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우주 정원사 5화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5)
“야, 싸움 난 거 아니야?”
“그런가 본데.”
“아저씨 술 거하게 드셨나 보네.”
나도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과 시선을 같이했다.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싸우고 있는 듯했다. 아니,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건가?
“네가 그러고도 내 아들이야?!”
“…….”
“못난 놈! 불효자 새끼!”
두 마디만 들어도 그들이 부자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이라는 남자는 멀리서 봐도, 사람들이 가려도 머리가 툭 튀어나올 만큼 키와 덩치가 컸다. 왜 맞고만 있나 했더니 아들이라서 그랬나 보다. 그나저나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우주,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거 아니다. 그냥 가자. 사람들이 신고했겠지, 저렇게 많은데.”
“그래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경찰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봐, 내 말 맞지. 이제 싸움 구경 끝났네. 가자’ 친구가 멈춘 나의 어깨를 돌리며 밀었다. 사람들도 나처럼 슬슬 등을 돌렸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이란 남자의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뭐, 이번만큼은 친구 말이 맞다. 휘말리면 나만 골치 아픈 일이다.
나는 결국 가지 못하게 붙잡는 친구들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 주고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백수의 지갑을 그렇게 털어 가고 싶을까.
“하…….”
샤워를 마치고 나와 긴 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취기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점차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 즈음 강한 의욕이 나의 잠을 깨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물이라도 한 번 더 떠오고, 벌레라도 한 마리 더 잡고 자야 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더니, 현실은 정반대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피플 온라인에 접속했다. 늦은 새벽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폐에 스며드는 공기가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접속하자마자 발밑에 푹 퍼진 잡초 더미를 대충 정리하고 밭으로 향했다.
“황홀한 밤이에요…….”
내 입으로 이런 감성적인 문장을 꺼낼 리 없었다. 나는 누군가 밭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아름다운 욕설을 뱉었다. 등불도 켜 놓지 않아서 더 어두컴컴한데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설마 천재영재……! 나는 앞뒤도 재지 않고 달려가 그의 옷을 세게 붙잡았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손에 착 감겼다. 내 열매 팔아서 좋은 옷 사 입은 거겠지.
“이 사랑! 죽일 놈의 사랑! 잘 걸렸다!”
초라하게 ‘새끼’라는 욕설이 강한 필터링으로 인해 ‘사랑’으로 순화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조만간 설정을 모조리 손봐야겠다. 나에게 옷깃을 붙잡힌 남자가 뒤돌며 소리쳤다.
“우니버스 님!”
잔뜩 놀란 골드찬이 나를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전혀 해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 같았다. 매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데다가, 어두워서 그의 예쁜 머리카락 색이 잘 보이지 않아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남아 있는 취기는 게임 속에서도 날 몽롱하게 만들고 시야를 흐릿하게 했다. 골드찬이 내 멍한 표정을 보며 옷깃을 잡은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오늘 늦게 들어왔는데 다행히 계셨네요. 저 기다린 거죠?”
“골드찬이구나… 응…뭐…….”
길 건너 걸어오는 사람이 친구인 줄 알고 반갑게 인사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나는 대강 얼버무리며 꾹 잡은 손을 놓았다.
“어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늦었는데 자러 갈 거예요?”
“아니, 새싹에 물만 주고 자려고. 물 뜨러 가야 해.”
“같이 가요. 등불 들어 줄게요.”
“그래, 그럼.”
나는 은은한 등불을 든 골드찬과 강을 향해 걸었다. 몰컴 하나? 오늘따라 좀 더 얌전한 골드찬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무 말 안 하고 걸어도 상관없지만 괜히 나를 어색해할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 졸리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골드찬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골드찬.”
“네.”
“넌 직업이 뭐야?”
레벨은 굉장히 높아 보이는데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마을에 있는 것 보면 모험가는 아닌 것 같고……. 나한테 해 준 것도 많은데 뒤늦게 물어보려니 조금 미안했다.
“전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요즘엔 요리가 재밌어서 요리 스킬 마저 올리는 중이에요.”
“요리 엄청 힘들지 않나…… 그래서 레이브 씨 음식 먹고 할 수 있다고 한 거구나.”
“네, NPC가 만드는 음식도 다 스킬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나는 언제 레벨 업 해서 다른 직업도 가져 볼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요. 제가 도와줄게요.”
