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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원사 2화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2)


이거 나 먹으라고 준 건가? 불쌍해 보여서? 주위를 뒤늦게 홱 둘러봤지만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음식을 먹는 건 물론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 캡슐을 나가면 똑같이 배가 고플 것이고, 게임 속에서만 섭취하면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맛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쟁반에 가지런하게 놓인 수저를 양손에 들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이 나는 양송이 수프부터 한 숟가락 떠먹었다.

“와…….”

나는 마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감탄사를 뱉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입 안을 뜨뜻하게 적신 양송이의 향은 3분으로 데워 먹는 인스턴트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엔 장어……. 야들야들하게 익은 장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큼한 소스가 아직 잠에 늘어져 있던 눈꺼풀을 번쩍 뜨이게 했다. 요리사를 찾고 싶다. 이런 장인이 내게 적선을 베풀다니! 그의 밑에서 조수가 되어 찌꺼기만 얻어먹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 먹고 접속 종료를 한 후, 또 대강 밥을 차려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맛이 떨어지는 듯했지만 수저를 멈출 수 없었다.

이곳에선 요리사의 스킬이 무궁무진하다. 게임에서 연습하고 현실에서 파는 건 이미 맛집 예약인 수준이었으니까.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유명한 ‘박주부’라는 셰프도 피플 온라인에서 3년을 밤낮으로 연습하고 식당을 차리자마자 빵 떴다는 기사였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분은 피플 온라인의 개발자를 은인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렇지만 제작자도 생각이 있는지 요리사의 직업을 가장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고, 어떤 방식으로 요리를 다루는지는 레벨에 따라 월등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젠 아무나 요리사로 뜨기는 어려웠다.

자고 일어나면 HP가 꽉 채워져 있긴 하지만 음식으로 보충하는 건 비싼 포션을 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차, 이렇게 마구잡이로 먹는 게 아니었는데. 일하고 나서 먹는 게 효율적이었을 텐데 이미 음식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보가 먹기엔 너무나 빵빵한 아이템인데도 주체 하지 못하고 한 번에 해치워 버렸다. 억지로 손을 멈춘 나는 그나마 남은 장어와 갈비 몇 조각을 한 곳에 밀어 두고 다시 호미를 찾아 들었다.

오늘은 씨앗을 심어 볼까?

어느 정도 정리된 공터를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골드찬이 선물해 준 꽃과 열매 씨앗을 꺼냈다. 이것도 흔히 구매할 수 없는 비싼 씨앗들이었다. 실패하면 돈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중해야 했다.

수북한 잡초 더미를 공터 밖으로 밀어 낸 후 성냥으로 불을 지펴 두고 돌아와서 땅을 힘껏 다졌다. 이쪽은 꽃을 피우고, 이쪽은 열매를 피워 볼까……. 머릿속에서 정원의 구조를 열심히 그렸다. 이래 보여도 나는 디자인 전공이었다. 이런 쪽에 써먹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아,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비싼 씨앗을 피우기엔 내 정원사 스킬은 아직 턱없이 모자랐다.

“어떡하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지만 좋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도해 보고 봐야지. 나는 불타고 있는 잡초 더미로 달려가 발로 열심히 불을 껐다. 겨우 건져 낸 잡초 몇 줌을 손에 쥐고 공터로 돌아왔다. 정원사 스킬을 가장 쉽게 올릴 수 있는 방법…….

열심히 뽑은 잡초를 다시 심어야만 했다.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고선 호미로 바르게 다진 잔디를 다시 캐서 잡초를 심었다. 잡초는 심으면 씨앗이 바로 나오기 때문에 나 같은 초보자에게 스킬 경험치 올리기엔 딱이었다.

잡초를 심고 씨앗을 얻고…… 다시 씨앗을 심었다.

[씨앗 심기 스킬이 +1 올랐습니다!]

종일 뽑은 잡초를 내 손으로 심고 있단 자체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러려고 그 비싼 요리를 먹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또 해가 질 때까지 잡초를 심고 뽑기를 반복했다. 등 뒤로 예쁜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 즈음 남은 음식을 먹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잡초 더미 조금만 늦게 태울걸…….

배긴 등이 아팠지만 집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노을이 지는 하늘을 감상하며 누워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바람이 일더니 사람 인영이 나타났다. 나는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뭐야!”

“우니버스 님, 안녕하세요. 또 계셨네요.”

“아…… 골드찬. 놀랐잖아.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거야?”

