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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악연인 기연과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바리스타 학원을 다녔을 때 만났었다. 조용히 한구석에서 수업에만 집중하는 편인 보루와는 달리, 언제나 사람들 틈에서 활기 넘치게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기연이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결코 어떤 인연이든 연결될 접점이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급하게 도착해 수업 받고, 끝나면 잽싸게 빠져나가 다음 아르바이트 자리로 뛰어야 하는 보루와, 늘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며 회식이다, 모임이다 ‘꽃 리더’ 노릇을 하는 기연은 그 날이 있기까지 어쩌다 한 번 눈이 마주쳐 눈인사만 주고받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아는 사이’였을 뿐이었다.

‘우리, 얘기 좀 해.’

그래서 어느 날 기연이 학원에 들어서는 그녀를 붙드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어리둥절해 엉겁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눌 ‘이야기’가 있을 리 없는 ‘우리 사이’에 ‘하자’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줄거리가 대충 ‘여러모로 잘난 내가 네 남자 윤태구와 썸씽이 생겼으니, 별 볼 일 없는 애인 소보루가 포기해 줘.’로 요약이 되었을 때, 보루는 매우 짧은 소고 끝에 기연의 하얀 얼굴에 짙푸른 블루베리 주스를 투척했었다.

이미 여러 번 밤을 보냈다는 말에 판단을 길게 끌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보루에게 태구는 그래서 그 순간을 기점으로 ‘전 남친’이 되었고.

보루는 그 학원 원장이자 담당 강사이던 태구를 피해 다른 학원에서 남은 수업을 이어 들으면서 단 한 번의 마주침 없이 그를 인생에서 지워 냈다. 그래서 밤늦게 띵동, 하고 울린 메시지에 보루는 기분이 찝찝해 얼굴을 확 구겨야 했다.

[기적의 빵집입니다. 내일 오후 2시부터 근무해 주세요. 약 30분 먼저 와 주시면, 업무 내용과 스케줄 상의하실 수 있습니다.]

그 뒤에 필요한 서류 두어 가지가 덧붙은 메시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채용한 것인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버린 보루는 받은 메시지 번호로 전화를 했다.

받는 이가 기연이었다면 바로 따지고 들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받은 사람은 그곳 다른 직원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좋게 거절하려던 보루에게 무심히 흘린 빵빵한 한 달 페이를 듣고 보루는 ‘안 할게요.’ 준비한 그 한 마디를 꾹 눌러 삼켜야 했다.

이 세상에서 범법 행위 말고, 못 할 게 없는 서른 살의 프리터족 소보루. 그냥 신경만 긁을 뿐인 한 사람만 견디면 한 달 뒤에는 그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잖아?

한 달. 그까짓 거, 못 할 것도 없다. 보루는 멍하니, 거울을 보고 앉아 한참을 자기최면에 힘썼다.

똥꼬 치마 입고 샐샐 웃으며 배 나온 아저씨한테 생리대 판촉도 불사하는 소보루다.

개와 같은 분노조절 장애자들을 상대하며 못 들을 말 열두 시간씩 듣는 쇼핑몰 상담원도 했던 소보루다.

요양원 간병 아르바이트로 그야말로 똥오줌도 맨손에 묻히며 일했던 소보루가 큰돈 만지게 해 줄 꿀알바를 놓칠 이유가 겨우 ‘못된 년’ 하나뿐인 것이다!

그래! 못할 것 없지, 뭐.

돈이잖아, 돈!



# 그 남자의 은밀한 덕질 생활



어렵지 않게 출근 작심이 서자 안정을 찾은 보루는 이제 가벼워진 마음으로 거울 위에 있는 조명을 탁 하고 켰다. 그리고 오늘 예고한 사연자의 내용을 읽으며, 손으로는 거울 속 그녀의 얼굴에 분장을 이어 나갔다.

사진 속 여자는 사연 내용대로라면 두 달 전 헤어진 사연자의 전 여자친구였다. 다음 주에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여자를 진짜 보내기 위해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신청했다고 했다.