“고마워.”
착한 녀석. 미소년처럼 생겨서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니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골드찬은 등불을 든 손을 꼼지락대며 내 눈치를 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저한테 더 궁금한 거 없어요?”
“궁금한 거?”
“네, 답할 수 있는 건 답해 줄게요.”
음…….
없는데. 왠지 기대하는 골드찬의 표정을 보아하니 없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긴, 한창 관심 받고 싶을 때지. 은은한 등불이 그의 뽀얀 뺨을 붉게 비췄다.
“없어요?”
“아니야, 기다려 봐. 이거 물어봐도 되나…….”
“뭔데요?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골드찬은 조금 전까진 인터뷰 받는 스타처럼 고고하게 말하더니 지금은 자신이 궁금해서 눈을 밝혔다.
사실 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다. 이 어린애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나에게 계속 퍼 주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의문이었다. 이미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어 놓고 이제 와서 질문한다는 건 좀 뻔뻔했지만, 가슴속에 작게 남아 있는 찝찝함을 덜어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너 금수저야?”
“네? 아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나중에 부모가 와서 다 뱉어 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가슴속에 남아 있던 찝찝함이 몸집을 키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돈은 많아요…… 자랑 아니에요!”
부푼 마음이 다시 사그라졌다. 다행이다. 나는 골드찬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게 자랑이지 뭐야. 좋겠다.”
아무래도 골드찬은 겸손하게 대답한 거였는데 내가 순간 오해한 것 같았다. 간 떨어질 뻔했네. 앞으로도 안심하고 받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현실도 아니고 게임인데 뭐 어때. 고마운 마음만 충분히 전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힘을 주며 골드찬을 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꼬리가 조금 처졌다.
“우니버스 님은 제가 돈이 많아서 좋, 아니…….”
“어?”
“돈이 많은 사람이 좋아요?”
당연한 질문을 하는 골드찬은 나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돈이 많은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돈이 많은 게 좋다. 그렇지만 ‘응’이라고 대답하면 왠지 골드찬의 동심을 깰 것 같았다. 속물 같기도 하고. 나는 겸손을 담은 최선의 대답을 택했다.
“그게 중요해? 난 착한 사람 좋아해.”
“…….”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네?”
갑자기 골드찬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너무 속 보이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등불에 귀가 붉어진 골드찬을 보다 등을 돌렸다. 어느새 내가 자주 이용하는 우물에 가까워졌다. 물뿌리개를 들고 후다닥 달려가서 두레박을 끌어 올렸다. 이런 건 자동으로 해 놓으면 좀 좋으련만. 쓸데없이 HP만 닳는 행동이었다.
큰 물뿌리개에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담은 후 아이템 창에 넣었다. 그것도 HP가 닳는 행동이니까. 나는 이곳에만 오면 짠돌이가 되는 것 같다. 여전히 멈춘 자리에 서 있는 골드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졸린가? 정신이 없어 보이네.
“골드찬, 돌아가자. 졸려? 이제 등불은 내가 들게.”
등불을 뺏어 들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감쌌다. 나름 친근함의 표시였다. 골드찬은 몸을 살짝 들썩이더니 이내 약하게 고개를 숙였다. 말은 잘하면서 가끔 행동은 참 소심한 게 귀엽다.
“가자.”
“네에…….”
얼굴 밑에서 골드찬의 바다 빛 머리색이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아까 건욱이 바다 마을의 경치가 끝내준다 말했던 게 떠올랐다. 모험하고 싶은 욕구가 한가득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술기운과 기분 좋게 선들거리는 새벽 바람, 보드라운 에메랄드 머리색과 시원한 물 냄새까지.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드디어 성공했다!
이틀 동안 정원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한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역시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는구나. 눈앞에서 퐁퐁 피어난 꽃과 열매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웠다. 이 모습을 골드찬이 봤어야 하는 건데.
골드찬은 그저께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 뜨는 걸 도와주고, 벌레도 잡아 줬다. 안 해도 된다는 걸 굳이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말릴 이유도 없어서 그냥 놔뒀더니 나보다 더 열심히 정원을 가꿨다. 어쩌면 레벨 높은 애가 도와줘서 다 성공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드디어 보답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수확을 해 볼까?
