”

시종이 빠르게 소리친 보람이 없게 이미 황태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텔레포트 마법을 썼다는 증거로써 작게 바람이 휘날리며 빈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 * *



황태자가 자신의 시종을 따돌리며 향한 곳은 평민 마법사가 운영하는 ‘아로로 포션’이라는 마법 물약 상점.

사실 황궁에서 변방 도시 하르멜까지 이렇게까지 먼 길을 넘어올 만한 가치는 없지만, 찾는 것이 있어 굳이 장장 이틀이 걸리는 길을 돌파해 왔다. 물론, 텔레포트 마법으로 금방 왔으니 거리는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머리나 눈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건 아닐까, 고민 중이었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저 여자가 미친 걸까?’

큰 냄비를 이용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을 만들고 있는 긴 흑발의 여자는 얼핏 마녀를 연상케 했다.

머리에 쓴 거대한 고깔모자와 그 고깔 밑에 달린 수술과 솔방울, 그리고 옷 주머니에 들어 있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인형들. 실제로 웃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고약한 생김새라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특히 천장으로 높이 솟은 고깔모자는 당장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휙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