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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제 7분 전. 냉동실에 넣어 둔 차가운 소주를 따서, 각 얼음을 채운 목이 긴 잔에 끝까지 따랐다. 손가락 한 마디만 남기고 잔이 다 채워지자, 병에 남은 소주가 아까워 그 자리에서 입 안에 휙 털어 넣고는 인상을 팍 썼다.
쓰다. 쓰고 맛있다. 가슴을 훑어 내려가는 그 느낌을 오랜만에 반기며, 마침내 그 시간이 돌아왔다는 짜릿한 실감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맨몸에 가운만 걸친 기적은 모니터 앞에 있을 때만 쓰는 안경을 쓰고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4분 전.
전원을 켜고 접속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시간 확인하면서 점점 피가 끓기 시작했다. 늘 병을 비우기 위해 홀짝인 그 한 잔 탓을 해 보지만, 이 두근거림의 정체를 기적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어디 알리기도 꺼림칙한 그 비밀. a.k.a ‘덕질’.
물론 누군가의 눈에 ‘덕질’인 이것이 기적에게는 오랜 취미이자, 유일한 숨통이라고 스스로 항변해 간직하는 그만의 달콤한 시간이지만 말이다.
《안녕, 한 주 동안 잘 지냈나요? 오늘 ‘보`s TV’ 지금 시작합니다!》
모니터를 가득 채운, 오늘도 또 다른 얼굴의 저 여자. 항상 다른 얼굴의 누군가가 되어 분홍색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는 여자, ‘보’. 그녀의 방송을 보는 구독자들은 그녀를 ‘보스’라고 충성을 담아 부르곤 한다.
어깨쯤 오는 단발머리에 반짝반짝 커다랗고 진한 눈매를 한 ‘오늘의 보’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긋나긋 예쁜 목소리로 인사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헤드폰을 통해 고막에 닿는 순간부터 이미 절정을 찍는 전류.
저릿저릿 희열을 느끼며 기적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리고 한 손에 든 소주를 조금씩 홀짝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생방송이라고 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올라오는 편집영상도 좋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그녀와의 소통을 하는 날을 기적은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옛날 인터넷 라디오 시절 기분도 나고 말이다.
계정을 통해 받는 소소한 고민 상담, 누군가의 요청이나 보스가 공유하고 싶은 음악을 띄운다거나 하는 코너는 그녀가 아주 오래전 한 플랫폼 방장이 되어 인터넷 라디오를 꾸리던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구닥다리 방송 운영이었다. 그리고 이 채널의 다른 구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적도 상당히 ‘옛스러운’ 그녀의 진행내용을 좋아한다.
뭐, 구닥다리가 아니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그녀가 한 시간 내내 비명만 질러도 지금 팬덤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 분명하기는 하다.
《……오늘 저는 사연자 분의 여자친구인 ‘수정’이라는 여자가 되었어요. 오늘 사연자 분이 사진 공개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셔서 비교 샷은 없어요. 어때요? 닮았나요, 사연자 분?》
그리고 일 년 전, 본격적으로 이 채널을 오픈하면서 그녀는 본인의 얼굴 대신 ‘누군가의 무엇’으로 분해 매회 사연자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보탰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거나, 제 사과를 받아 주지 않는 애인, 혹은 돌아가신 엄마나 돈을 들고 튄 원수 같은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하소연을 들어 주기도 하고, 못 다한 말을 대신 들어 주기도 하고, 듣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기도 하는 5분 남짓한 마지막 코너는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타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짤막하게 이런 사연자의 소원입니다, 하고는 카메라를 조용히 바라만 보며 말없이 차를 마셔 주거나, 혹은 오랜 짝사랑을 고백해 달라는 소녀의 사연에 음성녹음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가끔 생방송인 경우에는 사연자와 전화 통화를 해 주기도, 오늘 같은 경우는 그녀가 상대방이 되어 답장을 적어 읽어 주기도 한다.
《……가끔 떠올리는 것까지도 하지 말자. 살아 있는 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지만 말이야. 떠올리는 것마저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 그렇게 서로를 위하자. 사랑했었노라고, 고마웠다고도 말고. 혹시 모를 미안함까지 오늘 이 안녕을 마지막으로 잊어야 해. 그렇게 마지막으로 오빠, 남은 감정을 오늘 모두 써 버리자…….》
조용하게 읽어 나가는 편지 안에는 따스하고 다정하지만, 단단한 작별이 담겨 있었다. 철저히 사연 주인공이 원하는 내용을 적어 주는 편인 보스이니, 아마 저 내용도 그 남자가 원하는 내용이었을 테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작별을 읽는 동안은 정말로 떠난 여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물기 어린 얼굴이었다.
