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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주의: 이 소설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로, 정확한 동식물 질병 관리 및 사육법 등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0.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
젖소의 뒷발에 차이지 않도록 몸을 뒤로 쭉 빼면서도 의료용 장갑을 낀 팔을 좀 더 깊이 넣었다. 소는 그리 불편하지 않은지 꼬리를 휙휙 돌리며 여물을 먹었다.
“어뗘? 새끼 뱄드나?”
나무로 지은 외양간 밖에서 보채듯 계속 물어보시는 최씨 할아버지는 나의 직업적 고충 따위는 몰라주는 분이셨다.
“아……!”
있다. 확인을 끝낸 즉시 소의 직장에서 얼른 팔을 빼며 활짝 웃었다. 내 표정으로 알게 된 최씨 할아버지가 펄쩍 뛰진 못하시고 틀니를 딱딱 부딪치며 웃으셨다.
“드디어 하나 얻소! 아주 고상했셔, 나가 을마나 고상을…….”
할아버지, 고생은 제가 했죠. 실한 수소 수소문해 드리고 중개 수수료를 총각김치 반 통으로 받았는데요. 5일장 중개상에게는 꼬박꼬박 돈 주셨으면서 왜 저한테는…….
하고 싶은 말이 몇십 개는 생겼지만 나는 그저 입으로만 웃었다.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음머―!
“으악!”
그때 별안간 젖소가 뒷발질을 하는 바람에 종아리를 맞고 짚단 위로 쓰러졌다. 뒤를 슬쩍 보는 젖소가 어째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 자식…….
“아이고, 똥간에 구르지 않은 게 다행이여.”
“하, 하하, 하하하.”
허탈하게 웃다가 진료 가방을 챙겨 외양간에서 나왔다. 최씨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수고혔써.”
내 손에는 커다란 알사탕 3개가 올라와 있었다. 진료비는 또 할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휴.
이 산 밑 시골에서 동물 병원 수의사로 일한 지, 1년이 되었다. 이제는 이런 일이 너무 익숙하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2층짜리 나의 동물 병원에 도착하니 할머니 세 분이 건물 턱에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짐칸이 긴 중형차를 공터에 대충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들은 반가워하며 손을 휘저어 인사를 하셨다.
“왔소, 왔고만여.”
“무슨 일 있으세요?”
당연히 아무 일도 없겠지만 예의상 말을 붙여 드렸다. 이렇게 내가 왕진을 갈 때면 동물 병원을 잠그기 때문에 이 근처 사는 할머니들은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앞에 쪼르르 앉아 계셨다.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열어 두고 갔지만 약품이 사라지는 일이 생겨 잠글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물 병원이 할머니들의 담소장이 된 덕분에 약품을 그냥 들고 간 사람은 금방 잡혔는데, 그렇다고 경찰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그 범인인 할아버지도 여전히 내게 한우의 상태를 봐 달라며 찾아오신다.
“이번 주에 우리 손녀가 온다 하요, 의사 총각 함 만나 봐.”
저는 수의사입니다, 할머니.
“하하하, 말씀드렸잖아요. 제 애인이 유학을 가서…….”
물론 뻥이다.
“몸뚱이가 멀어지면 맴도 멀어진다고, 글 은제까지 기다리고 있셔! 우리 손녀가 설서 이렇게 큰 회사를 다닌다고?”
그리고 씨알도 안 먹힌다.
“잘생긴 우리 의사 총각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잖여! 늦기 전에 장가가서 요 2층에 신방을 차려야지 않것소!”
할머니, 훌쩍 아니고 갓 넘었거든요? 만으로는 29세였다. 우리나라의 나이 계산법도 국제 표준을 쓸 때가 왔다.
“떡두꺼비 같은 아도 낳고 이 병원도 물려주고!”
“암, 암!”
당장 결혼해도 30년이 걸릴 일이었다.
하하 입으로만 웃으며 동물 병원의 유리문을 열자 할머니들이 아구구구 구부러진 허리를 조금이라도 세우며 내 뒤로 붙었다.
불을 켜 둔 채 갔다 왔기에 곧장 진료실로 향했다. 가방을 놓고 하얀 가운을 다시 입는 동안, 할머니들은 병원 오른쪽에 마련된 대기실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아 수다를 이어 가셨다. 자신의 손녀와의 선을 자꾸 권유하던 할머니의 손녀 자랑에 미혼의 딸이나 손녀가 없는 다른 두 할머니들은 맞장구를 치면서도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 심지어 태어난 지 5개월 된 손주 자랑까지 더하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의 자식이 5개월이 될 동안의 일을, 나는 빠짐없이 들었다. 이 정도면 랜선 삼촌 아닌가. 아니지, 할머니의 집에 놓인 전화로 듣고 입으로 전하신 거니까 구리선 삼촌인가.
