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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원사 3화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3)
가만히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드찬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자 여태 심었던 씨앗이 와르르 쏟아졌다. 저번보다 많은 양이었다. 나는 냉큼 두 손을 내밀어 씨앗을 받았다. 그는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골드찬. 이번엔 정말로 잘 키울게.”
“이제 아무도 서리해 가지 못할 거예요. 힘내세요, 우니버스 님.”
“응, 너 때문에 미안해서라도 게임 못 접겠다.”
“……접다니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예요. 포기하지 마세요.”
골드찬의 부모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많고 예의도 바르네……. 조금 전까지 욕을 마구잡이로 내뱉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씨앗을 아이템 창에 고이 저장해 두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이리저리 흩트렸다. 간지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골드찬은 내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홱 하고 고개를 뒤로 뺐다.
“이, 이건 반칙이에요. 그럼 열심히 키워 보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오늘은 작별 인사까지 하고 사라지는 예의 바른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져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골드찬이 사라지자 공터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다시 쭈그려 앉아 꽃과 열매 씨앗을 골고루 심었다.
천재영재라는 놈 걸리기만 해 봐라. 팻말까지 세워 뒀는데 서리를 해 가다니…….
기억하기 쉬운 닉네임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호미로 야무지게 땅을 팠다. 내 사유지도 아니라서 폴리스한테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정원을 완성했을 때, 주민들이 놀러 온다면 그놈은 블랙리스트로 등록해서 얼씬도 못 하게 해야지. 골드찬이 아니었으면 화가 나서 게임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박주부에게 개발자가 은인이라면 나에겐 골드찬이 게임 속 은인이었다.
씨앗을 심고 보니 골드찬이 이번에 준 씨앗은 더 비싼 씨앗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일주일을 기다려서 열매와 꽃을 피웠다면, 지금 심은 씨앗은 사흘만 기다리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사흘 동안은 천재영재가 드나들지 못하게 감시를 해야겠다.
오늘의 일을 끝마치니 골드찬에게 귓속말이 왔다. 진짜 귀 옆에서 속삭이듯 골드찬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우니버스 님, 저녁 식사 같이할래요? 근처 레스토랑 쿠폰이 생겼거든요. 의미 부여는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HP가 다 떨어져 가는데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곧장 답장을 눌러 손을 입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되나?
“응, 좋아. 어디로 가면 돼?”
-……크게 말해도 돼요. 귀 간지러워요. 10분 뒤에 마을 분수대 앞에서 만나요.
나는 그 말에 비밀스럽게 숙인 몸을 펴고 머쓱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이따 보자.”
더러워진 토시를 벗어서 아이템 창에 넣어 두고 옷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옷도 한 벌밖에 없어서 레스토랑에 꼬질꼬질하게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게임이니 상관없었다. 분수대 근처라면 레이브 씨의 레스토랑을 가려는 건가? 매일 물을 떠 올 때마다 지나쳤던 곳인데 워낙 유명하고 비싼 데인지라 발을 들일 생각도 못 했던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음식을 하나도 못 먹었다. 맛있는 장어덮밥을 챙겨 주던 사람은 날 벌써 잊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과 열매로만 채우던 HP를 얼마 만의 음식으로 채워 보는 것인가! 거긴 연어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던데. 먹을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아차,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천재영재가 또 언제 올 줄 알고.
그래도 음식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밭 아래 공간에 나뭇가지로 크게 글씨를 써넣었다. 이 정도면 찔려서 서리할 생각은 들지 않겠지.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서리해 가면 죽음뿐. 양심을 지키시오.]
나뭇가지를 던지고 손을 마저 털었다. 지저분한 손은 분수대에서 씻어야지. 현실에선 안 그러는데 게임만 들어오면 초라해지는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하자 약속 시각이 5분밖에 안 남았다. 뛰어가기에는 소모가 큰 HP를 아껴야 해서 슬슬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 속도면 충분히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조금씩 지는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저녁 시간엔 볼거리가 더 많았다. 분수대로 가는 길에는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는 부부와 불꽃놀이를 하는 남자, 머핀을 파는 여자, 춤을 추는 NPC들이 눈과 코를 심심하지 않게 했다. 마치 해외여행을 온 것처럼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각이 넘어 버렸다. 어차피 음식을 먹을 거니까 남은 HP는 뛰는 데 써 버리자 싶어 서둘러 뛰었다.
