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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여전히 꿈을 꾼다
3화
그런 속내를 모르는 아나이스는 마녀라는 단어에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마력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죠. 마녀가 아니니 마법은 못 쓰고요. 근데 언제 가실 거예요?”
제디스라는 남자는 귀찮아하는 아나이스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근처에 다가와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주변을 어슬렁거리질 않나, 이것저것 손대려고 하질 않나. 도무지 물약 만들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구경할 거면 좀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어디 덧나나?’
그러나 애써 무시하기에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셨고 남자의 시선이 조금 따가웠다. 실은 자신을 관찰하는 저 초록색 눈동자가 불쾌하기보다는 신경 쓰였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태연하게 버티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그가 낯선 남자이고 잘생겼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자세한 원인을 모르겠다. 그가 마녀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들킬 것만 같은 기분에 앞치마를 잡은 손끝이 떨렸다.
아나이스는 들키지 않도록 침을 삼켰다. 그러나 입 안이 마르고 있어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진짜 마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두려웠다. 자신의 핏줄만은 정말 마녀와 연관이 있으니까.
‘어쩌면 좋지. 혹시라도 들키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온 제디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정말 의문이야.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나? 어떻게 그쪽이 여기 있는지, 이 정보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해 보시지.”
황족은 마녀를 느낄 수 있으니, 마녀 또한 황족을 알아챌 수 있겠지. 떠보는 말에 걸린다면 정말 마녀일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생각으로 이런 말이 나오긴 했으나 아나이스에겐 수수께끼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건 그쪽이 아닌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뜻이 아니라 이 의심의 진의를 몰라서 당황스럽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네요. 음, 그리고 저는 ‘그쪽’이 아니라 ‘아나이스 비올레트’예요. 아로로 포션에서 일한 지 오래됐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그 순간, 제디스는 더 가까이 다가와 아나이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는 그녀의 손에 있는 국자를 슬쩍 빼내어 옆으로 던졌다.
쨍그랑 탕 탕 탕.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나이스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오늘 물약 제조는 망했구나. 아나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하! 대체 무슨 짓이야?”
“그새 역할 놀이에 심취했나? 원래 여기서 일하던 점원은 어디로 보냈지? 그래, 그 아나이스 비올레트라는 여자. 어디에 숨겼어?”
“무, 무슨 소리예요? 그게 나라니까요! 자꾸 시비 걸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아나이스는 말할수록 더욱 수상해지는 남자의 태도를 보고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게 웬 잘생긴 미친놈이야.’
당황과 분노로 인해 아나이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간신히 참고는 있지만 예쁜 얼굴에는 이미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 헛소리를 듣느라 오늘 치 물약을 못 만들게 생겼다니 조금, 아니 매우 많이, 엄청나게 짜증이 났다.
‘외모로 용서받기에는 이미 글렀어. 이 자식아!’
아나이스는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제디스는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압박했다. 그에 그녀의 입술이 비틀어지며 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프잖아. 이 무례한 사람 같으니!’
그러나 제디스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듯, 비웃음과 웃음의 경계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분노를 드러내는 아나이스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그리고 음산하게 읊조렸다.
“정말 마녀가 아니야? 내 취향은 또 어떻게 알아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사람을 홀릴 것처럼 생겨서는 아니라고 말하면 누가 믿는단 말이야?”
“호, 홀리긴 뭘 홀……!”
“그런 외모와 짙은 마력을 아무나 가질 순 없을 테지.”
“대체 무슨 소릴…….”
“아아, 혹시 가짜 마력을 충전하고 나타난 거라고 거짓말할 생각이면 그만둬. 나는 마녀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러니까 난 마녀가 아니……!”
“쉿.”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끊던 제디스는 아예 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들어 아나이스의 입술을 거칠게 눌렀다. 뭐라 항변할 것처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 아나이스는 숨을 흡, 들이쉬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을 낱낱이 벗겨 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아나이스의 입술을 세게 눌렀다.
그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그러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의 체온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뜨거운 남자의 시선.
숨 막히는 기분에 아나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은 청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가슴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가 입술에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겠다. 분노보다 당황이 더 커지기 시작한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어떻게 봐도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마녀로 몰고 그래? 아니라고 하는데도 아주 막무가내로.’