준비 동작으로 두 손을 탁탁 털며 비비고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꽃은 몇 개만 수확해서 씨앗을 얻고, 열매는 몽땅 수확해서 몇 개는 주스를 만들고 나머지는 다시 심어야겠다.
꽃을 따려고 손을 뻗은 순간 손에 미약한 정전기가 일었다.
“아! 뭐야…….”
고통 감도를 낮춰 놔서 아프진 않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오류인가? 이번엔 열매를 따려고 꺾으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전기가 통하며 경고창이 떴다.
[사유지에 놓인 물건은 함부로 주울 수 없습니다.]
“……?”
나는 사유지로 지정한 적이 없는데 무슨 사유지란 말인가. 정원 옆에 놓은 물뿌리개는 잘만 주워지는데.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진짜.”
몇 번을 시도해도 손에선 정전기만 일고 수확은커녕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그새 내 정원을 사유지로 등록해 놓은 모양이었다. 어떤 개호로 잡놈이……. 그렇다면 나는 여태 남의 정원을 가꾸고 있던 셈이다.
“너무 행복해.”
행복은 씨발. 일단 욕설 필터링부터 해제해야겠다. 열심히 설정 창을 뒤지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골드찬이 온 건가?
“어?”
뒤를 돌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설마…… 사유지의 주인인 건가?
“저기요.”
“네?”
“이 사유지 주인이세요?”
나는 작은 정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며 발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뭐야, 저 행동은? 의심스럽게. 그제야 그의 머리 위에 적힌 닉네임이 눈에 띄었다. 패밀리를 들었다는 표시인 F와 화려한 닉네임이 반짝이고 있었다.
[천재영재]
닉네임 주변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아하니 낮은 레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놈이 초보자의 물건을 빼앗고 사유지로 등록까지 해?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순식간에 변하는 내 표정을 보고 불안함을 느꼈는지 천재영재는 ‘아, 아니요……’라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려 공터를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 서세요.”
“안녕히 계세요.”
“서라고요!”
“아악……!”
천재영재는 내가 뛰는 걸 보자마자 똑같이 뛰기 시작했다. 사유지도 풀어 달라고 하고 열매값도 내놓으라고 해야지. 절대 이대로 못 놓친다. 나는 오늘 포기는 해선 안 된다는 걸 배웠거든.
우리는 그렇게 넓은 마을 안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안 그래도 HP가 반이나 떨어진 상태였는데 그를 쫓아가면서 빠르게 닳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오히려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지금 놓친다면 영영 그를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서라고!”
“따라오지 마세요!”
“사유지라도 좀 풀어 달라고요!”
“제 거 아니라니까요!”
네 것이 아니면 누구 건데! 어떻게 딱 작은 정원만 사유지로 등록해 놓을 수 있느냔 말이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뛰는 천재영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연신 뒤돌아보며 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저 집 주인 거라고요!”
그가 손을 가리킨 곳엔 성처럼 큰 집이 있었다. 벌써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터라 그 집이 실제보다 작게 보였다. 저 집 주인이 뭐가 모자라서 내 정원을 가지려 드는데! 나는 천재영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고서야 그가 정원에 다시 발을 들일 리 없으니까.
“열매값도 내놔!”
“아, 그건! 죄송해요!”
“그러니까 내놓으라고!”
“으헉!”
나를 보며 소리치던 천재영재가 앞을 보지 못하고 NPC와 부딪혀 넘어졌다.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양 NPC는 제 뿔을 쓰다듬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굉장한 엄살처럼 보였다.
“아이구, 아이구!”
“미, 미안. 괜찮아?”
“잡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천재영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HP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흐물대며 정원으로 돌아갈 상황은 막았다.
“사유지 풀고 열매값도 내놔요.”
“저 진짜 아니라고요! 열매값은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아이템 창을 뒤적인 천재영재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를 확인하자 반짝이는 동전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흠,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한데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HP도 닳았고, 정신적 피해 보상도 받고 싶었다.
“음식도 좀 줘요. 그쪽 잡느라 HP 바닥났으니까.”
“저도 거진데.”
“…….”
“알았어요. 이거라도…….”
말없이 노려보자 천재영재가 품 안에서 포도 주스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정원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다. 그때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NPC가 내 앞을 막아서며 천재영재에게 외쳤다. 주저앉은 내 얼굴에 닿은 털은 정말 부드럽고 푹신했다.