빠르게 도착한 분수대 앞에는 골드찬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아까의 캐쥬얼한 차림과 달리 깔끔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레스토랑 간다고 분위기 좀 낸 건가. 꼭 사립학교에 다니는 똘똘한 전교 1등 같아 보였다.
손을 흔들며 골드찬의 시선을 끌자 그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좀 늦으셨네요. 절 기다리게 하시다니.”
“미안, 미안. 오면서 정신이 좀 팔려 가지고. 갈까?”
“네, 따라오세요.”
골드찬은 나를 레이브의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분수대에서 가까운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도 아늑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커다란 간판에는 레이브 씨의 근엄한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레이브 씨는 커다란 몸집의 불곰이다. 하지만 다혈질일 것으로 보이는 얼굴과 달리 성격은 매우 여린 분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강에서 직접 연어를 낚시해서 한정된 개수로만 음식을 팔고, 번 돈으로 초보 여행자를 돕는 선량한 NPC라고 했다.
골드찬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서며 홀을 둘러보았다. 마치 숲에 들어온 것처럼 오래된 나무 향이 났다. 꼭 예전에 전 여자 친구와 함께 갔던 캔들 가게에서 맡아 본 냄새와 비슷했다. 레이브 씨는 음식을 하고 있는지 주방에서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났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이 없어서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들었다. 뭐, 볼 것도 없이 연어 스테이크를 먹으러 온 거긴 하지만. 위에서 달랑거리는 꽃 모양의 조명이 메뉴판을 조준해 비췄다.
“나는 연어 스테이크 먹을래.”
“저도요. 와인도 드실래요?”
“무슨 와인이야. 주스나 시키자.”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벌써부터 까져 가지고.
골드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놓인 작은 종을 흔들었다. 옅은 무지갯빛이 공중에 흩날리며 부엌으로 날아갔다. 살짝 어둑한 레스토랑과 참 잘 어울리는 종이었다.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레이브 씨가 주방에서 나와 우리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역시 실제로 보는 레이브 씨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게임인데 왜 이렇게 무섭게 생긴 거야. 긴장한 나와 달리 여유로운 손짓의 골드찬은 메뉴판을 짚으며 주문했다.
“연어 스테이크 두 개랑 신비한 산딸기 주스 두 잔 주세요.”
“네, 골드찬. 즐거운 데이트 되셔요.”
“데, 데이트라니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에구, 귀여우셔라.”
레이브 씨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친근하게 웃었다. 섬뜩하지만 다정한 미소였다. 그는 주문서에 하나씩 받아 적더니 골드찬을 향해 윙크하고선 다시 주방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둘이 친한 사인가? NPC와도 친밀도를 올릴 수 있긴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NPC가 하나도 없었다. 기회가 되면 레이브 씨처럼 큰 동물 말고 귀여운 토끼나 요정이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우니버스 님, 오해하지 마세요. 레이브 씨가 농담한 거예요.”
“무슨 오해?”
“데이트…한다는 거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난 신경 안 써.”
“……네. 많이 해 보셨나 봐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어쩐지 시무룩해진 골드찬의 표정을 보며 말을 하다 말고 번쩍거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브 씨의 레스토랑 위치는 강 옆이라서 밤낚시를 하는 유저와, 돌다리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유저들을 볼 수 있었다.
불꽃놀이… 해 보고 싶다. 어둑해진 하늘과 대비되는 불꽃놀이의 화려한 불빛이 내 눈동자를 마구 일렁이게 했다.
“불꽃놀이 해 보고 싶어요?”
“응…….”
골드찬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고맙게도 먼저 물어봐 주었다. 이렇게 대답하면 하자고 하겠지. 골드찬은 항상 그랬으니까. 나는 그에게 많은 양의 씨앗을 받은 이후부터 매우 뻔뻔해졌다. 어린애의 등골을 빼먹는 건 양심에 찔렸지만, 금수저 같은데 뭐 어때.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같이 좀 즐겨 보자는 의미일 뿐이었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골드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너무 데이트 같은데.”
“커플만 불꽃놀이 하라는 법 있어?”
