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우주 정원사 6화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6)


“내 정원에 사유지 등록을 해 놔서 수확을 못 하게 됐어. 그 말은 너한테도 보답을 못 하게 됐다는 뜻이야.”

“……아.”

“일단은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레벨 높은 사람이면 여기서 직업 가졌을 확률도 높으니까 퇴근 시간에 오겠지.”

정원에서 일할 때마다 이 집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그렇게 부러웠는데. 어쩌면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 나는 괜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커다란 정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어수선하게 그는 연신 내 눈치를 보았다.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무서워?”

“네?”

“도둑 무섭냐고. 넌 레벨도 높을 거 아냐. 여기선 레벨만 높으면 다잖아. 쫄 거 없어.”

“그게 아니라…….”

“겁은 많아서.”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골드찬의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내 행동에도 이렇게 움찔움찔하는데 도둑놈이라도 마주치면 까무러치겠다. 도둑놈의 집 주변은 한적해서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경치도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돈이 있고 봐야 한다. 나는 가만히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를 감상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내 시력을 몽골인처럼 만들어 줄 정도로 푸르렀다.

“저는 바다보다 산이 더 좋아요.”

“어,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정말요? 보통 바다를 더 좋아하던데. 그리고 전 바다보단 계곡을 더 좋아해요.”

“나도. 나중에 저기로 소풍 가자. 가 보고 싶어.”

“……생각해 보고요.”

좋아한다면서 그놈의 생각은 맨날 하네.

“그럼 혼자 가야지.”

“혼자요? 그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같이 가 드릴게요.”

싱겁기는. 골드찬은 나를 힐끔 보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근 그와 통하는 게 많았다. 나를 잘 따르기도 하고. 물론 돕는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말이다.

“또…… 겨울보단 여름을 더 좋아해요.”

“나돈데.”

“…….”

“왜.”

그가 고개를 들자 내 얼굴에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스쳐 간지러웠다.

“공통점이 많네요. 우연일까요?”

저 부담스럽고도 다정한 미소는 뭔데. 나는 슬그머니 골드찬의 눈을 피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심장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너무 귀여운 얼굴을 봐도 무리가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럼 운명이겠냐.”

나도 모르게 까칠한 답변이 나가 버렸다. 그래도 골드찬은 생글대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정말 여름이 더 좋아요?”

“그렇다니까.”

나는 예전부터 추운 건 딱 질색이고 더위를 덜 타는 편이라 여름을 더 좋아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잠이 오는 거지. 오늘은 늦잠까지 자고 일어났는데.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명상의 효과라도 생긴 걸까.

“엇.”

언제부터 존 건지 내 입가로 주륵 흐른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요즘 따라 게임 속에서 많이 자는 기분이다. 남의 집 앞에서 조는 건 예의가 아닌데……. 어깨가 뻐근하다 싶더니 골드찬이 내 어깨에 기대어 똑같이 졸고 있었다. 머리가 축축해 보이네.

“아.”

무슨 게임에서도 침을 흐르게 해 놨어. 민망하게시리. 골드찬의 머리를 촉촉이 적신 내 침이 그의 정수리에서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나는 잠든 그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열심히 작업복으로 닦아 주었다. 내 거친 손길에 그의 긴 속눈썹이 들렸다.

“……우니버스 님? 뭐 하세요?”

차마 침을 닦아 줬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닦던 작업복 소매를 숨기고 손으로 머리를 빗겨 주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어, 머리가 조금 엉킨 것 같길래.”

“……고맙습니다.”

붉은 노을이 쑥스럽게 웃는 골드찬의 두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던 건지 엉덩이가 납작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은 골드찬을 밀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도둑놈은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다.

“도대체 집주인은 언제 오는 거야.”

“…….”

“수확이라도 해야 진전이 있지. 레벨 업도 못하게 생겼네.”

오늘은 여기서 종료해 버릴까. 그런데 시야가 왜 이렇게 흐릿하지.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골드찬의 어깨를 짚었다.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우니버스 님. 할 말이 있어요.”

“…….”

“저 사실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모른 척하시는 거예요? 저 너무 헷갈려요. 오늘도 저랑 시간 보내려고 그러신 것도 다 아는…… 어, 우니버스 님!”