“나도 보상을 받아야겠다앙!”
“무, 무슨 보상.”
“내 뿔이 너무 아프다앙!”
“미안…….”
“보상할 게 없다면 내 부탁을 들어 달라앙!”
“퀘스트 하기 싫어!”
NPC의 퀘스트는 정말 어렵고 귀찮은 일이었다. 자유도 높은 게임 내 퀘스트는 초보자나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이 내게도 퀘스트를 요구할까 봐 천재영재를 힐끗 보고 뒤로 다시 뛰었다. 뛰면서 돌아보자 양이 천재영재의 멱살을 틀어쥐고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다.
잘됐다. 남의 것을 훔치면 벌을 받아야지.
나는 속으로 웃으며 그가 준 포도 주스를 단번에 마셨다. 버프가 들어간 주스인지 보랏빛이 내 몸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무슨 버프지? HP가 빠르게 오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저나 정원 사유지의 주인이 저 집 주인이라고 했었지. 나는 큰 집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있는 사람이 더 한다더니. 천재영재 다음은 너다. 나는 이번에 뛰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몹쓸 천재영재를 따라 멀리도 온 모양이다. 10분을 넘게 걸어도 큰 집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루해서 하나뿐인 친구 창을 들여다보는데 어느새 골드찬이 접속 중이었다. 왜 말 안 걸었지?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귓속말을 건넸다.
“골드찬, 언제 왔어?”
골드찬에게서 빠르게 답이 왔다.
-우니버스 님! 저 방금 들어왔어요. 꽃이 예쁘게 피었네요. 어디 계세요?
“도둑놈 좀 잡느라고. 지금은 다른 놈 잡으러 가고 있어.”
-도둑이요? 저도 같이 갈게요! 그럼 지금 팔로우 할게요. 잠시만요.
“그래.”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자 뒤에서 소름 돋는 바람이 일었다. 그의 팔로우는 언제나 내 뒤를 서늘하게 했다.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골드찬의 숨결이 간지러워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거리를 벌렸다. 오늘도 예쁘장한 그의 모습은 눈을 즐겁게 했다.
“옷 좋은 거 입었네. 예쁘다.”
오늘 골드찬의 차림은 마치 왕족을 보는 듯했다. 흰색과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비단옷은 누가 봐도 돈 좀 있는 사람 같았다. 골드찬은 칭찬에 쑥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조금 떨어져서 걸어도 좋으련만. 그와 바짝 붙어서 걷자니 내 꼬질꼬질한 작업복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네 옷 더러워져. 너무 붙지 마.”
“괜찮아요. 그나저나 도둑이 어딨는데요?”
“따라오면 알아. 아주 못된 놈이거든.”
“우니버스 님과 도둑 잡기라니. 기대돼요. 저도 혼내 줄게요.”
누군 속이 타들어 가는데 기대가 된다니. 골드찬을 힐끗 내려다보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레벨 높은 애 하나 데려가는 게 마음이 편하니까 꾸중은 말아야겠다.
골드찬의 조잘거리는 말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큰 집 앞에 다다랐다.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야.”
너처럼 돈 많은 놈이니까 긴장해야 한다고. 나는 여유로운 골드찬에게 긴장감을 심어 주기 위해 무거운 어조로 속삭였다. 그도 놀란 모양인지 입을 작게 벌린 채 커다란 집을 보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초조해 보이는 그의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선 정문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로그인 중이어야 할 텐데. 힘차게 두드렸는데도 집 안에서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없나 보네.”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수확할 수가 없는데 어쩌지.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폴리스라도 대동하고 올까. 그러기엔 집주인의 죄목이 정확하지 않아서 부를 수가 없다. 애초에 내 정원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우니버스 님.”
“어?”
뒤를 돌자 골드찬이 두 손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깐 같이 혼내 주겠다고 기세등등하더니 지금은 잔뜩 쫄은 강아지 같았다.
“이 집 주인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도둑놈이니까.”
“뭘…… 훔쳤는데요?”
“내 정원.”
“정원이요? 그대로 있던데……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제 정…….”
“아무튼!”
지금 도둑놈 편드는 건가? 왠지 그런 느낌이 나서 나는 살짝 예민해졌다. 확실하게 말해 줘야지.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5)
“야, 싸움 난 거 아니야?”