정말 재수 없고 악의가 담긴 것 같은 비꼬는 말투를 쓰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듣기엔 뭔가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힘으로 찍어 누르고 협박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행동과 달리 정말 그런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빛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노려보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제 얼굴을 관찰하고 있다.
둥글게 아치를 그린 눈썹에서부터 시작된 시선은 아나이스의 속눈썹 한 올 한 올을 훑으며 옆으로 지나가다가 다시 휘어져 콧잔등에서 코끝까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뭔가 비밀을 탐색하는 것처럼 천천히 하나하나 뜯어보는 시선은 이름난 사색가나 비평가의 그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신비하리만치 빛나는, 그러나 어두운 초록색 눈동자 안에 그녀의 얼굴을 담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이 굴었다. 아나이스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포식자가 먹이를 감상하는 눈빛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눈빛으로 발가벗겨질 수도 있는 건가?’
아나이스는 긴장감에 어느새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그시 입술을 누르던 엄지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그에 따라 아나이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러나 제디스는 손을 떼는 대신 나머지 손가락을 펼쳐 아나이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게 너무도 간질거려 아나이스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나이스라고 했지. 어떻게 증명할래?”
“뭘요? 제가 본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계속 말했는데 당신이 안 믿는 것뿐이잖아.”
정말 웃기게도, 제디스는 그 말에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럼 네가 마녀가 아닌 아나이스라는 증거를 보여 줘.”
그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는 부드러웠으나 상대방을 살금살금 찔러 대는 어투였다.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가 아주 잘 보였다.
아나이스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 혹은 ‘어떻게 보여 줘야 하냐. 내가 잘하는 건 물약 만들기뿐인데 마녀도 그걸 잘 하지 않냐. 그럼 해명이 되겠냐.’ 따위의 질문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 남자가 갑자기 손짓하는 게 아닌가.
그가 마법사이니만큼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게 의심스러웠다.
‘지금 마법을 쓴 거야?’
순간 놀라 질끈 눈을 감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쪽 눈을 떠보니 남자는 조금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껏 고압적으로 굴었던 모습을 잊어버릴 정도로.
‘뭐 하는 거지? 마법에 실패하기라도 했나?’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이내 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아나이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물약 제조실 구석구석에 손짓을 보냈는데 그에 따라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책들이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되고 레시피 종이들도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바닥에 쌓여 있던 약초들이 한쪽 구석으로 밀리면서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물러나고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오르골이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휘이익!
누가 던진 것처럼 빠르게 날아온 그것은 아나이스의 근처에서 바로 멈추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곧이어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오르골은 단순한 멜로디 대신 무려 경쾌한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었어?”라고 중얼거리는 아나이스의 허리에 제디스의 팔이 감겨 왔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나이스에게 제디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제 확인해 보지.”
남자는 당황스러워하며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아나이스를 방 가운데로 이끌었다. 에스코트하듯 정중하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저항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잘생긴 얼굴 가득 짙은 미소를 올리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관찰자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묘한 얼굴을 한 그는 허리를 붙잡은 팔을 이끌면서 왈츠 음악에 따라 아나이스 자신의 움직임을 유도하려고 들었다.
아무리 봐도 상황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가 의도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지금 저랑 춤을 추려는 거예요?”
“그렇지. 당신이랑.”
“대체 왜?”
“마녀는 춤을 잘 추거든.”
얼토당토않은 억지였다. 마녀라고 해서 다 춤을 잘 추라는 법이 있나.
“흐응, 그럼 난 당연히 춤을 못 추는 거고? 발이라도 실컷 밟아 드리면 되나요? 그런데 어쩌나. 이런 차림으론 춤을 못 출 것 같은데.”
코웃음을 치는 아나이스를 보다가 제디스는 피식 웃으며 마법을 사용했고, 그녀의 옷은 바로 한쪽 어깨를 드러낸 스타일의 연보라색 드레스로 바뀌었다. 세밀하게 이어지는 비즈와 레이스의 조화가 아름답다 못해 현란했다.
그 치렁치렁함과 화려함에 놀란 것도 잠시. 제디스가 입은 옷도 그녀의 드레스에 딱 맞는 의상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뭐, 겉으로만 보면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3화
그런 속내를 모르는 아나이스는 마녀라는 단어에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마력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죠. 마녀가 아니니 마법은 못 쓰고요. 근데 언제 가실 거예요?”