빈혈이라도 온 건지 나는 골드찬의 말을 마저 듣지 못하고 땅에 풀썩 쓰러졌다. 흐릿해진 시야는 눈꺼풀로 차단됐고, 귓가엔 골드찬의 울먹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리다 사라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마지막 생각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기절했다고 게임이 강제 종료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마치 컴퓨터 화면 보호기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계속 맴돌았다. 몸이 붕붕 뜬 느낌도 이상하고, 사방에 아무도 없이 어두컴컴한 것도 무서워서 캡슐을 종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저 멀리 보이는 카운트가 내게 부활할 시간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줄어들기까지 이제 1분 남짓 남았다. 게임에서 기절해 보는 건 처음이라 어디서 어떻게 깨어날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5, 4, 3, 2, 1…….

카운트가 0이 되자마자 붕 떴던 몸이 빠르게 바닥으로 꺼졌다.

“아악!”

“우니버스 님!”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바닥에 처박혀서 몸이 산산조각이 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푹신하고 보드라운 침대에 아주 편안히 누워 있었다. 옆엔 골드찬이 내 손을 꼭 잡은 채 물기 가득한 눈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죽었지?”

“죽은 게 아니라 잠시 혼수상태였어요. 오늘 뭐 드셨어요?”

“오늘 아무것도…… 아, 포도 주스 하나 마셨어.”

“상태 창 한번 들여다보세요. 아마 독이 들었던 것 같아요.”

분명 HP가 꽉 차고 힘도 펄펄 났었는데 독이라니? 누운 채로 상태 창을 띄워서 하나씩 드래그하며 포도 주스를 마신 시각을 확인했다.

[왕 포도를 삼킨 보라 뱀의 포도 주스: 일시적으로 HP를 가득 차게 합니다. 그러나 보라 뱀의 독은 치명적이어서 시간 안에 해독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내가 기른 열매처럼 재배해 만든 포도 주스인 줄 알았는데 무슨 뱀이 포도 주스를 만드는 거야. 천재영재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끝까지 나한테 엿을 먹이다니. 이번엔 제대로 갚아 줘야겠다.

“왕 포도를 삼킨 보라 뱀의 포도 주스래. 그냥 주스인 줄 알았는데.”

“왕삼보포 누가 줬어요? 그거 사냥할 때 버프용으로 먹는 거라서 해독할 능력 없는 초보자한텐 위험해요.”

“도둑놈이 줬어.”

왕삼보포. 고수들 사이에선 그렇게 부르나 보다. 자신을 거지라고 칭하던 천재영재는 아마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내 정원을 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제가 챙겨 드릴 테니까 그것만 먹어요. 함부로 받아먹지 말고요.”

“응, 근데 여긴 어디야?”

“우리 집이에요.”

“집 되게 좋다…… 그나저나 도둑놈은 못 보고 그냥 온 거지?”

“……우니버스 님. 진짜 몰라요?”

“뭘?”

골드찬은 울먹이던 슬픈 눈을 거두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그 집이 제집이고 우니버스 님이 가꾼 정원이 제 사유지라는 거요. 다 알고 계셨잖아요.”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그 도둑놈이 골드찬이라는 거야? 나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맞은편 창틀에는 골드찬에게 선물해 준 노란 튤립 화분이 보였다. 그때 골드찬이 말을 더 덧붙였다.

“이제 모른 척은 그만해도 돼요. 다 아니까요. 깜빡 속을 뻔했어요.”

그러니까 뭘 아는 건데. 골드찬은 전부터 주어를 빼먹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대화가 안 되는 느낌을 받을 때면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다.

“그래…….”

“역시.”

“…….”

“눈치가 빨라서 죄송해요.”

다시 되새겨 보자면 그 큰 집과 내가 가꾼 정원이 골드찬 거라는 건데. 울타리도 없이 집과 멀리 떨어진 정원이 사유지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했다. 그렇다면 왜 말하지 않은 걸까? 이걸 물었다간 또 답답한 대화를 할 게 뻔하니 묻고 싶은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

내가 괜한 자격지심이라도 가질까 봐 배려해 준 건가. 이 큰 집이 작은 소년의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럼 맨날 집에서 혼자 맛있는 거 해 먹은 거 골드찬이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좋은 집에 한번 초대를 안 한 걸 보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보다.

골드찬은 내가 저번에 서리를 당한 것 때문에 정원만 수확을 못 하게 설정했다고 했다. 그럼 말을 해 줬어야지. 미안하게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게 하다니. 어른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민망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 주인이 바로 앞에 있으니 수확하게 해 달라고 하면 바로 부탁을 들어줄 거다.

“그럼 사유지 좀 풀어 줘.”