“그런가 본데.”
“아저씨 술 거하게 드셨나 보네.”
나도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과 시선을 같이했다.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싸우고 있는 듯했다. 아니,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건가?
“네가 그러고도 내 아들이야?!”
“…….”
“못난 놈! 불효자 새끼!”
두 마디만 들어도 그들이 부자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이라는 남자는 멀리서 봐도, 사람들이 가려도 머리가 툭 튀어나올 만큼 키와 덩치가 컸다. 왜 맞고만 있나 했더니 아들이라서 그랬나 보다. 그나저나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우주,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거 아니다. 그냥 가자. 사람들이 신고했겠지, 저렇게 많은데.”
“그래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경찰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봐, 내 말 맞지. 이제 싸움 구경 끝났네. 가자’ 친구가 멈춘 나의 어깨를 돌리며 밀었다. 사람들도 나처럼 슬슬 등을 돌렸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이란 남자의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뭐, 이번만큼은 친구 말이 맞다. 휘말리면 나만 골치 아픈 일이다.
나는 결국 가지 못하게 붙잡는 친구들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 주고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백수의 지갑을 그렇게 털어 가고 싶을까.
“하…….”
샤워를 마치고 나와 긴 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취기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점차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 즈음 강한 의욕이 나의 잠을 깨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물이라도 한 번 더 떠오고, 벌레라도 한 마리 더 잡고 자야 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더니, 현실은 정반대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피플 온라인에 접속했다. 늦은 새벽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폐에 스며드는 공기가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접속하자마자 발밑에 푹 퍼진 잡초 더미를 대충 정리하고 밭으로 향했다.
“황홀한 밤이에요…….”
내 입으로 이런 감성적인 문장을 꺼낼 리 없었다. 나는 누군가 밭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아름다운 욕설을 뱉었다. 등불도 켜 놓지 않아서 더 어두컴컴한데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설마 천재영재……! 나는 앞뒤도 재지 않고 달려가 그의 옷을 세게 붙잡았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손에 착 감겼다. 내 열매 팔아서 좋은 옷 사 입은 거겠지.
“이 사랑! 죽일 놈의 사랑! 잘 걸렸다!”
초라하게 ‘새끼’라는 욕설이 강한 필터링으로 인해 ‘사랑’으로 순화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조만간 설정을 모조리 손봐야겠다. 나에게 옷깃을 붙잡힌 남자가 뒤돌며 소리쳤다.
“우니버스 님!”
잔뜩 놀란 골드찬이 나를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전혀 해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 같았다. 매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데다가, 어두워서 그의 예쁜 머리카락 색이 잘 보이지 않아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남아 있는 취기는 게임 속에서도 날 몽롱하게 만들고 시야를 흐릿하게 했다. 골드찬이 내 멍한 표정을 보며 옷깃을 잡은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오늘 늦게 들어왔는데 다행히 계셨네요. 저 기다린 거죠?”
“골드찬이구나… 응…뭐…….”
길 건너 걸어오는 사람이 친구인 줄 알고 반갑게 인사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나는 대강 얼버무리며 꾹 잡은 손을 놓았다.
“어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늦었는데 자러 갈 거예요?”
“아니, 새싹에 물만 주고 자려고. 물 뜨러 가야 해.”
“같이 가요. 등불 들어 줄게요.”
“그래, 그럼.”
나는 은은한 등불을 든 골드찬과 강을 향해 걸었다. 몰컴 하나? 오늘따라 좀 더 얌전한 골드찬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무 말 안 하고 걸어도 상관없지만 괜히 나를 어색해할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 졸리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골드찬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골드찬.”
“네.”
“넌 직업이 뭐야?”
레벨은 굉장히 높아 보이는데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마을에 있는 것 보면 모험가는 아닌 것 같고……. 나한테 해 준 것도 많은데 뒤늦게 물어보려니 조금 미안했다.
“전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요즘엔 요리가 재밌어서 요리 스킬 마저 올리는 중이에요.”
“요리 엄청 힘들지 않나…… 그래서 레이브 씨 음식 먹고 할 수 있다고 한 거구나.”
“네, NPC가 만드는 음식도 다 스킬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나는 언제 레벨 업 해서 다른 직업도 가져 볼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요. 제가 도와줄게요.”