“팔로잉 스킬 썼어요.”

그거 되게 레벨 높은 스킬 아닌가. 방학이라고 레벨 업을 엄청나게 한 모양이다. 팔로잉 스킬을 쓴 거면 나를 보러 왔다는 건데, 나는 아직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저 누워서 골드찬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골드찬은 작은 몸을 굽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광이라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본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대충 한 커스텀이라 민망해서 손으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골드찬은 내게 칭찬을 했다.

“우니버스 님 잘생기셨네요.”

“어…… 고마워.”

누가 보기에도 예쁘장한 미모를 가진 그보다는 아니었지만, 거의 실물과 가까운 나는 진실된 칭찬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기분이 좋았다. 골드찬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어둑한 공터를 바라보다 아이템 창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등불이었다.

그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등불을 내 얼굴 근처에 비췄다. 갑자기 환해진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손을 뻗자 내 손을 잡아 온다. 얼떨결에 잡고 일어난 나는 골드찬을 내려다봤다. 그는 이번에 내 몸을 훑더니 손을 뻗어 옷을 탁탁 털어 주었다.

“내, 내가 할게.”

“뒤는 못 털잖아요.”

등과 엉덩이까지 찰싹 달라붙은 잡초를 털어 준 골드찬은 당황한 내 손에 등불을 쥐여 주었다.

“이것도 나 가지라고? 선물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닌가…….”

“우니버스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

“아시면서…….”

“뭘?”

“아니에요. 그런데 뭐 하시는 거예요?”

“네가 준 꽃 씨앗 피우려고 스킬 경험치 올리는 중이었어.”

“대담하시네요.”

자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는 골드찬을 흘기며 등을 돌렸다. 중2병에 걸린 모양인지 연신 나를 보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색함을 참을 수 없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잡초를 뽑아야 했다.

“우니버스 님.”

“또 왜.”

“제 선물에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여기.”

“뭔 의미 부… 이것도 나 주는 거야?”

내 앞으로 다가온 골드찬이 세련된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어두컴컴한 지금 쓸 일은 없겠지만 낮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그는 끄덕이며 얼른 받으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매번 받기만 하네. 내가 금방 레벨 올려서 보답할게, 기다려.”

“……네, 기다릴게요. 도전 정신이 대단하시네요.”

뭔 도전. 아, 이 공터를 완벽한 정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도전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번엔 납득할 만한 말이었다.

골드찬은 그 말을 끝맺으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동그랗게 빛의 형상이 번쩍이다 사르르 사그라졌다. 이런 비싼 선물을 스스럼없이 주는 그는 아무래도 금수저인 게 분명했다.

“부럽다.”

그는 한낱 취준생인 나에게 부러움만 안겨 주고 떠나 버렸다.



* * *



나는 일주일 동안 성공한 정원사의 꿈을 안고 공터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간간이 챙겨 주는 음식을 아껴 먹으며 골드찬이 선물해 준 토시가 지저분하게 물들 때까지 정원 가꾸기에 열중이었다.

오늘도 물뿌리개에 마을 중심을 흐르는 강물을 담아서 열심히 내 새끼들의 목을 축여 주었다. 예전엔 식물을 가꾸고 소중히 아낀다는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알 것 같다. 이 새싹들은 하루하루 자라는 내 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삶에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래? 나 스스로 되뇌는 충고였다.

새싹에 물을 다 주고 상태를 살펴보자 꽃과 열매를 피우기까지 약 세 시간이 남았다. 물론 백 퍼센트 꽃이 피는 건 아니다. 복불복이기 때문에 더 정성을 쏟아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레벨도 낮으니까 거의 반절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성공해서 피는 건 골드찬 몇 송이 주고 나머지는 씨앗을 거둬서 다시 꽃을 피워야겠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팻말을 만들기로 했다. 오늘 물을 떠 오면서 강물에 떠내려오는 빈 팻말을 발견했는데 햇빛에 말리니 금세 건조해져서 글씨 쓰기 딱 좋은 상태였다. 이 정원은 내 작품이니까 이렇게라도 티를 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유명해지면 다들 나인 줄 아니까.