그러고 보니 여태 본 사람들은 모두 커플이었다. 사이좋게 달라붙어 불꽃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진을 찍고…… 그들은 불꽃놀이를 추억을 남기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게임에서 여자 친구 만드는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계속 보고 있자니 조금은 부러웠다.
“생각해 볼게요.”
“…….”
이런 면에선 조금 쪼잔하네. 골드찬도 금방 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둘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손을 꼼지락대고 있는데 쿵쿵 소리가 나며 콧속으로 맛있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레이브 씨가 웃으며 커다란 두 손에 든 접시를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어 스테이크는 눈으로만 보아도 이미 맛있었다. 분홍빛의 연어가 노릇하게 익어 고소한 냄새가 나고, 위에는 크리미한 소스가 듬뿍 얹혀 있었다. 위쪽엔 샐러드와 케이퍼가 레몬과 함께 놓여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새빨간 산딸기가 갈린 주스가 놓였다. 신비한 산딸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스 속 갈린 산딸기가 신선하게 반짝였다.
“오늘 아침에 갓 잡은 연어 중 가장 크답니다. 느끼하지 않게 소스에 오이 피클도 갈아 넣었어요.”
“고마워요, 레이브 씨.”
골드찬을 보며 슬쩍 웃은 레이브 씨는 내가 포크로 연어를 크게 한 조각 잘라 눈이 동그랗게 뜨일 정도로 맛있게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연어는 마트에서 사 먹는 퍽퍽한 연어 살과는 차원이 달랐다.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맛이었다. 나는 레이브 씨를 올려다보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진짜 맛있어요. 이런 음식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매일 올게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언제든 환영해요, 우니버스 님. 그럼 즐거운 식사 되셔요.”
“네, 잘 먹겠습니다.”
앞으로는 밖에서 연어 못 먹겠다. 게임이 이렇게 사람 입맛 하나를 바꿔 놓는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꼬질꼬질한 작업복을 입고 허겁지겁 연어를 먹는 나는 누가 봐도 초라해 보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거다.
비싼 요리답게 한 입씩 먹을 때마다 HP와 경험치가 조금씩 올랐다. 눈 깜빡할 새에 그릇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남은 산딸기 주스를 단번에 마셨다. 입 안에서 퍼지는 새콤달콤함이 내 정수리 위에서 맑은 효과음을 내며 팡팡 터졌다.
골드찬은 밥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인지 이제야 마지막 연어 조각을 우물거리며 주스로 목을 축였다. 그의 입가에 우유 수염처럼 주스 수염이 발갛게 났다. 여긴 냅킨이 없나?
“여기 묻었어.”
몸을 살짝 일으켜 닦아 주려고 하자 골드찬의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그는 잘 놀라는 편인가 보다. 저번에도 흠칫흠칫 몸을 떨더니 이번에도 나를 보고 몸이 살짝 덜컹거렸다.
“제가 할게요.”
“그러든지.”
“……닦아 주고 싶어요? 마침 냅킨이 저기 있네요.”
눈을 굴리던 골드찬이 내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뒤 테이블에 냅킨이 놓여 있었다. 팔을 뻗어 두어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네자 받지 않고 나에게 얼굴을 슬쩍 가까이 했다.
뭐, 닦아 달라는 건가? 밥도 얻어먹었는데 이 정도야 못 할 건 없지.
그의 입가가 버석하게 굳기 전에 냅킨을 뭉쳐 슥슥 문질렀지만 이미 산딸기 색이 번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닦아 줬는데도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더 웃겨 보였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기며 말했다.
“다 됐다.”
“고마워요, 우니버스 님.”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더니 금세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따가 공터에 돌아가면 실컷 웃어야지. 종료하고 잘 때도 생각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쁜 미모에 그렇지 못한 청결은 내 독특한 웃음 코드를 자극했다.
“후식 나왔답니다. 꿀에 적셔 먹는 포근한 시폰 케이크예요. 제가 직접 딴 꿀이랍니다. 연하게 개서 많이 달지 않을 거예요. 그릇 치워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셔요.”
차라리 맛있게 먹으라고 협박하는 게 나을 정도로 섬뜩하게 눈웃음을 지은 레이브 씨가 큰 손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접시에 케이크를 한 조각, 그 옆에 더 작은 종지에는 꿀을 담아 가져왔다. 안 그래도 단 게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골드찬, 여기 진짜 최고다.”
