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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여전히 꿈을 꾼다
4화
아나이스는 그냥 웃고 말았다. 잠깐의 유흥치고는 모든 게 너무 본격적이지 않아? 까짓것 춤 한번 춰 주지 뭐! 그리고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발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당연히 못 췄다.
어색해서 조금 뻣뻣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스텝이 꼬여서 발은 자꾸만 엇나갔으며, 더욱이 제디스의 발을 공격 대상으로 인식한 것처럼 밟으려고 들었다.
미심쩍은 눈길로 지켜보던 제디스가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미안하지만 고의는 아녜요.”
제디스는 그런 그녀를 비웃다가 뭐라 중얼거렸는데, 갑자기 움직이는 신발 때문에 아나이스는 까무러칠 뻔했다. 이 미친놈이 신발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꺅! 당신이 그런 거죠? 당장 마법 풀지 못해요?”
“마법사 처음 봐? 호들갑 떨지 말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 몸치와 박치도 능숙한 댄서가 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니까.”
마법 물약을 다루다 보면, 멀쩡하던 약이 갑자기 끓어올라서 온 방에 튀기도 하고 냄비에 구멍이 뚫려서 줄줄 새기도 하고, 온종일 재채기에 시달리기도 하는 등 온갖 돌발 상황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런 변수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마법사에게 정체성 의심을 받으며 강제로 춤춰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지만……. 어디 딴 나라 동화에서 나오는 저절로 움직이는 구두 같은 것, 적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나이스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후엔 원래부터 능숙한 춤꾼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고, 제디스는 그런 모습에서 예상치 못한 흥미를 느꼈다.
‘이렇게 쉽게 요령을 깨닫다니. 생각보다 재밌는 여자야.’
제디스는 자신의 마법을 금방 받아들이는 아나이스에게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는, 조금 매력적이었다.
새삼 깨닫는 사실이지만 제디스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의 미남자였다. 금발이란 게 그리 특이한 색상은 아니라지만, 날아오를 듯 휘날리다가도 사르륵 제자리로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은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게다가 얼굴은 또 어떠한지. 강인하게 느껴지는 눈매와 부드럽게 휘말려 높이 올라간 속눈썹, 그리고 차갑게 굳어 있는 입매와 오리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입술선은 부조화의 극치를 달렸다.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말 자체가 부조화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세기의 미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손색이 없을 테니.
사실 알고 보면, 아나이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그의 생김새도 아니고 조금 제멋대로인 태도는 더더욱 아니고, 따지자면 마력 쪽이었다.
‘마법사란 놈들은 원래 다 이런 거야? 아니면 이 남자가 특이한 거야?’
마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에 마력을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타고난 마력이 너무너무 적어서 그게 마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그것을 ‘매력’으로 느끼기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처럼.
아나이스는 언젠가 자신을 바라보던 동네 청년들의 눈빛이 변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자신의 마력에 끌린 때,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맹목적으로 구애하던 그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마녀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원래 예쁘니까 그런 거라고 운 좋게 넘어갔지.
어쨌든 마력을 가진 사람이 마력에 끌리는 건 천성이고 본능이다. 마치 자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인력이 작용하곤 했다.
‘설마설마하니 지금 내가 그 상황인 거야?’
황금빛의 제디스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듯했다. 귀족적 태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혹은 고려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은연중에 보이는 거침없는 태도는 그의 지위가 낮지 않다는 증거였다.
‘꽤 높은 고위 귀족이겠지. 적어도 백작 이상…….’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묘하게 아까부터 느껴지던 반짝임 때문에라도 그를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잠재된 마력이 거대하기 때문이려나.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빛나는 이유를 달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엄청난 마법사였던 걸까. 내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니 그런 거겠지.’
마력이 있는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이야기다. 타고난 마력이 많은 아나이스에게 아주 작은 마력 따위가 성에 차기나 할까.
그런 자신에게 이토록 영향을 주는 이 남자의 마력이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장된 마력 측정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나이스는 그 매력에 취하는 대신 경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레기가 일쑤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까딱하면 홀리기라도 할 것 같아. 뭐, 내가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라고? 흥, 그쪽이야말로.’
단단히 경계심을 올린 까닭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몸은 신발의 움직임을 따라 스텝을 밟고 있으나 아나이스의 얼굴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에게서 보일 법한 표정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이건 서로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사교 행위 혹은 기쁨과 설렘이 동반되어야 할 춤이 아니라 운동에 불과하게 되었다.
춤을 추는 내내 아나이스의 시선이 이동하는 모양, 눈을 깜박거리는 횟수, 손가락의 작은 움찔거림까지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던 제디스는 그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뭔가 이상한데?’