하아, 저것이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여자의 따뜻한 목소리 다음으로 저 진심을 그는 매우 좋아한다. 카메라 가득 눈을 맞추며 말하는 안녕에 아주 잠시 온 세상이 고요했다. 모니터 건너편의 그도 숨을 죽여 마음 아픈 안녕을 지켜보았다.
별다른 맺음 없이 ‘그럼, 우리도 오늘은 이만 인사할까요?’하며 손을 살짝 흔드는 것으로 오늘 방송이 끝이 났다. 차마 소리 내어 인사하지 못하고, 잔에 남은 술을 홀랑 비우며 기적도 소주 향기 가득한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보스도, 안녕.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전자 벨소리가 방 안을 깡깡 돌아다녔다.
띨리리리리. 정나미 떨어지게 끝나지 않는 전화벨 소리에 보루는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으며 신경질적으로 신음했다.
지정 번호만 울리는 저 벨소리는, 분명 그놈이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남자, 전 남친 윤태구 소유의 세 개 번호 모두 저 듣기 싫은 전자 벨소리로 저장해 놓았으니까.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댓바람부터 시작된 끈질긴 통화 연결이 지긋지긋해 으으! 진절머리를 냈다.
지치지도 않니, 이 인간아. 중얼중얼 싫은 소리를 한껏 뱉은 보루는 끊이지 않고 바로바로 이어지는 줄기찬 벨소리를 지우려 이불을 끌어다가 푹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끊어지면 곧 다시 시작되곤 하는 매우 집요한 벨소리에 보루는 이불 속에서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다.
야, 이 상또라이 자식아!!
그리고 잠시 중간에 벨소리가 멈춘 그 순간 보루가 이불을 홱 걷은 다음 감은 눈 그대로 커다랗게 외쳤다.
“오케이, 개굴! ‘쪼다새끼’한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스토킹으로 고소한다고 문자 좀 보내 줘!”
소중한 아침 시간, 기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강제 기상이 되어 버린 것이 억울해 감긴 눈꺼풀 끝에 눈물이 도록 맺혔다가 흘렀다. 문자를 받은 모양인지 다행히 잠잠해진 휴대폰.
하아, 정말로 고소해야 저 짓 좀 안 해 주려나.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 근래 다시 시작된 괴롭힘이었다. 침대 밑에 놓아 둔 휴대폰을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잡아 올렸다. 그녀가 잠이 들었던 지난 4시간 동안 잔뜩 밀린 메시지와 알림들을 확인하면서 서서히 졸음을 물렸다. 그리고 방금 전의 기분 나쁜 벨소리도 잊으려고 애썼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야 하는 그녀에게 아침 컨디션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온몸이 매트리스에 매몰된 것 같은 고단한 기분을 기분 좋게 바꾸어 받아들이는 이 시간. 이 짧은 시간이 보루가 하루 중 유일하게 굼뜨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너무 짧아서 꿀처럼 달콤한 순간을 잔뜩 음미하며 오늘 하루 그녀가 가야 할 아르바이트들을 시간별로 떠올렸다.
어느 정도 잠이 달아나자, 한껏 기지개를 켜며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맨발을 딛자마자, 가장 처음 그녀가 하는 일은 커피 머신을 켜는 일.
오늘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마실 소중한 양식, 커피. 잘 건조된 빈 통의 개수를 눈으로 확인하고 만들어야 할 커피 양을 가늠했다. 맨다리를 맨발로 삭삭 긁으며 냉장고에 붙은 엄마의 사진을 보며 인사했다.
엄마, 안녕? 그러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소리를 내어 엄마를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 잤어, 엄마?”
쓸쓸하게 작은 방 안을 울린 자신의 목소리. 고요하던 공간을 울린 자신의 목소리마저 반가워 보루는 다시 한 마디 더 소리 내어 보았다.
“오늘도 열심히 수고할게, 엄마.”
어색한 제 말에 피식 웃고는 너무 느리게 걸러져 나오는 커피를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인스턴트커피를 꺼내 진한 블랙을 만들었다.