“마음에 들어요?”
“응, 현실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만큼 맛있는 연어는 먹어 본 적이 없어.”
“저 그거 비슷하게 할 수 있어요. 요리가 취미거든요.”
“정말?”
따끈하고 촉촉한 시폰 케이크를 꿀에 적시며 느릿하게 끄덕인 골드찬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의외네. 곱게 자라서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힐 것같이 생겼는데. 금수저는 요리 수업이라도 받는 걸까. 아니면 요리사가 꿈이라든가. 레이브 씨와 비슷한 맛을 내는 거면 월등한 실력이라는 거겠지.
“네가 한 것도 먹어 보고 싶다.”
“……생각해 보고요.”
얘는 생각한다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저녁 식사도 끝나 가는데 불꽃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생겼을까. 지금 시간대에 하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불꽃놀이 할 거야?”
“아직 결정 못 했는데…… 나갈 때 한 번 더 물어봐 주세요.”
“알았어.”
까다롭긴.
남은 시폰 케이크를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일어섰다. 더 어둑해지기 전에 불꽃놀이를 할지 말지 결정하고, 밭을 지키러 가야 했다. 붉은 입가를 고상하게 두드려 닦던 골드찬이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뒤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표정 관리하는 데 열중했다. 이따가 사진으로 찍어 둬야지.
“골드찬, 우니버스 님 식사는 즐거우셨나요?”
“네, 정말 잘 먹었어요.”
“다음에 또 들러 주셔요. 이건 손님에게 드리는 오늘의 선물이에요.”
레이브 씨가 커다란 발 같은 손으로 쿠키 두 개를 건넸다. 익숙한 모양새의 쿠키는 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포춘쿠키였다. 하나씩 건네받은 쿠키 사이에 하얀 쪽지가 보였다. 딱딱한 포춘쿠키를 뽀각 반으로 가르자 부스러기가 떨어지며 쪽지가 드러났다. 쪽지를 펼치자 연두색의 방울들이 퐁퐁 공중으로 솟았다.
[새로움이 싹틀 시기네요. 그것은 당신을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싹이 터? 내 정원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대기업에 취직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만이 날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이었다. 재미로 하는 거긴 하지만 괜한 의미 부여를 하게 만드는 심오한 문구였다. 나와 동시에 쿠키를 쪼갠 골드찬은 진지한 눈빛으로 문구를 읽고 있었다. 어떤 문구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슬쩍 눈을 흘기자 내가 못 보도록 쪽지의 각도를 틀었다.
“골드찬, 뭐 나왔어.”
“궁금하죠?”
“응.”
“여기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말을 흐린 골드찬이 내게 쪽지를 들이밀었다. 그의 쪽지에선 달콤한 향기가 풍기며 글씨 위에서 통통한 하트가 나 좀 봐 달라는 듯 귀엽게 튀어 올랐다.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네요. 조금 더 솔직해지세요.]
사랑에 관한 문구인가? 하긴, 한창 학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지. 같은 반 친구라든가, 교생 선생님이라든가. 좋을 때다. 나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쪽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여전히 붉은 입을 가진 골드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때요?”
“설레는 말이네.”
“……역시.”
그는 소중한 것이라도 감추듯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매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불꽃놀이 하고 싶어졌어요. 강가로 가요.”
* * *
강가로 온 골드찬과 나는 아까 커플이 불꽃놀이를 하고 갔던 명당에 나란히 섰다. 골드찬이 공중에서 이것저것을 만지더니 내 손 가득 폭죽을 쥐여 주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 희한한 폭죽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일단 작은 것부터 해 볼까. 근데 어떻게 하는 거지. 성냥도 다 쓴 데다가 라이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골드찬, 이거 불은 어떻게 붙여?”
“저 주세요.”
폭죽을 다시 가져간 골드찬이 검지를 튕겨 도깨비불을 만들었다. 신기해서 몰래 따라 해 봤지만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슥슥 살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그가 작은 폭죽에 불을 붙이자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골드찬은 곧 터질 것 같은 폭죽을 내게 건네주고 자기 것에 불을 붙였다.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3)
가만히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드찬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자 여태 심었던 씨앗이 와르르 쏟아졌다. 저번보다 많은 양이었다. 나는 냉큼 두 손을 내밀어 씨앗을 받았다. 그는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골드찬. 이번엔 정말로 잘 키울게.”