“고마워.”
착한 녀석. 미소년처럼 생겨서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니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골드찬은 등불을 든 손을 꼼지락대며 내 눈치를 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저한테 더 궁금한 거 없어요?”
“궁금한 거?”
“네, 답할 수 있는 건 답해 줄게요.”
음…….
없는데. 왠지 기대하는 골드찬의 표정을 보아하니 없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긴, 한창 관심 받고 싶을 때지. 은은한 등불이 그의 뽀얀 뺨을 붉게 비췄다.
“없어요?”
“아니야, 기다려 봐. 이거 물어봐도 되나…….”
“뭔데요?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골드찬은 조금 전까진 인터뷰 받는 스타처럼 고고하게 말하더니 지금은 자신이 궁금해서 눈을 밝혔다.
사실 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다. 이 어린애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나에게 계속 퍼 주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의문이었다. 이미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어 놓고 이제 와서 질문한다는 건 좀 뻔뻔했지만, 가슴속에 작게 남아 있는 찝찝함을 덜어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너 금수저야?”
“네? 아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나중에 부모가 와서 다 뱉어 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가슴속에 남아 있던 찝찝함이 몸집을 키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돈은 많아요…… 자랑 아니에요!”
부푼 마음이 다시 사그라졌다. 다행이다. 나는 골드찬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게 자랑이지 뭐야. 좋겠다.”
아무래도 골드찬은 겸손하게 대답한 거였는데 내가 순간 오해한 것 같았다. 간 떨어질 뻔했네. 앞으로도 안심하고 받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현실도 아니고 게임인데 뭐 어때. 고마운 마음만 충분히 전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힘을 주며 골드찬을 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꼬리가 조금 처졌다.
“우니버스 님은 제가 돈이 많아서 좋, 아니…….”
“어?”
“돈이 많은 사람이 좋아요?”
당연한 질문을 하는 골드찬은 나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돈이 많은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돈이 많은 게 좋다. 그렇지만 ‘응’이라고 대답하면 왠지 골드찬의 동심을 깰 것 같았다. 속물 같기도 하고. 나는 겸손을 담은 최선의 대답을 택했다.
“그게 중요해? 난 착한 사람 좋아해.”
“…….”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네?”
갑자기 골드찬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너무 속 보이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등불에 귀가 붉어진 골드찬을 보다 등을 돌렸다. 어느새 내가 자주 이용하는 우물에 가까워졌다. 물뿌리개를 들고 후다닥 달려가서 두레박을 끌어 올렸다. 이런 건 자동으로 해 놓으면 좀 좋으련만. 쓸데없이 HP만 닳는 행동이었다.
큰 물뿌리개에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담은 후 아이템 창에 넣었다. 그것도 HP가 닳는 행동이니까. 나는 이곳에만 오면 짠돌이가 되는 것 같다. 여전히 멈춘 자리에 서 있는 골드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졸린가? 정신이 없어 보이네.
“골드찬, 돌아가자. 졸려? 이제 등불은 내가 들게.”
등불을 뺏어 들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감쌌다. 나름 친근함의 표시였다. 골드찬은 몸을 살짝 들썩이더니 이내 약하게 고개를 숙였다. 말은 잘하면서 가끔 행동은 참 소심한 게 귀엽다.
“가자.”
“네에…….”
얼굴 밑에서 골드찬의 바다 빛 머리색이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아까 건욱이 바다 마을의 경치가 끝내준다 말했던 게 떠올랐다. 모험하고 싶은 욕구가 한가득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술기운과 기분 좋게 선들거리는 새벽 바람, 보드라운 에메랄드 머리색과 시원한 물 냄새까지.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드디어 성공했다!
이틀 동안 정원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한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역시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는구나. 눈앞에서 퐁퐁 피어난 꽃과 열매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웠다. 이 모습을 골드찬이 봤어야 하는 건데.
골드찬은 그저께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 뜨는 걸 도와주고, 벌레도 잡아 줬다. 안 해도 된다는 걸 굳이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말릴 이유도 없어서 그냥 놔뒀더니 나보다 더 열심히 정원을 가꿨다. 어쩌면 레벨 높은 애가 도와줘서 다 성공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드디어 보답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수확을 해 볼까?