제디스라는 남자는 귀찮아하는 아나이스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근처에 다가와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주변을 어슬렁거리질 않나, 이것저것 손대려고 하질 않나. 도무지 물약 만들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구경할 거면 좀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어디 덧나나?’
그러나 애써 무시하기에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셨고 남자의 시선이 조금 따가웠다. 실은 자신을 관찰하는 저 초록색 눈동자가 불쾌하기보다는 신경 쓰였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태연하게 버티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그가 낯선 남자이고 잘생겼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자세한 원인을 모르겠다. 그가 마녀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들킬 것만 같은 기분에 앞치마를 잡은 손끝이 떨렸다.
아나이스는 들키지 않도록 침을 삼켰다. 그러나 입 안이 마르고 있어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진짜 마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두려웠다. 자신의 핏줄만은 정말 마녀와 연관이 있으니까.
‘어쩌면 좋지. 혹시라도 들키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온 제디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정말 의문이야.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나? 어떻게 그쪽이 여기 있는지, 이 정보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해 보시지.”
황족은 마녀를 느낄 수 있으니, 마녀 또한 황족을 알아챌 수 있겠지. 떠보는 말에 걸린다면 정말 마녀일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생각으로 이런 말이 나오긴 했으나 아나이스에겐 수수께끼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건 그쪽이 아닌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뜻이 아니라 이 의심의 진의를 몰라서 당황스럽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네요. 음, 그리고 저는 ‘그쪽’이 아니라 ‘아나이스 비올레트’예요. 아로로 포션에서 일한 지 오래됐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그 순간, 제디스는 더 가까이 다가와 아나이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는 그녀의 손에 있는 국자를 슬쩍 빼내어 옆으로 던졌다.
쨍그랑 탕 탕 탕.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나이스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오늘 물약 제조는 망했구나. 아나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하! 대체 무슨 짓이야?”
“그새 역할 놀이에 심취했나? 원래 여기서 일하던 점원은 어디로 보냈지? 그래, 그 아나이스 비올레트라는 여자. 어디에 숨겼어?”
“무, 무슨 소리예요? 그게 나라니까요! 자꾸 시비 걸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아나이스는 말할수록 더욱 수상해지는 남자의 태도를 보고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게 웬 잘생긴 미친놈이야.’
당황과 분노로 인해 아나이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간신히 참고는 있지만 예쁜 얼굴에는 이미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 헛소리를 듣느라 오늘 치 물약을 못 만들게 생겼다니 조금, 아니 매우 많이, 엄청나게 짜증이 났다.
‘외모로 용서받기에는 이미 글렀어. 이 자식아!’
아나이스는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제디스는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압박했다. 그에 그녀의 입술이 비틀어지며 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프잖아. 이 무례한 사람 같으니!’
그러나 제디스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듯, 비웃음과 웃음의 경계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분노를 드러내는 아나이스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그리고 음산하게 읊조렸다.
“정말 마녀가 아니야? 내 취향은 또 어떻게 알아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사람을 홀릴 것처럼 생겨서는 아니라고 말하면 누가 믿는단 말이야?”
“호, 홀리긴 뭘 홀……!”
“그런 외모와 짙은 마력을 아무나 가질 순 없을 테지.”
“대체 무슨 소릴…….”
“아아, 혹시 가짜 마력을 충전하고 나타난 거라고 거짓말할 생각이면 그만둬. 나는 마녀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러니까 난 마녀가 아니……!”
“쉿.”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끊던 제디스는 아예 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들어 아나이스의 입술을 거칠게 눌렀다. 뭐라 항변할 것처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 아나이스는 숨을 흡, 들이쉬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을 낱낱이 벗겨 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아나이스의 입술을 세게 눌렀다.
그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그러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의 체온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뜨거운 남자의 시선.
숨 막히는 기분에 아나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은 청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가슴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가 입술에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겠다. 분노보다 당황이 더 커지기 시작한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어떻게 봐도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마녀로 몰고 그래? 아니라고 하는데도 아주 막무가내로.’