실컷 말하고서 목이 마르셨는지 할머니들이 대기실에 놓은 작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씩 뽑으실 때였다. 밖에서 커다란 트럭 소리가 났다.
“아, 왔나 보네.”
“으잉, 뭐가 왔다냐?”
입구로 향하는 나를 할머니들이 목을 빼고 쳐다보시는데 따라나설 힘은 없는지 도로 대기실 소파에 쪼로록 앉으신다. 나는 평소에 한쪽을 잠가 놓는 유리문을 양쪽 다 활짝 열었다. 방금 차를 세운 기사들이 내리며 인사를 해 왔다. 그들은 싣고 온 커다란 상자를 조심조심 내리고 내게 물었다.
“어디다 놓을까요?”
“왼쪽으로 들어가면 진료실이 있어요. 공간 비워 놨으니 거기에 설치해 주세요.”
6개월 전 산 기계 할부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할부로 최신 초음파 기계를 하나 샀다. 젖소는 물론 말의 두꺼운 가죽까지 사람 가죽처럼 뚫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기계! 판촉 사원이 그렇게 설명했었다.
진료실에 설치되는 기계를 흐뭇하게 보는데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대학 동기들 중 비교적 가까운 곳에 개원한 이들이 내 개업식 때 와서 진료실을 둘러보고는 감탄을 했었다.
‘신도시 동물 병원도 아니고 시골 동물 병원에 이렇게 장비발 세우는 놈 처음 본다.’
시골이라고 꼭 낙후되어야 하나? 그리고 내 기계는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쓰는 것이다. 이 정도 투자는 별로 힘들지도 않으니, 유일한 수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이 지역 동물 복지의 일환이었다.
괜히 더 열심히 기사에게 설명을 듣고 시연을 할 동안, 할머니들은 결국 일어나서 진료실을 기웃거리셨다. 인간의 호기심은 노년의 굽은 척추도 벌떡 일으킨다.
1. 집사
기사들까지 방해하며 수다를 이어 가시던 할머니들은 오래지 않아 밭일을 해야 한다며 동물 병원을 떠나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안일을 한 다음 점심을 먹기 전까지 밭일을 하시는데, 그 짬에 내 동물 병원에 쉬러 오시는 것이다.
아직은 아침잠이 많은 탓에 할머니들이 존경스러웠지만 나이 들면 부지런한 게 아니라 일찍 잠들어 새벽에 깬다는 말에 살짝 삐딱해질 뻔했다.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이리 전화 주시고요. 멀어서 바로 오기는 힘들겠지만요.”
“하하,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믿고 샀어요.”
“이번 제품은 AS 문의가 확실히 적어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기사들은 텅 빈 2차선 도로에서 트럭을 유턴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새 기계를 사면 항상 느끼는 뿌듯한 마음으로 병원의 유리문 한쪽을 잠갔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흔적인 종이컵을 치우려 대기실을 본 순간, 매일 예의상 웃기만 하는 내 얼굴은 사정없이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박스 안 가져가면 어쩌라고.”
초음파 기계를 담아 왔던 커다란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통은 설치 기사가 전부 수거해 가는데 할머니들이 기사의 정신을 좀 빼놓는 바람에 잊고 간 모양이었다. 내 가슴까지 올 정도로 세로로 긴 박스의 날개를 잡고 질질 끌어 바깥까지 나왔다.
시골은 폐품을 수거하는 분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재활용 수거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틀 후였는데 그때까지 병원 앞에 놔둘 수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건물 옆 차를 세워 둔 공터 구석에 박스를 가져다 놨다.
“내친김에 신문도 같이 버려야겠다.”
종종 신문을 쓸 일이 있어 아낀다는 게 병원 2층의 내 살림 공간에까지 폐지가 잔뜩 쌓이고 말았다. 서울에서 살 때는 이렇게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기에 시골 생활은 나름 매력적이었다.
바깥에 있는 2층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 현관 근처에 쌓아 둔 신문 뭉치를 집어 들었다. 계단 아래를 내려 보자 하늘로 입을 벌리고 선 박스가 보였기에 각을 맞추고 떨어트렸다. 신문 뭉치는 정확하게 박스 안으로 들어갔지만 충격 탓에 박스가 휘청거리다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파트에서 이런 짓은 못 하지.”
던질 게 세 뭉치는 더 있었던 나는 일단 박스 옆에 뭉치를 떨어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들고 내려오면 무겁잖아. 어린애같이 즐거워하며 다시 박스를 세우고 신문을 전부 넣은 다음 손바닥을 탁탁 털며 다시 2층 계단으로 올랐다. 해가 중천에 있으니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해가 점점 뜨거워지네.”
그날 오후가 평화로운 시골 동물 병원 생활의 끝이었다.