“이제 아무도 서리해 가지 못할 거예요. 힘내세요, 우니버스 님.”
“응, 너 때문에 미안해서라도 게임 못 접겠다.”
“……접다니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예요. 포기하지 마세요.”
골드찬의 부모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많고 예의도 바르네……. 조금 전까지 욕을 마구잡이로 내뱉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씨앗을 아이템 창에 고이 저장해 두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이리저리 흩트렸다. 간지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골드찬은 내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홱 하고 고개를 뒤로 뺐다.
“이, 이건 반칙이에요. 그럼 열심히 키워 보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오늘은 작별 인사까지 하고 사라지는 예의 바른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져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골드찬이 사라지자 공터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다시 쭈그려 앉아 꽃과 열매 씨앗을 골고루 심었다.
천재영재라는 놈 걸리기만 해 봐라. 팻말까지 세워 뒀는데 서리를 해 가다니…….
기억하기 쉬운 닉네임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호미로 야무지게 땅을 팠다. 내 사유지도 아니라서 폴리스한테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정원을 완성했을 때, 주민들이 놀러 온다면 그놈은 블랙리스트로 등록해서 얼씬도 못 하게 해야지. 골드찬이 아니었으면 화가 나서 게임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박주부에게 개발자가 은인이라면 나에겐 골드찬이 게임 속 은인이었다.
씨앗을 심고 보니 골드찬이 이번에 준 씨앗은 더 비싼 씨앗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일주일을 기다려서 열매와 꽃을 피웠다면, 지금 심은 씨앗은 사흘만 기다리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사흘 동안은 천재영재가 드나들지 못하게 감시를 해야겠다.
오늘의 일을 끝마치니 골드찬에게 귓속말이 왔다. 진짜 귀 옆에서 속삭이듯 골드찬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우니버스 님, 저녁 식사 같이할래요? 근처 레스토랑 쿠폰이 생겼거든요. 의미 부여는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HP가 다 떨어져 가는데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곧장 답장을 눌러 손을 입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되나?
“응, 좋아. 어디로 가면 돼?”
-……크게 말해도 돼요. 귀 간지러워요. 10분 뒤에 마을 분수대 앞에서 만나요.
나는 그 말에 비밀스럽게 숙인 몸을 펴고 머쓱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이따 보자.”
더러워진 토시를 벗어서 아이템 창에 넣어 두고 옷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옷도 한 벌밖에 없어서 레스토랑에 꼬질꼬질하게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게임이니 상관없었다. 분수대 근처라면 레이브 씨의 레스토랑을 가려는 건가? 매일 물을 떠 올 때마다 지나쳤던 곳인데 워낙 유명하고 비싼 데인지라 발을 들일 생각도 못 했던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음식을 하나도 못 먹었다. 맛있는 장어덮밥을 챙겨 주던 사람은 날 벌써 잊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과 열매로만 채우던 HP를 얼마 만의 음식으로 채워 보는 것인가! 거긴 연어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던데. 먹을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아차,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천재영재가 또 언제 올 줄 알고.
그래도 음식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밭 아래 공간에 나뭇가지로 크게 글씨를 써넣었다. 이 정도면 찔려서 서리할 생각은 들지 않겠지.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서리해 가면 죽음뿐. 양심을 지키시오.]
나뭇가지를 던지고 손을 마저 털었다. 지저분한 손은 분수대에서 씻어야지. 현실에선 안 그러는데 게임만 들어오면 초라해지는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하자 약속 시각이 5분밖에 안 남았다. 뛰어가기에는 소모가 큰 HP를 아껴야 해서 슬슬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 속도면 충분히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조금씩 지는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저녁 시간엔 볼거리가 더 많았다. 분수대로 가는 길에는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는 부부와 불꽃놀이를 하는 남자, 머핀을 파는 여자, 춤을 추는 NPC들이 눈과 코를 심심하지 않게 했다. 마치 해외여행을 온 것처럼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각이 넘어 버렸다. 어차피 음식을 먹을 거니까 남은 HP는 뛰는 데 써 버리자 싶어 서둘러 뛰었다.