미술은 잘하지만 작명 센스는 없는 나는 간단하게 내 이름을 넣어서 [우주 정원]으로 짓기로 했다. 연필조차 없는 쪼렙이라 잡초를 빻아서 물감을 만들듯 물에 개어 잡초 뭉치를 손으로 잡고, 짙은 초록색으로 두어 번 덧그리듯 써넣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화려하고 큰 팻말로 바꿔야지. 그래도 주변에서 뽑아 온 남색, 노란색, 보라색의 잡초가 있어서 그것도 빻아 글씨 주변에 탁탁 뿌려 넣자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꽤 나쁘지 않았다. 진짜 우주 느낌이 나는 것도 같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잔디를 파내고 팻말을 세게 박아 넣었다. 캡처도 한 장 찍어 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엔 성처럼 큰 집 빼고는 집이 없었다. 나중에 집을 짓는다면 정원 근처에 짓는 게 좋겠다. 그래야 돌보기 쉬우니까 말이다.

남은 시간은 잡초를 심고 씨앗을 거두고 다시 뽑는 일을 반복했다. 일주일 동안 이 일만 계속하니 내 정원사 스킬 레벨은 어느 정도 꽃을 피울 정도는 됐다. 눈을 감고 검지로 한 곳을 가리키자 뽁 하고 작고 빨간 꽃이 솟아났다. 진짜 신기하네.

또 해 볼까.

내가 서 있는 곳부터 손으로 원을 그리듯 둥글게 콕콕 찍으며 하트 모양을 그렸다.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꽃이 무작위로 피어났다. 빨간 장미, 노란 튤립, 하얀색의 프리지어 등 전보다 퀄리티 높은 꽃들도 중간중간 솟아났다.

저건 뽑아서 저렴하게 팔아야지.

그때 등 뒤에서 바람이 일었다. 싸늘한 느낌에 목덜미를 긁적이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아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바람이 불었다. 센 바람에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누군가 다녀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야…… 무섭게.”

팔뚝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핀 꽃들을 모조리 뽑았다. 손안에 모은 씨앗은 중고 장터에 올려놨고…… 꽃이 필 때까지 가만히 누워서 HP나 채워야겠다.

사람들이 이래서 게임에 중독되는 건가? 살랑이는 바람이 앞머리를 흩날리게 하고 마을에서 불어오는 맛있는 점심 냄새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예쁜 새들과 요정 NPC들……. 현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평화로웠다. 이곳에서 직장을 찾는 사람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이미 정원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긴 하지만.

낮잠이나 잘까 싶어 골드찬이 준 선글라스를 쓰고 눈을 살며시 감았는데 마을에서 결혼식을 하는지 맑은 피아노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 찰나, 맞춰 둔 스킬 타이머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니버스 님, 설정해 둔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연장하시겠습니까?]

연장 대신 종료 버튼을 누르고 빠르게 새싹 앞으로 달려갔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10, 9, 8, 7…….]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제발 성공해라.

0이 되기가 무섭게 첫 번째로 심은 새싹이 흰빛을 내며 환히 빛나는가 싶더니 급속도로 회색빛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순서대로 하나둘씩 불에 타 버린 것처럼 시들어 가더니 다섯 번째로 핀 꽃에서 다른 반응이 일어났다. 좌우로 흔들리던 새싹에서 봉우리가 솟고 퐁 하고 빨간 튤립이 피어났다.

[성공! 정원사의 스킬 ‘꽃 피우기’가 +1 올랐습니다.]

아싸!

비싼 꽃 하나 피워 낸 게 어디인가. 만지면 부서질까 봐 꽃잎을 어루만지듯 두르며 감탄했다. 물뿌리개에 남아 있던 물을 조심히 부어 주고 두 번째 줄에 심은 꽃을 확인하기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두 번째 줄은 더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하나도 안 피냐고. 상심의 한숨을 푹 쉬는데 아까처럼 뒤에서 바람이 홱 하고 불었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신발이 방금 피워 낸 내 새끼를 꾹 밟고 서 있었다.

“안 돼!”

선글라스를 빠르게 벗으며 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짓밟힌 튤립에서 빨간 물이 새어 나왔다. 마치 살인 현장을 보는 듯했다. 나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앞에 서 있는 다리를 밀쳤다.

“우니버스 님?”

내가 어떻게 피워 낸 꽃인데!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올려다보자 휘청한 골드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고백 준비는 다…….”

“왜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냐고!”

“네?”

“하나밖에 안 핀 건데…… 안 그래도 너 주려고 했단 말이야. 네 발로 짓밟았으니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역시.”

역시는 무슨 역시. 선물 받은 씨앗이니 자기 돈을 날려 먹었다는 뜻인데, 금수저는 이런 작은 꽃에 생명이라곤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아직은 포기하기 이르다. 그가 준 열매 씨앗이 남아 있으니 다음 주는 거기에 전념해야겠다.