사연 보낸 남자에게 오늘 보루는 사진 속 여자로 분해 주어야 한다. 생머리 단발에, 짙은 눈매, 도톰한 입술, 광대라인이 없는 통통한 볼살이라 메이크업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었지만 나름 분위기를 내기 위해 골똘했다.

눈매 표현을 위해 아이라인을 짙게 그리고, 커다란 쌍꺼풀 라인을 위해 속눈썹도 짧게 잘라 숨기듯 붙였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원래 보루의 쌍꺼풀보다 더 짙어질 것이었다. 짧은 기장의 가발을 쓴 뒤 앞머리를 만들어 가렸다. 안 닮은 것보다는 가리는 게 상책이었다. 여기에 조명을 세게 쏜다면, 얼추 사진 속 여자처럼 보이겠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시 한번 사연을 숙지했다.

그리고 남자가 보낸 사연에 아까 미리 적어 놓은 답장을 꺼내 확인했다. 진짜 작별이 필요한 이런 종류의 사연은 그동안 해 봐서 알고 있다. 듣고 싶은 말은 ‘다시 만나 사랑하자’가 아니라, ‘정말 안녕’이니까.

보루는 시간을 확인하고 그녀의 계정에 로그인했다. 마이크 거치대를 움직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긴장감을 다스렸다. 오늘 방송은 오랜만에 하는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

마지막으로 메이크업을 거울로 확인하고, 표정을 여러 개 지어 보았다. 그리고 방송을 시작하기 전인 카메라를 대기한 후, 모니터로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뒤 익숙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오늘의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 한 주 동안 잘 지냈나요? 오늘 ‘보`s TV’ 지금 시작합니다!”



***



내일은 새벽부터 큰 행사에 빵 배달이 예약되어 있었다. 매장에서 판매할 물량까지 해내려면 오늘 제빵 주방은 밤샘 작업이 불가피했다. 새벽에 나오기로 한 수한 대신 이른 저녁부터 단체 주문 물량을 책임진 기적은 오랜만의 제빵에 피가 절절 끓는, 기분 좋은 흥분 상태가 되었다.

“당분간 오늘처럼 내가 공석 메울 거야. 오늘 수한이 쉬게 했으니까, 내일부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쉬어. 그러니까, 금!”

“네!”

금, 이라고 불린 주방 식구 중 막내가 제 성이 불리자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휴무자 리스트 만들어 와.”

네! 잽싸게 대답이 터졌지만, 사장인 기적은 이미 앞치마와 제빵모를 풀어내며 벌써 주방을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 안의 누구든 성으로만 부르는 사장. 그동안은 수한의 담당 아래서 사장과 직접 대면이 적었기에 불편을 몰랐었던 것이다.

사장이 오늘 작업 동안 여기저기서 아무나 불러 젖히는 바람에 살얼음판을 겪어야 했었다. 하루 종일도 모자라 밤늦은 시간까지 지하의 제빵 주방을 장악했던 사장, 이기적.

팡팡 터지는 고함, 지적, 한숨소리 하나까지 곤두세운 채 버텼던 제빵 식구들은 방금 전 지옥문을 나온 기분이었다.

금이나 박, 서는 하나 밖에 없어서 정신만 똑바로 챙기면 대비가 가능했지만, 세 명이나 되는 김들은 각기 상황에 맞는 김의 정체를 추리해 내느라 애를 먹고, 틀리면 욕도 먹어야 했던 것이었다.

너 말고, 김! 김, 너 말야! 정신 안차려, 김?!

사장이 나가고 나니, 불구덩이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처럼 사방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누구든 내 밑으로 휴무 만들어서 이기적 대장이 이 제빵 주방에 또 들어오면 알아서들 해! 젠장……!”

수한 다음 서열인 첫 번째 김의 협박으로 당장 10분 내로 리스트를 만들어 튀어 올라가야 하는 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



[바리스타 면접은? 어떻게 됐는지 보고는 해 줘야 할 것 아냐?]

아까 보낸 메시지를 확인 하고도 여태 아무런 대답이 없는 동생이자, 한 달짜리 신출내기 경력의 매니저 기연.