빠르게 도착한 분수대 앞에는 골드찬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아까의 캐쥬얼한 차림과 달리 깔끔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레스토랑 간다고 분위기 좀 낸 건가. 꼭 사립학교에 다니는 똘똘한 전교 1등 같아 보였다.
손을 흔들며 골드찬의 시선을 끌자 그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좀 늦으셨네요. 절 기다리게 하시다니.”
“미안, 미안. 오면서 정신이 좀 팔려 가지고. 갈까?”
“네, 따라오세요.”
골드찬은 나를 레이브의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분수대에서 가까운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도 아늑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커다란 간판에는 레이브 씨의 근엄한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레이브 씨는 커다란 몸집의 불곰이다. 하지만 다혈질일 것으로 보이는 얼굴과 달리 성격은 매우 여린 분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강에서 직접 연어를 낚시해서 한정된 개수로만 음식을 팔고, 번 돈으로 초보 여행자를 돕는 선량한 NPC라고 했다.
골드찬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서며 홀을 둘러보았다. 마치 숲에 들어온 것처럼 오래된 나무 향이 났다. 꼭 예전에 전 여자 친구와 함께 갔던 캔들 가게에서 맡아 본 냄새와 비슷했다. 레이브 씨는 음식을 하고 있는지 주방에서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났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이 없어서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들었다. 뭐, 볼 것도 없이 연어 스테이크를 먹으러 온 거긴 하지만. 위에서 달랑거리는 꽃 모양의 조명이 메뉴판을 조준해 비췄다.
“나는 연어 스테이크 먹을래.”
“저도요. 와인도 드실래요?”
“무슨 와인이야. 주스나 시키자.”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벌써부터 까져 가지고.
골드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놓인 작은 종을 흔들었다. 옅은 무지갯빛이 공중에 흩날리며 부엌으로 날아갔다. 살짝 어둑한 레스토랑과 참 잘 어울리는 종이었다.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레이브 씨가 주방에서 나와 우리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역시 실제로 보는 레이브 씨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게임인데 왜 이렇게 무섭게 생긴 거야. 긴장한 나와 달리 여유로운 손짓의 골드찬은 메뉴판을 짚으며 주문했다.
“연어 스테이크 두 개랑 신비한 산딸기 주스 두 잔 주세요.”
“네, 골드찬. 즐거운 데이트 되셔요.”
“데, 데이트라니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에구, 귀여우셔라.”
레이브 씨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친근하게 웃었다. 섬뜩하지만 다정한 미소였다. 그는 주문서에 하나씩 받아 적더니 골드찬을 향해 윙크하고선 다시 주방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둘이 친한 사인가? NPC와도 친밀도를 올릴 수 있긴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NPC가 하나도 없었다. 기회가 되면 레이브 씨처럼 큰 동물 말고 귀여운 토끼나 요정이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우니버스 님, 오해하지 마세요. 레이브 씨가 농담한 거예요.”
“무슨 오해?”
“데이트…한다는 거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난 신경 안 써.”
“……네. 많이 해 보셨나 봐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어쩐지 시무룩해진 골드찬의 표정을 보며 말을 하다 말고 번쩍거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브 씨의 레스토랑 위치는 강 옆이라서 밤낚시를 하는 유저와, 돌다리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유저들을 볼 수 있었다.
불꽃놀이… 해 보고 싶다. 어둑해진 하늘과 대비되는 불꽃놀이의 화려한 불빛이 내 눈동자를 마구 일렁이게 했다.
“불꽃놀이 해 보고 싶어요?”
“응…….”
골드찬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고맙게도 먼저 물어봐 주었다. 이렇게 대답하면 하자고 하겠지. 골드찬은 항상 그랬으니까. 나는 그에게 많은 양의 씨앗을 받은 이후부터 매우 뻔뻔해졌다. 어린애의 등골을 빼먹는 건 양심에 찔렸지만, 금수저 같은데 뭐 어때.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같이 좀 즐겨 보자는 의미일 뿐이었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골드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너무 데이트 같은데.”
“커플만 불꽃놀이 하라는 법 있어?”