골드찬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나를 보며 쭈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신발 밑창엔 내 튤립이 조각난 채 볼품없이 붙어 있었다.

“제가 다 망쳤어요. 미안해요.”

“아니, 뭐…… 다시 키우면 되니까 괜찮아.”

“……빨간 튤립이네요. 이 꽃의 꽃말이 뭔 줄 알아요?”

나는 바스러진 꽃잎과 시든 꽃을 주워 담으며 정수리로 떨어지는 그의 말을 흘렸다. 알 게 뭐람. 키우는 게 중요할 뿐 그런 감성적인 의미엔 관심이 없었다. 밑창에 삐죽 튀어나온 꽃잎을 뗀 골드찬은 버리지 않고 손으로 감싸며 알 수 없는 말을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사랑의 고백.”

아직도 울려 퍼지는 결혼식 연주가 그의 작은 속삭임을 막아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되묻자, 어쩐지 볼을 살짝 붉힌 표정으로 나타날 때와 비슷하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홍길동이야 뭐야.

저번부터 자꾸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답답해서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받은 게 많아서 그럴 수는 없었다. 열매라도 제대로 키워서 선물해 줘야지. 생각보다 경험치가 빠르게 올라서 꽃을 피울 때보단 시간이 적게 걸릴 것 같다.



* * *



아, 이러다 다시 게임을 접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정원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은 작심삼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허무하게 성공한 꽃을 날려서 그런지 열매에는 정성이 조금 덜 들어갔다. 새싹에 직접 물을 주지 않고 가랑비를 내리듯 시간 날 때마다 설설 주고 급히 구한 단기 아르바이트에 집중하느라 게임에 잘 접속하지도 못했다.

신경을 안 쓴 것치곤 새싹은 하나도 시든 것이 없었다. 드디어 일주일이 지났고, 열매가 맺힐 시간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재미없는 공터에 앉아 기다리기는 지루해서 그동안 밥을 먹고 올 생각으로 종료를 했다. 대충 점심을 차려 먹고 못 본 예능을 한 편 보고,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잊고 있던 열매가 생각이 났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긴장되는 마음으로 피플 온라인에 접속했다. 신비로운 배경음과 함께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나는 곧장 열매 밭으로 향했다. 눈 옆에 뜨는 알람에선 연신 열매 맺기가 성공했다는 효과음이 울렸다.

직접 보지 않아도 반 이상은 맺었다는 의미였다.

“……?”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열매 밭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성공했다고 알람이 왔는데…….

이력을 살펴보자.

열매가 뽑힌 곳을 눌러 열심히 아래로 드래그했다.

[우니버스 님이 물을 주었습니다.]

[우니버스 님이 물을 주었습니다.]

[성공! 정원사의 스킬 ‘열매 맺기’ 가 +1 올랐습니다.]

일주일간의 기록을 쭉 내리자 제일 밑에 낯선 닉네임이 보였다.

[천재영재 님이 열매를 수확했습니다.]

[천재영재 님이 열매를 수확했습니다.]

“……개아름다운 세상!”

나는 분명 욕을 뱉었는데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진짜!

“멍멍! 삐약! 개저는 평화를 사랑해요! 알러뷰!”

자유도 높은 게임이라면서 무슨 욕도 못 하게 하는 거야? 필터링이 된 채 나오는 말은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다.

열매가 뽑힌 자리에서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 발을 구르며 열불을 내는데, 뒤에서 바람이 일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니버스 님! 무슨 일이에요?”

“사랑해!”

나는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골드찬에게 놀라 다시 아름다운 욕설을 뱉었다. 또 나를 팔로우한 모양인지 놀란 눈으로 내 성난 표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내 욕설을 듣고 제 가슴팍에 손을 대며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네?”

“아, 답답해. 누가 내 열매를 서리해 갔어. 미안, 또 돈 날려 먹었네…….”

“…….”

“이제 씨앗도 없는데.”

열을 식히며 한숨을 폭 내쉬자 내 숨에 골드찬의 빛나는 머리가 사르르 휘날렸다. 멍한 눈을 하던 골드찬이 내 말을 듣고 무언가 조작하기 시작했다. 햇빛이 뜨거운지 그의 얼굴이 발개졌다.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또 선물을 주려는 게 아닐까. 나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처럼 살짝 기대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