기적은 아직 자정이 되기도 전인 시계를 보고 알 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매장 직원인 웅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베이커리에서 가장 막내이면서, 가장 많은 역할을 맡고 있고, 때로는 사장인 자신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베이커리에 충성하는 웅.

[이름도 예쁘고, 얼굴은 더 예쁜 그 바리스타 누나? 매니저님이 출근하게 하라고 하시던데요?]

다른 한 자리는 겨우 메우기는 했군 그래. 아무 것도 없이 잘난 척 나선 것인 줄 알았는데, 기연이 일을 하긴 했다.

‘카페 티오, 나한테 맡겨 줘. 아는 애 있어.’

‘아는 애 말고, 실력이 있는 애.’

‘있어, 실력. 학원에서 알게 된 애야. 자격증도 땄고.’

‘그래, 자격증 학원에서 공부하면 대부분 그렇게 자격증을 따기 마련이지.’

‘흥.’

일 년이 넘게 즐거운 학원 생활만 누리고, 결과물도 못 얻은 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흥미를 놓아 버린 기연. 그녀는 대신 오빠인 기적의 베이커리에 없어도 되는 매니저 직급을 멋대로 만들어 눌러앉아 버렸던 것이다.

기적은 고단한 한숨과 함께 그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지정석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동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두고 죽은 듯이 쉬었다.

이렇게 죽을 만큼 피곤한 날은 그냥 다 잊고 뛰는 것이 딱 좋은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헬스장을 찾기도, 그렇다고 캄캄한 곳을 달리는 것도 애매한 한밤중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심해지는 갑갑증.

그러다 번쩍, 눈을 뜨고 노랗게 빛을 발하는 시계를 급히 확인했다.

맙소사, 잊을 뻔했다! 수요일이었구나!

그는 차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단지 안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사서 소중히 들고 나왔다.

수요일 밤,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소주 한 병.

차갑게 하기 위해 냉동실에 넣어 놓고, 바로 욕실로 직행한 그는 뜨겁고 센 샤워기 물을 맞으며 경건하게 내내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긴긴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수요일 밤 열두 시. 이날만을 기다리며 한 주 동안 고된 노동을 해낸 그였다. 오늘따라 더 고단한 하루라서 다가올 그 시간이 더 기다려지는 걸까.

기적은 경건히 샤워를 마치고,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말리던 중 화장대 위를 드르륵 구르기 시작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알람 메시지. ‘10분 전!’

기적의 휴대폰 알람 앱이 유일하게 저장하고 있는 스케줄이었다. 새벽 출근을 위한 알람도 없다. 그건 몸이 알아서 일어나게 하니까. 하지만 이 스케줄은 결코 1초도 놓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랄까.

그리고 바로 이어진 톡 메시지 하나.

[면접쯤이야 혼자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봐? 꼰대처럼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까지 갑질이셔!]

빨리도 대답하는 ‘을’, 이기연의 메시지를 이번에는 기적이 고약하게 씹어 주려다가 심호흡을 깊게 한 후 메시지를 보냈다.

[괜히 맑은 물 흐리지 말고, 웬만하면 서둘러 귀가해. 너도 벌써 서른이다. 잠을 줄여 놀면 수명도 동시에 줄어. 이제 무병장수를 설계해야 할 나이 아니냐?]

일부러 뼈 때리는 말을 골라 던지고서, 생각보다 후련하고 시원한 기분을 느끼는데 평소와 달리 칼 답장이 날아왔다.

[힉. 나 지금 맑은 물, 청담인 건 어떻게 알았어? 오빠 너, 혹시 나 과잉보호 뭐 그런 거 하는 거니? 하마터면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낯가림할 뻔했어, 나.]

골 때리는 오해로 돌려받게 되는 억울한 결말로 이어지고 말았지만.

이제 서른이 된 여동생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렇게 내버려 두기도 찜찜한 기적은 간신히 벗어난 갑갑증이 다시 몰려드는 것에 진저리를 치며 휴대폰을 던지듯 팽개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