그러고 보니 여태 본 사람들은 모두 커플이었다. 사이좋게 달라붙어 불꽃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진을 찍고…… 그들은 불꽃놀이를 추억을 남기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게임에서 여자 친구 만드는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계속 보고 있자니 조금은 부러웠다.
“생각해 볼게요.”
“…….”
이런 면에선 조금 쪼잔하네. 골드찬도 금방 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둘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손을 꼼지락대고 있는데 쿵쿵 소리가 나며 콧속으로 맛있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레이브 씨가 웃으며 커다란 두 손에 든 접시를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어 스테이크는 눈으로만 보아도 이미 맛있었다. 분홍빛의 연어가 노릇하게 익어 고소한 냄새가 나고, 위에는 크리미한 소스가 듬뿍 얹혀 있었다. 위쪽엔 샐러드와 케이퍼가 레몬과 함께 놓여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새빨간 산딸기가 갈린 주스가 놓였다. 신비한 산딸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스 속 갈린 산딸기가 신선하게 반짝였다.
“오늘 아침에 갓 잡은 연어 중 가장 크답니다. 느끼하지 않게 소스에 오이 피클도 갈아 넣었어요.”
“고마워요, 레이브 씨.”
골드찬을 보며 슬쩍 웃은 레이브 씨는 내가 포크로 연어를 크게 한 조각 잘라 눈이 동그랗게 뜨일 정도로 맛있게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연어는 마트에서 사 먹는 퍽퍽한 연어 살과는 차원이 달랐다.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맛이었다. 나는 레이브 씨를 올려다보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진짜 맛있어요. 이런 음식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매일 올게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언제든 환영해요, 우니버스 님. 그럼 즐거운 식사 되셔요.”
“네, 잘 먹겠습니다.”
앞으로는 밖에서 연어 못 먹겠다. 게임이 이렇게 사람 입맛 하나를 바꿔 놓는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꼬질꼬질한 작업복을 입고 허겁지겁 연어를 먹는 나는 누가 봐도 초라해 보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거다.
비싼 요리답게 한 입씩 먹을 때마다 HP와 경험치가 조금씩 올랐다. 눈 깜빡할 새에 그릇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남은 산딸기 주스를 단번에 마셨다. 입 안에서 퍼지는 새콤달콤함이 내 정수리 위에서 맑은 효과음을 내며 팡팡 터졌다.
골드찬은 밥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인지 이제야 마지막 연어 조각을 우물거리며 주스로 목을 축였다. 그의 입가에 우유 수염처럼 주스 수염이 발갛게 났다. 여긴 냅킨이 없나?
“여기 묻었어.”
몸을 살짝 일으켜 닦아 주려고 하자 골드찬의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그는 잘 놀라는 편인가 보다. 저번에도 흠칫흠칫 몸을 떨더니 이번에도 나를 보고 몸이 살짝 덜컹거렸다.
“제가 할게요.”
“그러든지.”
“……닦아 주고 싶어요? 마침 냅킨이 저기 있네요.”
눈을 굴리던 골드찬이 내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뒤 테이블에 냅킨이 놓여 있었다. 팔을 뻗어 두어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네자 받지 않고 나에게 얼굴을 슬쩍 가까이 했다.
뭐, 닦아 달라는 건가? 밥도 얻어먹었는데 이 정도야 못 할 건 없지.
그의 입가가 버석하게 굳기 전에 냅킨을 뭉쳐 슥슥 문질렀지만 이미 산딸기 색이 번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닦아 줬는데도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더 웃겨 보였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기며 말했다.
“다 됐다.”
“고마워요, 우니버스 님.”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더니 금세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따가 공터에 돌아가면 실컷 웃어야지. 종료하고 잘 때도 생각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쁜 미모에 그렇지 못한 청결은 내 독특한 웃음 코드를 자극했다.
“후식 나왔답니다. 꿀에 적셔 먹는 포근한 시폰 케이크예요. 제가 직접 딴 꿀이랍니다. 연하게 개서 많이 달지 않을 거예요. 그릇 치워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셔요.”
