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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늦은 저녁, 제어드 아이언이 찾은 곳은 뉴욕 중심가에 있는 아그네스 클럽이었다.
우아한 실내로 들어서자 막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넉 달 이상 지루하게 끌었던 계약 성사를 위해 반년 이상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온 그였다. 한 번 꽂히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탓에 일벌레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이지만 이번엔 만사 제치고 연휴가 낀 월요일까지 푹 쉬며 지친 심신을 달랠 생각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아이언 씨.”
말쑥한 은색 정장 차림의 제어드를 보며 아그네스 클럽의 총 매니저가 반갑게 맞았다.
“잘 지냈나, 마크?”
“덕분에. 오늘은 혼자이신가요? 아니면 나중에 일행이? 룸으로 모실까요?”
“아니, 그냥 라운지에서.”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가 제어드를 앞서 걸어갔다.
제어드는 느긋한 표정으로 넓은 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실내조명과 부드러운 재즈 선율, 세련된 실내 장식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실내는 이미 테이블이 거의 찬 상태였다.
그는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몇몇 지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교환한 후 먼저 라운지 복도 한편의 남성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손을 씻고 휴게실을 나와 몇 발짝 정도 떼었을 때였다.
세련된 붉은 원피스 차림에 굽 높은 붉은 하이힐을 신은 동양 여자 한 명이 불안한 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겠군, 하고 생각했을 때 여자의 몸이 정말 앞으로 휘청 흔들렸다.
앗, 하는 낮은 외침을 터트리며 제어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쭉 뻗어 잘록한 허리와 가는 팔을 감싸 안았다.
얇은 천 아래 유연한 곡선의 여체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끈, 열이 피오르면서 손바닥 전체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길에 여자의 몸이 즉각 얼어붙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어드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달걀 형의 얼굴 주변에 흩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갈증을 밀려온다. 다만 은은한 향수에 뒤섞인 진한 알코올 향을 감지하자 절로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술에 취한 건가?
그때였다.
여자가 한 손으로 풍성한 머리칼을 우아하게 쓸어 올리며 새침하게 고개를 튼 것은.
그 찰나의 순간 그는 투명한 흰 피부 속의 섬세한 윤곽과 까만 눈망울을 똑똑히 보았다.
쿵, 때아니게 심장이 울렸다.
촉촉한 물기로 젖은 채 영롱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마치 마법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괜찮아요? 이봐요, 아가씨?”
하지만 여자는 그의 물음을 무시한 채 가볍게 몸을 틀더니 그의 손을 밀어내 버렸다.
붉은 기가 감도는 작은 입술에서 뭐라고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꼿꼿이 허리를 든 채 한 걸음 뗀 여자가 다시 휘청 흔들렸다.
그가 다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가뿐히 그의 손을 피하면서 곧장 여성 휴게실 문을 여는 여자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자의 매끈한 뒤태로 향했다. 167 정도의 키에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글래머스한 몸매였다. 타이트한 붉은 원피스로 감싸인 모양 좋은 힙과 매끈하게 쭉 뻗은 종아리가 남자의 욕망을 자극할 만했다.
여자는 그렇게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어드는 잠시 멍한 상태로 푸른색 휴게실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순간의 환상을 본 기분이었다.
아까에 이어 다시 터져 오르는 갈증에 마른 입술까지 축였다.
“실례지만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바로 옆에서 조심스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어드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매력적인 금발 미인이 그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미소 짓고 있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여자 휴게실 문 앞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볼을 살짝 물들이며 곧장 옆으로 물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천만에요.”
라운지로 돌아와 긴 철제 스툴 의자에 앉은 후에도 제어드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스치듯 보았던 까만 눈망울이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 혹은 절망?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눈빛으로 얼룩진 검은 눈이었다.
무엇보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채…….
신기하리만치 그 찰나의 영상이 그의 심장을 비틀며 머릿속을 휘젓는다.
어둑한 실내조명 탓에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좀처럼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뜻밖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고작 술 취한 낯선 여자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 낯선 동양 여자의 존재가 각인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20대 중반의 바텐더, 빌리가 제어드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가 즐겨 마시는 고급 스카치위스키가 눈앞에 놓였을 때야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일로 좀 바쁘다 보니. 고맙군. 아그네스의 이 맛이 그리웠던 참이야. 요즘도…….”
“어머, 제어드!”
갑자기 끼어든 간드러진 여자 음성에 제어드는 잔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 리즈의 친구인 카니아 터너였다. 부잣집 외동딸이자 잘 나가는 모델이기도 한 카니아는 최근 들어 그에게 한껏 관심을 드러내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아, 카니아.”
제어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감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기회다 싶어 일부러 작정한 것인지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 끝으로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어루만지면서.
“왠지 오늘따라 여길 오고 싶더라.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던 걸까요?”
제어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지금, 이 여자는 가장 원치 않는 대화 상대였다.