※주의: 이 소설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로, 정확한 동식물 질병 관리 및 사육법 등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0.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
젖소의 뒷발에 차이지 않도록 몸을 뒤로 쭉 빼면서도 의료용 장갑을 낀 팔을 좀 더 깊이 넣었다. 소는 그리 불편하지 않은지 꼬리를 휙휙 돌리며 여물을 먹었다.
“어뗘? 새끼 뱄드나?”
나무로 지은 외양간 밖에서 보채듯 계속 물어보시는 최씨 할아버지는 나의 직업적 고충 따위는 몰라주는 분이셨다.
“아……!”
있다. 확인을 끝낸 즉시 소의 직장에서 얼른 팔을 빼며 활짝 웃었다. 내 표정으로 알게 된 최씨 할아버지가 펄쩍 뛰진 못하시고 틀니를 딱딱 부딪치며 웃으셨다.
“드디어 하나 얻소! 아주 고상했셔, 나가 을마나 고상을…….”
할아버지, 고생은 제가 했죠. 실한 수소 수소문해 드리고 중개 수수료를 총각김치 반 통으로 받았는데요. 5일장 중개상에게는 꼬박꼬박 돈 주셨으면서 왜 저한테는…….
하고 싶은 말이 몇십 개는 생겼지만 나는 그저 입으로만 웃었다.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음머―!
“으악!”
그때 별안간 젖소가 뒷발질을 하는 바람에 종아리를 맞고 짚단 위로 쓰러졌다. 뒤를 슬쩍 보는 젖소가 어째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 자식…….
“아이고, 똥간에 구르지 않은 게 다행이여.”
“하, 하하, 하하하.”
허탈하게 웃다가 진료 가방을 챙겨 외양간에서 나왔다. 최씨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수고혔써.”
내 손에는 커다란 알사탕 3개가 올라와 있었다. 진료비는 또 할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휴.
이 산 밑 시골에서 동물 병원 수의사로 일한 지, 1년이 되었다. 이제는 이런 일이 너무 익숙하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2층짜리 나의 동물 병원에 도착하니 할머니 세 분이 건물 턱에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짐칸이 긴 중형차를 공터에 대충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들은 반가워하며 손을 휘저어 인사를 하셨다.
“왔소, 왔고만여.”
“무슨 일 있으세요?”
당연히 아무 일도 없겠지만 예의상 말을 붙여 드렸다. 이렇게 내가 왕진을 갈 때면 동물 병원을 잠그기 때문에 이 근처 사는 할머니들은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앞에 쪼르르 앉아 계셨다.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열어 두고 갔지만 약품이 사라지는 일이 생겨 잠글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물 병원이 할머니들의 담소장이 된 덕분에 약품을 그냥 들고 간 사람은 금방 잡혔는데, 그렇다고 경찰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그 범인인 할아버지도 여전히 내게 한우의 상태를 봐 달라며 찾아오신다.
“이번 주에 우리 손녀가 온다 하요, 의사 총각 함 만나 봐.”
저는 수의사입니다, 할머니.
“하하하, 말씀드렸잖아요. 제 애인이 유학을 가서…….”
물론 뻥이다.
“몸뚱이가 멀어지면 맴도 멀어진다고, 글 은제까지 기다리고 있셔! 우리 손녀가 설서 이렇게 큰 회사를 다닌다고?”
그리고 씨알도 안 먹힌다.
“잘생긴 우리 의사 총각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잖여! 늦기 전에 장가가서 요 2층에 신방을 차려야지 않것소!”
할머니, 훌쩍 아니고 갓 넘었거든요? 만으로는 29세였다. 우리나라의 나이 계산법도 국제 표준을 쓸 때가 왔다.
“떡두꺼비 같은 아도 낳고 이 병원도 물려주고!”
“암, 암!”
당장 결혼해도 30년이 걸릴 일이었다.
하하 입으로만 웃으며 동물 병원의 유리문을 열자 할머니들이 아구구구 구부러진 허리를 조금이라도 세우며 내 뒤로 붙었다.
불을 켜 둔 채 갔다 왔기에 곧장 진료실로 향했다. 가방을 놓고 하얀 가운을 다시 입는 동안, 할머니들은 병원 오른쪽에 마련된 대기실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아 수다를 이어 가셨다. 자신의 손녀와의 선을 자꾸 권유하던 할머니의 손녀 자랑에 미혼의 딸이나 손녀가 없는 다른 두 할머니들은 맞장구를 치면서도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 심지어 태어난 지 5개월 된 손주 자랑까지 더하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의 자식이 5개월이 될 동안의 일을, 나는 빠짐없이 들었다. 이 정도면 랜선 삼촌 아닌가. 아니지, 할머니의 집에 놓인 전화로 듣고 입으로 전하신 거니까 구리선 삼촌인가.