아침 식사 대신 잔뜩 만들어 마시고 잠을 깨운 다음, 오늘도 바쁜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
아까 그냥 한 정거장이라도 지하철을 탔어야 맞았다. 오전에 잡혔던 도시락 가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애매하게 남는 시간을 따져 보다가 무턱대고 걸어 볼까 했던 것이 사달이었다. 항상 자신의 우매한 거리감과 방향 감각을 너무 과신했을 때에 일어났던 일들을 또 잊고. 겨우 차비 1,250원 아껴서 살림이 크게 피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시간이 임박하는데도 계속 이어지는 골목과 골목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보루는 그제야 내비게이션 앱을 켜서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점심 대신 도시락 가게에서 사 온 삼각김밥 하나를 우물우물 씹는 둥, 마는 둥 삼킨 다음 아침에 집에서 내려서 지고 다니던 커피통 하나를 새로 개봉했다.
바리스타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한 방울 맛보지도 못하고 냄새 고문만 당할 게 빤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커피를 충전해 두어야 했다. 그녀도 몰랐는데 급히 걸으면서 뚜껑을 열기 전부터 이미 콧구멍이 벌름거릴 만큼 커피가 고팠었던 모양이었다. 뜨겁게 내려 향이 그득할 때에 마시는 진한 커피를 좋아하지만, 여의치 않으니 오후 동안의 식은 커피도 충분히 고마웠다.
한낮에 보는 <기적의 빵집>은 밤보다 더 과하게 거대해 보였다. 이 규모의 건물을 빵 냄새로 꽉 채우고, 손님으로 북적이게 하는 ‘기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 높이 달린 고고한 빵집 간판을 올려다보려 고개를 한껏 젖힌 보루는 젖힌 김에 커피를 넘기려 꿀떡꿀떡 둘러 마시며 서둘러 걸었다. 그녀가 입구를 뒤로 젖힌 눈으로 확인하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퍽! 하고, 그녀의 들린 팔꿈치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보루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꼼짝없이 새카만 커피를 둘러쓴 채, 아직 넘기지 못한 입 안의 커피가 줄줄 새고, 콧구멍으로도 침범한 커피를 줄줄 내보내야 했다.
아픈 걸 깨닫기도 전에, 켁켁 뿜어져 나오는 커피에 익사할 것 같아 살기 위해 쉼 없이 기침이 곧이어 터져 나왔다.
“헉, 보루 누나! 미안, 괜찮아요? 어떡해, 들어오는 걸 못 봤어요.”
우리 참성격의 소유자, 젊은이 웅이 상자가 잔뜩 쌓인 끌차를 한쪽에 놓고 푹 젖은 보루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 누나 삼은 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신고식을 기대한 건 아닌데 말이다, 웅아.
***
“채용한 것에 대한 나름 감사의 제스처야? 과거 청산하자고 셀프로 뒤집어쓰고 온 모양이지?”
기연은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그 다음에는 한심해하더니, 그리고 저렇게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보루는 얄미운 말에도 정색을 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 그저 묵묵부답 기연이 막고 서 있는 복도를 비켜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다 나 때문이에요, 누나. 택배 상자 끌차로 내놓다가 들어오는 보루 누나를 못 봤어요. 그래서 내 후드 집업이라도 주려고 가는 길이에요.”
“지금 옷 좀 갈아입는다고 해결될 몰골은 아닌 것 같은데?”
“하아, 그렇죠? 머리카락까지 커피에 푹 젖었어요.”
이제 기연과 웅은 나란히 서서 귀신형용인 그녀를 연거푸 훑고 있었다. 그러나 관람당하는 쪽의 심리상태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웅이 넌 가 보고, 소보루 씨는 날 따라와.”
기연의 살짝 내리깐 눈과 비릿한 미소가 마음에 걸린 보루는 선뜻 그녀를 따라가지지가 않았다. 옆에서 보루의 어깨에 팔을 두른 웅이 이끌지 않았다면 영영 저 의뭉스러운 계집애의 뒤를 따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들어가. 저 안쪽으로 화장실이 있어. 샤워부스도 있고.”
기연이 보루를 면접 봤던 방. 아담하지만 책상과 회의 테이블, 그리고 응접 소파까지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방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기연이 말했다.
“씻고 있어. 내 옷 가져다줄게.”
“네 옷?”
“너보다 삼십 센티는 더 큰 남자애 옷을 입고 뜨거운 커피 만들 수나 있겠어? 바지는 블랙진이니까 그냥 입고, 내가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카디건 티셔츠가 차에 있어. 가져다줄 테니, 오늘은 그거 입고 일해.”