그녀의 탐스러운 흑발과 그에 대비되는 발그레한 뺨이 마음에 들었으나, 무감각해 보이는 눈과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춤이라는 유흥을 예고 없이, 별안간 끝냈다.
“앗!”
또 다른 돌발 상황에 아나이스는 이번에는 대처하지 못했다. 신발에 걸려 있던 마법이 갑자기 풀려 버리자 발은 균형을 잃고 관성이란 놈이 작용했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것을 다행히 제디스가 받았다.
그런데 완전한 다행은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아나이스는 다시 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안겨 있을 수밖에.
그의 품에서는 어렴풋이 상큼한 레몬 향이 났다. 참 어울리지 않게도.
여기서 당황한 건 아나이스 혼자는 아니었다. 제디스는 포옹이 되어 버린 부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크, 아찔하군.’
자신의 팔 안에 들어오는 여인의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제 가슴팍에 닿는 그녀의 가슴은 생각보다 크고 말랑했으며, 목을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데다가, 그 무엇보다 그녀의 마력이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대했다.
아나이스가 방심했기 때문일까. 흘러나오는 그녀의 마력이 고스란히 제디스에게 전해지며 꽤 큰 충격을 선사했다.
‘이건……. 가짜 마력 같은 게 아니야.’
출처가 자연이건 인간이건 간에, 일단 추출되어 외부로 나온 마력에선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무색무취한 ‘힘’ 그 자체. 그러나 그녀의 마력에는 색깔이 있었고 향기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취할 것 같고 계속 맡다 보면 중독될 것만 같은.
마력이 만들어 내는 이끌림이란, 조용한 폭풍처럼 다가왔다. 그건 제디스의 머릿속에서 어서 이 여인을 취하라는 충동과도 같았다.
앞서 말했지 않은가. 마력은 매력과도 같다고. 더욱이 이렇게 방대한 마력을 가진, 타고난 외모부터 아름다운 여자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생물이었다. 유니콘을 발견했다는 선대의 기록과도 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의혹이 남는다. 이토록 거대한 마력이라니. 의혹은 곧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오고 만다.
“넌 정말로 마녀인가.”
정말 그런 거라면 놓을 수 있는 지금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디스는 충동적으로 여체를 품으로 더 끌어안고 말았다. 그녀를 안은 팔을 풀기는커녕 더욱 세게 옭아맸다.
제디스는 자신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여체와 그녀의 마력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나 이건 절대 아나이스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힘이 풀린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이다.
“저, 저기요.”
“…….”
“이제 놓아 주셔도 될 것 같은데…….”
“…….”
“이봐요?”
“…….”
“아, 안 들리나 봐.”
제디스는 아나이스의 말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이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달되는 이 신선한 마력도 마력이거니와, 볼록하고 탄력 있는 가슴과 그 아래에서 두근대는 심장과, 가녀린 허리와,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이 여인의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지나치게 가까워 예상치 못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리 사이에 숨겨진 신체를 자극하는 찌릿한 감각이 낯설었다. 실은 급작스럽게 상대의 마력이 작용한 것이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인 제디스는 그런 것을 구분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것이 여체를 향해 발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누가 보아도 탐스럽다는 말이 나올 여인이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서야 깨닫다니.
말로 꺼낼 수 없는 충동과 함께 여과되지 않은 노골적인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아, 이 여자를 이대로 안고 싶어.’
그러나 그 생각에 또 당황하고 만다. 처음 만난 여자를 상대로 무슨 생각이냐!
하지만 또 거세게 자극하는 감각과 여자의 미모에 정신을 뺏기고 만다. 그녀의 입술이 뭐라고 움직이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래요?”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리며 세상이 멍멍했다. 그저 그 입술을 취하고 혀를 놀려서 그 맛을 느껴 보고 싶었다.
“……줘요.”
역시 들리지 않는다.
생각건대, 제게 이런 짜릿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런 여자라면 안았을 때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한 번쯤은 품어 보고 싶은데.
‘정말 미치겠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아니, 아니지. 이 여자가 날 이상하게 만드는 거겠지.’
진정하자고, 혹은 이 여자를 품에서 놓아 버리자고 생각했음에도 팔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나이스의 마력은 조심스레 침범해 와 제디스의 무언가를 톡톡 건드렸다. 그것은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 드는 진한 잔상임과 동시에, 신체를 파고드는 자극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후자는 매우 강력했다. 제어하려 해도 제어되지 않는 그 감각은 끊임없이 저를 자극했다. 부드러운 여체와 코끝에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맞추기라도 할 것 같았다.