“이미 수확할 수 있게 풀어 놨어요. 정원으로 가요.”

반나절 만에 다시 도착한 정원엔 내가 소중하게 키운 꽃과 열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엔 며칠 잡초 뽑기에 소홀했다고 그새 발등을 간지럽히는 잡초들이 꽃 주변을 노리고 있었다. 해충이 생기기 전에 빠르게 수확하고 열매는 아이템 창에, 꽃은 한 다발을 모아 잠시 구석에 놓고 잡초를 뽑았다. 오늘은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많아서 잡초 뽑는 일이 한결 수월했다.

“큼……!”

아, 맞다. 골드찬이 있었지. 집중해서 일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뒤에서 나는 헛기침 소리에 잡초가 덕지덕지 묻은 손을 털어 내고 꽃다발을 들었다. 그를 오해하긴 했어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골드찬 덕분이었다. 인간의 도리로서 보답은 필수였다.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골드찬. 이건 선물. 너 닮아서 예쁘지.”

포장지도 없이 줄기에 묻은 흙만 털어서 건넨 초라한 꽃다발이지만 꽃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 있었다. 보라색,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이 적절히 섞인 알록달록한 꽃다발에선 깨끗하고 우아한 향이 폴폴 풍겼다. 맡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골드찬은 품 안 가득 꽃다발을 받아 들고 내 눈을 응시했다. 여태 쑥스러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꽃잎을 만지작대던 그의 손이 멈추고 내 볼을 천천히 쓸었다. 흙이 묻은 듯 까끌한 느낌이 났다.

“우니버스 님, 저 좋아해요?”

“…….”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뭐래.”

찌푸려진 내 미간과 달리 소년은 고운 눈매를 접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가진 에메랄드 빛의 머리와 참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근데 뭐라는 거야. 나는 헛소리를 반대쪽 귀로 내보내며 다시 쭈그려 앉아 퍼렇게 물든 손으로 잡초를 뽑았다.

잡초를 움켜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부처가 온 줄 알았다. 어떻게 사람의 뒤에서 후광이 날 수가 있지? 분명 또 치장하는 데 돈을 쓴 게 확실하다. 이번엔 내가 그의 말간 눈을 마주하기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내 뒤에서 골드찬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관심받고 싶은 강아지처럼 한참을 서성거렸다.



* * *



[@@@신비한 꽃 팔아요. 에눌 가능. 원하시는 버프 걸어 드림@@@]

머리 위에 채팅 매크로 창을 띄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가를 따라 이어진 가판대 중 내 것이 가장 초라했다. 다른 상인들은 매크로 색도 휘황찬란하고 내 말풍선보다 두 배는 컸다. 게다가 파는 상품도 마을에선 볼 수 없는 아이템이 많았다.

꽃밭이 처음보다 세배 정도 커졌을 때, 나는 가판대를 놓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훌륭한 정원사가 되려면 일단 자금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골드찬의 등골을 빨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른 돈을 벌어서 사유지 등록도 해야 하는데 작은 정원만 가꾸다 보니 레벨 업은커녕 수확도 시원치 않았다.

가판대에 깔끔하게 수확한 꽃들을 차례대로 진열에 놓고 한쪽에는 열매를 판 돈으로 포장지를 사서 겹쳐 놓았다. 다들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쫄 거 없어.

시장은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고 조용했다. 다들 매크로 창만 띄워 두고 잠수를 탄 것 같았다. 나는 첫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고개를 기웃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나의 꼬질꼬질한 모습을 한 번씩 훑으며 빠르게 지나갔다. 옷이 문젠가. 그렇지만 옷을 살 돈도 없었다. 골드찬은 나에게 다 줘도 옷만큼은 주지 않았다. 자기 정원이나 열심히 가꾸라는 의미일까.

그때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편하게 구경하세요.”

“잠수 아니시네요. 그럼 구경 좀 할게요. 다 직접 키우신 거죠?”

“네, 제가 손수 키운 꽃들이에요.”

훤칠한 키의 남자는 진지하게 꽃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빨간색이지만 미약하게 노란빛이 나는 튤립을 들었다 놓기도 하고, 흰색에 프리즘 반짝이가 박힌 프리지어의 향기를 맡기도 했다. 왠지 사 갈 것 같다. 나는 손님이 부담스럽지 않게 괜히 정리된 포장지를 다시 하나씩 들춰 보며 딴짓을 했다.

“이건 얼마예요?”

“다 기본 2만 냥이에요. 에누리 가능합니다. 이게 마음에 드세요?”