이제 7분 전. 냉동실에 넣어 둔 차가운 소주를 따서, 각 얼음을 채운 목이 긴 잔에 끝까지 따랐다. 손가락 한 마디만 남기고 잔이 다 채워지자, 병에 남은 소주가 아까워 그 자리에서 입 안에 휙 털어 넣고는 인상을 팍 썼다.
쓰다. 쓰고 맛있다. 가슴을 훑어 내려가는 그 느낌을 오랜만에 반기며, 마침내 그 시간이 돌아왔다는 짜릿한 실감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맨몸에 가운만 걸친 기적은 모니터 앞에 있을 때만 쓰는 안경을 쓰고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4분 전.
전원을 켜고 접속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시간 확인하면서 점점 피가 끓기 시작했다. 늘 병을 비우기 위해 홀짝인 그 한 잔 탓을 해 보지만, 이 두근거림의 정체를 기적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어디 알리기도 꺼림칙한 그 비밀. a.k.a ‘덕질’.
물론 누군가의 눈에 ‘덕질’인 이것이 기적에게는 오랜 취미이자, 유일한 숨통이라고 스스로 항변해 간직하는 그만의 달콤한 시간이지만 말이다.
《안녕, 한 주 동안 잘 지냈나요? 오늘 ‘보`s TV’ 지금 시작합니다!》
모니터를 가득 채운, 오늘도 또 다른 얼굴의 저 여자. 항상 다른 얼굴의 누군가가 되어 분홍색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는 여자, ‘보’. 그녀의 방송을 보는 구독자들은 그녀를 ‘보스’라고 충성을 담아 부르곤 한다.
어깨쯤 오는 단발머리에 반짝반짝 커다랗고 진한 눈매를 한 ‘오늘의 보’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긋나긋 예쁜 목소리로 인사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헤드폰을 통해 고막에 닿는 순간부터 이미 절정을 찍는 전류.
저릿저릿 희열을 느끼며 기적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리고 한 손에 든 소주를 조금씩 홀짝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생방송이라고 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올라오는 편집영상도 좋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그녀와의 소통을 하는 날을 기적은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옛날 인터넷 라디오 시절 기분도 나고 말이다.
계정을 통해 받는 소소한 고민 상담, 누군가의 요청이나 보스가 공유하고 싶은 음악을 띄운다거나 하는 코너는 그녀가 아주 오래전 한 플랫폼 방장이 되어 인터넷 라디오를 꾸리던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구닥다리 방송 운영이었다. 그리고 이 채널의 다른 구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적도 상당히 ‘옛스러운’ 그녀의 진행내용을 좋아한다.
뭐, 구닥다리가 아니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그녀가 한 시간 내내 비명만 질러도 지금 팬덤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 분명하기는 하다.
《……오늘 저는 사연자 분의 여자친구인 ‘수정’이라는 여자가 되었어요. 오늘 사연자 분이 사진 공개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셔서 비교 샷은 없어요. 어때요? 닮았나요, 사연자 분?》
그리고 일 년 전, 본격적으로 이 채널을 오픈하면서 그녀는 본인의 얼굴 대신 ‘누군가의 무엇’으로 분해 매회 사연자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보탰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거나, 제 사과를 받아 주지 않는 애인, 혹은 돌아가신 엄마나 돈을 들고 튄 원수 같은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하소연을 들어 주기도 하고, 못 다한 말을 대신 들어 주기도 하고, 듣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기도 하는 5분 남짓한 마지막 코너는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타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짤막하게 이런 사연자의 소원입니다, 하고는 카메라를 조용히 바라만 보며 말없이 차를 마셔 주거나, 혹은 오랜 짝사랑을 고백해 달라는 소녀의 사연에 음성녹음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가끔 생방송인 경우에는 사연자와 전화 통화를 해 주기도, 오늘 같은 경우는 그녀가 상대방이 되어 답장을 적어 읽어 주기도 한다.
《……가끔 떠올리는 것까지도 하지 말자. 살아 있는 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지만 말이야. 떠올리는 것마저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 그렇게 서로를 위하자. 사랑했었노라고, 고마웠다고도 말고. 혹시 모를 미안함까지 오늘 이 안녕을 마지막으로 잊어야 해. 그렇게 마지막으로 오빠, 남은 감정을 오늘 모두 써 버리자…….》
조용하게 읽어 나가는 편지 안에는 따스하고 다정하지만, 단단한 작별이 담겨 있었다. 철저히 사연 주인공이 원하는 내용을 적어 주는 편인 보스이니, 아마 저 내용도 그 남자가 원하는 내용이었을 테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작별을 읽는 동안은 정말로 떠난 여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물기 어린 얼굴이었다.