4화
아나이스는 그냥 웃고 말았다. 잠깐의 유흥치고는 모든 게 너무 본격적이지 않아? 까짓것 춤 한번 춰 주지 뭐! 그리고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발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당연히 못 췄다.
어색해서 조금 뻣뻣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스텝이 꼬여서 발은 자꾸만 엇나갔으며, 더욱이 제디스의 발을 공격 대상으로 인식한 것처럼 밟으려고 들었다.
미심쩍은 눈길로 지켜보던 제디스가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미안하지만 고의는 아녜요.”
제디스는 그런 그녀를 비웃다가 뭐라 중얼거렸는데, 갑자기 움직이는 신발 때문에 아나이스는 까무러칠 뻔했다. 이 미친놈이 신발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꺅! 당신이 그런 거죠? 당장 마법 풀지 못해요?”
“마법사 처음 봐? 호들갑 떨지 말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 몸치와 박치도 능숙한 댄서가 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니까.”
마법 물약을 다루다 보면, 멀쩡하던 약이 갑자기 끓어올라서 온 방에 튀기도 하고 냄비에 구멍이 뚫려서 줄줄 새기도 하고, 온종일 재채기에 시달리기도 하는 등 온갖 돌발 상황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런 변수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마법사에게 정체성 의심을 받으며 강제로 춤춰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지만……. 어디 딴 나라 동화에서 나오는 저절로 움직이는 구두 같은 것, 적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나이스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후엔 원래부터 능숙한 춤꾼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고, 제디스는 그런 모습에서 예상치 못한 흥미를 느꼈다.
‘이렇게 쉽게 요령을 깨닫다니. 생각보다 재밌는 여자야.’
제디스는 자신의 마법을 금방 받아들이는 아나이스에게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는, 조금 매력적이었다.
새삼 깨닫는 사실이지만 제디스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의 미남자였다. 금발이란 게 그리 특이한 색상은 아니라지만, 날아오를 듯 휘날리다가도 사르륵 제자리로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은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게다가 얼굴은 또 어떠한지. 강인하게 느껴지는 눈매와 부드럽게 휘말려 높이 올라간 속눈썹, 그리고 차갑게 굳어 있는 입매와 오리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입술선은 부조화의 극치를 달렸다.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말 자체가 부조화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세기의 미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손색이 없을 테니.
사실 알고 보면, 아나이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그의 생김새도 아니고 조금 제멋대로인 태도는 더더욱 아니고, 따지자면 마력 쪽이었다.
‘마법사란 놈들은 원래 다 이런 거야? 아니면 이 남자가 특이한 거야?’
마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에 마력을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타고난 마력이 너무너무 적어서 그게 마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그것을 ‘매력’으로 느끼기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처럼.
아나이스는 언젠가 자신을 바라보던 동네 청년들의 눈빛이 변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자신의 마력에 끌린 때,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맹목적으로 구애하던 그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마녀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원래 예쁘니까 그런 거라고 운 좋게 넘어갔지.
어쨌든 마력을 가진 사람이 마력에 끌리는 건 천성이고 본능이다. 마치 자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인력이 작용하곤 했다.
‘설마설마하니 지금 내가 그 상황인 거야?’
황금빛의 제디스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듯했다. 귀족적 태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혹은 고려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은연중에 보이는 거침없는 태도는 그의 지위가 낮지 않다는 증거였다.
‘꽤 높은 고위 귀족이겠지. 적어도 백작 이상…….’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묘하게 아까부터 느껴지던 반짝임 때문에라도 그를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잠재된 마력이 거대하기 때문이려나.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빛나는 이유를 달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엄청난 마법사였던 걸까. 내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니 그런 거겠지.’
마력이 있는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이야기다. 타고난 마력이 많은 아나이스에게 아주 작은 마력 따위가 성에 차기나 할까.
그런 자신에게 이토록 영향을 주는 이 남자의 마력이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장된 마력 측정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나이스는 그 매력에 취하는 대신 경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레기가 일쑤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까딱하면 홀리기라도 할 것 같아. 뭐, 내가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라고? 흥, 그쪽이야말로.’
단단히 경계심을 올린 까닭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몸은 신발의 움직임을 따라 스텝을 밟고 있으나 아나이스의 얼굴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에게서 보일 법한 표정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이건 서로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사교 행위 혹은 기쁨과 설렘이 동반되어야 할 춤이 아니라 운동에 불과하게 되었다.
춤을 추는 내내 아나이스의 시선이 이동하는 모양, 눈을 깜박거리는 횟수, 손가락의 작은 움찔거림까지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던 제디스는 그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뭔가 이상한데?’