실컷 말하고서 목이 마르셨는지 할머니들이 대기실에 놓은 작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씩 뽑으실 때였다. 밖에서 커다란 트럭 소리가 났다.
“아, 왔나 보네.”
“으잉, 뭐가 왔다냐?”
입구로 향하는 나를 할머니들이 목을 빼고 쳐다보시는데 따라나설 힘은 없는지 도로 대기실 소파에 쪼로록 앉으신다. 나는 평소에 한쪽을 잠가 놓는 유리문을 양쪽 다 활짝 열었다. 방금 차를 세운 기사들이 내리며 인사를 해 왔다. 그들은 싣고 온 커다란 상자를 조심조심 내리고 내게 물었다.
“어디다 놓을까요?”
“왼쪽으로 들어가면 진료실이 있어요. 공간 비워 놨으니 거기에 설치해 주세요.”
6개월 전 산 기계 할부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할부로 최신 초음파 기계를 하나 샀다. 젖소는 물론 말의 두꺼운 가죽까지 사람 가죽처럼 뚫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기계! 판촉 사원이 그렇게 설명했었다.
진료실에 설치되는 기계를 흐뭇하게 보는데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대학 동기들 중 비교적 가까운 곳에 개원한 이들이 내 개업식 때 와서 진료실을 둘러보고는 감탄을 했었다.
‘신도시 동물 병원도 아니고 시골 동물 병원에 이렇게 장비발 세우는 놈 처음 본다.’
시골이라고 꼭 낙후되어야 하나? 그리고 내 기계는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쓰는 것이다. 이 정도 투자는 별로 힘들지도 않으니, 유일한 수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이 지역 동물 복지의 일환이었다.
괜히 더 열심히 기사에게 설명을 듣고 시연을 할 동안, 할머니들은 결국 일어나서 진료실을 기웃거리셨다. 인간의 호기심은 노년의 굽은 척추도 벌떡 일으킨다.
1. 집사
기사들까지 방해하며 수다를 이어 가시던 할머니들은 오래지 않아 밭일을 해야 한다며 동물 병원을 떠나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안일을 한 다음 점심을 먹기 전까지 밭일을 하시는데, 그 짬에 내 동물 병원에 쉬러 오시는 것이다.
아직은 아침잠이 많은 탓에 할머니들이 존경스러웠지만 나이 들면 부지런한 게 아니라 일찍 잠들어 새벽에 깬다는 말에 살짝 삐딱해질 뻔했다.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이리 전화 주시고요. 멀어서 바로 오기는 힘들겠지만요.”
“하하,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믿고 샀어요.”
“이번 제품은 AS 문의가 확실히 적어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기사들은 텅 빈 2차선 도로에서 트럭을 유턴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새 기계를 사면 항상 느끼는 뿌듯한 마음으로 병원의 유리문 한쪽을 잠갔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흔적인 종이컵을 치우려 대기실을 본 순간, 매일 예의상 웃기만 하는 내 얼굴은 사정없이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박스 안 가져가면 어쩌라고.”
초음파 기계를 담아 왔던 커다란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통은 설치 기사가 전부 수거해 가는데 할머니들이 기사의 정신을 좀 빼놓는 바람에 잊고 간 모양이었다. 내 가슴까지 올 정도로 세로로 긴 박스의 날개를 잡고 질질 끌어 바깥까지 나왔다.
시골은 폐품을 수거하는 분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재활용 수거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틀 후였는데 그때까지 병원 앞에 놔둘 수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건물 옆 차를 세워 둔 공터 구석에 박스를 가져다 놨다.
“내친김에 신문도 같이 버려야겠다.”
종종 신문을 쓸 일이 있어 아낀다는 게 병원 2층의 내 살림 공간에까지 폐지가 잔뜩 쌓이고 말았다. 서울에서 살 때는 이렇게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기에 시골 생활은 나름 매력적이었다.
바깥에 있는 2층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 현관 근처에 쌓아 둔 신문 뭉치를 집어 들었다. 계단 아래를 내려 보자 하늘로 입을 벌리고 선 박스가 보였기에 각을 맞추고 떨어트렸다. 신문 뭉치는 정확하게 박스 안으로 들어갔지만 충격 탓에 박스가 휘청거리다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파트에서 이런 짓은 못 하지.”
던질 게 세 뭉치는 더 있었던 나는 일단 박스 옆에 뭉치를 떨어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들고 내려오면 무겁잖아. 어린애같이 즐거워하며 다시 박스를 세우고 신문을 전부 넣은 다음 손바닥을 탁탁 털며 다시 2층 계단으로 올랐다. 해가 중천에 있으니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해가 점점 뜨거워지네.”
그날 오후가 평화로운 시골 동물 병원 생활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