준비 동작으로 두 손을 탁탁 털며 비비고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꽃은 몇 개만 수확해서 씨앗을 얻고, 열매는 몽땅 수확해서 몇 개는 주스를 만들고 나머지는 다시 심어야겠다.
꽃을 따려고 손을 뻗은 순간 손에 미약한 정전기가 일었다.
“아! 뭐야…….”
고통 감도를 낮춰 놔서 아프진 않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오류인가? 이번엔 열매를 따려고 꺾으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전기가 통하며 경고창이 떴다.
[사유지에 놓인 물건은 함부로 주울 수 없습니다.]
“……?”
나는 사유지로 지정한 적이 없는데 무슨 사유지란 말인가. 정원 옆에 놓은 물뿌리개는 잘만 주워지는데.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진짜.”
몇 번을 시도해도 손에선 정전기만 일고 수확은커녕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그새 내 정원을 사유지로 등록해 놓은 모양이었다. 어떤 개호로 잡놈이……. 그렇다면 나는 여태 남의 정원을 가꾸고 있던 셈이다.
“너무 행복해.”
행복은 씨발. 일단 욕설 필터링부터 해제해야겠다. 열심히 설정 창을 뒤지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골드찬이 온 건가?
“어?”
뒤를 돌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설마…… 사유지의 주인인 건가?
“저기요.”
“네?”
“이 사유지 주인이세요?”
나는 작은 정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며 발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뭐야, 저 행동은? 의심스럽게. 그제야 그의 머리 위에 적힌 닉네임이 눈에 띄었다. 패밀리를 들었다는 표시인 F와 화려한 닉네임이 반짝이고 있었다.
[천재영재]
닉네임 주변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아하니 낮은 레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놈이 초보자의 물건을 빼앗고 사유지로 등록까지 해?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순식간에 변하는 내 표정을 보고 불안함을 느꼈는지 천재영재는 ‘아, 아니요……’라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려 공터를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 서세요.”
“안녕히 계세요.”
“서라고요!”
“아악……!”
천재영재는 내가 뛰는 걸 보자마자 똑같이 뛰기 시작했다. 사유지도 풀어 달라고 하고 열매값도 내놓으라고 해야지. 절대 이대로 못 놓친다. 나는 오늘 포기는 해선 안 된다는 걸 배웠거든.
우리는 그렇게 넓은 마을 안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안 그래도 HP가 반이나 떨어진 상태였는데 그를 쫓아가면서 빠르게 닳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오히려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지금 놓친다면 영영 그를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서라고!”
“따라오지 마세요!”
“사유지라도 좀 풀어 달라고요!”
“제 거 아니라니까요!”
네 것이 아니면 누구 건데! 어떻게 딱 작은 정원만 사유지로 등록해 놓을 수 있느냔 말이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뛰는 천재영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연신 뒤돌아보며 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저 집 주인 거라고요!”
그가 손을 가리킨 곳엔 성처럼 큰 집이 있었다. 벌써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터라 그 집이 실제보다 작게 보였다. 저 집 주인이 뭐가 모자라서 내 정원을 가지려 드는데! 나는 천재영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고서야 그가 정원에 다시 발을 들일 리 없으니까.
“열매값도 내놔!”
“아, 그건! 죄송해요!”
“그러니까 내놓으라고!”
“으헉!”
나를 보며 소리치던 천재영재가 앞을 보지 못하고 NPC와 부딪혀 넘어졌다.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양 NPC는 제 뿔을 쓰다듬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굉장한 엄살처럼 보였다.
“아이구, 아이구!”
“미, 미안. 괜찮아?”
“잡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천재영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HP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흐물대며 정원으로 돌아갈 상황은 막았다.
“사유지 풀고 열매값도 내놔요.”
“저 진짜 아니라고요! 열매값은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아이템 창을 뒤적인 천재영재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를 확인하자 반짝이는 동전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흠,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한데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HP도 닳았고, 정신적 피해 보상도 받고 싶었다.
“음식도 좀 줘요. 그쪽 잡느라 HP 바닥났으니까.”
“저도 거진데.”
“…….”
“알았어요. 이거라도…….”
말없이 노려보자 천재영재가 품 안에서 포도 주스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정원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다. 그때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NPC가 내 앞을 막아서며 천재영재에게 외쳤다. 주저앉은 내 얼굴에 닿은 털은 정말 부드럽고 푹신했다.