차라리 맛있게 먹으라고 협박하는 게 나을 정도로 섬뜩하게 눈웃음을 지은 레이브 씨가 큰 손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접시에 케이크를 한 조각, 그 옆에 더 작은 종지에는 꿀을 담아 가져왔다. 안 그래도 단 게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골드찬, 여기 진짜 최고다.”
“마음에 들어요?”
“응, 현실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만큼 맛있는 연어는 먹어 본 적이 없어.”
“저 그거 비슷하게 할 수 있어요. 요리가 취미거든요.”
“정말?”
따끈하고 촉촉한 시폰 케이크를 꿀에 적시며 느릿하게 끄덕인 골드찬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의외네. 곱게 자라서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힐 것같이 생겼는데. 금수저는 요리 수업이라도 받는 걸까. 아니면 요리사가 꿈이라든가. 레이브 씨와 비슷한 맛을 내는 거면 월등한 실력이라는 거겠지.
“네가 한 것도 먹어 보고 싶다.”
“……생각해 보고요.”
얘는 생각한다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저녁 식사도 끝나 가는데 불꽃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생겼을까. 지금 시간대에 하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불꽃놀이 할 거야?”
“아직 결정 못 했는데…… 나갈 때 한 번 더 물어봐 주세요.”
“알았어.”
까다롭긴.
남은 시폰 케이크를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일어섰다. 더 어둑해지기 전에 불꽃놀이를 할지 말지 결정하고, 밭을 지키러 가야 했다. 붉은 입가를 고상하게 두드려 닦던 골드찬이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뒤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표정 관리하는 데 열중했다. 이따가 사진으로 찍어 둬야지.
“골드찬, 우니버스 님 식사는 즐거우셨나요?”
“네, 정말 잘 먹었어요.”
“다음에 또 들러 주셔요. 이건 손님에게 드리는 오늘의 선물이에요.”
레이브 씨가 커다란 발 같은 손으로 쿠키 두 개를 건넸다. 익숙한 모양새의 쿠키는 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포춘쿠키였다. 하나씩 건네받은 쿠키 사이에 하얀 쪽지가 보였다. 딱딱한 포춘쿠키를 뽀각 반으로 가르자 부스러기가 떨어지며 쪽지가 드러났다. 쪽지를 펼치자 연두색의 방울들이 퐁퐁 공중으로 솟았다.
[새로움이 싹틀 시기네요. 그것은 당신을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싹이 터? 내 정원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대기업에 취직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만이 날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이었다. 재미로 하는 거긴 하지만 괜한 의미 부여를 하게 만드는 심오한 문구였다. 나와 동시에 쿠키를 쪼갠 골드찬은 진지한 눈빛으로 문구를 읽고 있었다. 어떤 문구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슬쩍 눈을 흘기자 내가 못 보도록 쪽지의 각도를 틀었다.
“골드찬, 뭐 나왔어.”
“궁금하죠?”
“응.”
“여기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말을 흐린 골드찬이 내게 쪽지를 들이밀었다. 그의 쪽지에선 달콤한 향기가 풍기며 글씨 위에서 통통한 하트가 나 좀 봐 달라는 듯 귀엽게 튀어 올랐다.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네요. 조금 더 솔직해지세요.]
사랑에 관한 문구인가? 하긴, 한창 학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지. 같은 반 친구라든가, 교생 선생님이라든가. 좋을 때다. 나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쪽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여전히 붉은 입을 가진 골드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때요?”
“설레는 말이네.”
“……역시.”
그는 소중한 것이라도 감추듯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매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불꽃놀이 하고 싶어졌어요. 강가로 가요.”
* * *
강가로 온 골드찬과 나는 아까 커플이 불꽃놀이를 하고 갔던 명당에 나란히 섰다. 골드찬이 공중에서 이것저것을 만지더니 내 손 가득 폭죽을 쥐여 주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 희한한 폭죽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일단 작은 것부터 해 볼까. 근데 어떻게 하는 거지. 성냥도 다 쓴 데다가 라이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골드찬, 이거 불은 어떻게 붙여?”
“저 주세요.”
폭죽을 다시 가져간 골드찬이 검지를 튕겨 도깨비불을 만들었다. 신기해서 몰래 따라 해 봤지만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슥슥 살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그가 작은 폭죽에 불을 붙이자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골드찬은 곧 터질 것 같은 폭죽을 내게 건네주고 자기 것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