하아, 저것이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여자의 따뜻한 목소리 다음으로 저 진심을 그는 매우 좋아한다. 카메라 가득 눈을 맞추며 말하는 안녕에 아주 잠시 온 세상이 고요했다. 모니터 건너편의 그도 숨을 죽여 마음 아픈 안녕을 지켜보았다.
별다른 맺음 없이 ‘그럼, 우리도 오늘은 이만 인사할까요?’하며 손을 살짝 흔드는 것으로 오늘 방송이 끝이 났다. 차마 소리 내어 인사하지 못하고, 잔에 남은 술을 홀랑 비우며 기적도 소주 향기 가득한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보스도, 안녕.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전자 벨소리가 방 안을 깡깡 돌아다녔다.
띨리리리리. 정나미 떨어지게 끝나지 않는 전화벨 소리에 보루는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으며 신경질적으로 신음했다.
지정 번호만 울리는 저 벨소리는, 분명 그놈이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남자, 전 남친 윤태구 소유의 세 개 번호 모두 저 듣기 싫은 전자 벨소리로 저장해 놓았으니까.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댓바람부터 시작된 끈질긴 통화 연결이 지긋지긋해 으으! 진절머리를 냈다.
지치지도 않니, 이 인간아. 중얼중얼 싫은 소리를 한껏 뱉은 보루는 끊이지 않고 바로바로 이어지는 줄기찬 벨소리를 지우려 이불을 끌어다가 푹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끊어지면 곧 다시 시작되곤 하는 매우 집요한 벨소리에 보루는 이불 속에서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다.
야, 이 상또라이 자식아!!
그리고 잠시 중간에 벨소리가 멈춘 그 순간 보루가 이불을 홱 걷은 다음 감은 눈 그대로 커다랗게 외쳤다.
“오케이, 개굴! ‘쪼다새끼’한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스토킹으로 고소한다고 문자 좀 보내 줘!”
소중한 아침 시간, 기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강제 기상이 되어 버린 것이 억울해 감긴 눈꺼풀 끝에 눈물이 도록 맺혔다가 흘렀다. 문자를 받은 모양인지 다행히 잠잠해진 휴대폰.
하아, 정말로 고소해야 저 짓 좀 안 해 주려나.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 근래 다시 시작된 괴롭힘이었다. 침대 밑에 놓아 둔 휴대폰을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잡아 올렸다. 그녀가 잠이 들었던 지난 4시간 동안 잔뜩 밀린 메시지와 알림들을 확인하면서 서서히 졸음을 물렸다. 그리고 방금 전의 기분 나쁜 벨소리도 잊으려고 애썼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야 하는 그녀에게 아침 컨디션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온몸이 매트리스에 매몰된 것 같은 고단한 기분을 기분 좋게 바꾸어 받아들이는 이 시간. 이 짧은 시간이 보루가 하루 중 유일하게 굼뜨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너무 짧아서 꿀처럼 달콤한 순간을 잔뜩 음미하며 오늘 하루 그녀가 가야 할 아르바이트들을 시간별로 떠올렸다.
어느 정도 잠이 달아나자, 한껏 기지개를 켜며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맨발을 딛자마자, 가장 처음 그녀가 하는 일은 커피 머신을 켜는 일.
오늘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마실 소중한 양식, 커피. 잘 건조된 빈 통의 개수를 눈으로 확인하고 만들어야 할 커피 양을 가늠했다. 맨다리를 맨발로 삭삭 긁으며 냉장고에 붙은 엄마의 사진을 보며 인사했다.
엄마, 안녕? 그러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소리를 내어 엄마를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 잤어, 엄마?”
쓸쓸하게 작은 방 안을 울린 자신의 목소리. 고요하던 공간을 울린 자신의 목소리마저 반가워 보루는 다시 한 마디 더 소리 내어 보았다.
“오늘도 열심히 수고할게, 엄마.”
어색한 제 말에 피식 웃고는 너무 느리게 걸러져 나오는 커피를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인스턴트커피를 꺼내 진한 블랙을 만들었다.