정말 재수 없고 악의가 담긴 것 같은 비꼬는 말투를 쓰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듣기엔 뭔가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힘으로 찍어 누르고 협박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행동과 달리 정말 그런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빛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노려보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제 얼굴을 관찰하고 있다.
둥글게 아치를 그린 눈썹에서부터 시작된 시선은 아나이스의 속눈썹 한 올 한 올을 훑으며 옆으로 지나가다가 다시 휘어져 콧잔등에서 코끝까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뭔가 비밀을 탐색하는 것처럼 천천히 하나하나 뜯어보는 시선은 이름난 사색가나 비평가의 그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신비하리만치 빛나는, 그러나 어두운 초록색 눈동자 안에 그녀의 얼굴을 담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이 굴었다. 아나이스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포식자가 먹이를 감상하는 눈빛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눈빛으로 발가벗겨질 수도 있는 건가?’
아나이스는 긴장감에 어느새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그시 입술을 누르던 엄지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그에 따라 아나이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러나 제디스는 손을 떼는 대신 나머지 손가락을 펼쳐 아나이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게 너무도 간질거려 아나이스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나이스라고 했지. 어떻게 증명할래?”
“뭘요? 제가 본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계속 말했는데 당신이 안 믿는 것뿐이잖아.”
정말 웃기게도, 제디스는 그 말에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럼 네가 마녀가 아닌 아나이스라는 증거를 보여 줘.”
그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는 부드러웠으나 상대방을 살금살금 찔러 대는 어투였다.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가 아주 잘 보였다.
아나이스는 ‘내가 왜 그래야 하냐.’ 혹은 ‘어떻게 보여 줘야 하냐. 내가 잘하는 건 물약 만들기뿐인데 마녀도 그걸 잘 하지 않냐. 그럼 해명이 되겠냐.’ 따위의 질문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 남자가 갑자기 손짓하는 게 아닌가.
그가 마법사이니만큼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게 의심스러웠다.
‘지금 마법을 쓴 거야?’
순간 놀라 질끈 눈을 감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쪽 눈을 떠보니 남자는 조금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껏 고압적으로 굴었던 모습을 잊어버릴 정도로.
‘뭐 하는 거지? 마법에 실패하기라도 했나?’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이내 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아나이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물약 제조실 구석구석에 손짓을 보냈는데 그에 따라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책들이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되고 레시피 종이들도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바닥에 쌓여 있던 약초들이 한쪽 구석으로 밀리면서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물러나고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오르골이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휘이익!
누가 던진 것처럼 빠르게 날아온 그것은 아나이스의 근처에서 바로 멈추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곧이어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오르골은 단순한 멜로디 대신 무려 경쾌한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었어?”라고 중얼거리는 아나이스의 허리에 제디스의 팔이 감겨 왔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나이스에게 제디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제 확인해 보지.”
남자는 당황스러워하며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아나이스를 방 가운데로 이끌었다. 에스코트하듯 정중하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저항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잘생긴 얼굴 가득 짙은 미소를 올리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관찰자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묘한 얼굴을 한 그는 허리를 붙잡은 팔을 이끌면서 왈츠 음악에 따라 아나이스 자신의 움직임을 유도하려고 들었다.
아무리 봐도 상황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가 의도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지금 저랑 춤을 추려는 거예요?”
“그렇지. 당신이랑.”
“대체 왜?”
“마녀는 춤을 잘 추거든.”
얼토당토않은 억지였다. 마녀라고 해서 다 춤을 잘 추라는 법이 있나.
“흐응, 그럼 난 당연히 춤을 못 추는 거고? 발이라도 실컷 밟아 드리면 되나요? 그런데 어쩌나. 이런 차림으론 춤을 못 출 것 같은데.”
코웃음을 치는 아나이스를 보다가 제디스는 피식 웃으며 마법을 사용했고, 그녀의 옷은 바로 한쪽 어깨를 드러낸 스타일의 연보라색 드레스로 바뀌었다. 세밀하게 이어지는 비즈와 레이스의 조화가 아름답다 못해 현란했다.
그 치렁치렁함과 화려함에 놀란 것도 잠시. 제디스가 입은 옷도 그녀의 드레스에 딱 맞는 의상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뭐, 겉으로만 보면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