그녀의 탐스러운 흑발과 그에 대비되는 발그레한 뺨이 마음에 들었으나, 무감각해 보이는 눈과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춤이라는 유흥을 예고 없이, 별안간 끝냈다.
“앗!”
또 다른 돌발 상황에 아나이스는 이번에는 대처하지 못했다. 신발에 걸려 있던 마법이 갑자기 풀려 버리자 발은 균형을 잃고 관성이란 놈이 작용했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것을 다행히 제디스가 받았다.
그런데 완전한 다행은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아나이스는 다시 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안겨 있을 수밖에.
그의 품에서는 어렴풋이 상큼한 레몬 향이 났다. 참 어울리지 않게도.
여기서 당황한 건 아나이스 혼자는 아니었다. 제디스는 포옹이 되어 버린 부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크, 아찔하군.’
자신의 팔 안에 들어오는 여인의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제 가슴팍에 닿는 그녀의 가슴은 생각보다 크고 말랑했으며, 목을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데다가, 그 무엇보다 그녀의 마력이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대했다.
아나이스가 방심했기 때문일까. 흘러나오는 그녀의 마력이 고스란히 제디스에게 전해지며 꽤 큰 충격을 선사했다.
‘이건……. 가짜 마력 같은 게 아니야.’
출처가 자연이건 인간이건 간에, 일단 추출되어 외부로 나온 마력에선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무색무취한 ‘힘’ 그 자체. 그러나 그녀의 마력에는 색깔이 있었고 향기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취할 것 같고 계속 맡다 보면 중독될 것만 같은.
마력이 만들어 내는 이끌림이란, 조용한 폭풍처럼 다가왔다. 그건 제디스의 머릿속에서 어서 이 여인을 취하라는 충동과도 같았다.
앞서 말했지 않은가. 마력은 매력과도 같다고. 더욱이 이렇게 방대한 마력을 가진, 타고난 외모부터 아름다운 여자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생물이었다. 유니콘을 발견했다는 선대의 기록과도 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의혹이 남는다. 이토록 거대한 마력이라니. 의혹은 곧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오고 만다.
“넌 정말로 마녀인가.”
정말 그런 거라면 놓을 수 있는 지금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디스는 충동적으로 여체를 품으로 더 끌어안고 말았다. 그녀를 안은 팔을 풀기는커녕 더욱 세게 옭아맸다.
제디스는 자신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여체와 그녀의 마력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나 이건 절대 아나이스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힘이 풀린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이다.
“저, 저기요.”
“…….”
“이제 놓아 주셔도 될 것 같은데…….”
“…….”
“이봐요?”
“…….”
“아, 안 들리나 봐.”
제디스는 아나이스의 말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이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달되는 이 신선한 마력도 마력이거니와, 볼록하고 탄력 있는 가슴과 그 아래에서 두근대는 심장과, 가녀린 허리와,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이 여인의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지나치게 가까워 예상치 못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리 사이에 숨겨진 신체를 자극하는 찌릿한 감각이 낯설었다. 실은 급작스럽게 상대의 마력이 작용한 것이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인 제디스는 그런 것을 구분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것이 여체를 향해 발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누가 보아도 탐스럽다는 말이 나올 여인이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서야 깨닫다니.
말로 꺼낼 수 없는 충동과 함께 여과되지 않은 노골적인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아, 이 여자를 이대로 안고 싶어.’
그러나 그 생각에 또 당황하고 만다. 처음 만난 여자를 상대로 무슨 생각이냐!
하지만 또 거세게 자극하는 감각과 여자의 미모에 정신을 뺏기고 만다. 그녀의 입술이 뭐라고 움직이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래요?”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리며 세상이 멍멍했다. 그저 그 입술을 취하고 혀를 놀려서 그 맛을 느껴 보고 싶었다.
“……줘요.”
역시 들리지 않는다.
생각건대, 제게 이런 짜릿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런 여자라면 안았을 때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한 번쯤은 품어 보고 싶은데.
‘정말 미치겠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아니, 아니지. 이 여자가 날 이상하게 만드는 거겠지.’
진정하자고, 혹은 이 여자를 품에서 놓아 버리자고 생각했음에도 팔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나이스의 마력은 조심스레 침범해 와 제디스의 무언가를 톡톡 건드렸다. 그것은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 드는 진한 잔상임과 동시에, 신체를 파고드는 자극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후자는 매우 강력했다. 제어하려 해도 제어되지 않는 그 감각은 끊임없이 저를 자극했다. 부드러운 여체와 코끝에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맞추기라도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