“나도 보상을 받아야겠다앙!”
“무, 무슨 보상.”
“내 뿔이 너무 아프다앙!”
“미안…….”
“보상할 게 없다면 내 부탁을 들어 달라앙!”
“퀘스트 하기 싫어!”
NPC의 퀘스트는 정말 어렵고 귀찮은 일이었다. 자유도 높은 게임 내 퀘스트는 초보자나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이 내게도 퀘스트를 요구할까 봐 천재영재를 힐끗 보고 뒤로 다시 뛰었다. 뛰면서 돌아보자 양이 천재영재의 멱살을 틀어쥐고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다.
잘됐다. 남의 것을 훔치면 벌을 받아야지.
나는 속으로 웃으며 그가 준 포도 주스를 단번에 마셨다. 버프가 들어간 주스인지 보랏빛이 내 몸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무슨 버프지? HP가 빠르게 오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저나 정원 사유지의 주인이 저 집 주인이라고 했었지. 나는 큰 집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있는 사람이 더 한다더니. 천재영재 다음은 너다. 나는 이번에 뛰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몹쓸 천재영재를 따라 멀리도 온 모양이다. 10분을 넘게 걸어도 큰 집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루해서 하나뿐인 친구 창을 들여다보는데 어느새 골드찬이 접속 중이었다. 왜 말 안 걸었지?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귓속말을 건넸다.
“골드찬, 언제 왔어?”
골드찬에게서 빠르게 답이 왔다.
-우니버스 님! 저 방금 들어왔어요. 꽃이 예쁘게 피었네요. 어디 계세요?
“도둑놈 좀 잡느라고. 지금은 다른 놈 잡으러 가고 있어.”
-도둑이요? 저도 같이 갈게요! 그럼 지금 팔로우 할게요. 잠시만요.
“그래.”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자 뒤에서 소름 돋는 바람이 일었다. 그의 팔로우는 언제나 내 뒤를 서늘하게 했다.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골드찬의 숨결이 간지러워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거리를 벌렸다. 오늘도 예쁘장한 그의 모습은 눈을 즐겁게 했다.
“옷 좋은 거 입었네. 예쁘다.”
오늘 골드찬의 차림은 마치 왕족을 보는 듯했다. 흰색과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비단옷은 누가 봐도 돈 좀 있는 사람 같았다. 골드찬은 칭찬에 쑥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조금 떨어져서 걸어도 좋으련만. 그와 바짝 붙어서 걷자니 내 꼬질꼬질한 작업복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네 옷 더러워져. 너무 붙지 마.”
“괜찮아요. 그나저나 도둑이 어딨는데요?”
“따라오면 알아. 아주 못된 놈이거든.”
“우니버스 님과 도둑 잡기라니. 기대돼요. 저도 혼내 줄게요.”
누군 속이 타들어 가는데 기대가 된다니. 골드찬을 힐끗 내려다보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레벨 높은 애 하나 데려가는 게 마음이 편하니까 꾸중은 말아야겠다.
골드찬의 조잘거리는 말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큰 집 앞에 다다랐다.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야.”
너처럼 돈 많은 놈이니까 긴장해야 한다고. 나는 여유로운 골드찬에게 긴장감을 심어 주기 위해 무거운 어조로 속삭였다. 그도 놀란 모양인지 입을 작게 벌린 채 커다란 집을 보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초조해 보이는 그의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선 정문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로그인 중이어야 할 텐데. 힘차게 두드렸는데도 집 안에서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없나 보네.”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수확할 수가 없는데 어쩌지.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폴리스라도 대동하고 올까. 그러기엔 집주인의 죄목이 정확하지 않아서 부를 수가 없다. 애초에 내 정원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우니버스 님.”
“어?”
뒤를 돌자 골드찬이 두 손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깐 같이 혼내 주겠다고 기세등등하더니 지금은 잔뜩 쫄은 강아지 같았다.
“이 집 주인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도둑놈이니까.”
“뭘…… 훔쳤는데요?”
“내 정원.”
“정원이요? 그대로 있던데……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제 정…….”
“아무튼!”
지금 도둑놈 편드는 건가? 왠지 그런 느낌이 나서 나는 살짝 예민해졌다. 확실하게 말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