“네. 이 꽃 비싼 거로 알고 있는데 굉장히 싸네요. 이걸로 주세요.”

골드찬이 준 씨앗은 내가 부른 금액보다 더 비쌌지만, 레벨이 낮은 사람이 수확하면 그만큼 시드는 시간도 짧아서 싸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송이에 2만 냥이면 첫 수입치고는 짭짤한 금액이다. 남자가 고른 꽃은 새빨간 튤립이었다. 골드찬이 실수로 밟은 그 튤립과 같은 종이었다.

“포장해 드릴게요.”

“네, 근데 버프는 어떤 거 걸어 주시는 건가요?”

“그게…….”

사실 버프는 손님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걸 줄 아는 버프라고는 1분도 안 가는 해충 박멸과 이슬비 버프뿐이었다.

“사랑에 관한 버프입니다.”

장사는 입으로 하는 거다. 친구들에게 말빨로 지지 않는 경력이 있는 나는 일단 내지르고 봤다. 남자가 호구라면 좋겠다. 제발. 남자는 감탄하며 눈을 크게 떴다. 촉이 왔다. 분명 저 남자는 호구일 것이다.

“오호, 신선한데요? 정원사란 직업은 설명도 읽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런 버프가 있었나 봐요.”

“……네.”

“꽃에 어울리는 버프네요. 그럼 혹시 사랑에 빠지는 버프도 있나요?”

“감정을 조종하는 건 못해요. 꽃을 받는 사람이 손님의 마음을 더 잘 느껴지게 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것도 좋네요. 버프 걸어 주세요. 여기 2만 냥.”

“감사합니다.”

나는 돈을 받아 들고 아이템 창에 구겨 넣었다. 이제 버프를 걸어야 하는데……. 남자는 기대하듯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는 포장지에 꽃 한 송이를 예쁘게 담아 포장하고 남자에게 건네며 눈치를 한번 봤다.

“합니다.”

남자가 끄덕임과 동시에 이슬비 버프를 썼다. 꽃이 새싹일 때 잘 자라라고 쓰는 버프인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의 머리 위에 새하얀 구름이 생기더니 분무기를 뿌리는 것처럼 비가 내렸다. 꽃잎과 남자의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었다. 그때 남자의 정수리에서 은색 머리카락이 한 올 자랐다. 저것도 새싹이라고 자란 건가. 못 본 척하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선물 받는 분이 좋아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참, 이 꽃의 꽃말이 있나요?”

“네, 그건 사랑을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어울리죠?”

“의미도 예뻐요. 오늘부터 한 송이씩 모아야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내일도 올게요.”

“감사합니다!”

장사하기 전 꽃말을 외워 두길 잘했다. 정말 전문가가 된 느낌이었다. 눈웃음을 짓던 남자는 순식간에 텔레포트를 쓰며 사라졌다.

“깜짝이야.”

남자가 사라지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골드찬이 나타났다. 큰 키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모양이다. 오늘 그의 옷차림은 참 발랄했다. 한쪽 어깨에만 걸친 멜빵바지와 최신형 캡모자까지. 뒤로 돌려 쓴 모자는 그의 귀여운 미모를 한껏 더 돋보이게 했다. 골드찬은 내 가판대를 찬찬히 훑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빨간 튤립은 왜 팔았어요?”

“그야 돈 벌려고 팔았지.”

“이제 저한텐 안 주는 거예요?”

“저번에 줬잖아. 한 다발 가득.”

“벌써 일주일도 더 된 일인걸요. 우니버스 님 레벨도 낮아서 금방 시든단 말이에요. 아직 좀 남긴 했지만…….”

아무리 정원 주인이라지만 갑질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도 장사해야 하는데.

나는 벌써 그가 준 은혜를 잊고서 속으로 궁시렁댔다. 축 내려간 눈꼬리로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다른 사람이라면 가판대에 있는 물건을 다 주고도 남을 표정이었다.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진짜 너라서 주는 거야.”

“……알아요. 뭐 주실 거예요?”

나는 가판대를 훑다 노란 튤립을 발견했다. 아침에 수확하면서 꽃잎 끝이 살짝 뜯어졌는데, 이 정도 하자인 건 충분히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팔았다가 컴플레인 들어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나는 뜯어진 쪽이 보이지 않게 포장지로 슬쩍 가려서 골드찬에게 내밀었다. 노란 튤립에서는 투명도 높은 작은 노란 튤립이 계속 공중에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