아침 식사 대신 잔뜩 만들어 마시고 잠을 깨운 다음, 오늘도 바쁜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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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냥 한 정거장이라도 지하철을 탔어야 맞았다. 오전에 잡혔던 도시락 가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애매하게 남는 시간을 따져 보다가 무턱대고 걸어 볼까 했던 것이 사달이었다. 항상 자신의 우매한 거리감과 방향 감각을 너무 과신했을 때에 일어났던 일들을 또 잊고. 겨우 차비 1,250원 아껴서 살림이 크게 피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시간이 임박하는데도 계속 이어지는 골목과 골목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보루는 그제야 내비게이션 앱을 켜서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점심 대신 도시락 가게에서 사 온 삼각김밥 하나를 우물우물 씹는 둥, 마는 둥 삼킨 다음 아침에 집에서 내려서 지고 다니던 커피통 하나를 새로 개봉했다.
바리스타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한 방울 맛보지도 못하고 냄새 고문만 당할 게 빤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커피를 충전해 두어야 했다. 그녀도 몰랐는데 급히 걸으면서 뚜껑을 열기 전부터 이미 콧구멍이 벌름거릴 만큼 커피가 고팠었던 모양이었다. 뜨겁게 내려 향이 그득할 때에 마시는 진한 커피를 좋아하지만, 여의치 않으니 오후 동안의 식은 커피도 충분히 고마웠다.
한낮에 보는 <기적의 빵집>은 밤보다 더 과하게 거대해 보였다. 이 규모의 건물을 빵 냄새로 꽉 채우고, 손님으로 북적이게 하는 ‘기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 높이 달린 고고한 빵집 간판을 올려다보려 고개를 한껏 젖힌 보루는 젖힌 김에 커피를 넘기려 꿀떡꿀떡 둘러 마시며 서둘러 걸었다. 그녀가 입구를 뒤로 젖힌 눈으로 확인하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퍽! 하고, 그녀의 들린 팔꿈치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보루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꼼짝없이 새카만 커피를 둘러쓴 채, 아직 넘기지 못한 입 안의 커피가 줄줄 새고, 콧구멍으로도 침범한 커피를 줄줄 내보내야 했다.
아픈 걸 깨닫기도 전에, 켁켁 뿜어져 나오는 커피에 익사할 것 같아 살기 위해 쉼 없이 기침이 곧이어 터져 나왔다.
“헉, 보루 누나! 미안, 괜찮아요? 어떡해, 들어오는 걸 못 봤어요.”
우리 참성격의 소유자, 젊은이 웅이 상자가 잔뜩 쌓인 끌차를 한쪽에 놓고 푹 젖은 보루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 누나 삼은 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신고식을 기대한 건 아닌데 말이다, 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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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한 것에 대한 나름 감사의 제스처야? 과거 청산하자고 셀프로 뒤집어쓰고 온 모양이지?”
기연은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그 다음에는 한심해하더니, 그리고 저렇게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보루는 얄미운 말에도 정색을 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 그저 묵묵부답 기연이 막고 서 있는 복도를 비켜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다 나 때문이에요, 누나. 택배 상자 끌차로 내놓다가 들어오는 보루 누나를 못 봤어요. 그래서 내 후드 집업이라도 주려고 가는 길이에요.”
“지금 옷 좀 갈아입는다고 해결될 몰골은 아닌 것 같은데?”
“하아, 그렇죠? 머리카락까지 커피에 푹 젖었어요.”
이제 기연과 웅은 나란히 서서 귀신형용인 그녀를 연거푸 훑고 있었다. 그러나 관람당하는 쪽의 심리상태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웅이 넌 가 보고, 소보루 씨는 날 따라와.”
기연의 살짝 내리깐 눈과 비릿한 미소가 마음에 걸린 보루는 선뜻 그녀를 따라가지지가 않았다. 옆에서 보루의 어깨에 팔을 두른 웅이 이끌지 않았다면 영영 저 의뭉스러운 계집애의 뒤를 따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들어가. 저 안쪽으로 화장실이 있어. 샤워부스도 있고.”
기연이 보루를 면접 봤던 방. 아담하지만 책상과 회의 테이블, 그리고 응접 소파까지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방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기연이 말했다.
“씻고 있어. 내 옷 가져다줄게.”
“네 옷?”
“너보다 삼십 센티는 더 큰 남자애 옷을 입고 뜨거운 커피 만들 수나 있겠어? 바지는 블랙진이니까 그냥 입고, 내가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카디건 티셔츠가 차에 있어. 가져다줄 테니, 오늘은 그거 입고 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