하지만 그의 침묵을 허락으로 오해하며 굳이 한쪽 끝에 놓인 스툴 의자까지 끌어와 뻔뻔스럽게 바싹 붙어 앉는 여자다.
“빌리, 난 늘 마시는 베일리스 한 잔…….”
“자리 많아.”
“네?”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주춤하며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술 마시고 싶으면 다른 자리 찾으라고.”
그의 직선적인 말에 카니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제어드의 표정은 얼음이라도 얼릴 것 같이 싸늘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여자라 해도 그 무언의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에이, 왜 그래요, 제어드. 우리 오랜만이잖아요.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그럴 생각 없어.”
이번에는 어두운 조명 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띌 만큼 붉어졌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난 벌써 세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아니면 내가 일어날까?”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매몰찬 어조였다.
그제야 카니아도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자각한 것 같았다.
모욕감과 분노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입술을 깨문다. 모든 남자가 흠모할 만한 완벽한 미모라도 천하의 제어드 아이언 앞에서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것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어드는 거부의 냉기를 팍팍 풍기며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카니아가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남은 진한 향수의 잔향에 절로 콧등을 찡그렸다.
카니아 같은 타입은 조금만 틈을 주면 금세 달라붙는 스타일이기에 처음부터 단호히 자를 필요가 있었다.
불나방처럼 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여느 여자들처럼…….
제어드는 피식 입술을 꼬며 갈색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깊고 진한 기운이 민감한 혀를 감싸며 몸 안으로 스며들자 나른한 만족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잊고 있던 동양 여자의 존재가 떠오른 것과 동시에 본능에 이끌리듯 라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 그의 시야 속에 아까 휴게실 앞에서 마주쳤던 그 동양 여자가 들어왔다.
바지직, 갑자기 심장이 바싹 조여들더니 낯선 통증을 유발했다.
더 웃긴 것은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었다.
거만하게 작은 턱을 치켜든 도도한 표정으로 구석진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는 어둑한 실내조명 속에서도 단연 시선을 끌었다.
우아하면서도 불안한 걸음걸이였다.
당연히 라운지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은밀히 그녀를 좇았다. 개중 어떤 남자는 여자의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먹이를 만난 듯이.
제어드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굳혔다. 왜 저들의 시선이 거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저런 식으로 자신을 무방비 상태에 방치한 저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녀가 허리 높이의 칸막이 구석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위치에서 여자가 크리스털 잔에 술을 기울이는 모습이 반쯤 보였다.
놀랍게도 10분이 지나도록 그녀의 테이블에는 누구도 동석하지 않았다.
제어드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회원제로 관리하는 고급 클럽이었다. 철저히 개인신상을 파악하기에 아무나 쉽게 회원이 될 수 없지만, 종종 직원의 백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전에도 그렇게 신분 상승을 꿈꾸며 술에 취한 척 부자 남자들을 노리는 노련한 여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도 그런 부류 중 하나인가?
제어드는 곧장 그 가정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하기에 동양 여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거만한 품위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귀티가 흐르는 데다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친 듯 술을 마실 뿐이다.
제어드가 고개를 돌려 손짓을 보내자 바텐더, 빌리가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저 동양 여자에 대해 아나?”
제이드의 손짓에 따라 구석진 테이블을 바라본 빌리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개인 신상정보라 잠시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키며 대답을 기다리자 그래도 오랜 시간 알아온 제어드라면 괜찮다 싶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연 빌리였다.
“네. 소이 양이라고 보통 함께 오시는 남자분이 계셨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이른 저녁에 혼자 오셔서 계속 저렇게 마시기만 하시네요. 그다지 술이 센 것 같진 않은데…….”
남자?
제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애인에게 차여서 저렇게 퍼마신다고?
이유가 무엇이든 이런 고급 클럽에서 여자 혼자, 그것도 마시고 죽기라도 할 것처럼 무식하게 들이켜는 여자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직접 나서 못 마시게 막기라도 하시게?
다가오는 여자도 귀찮아서 뿌리친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제어드 아이언. 저 여자는 너하고 아무 상관 없어.
그는 어이없는 자신의 모습을 향해 쓴 비소를 날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오늘 밤 이곳에 온 이유는 업무로 시달린 무거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처음 계획대로 가볍게 한잔을 하고 돌아가 푹 쉬면 그만이다. 특별히 세상 끝난 것처럼 무식하게 술을 퍼마시는 여자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제어드는 고집스럽게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스카치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시선은 다시 구석진 테이블로 향했다.
매끈한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새 잔은 비워지고 여자가 다시 술을 따르는 것이 보인 탓이었다.
젠장,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늦은 저녁, 제어드 아이언이 찾은 곳은 뉴욕 중심가에 있는 아그네스 클럽이었다.
우아한 실내로 들어서자 막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넉 달 이상 지루하게 끌었던 계약 성사를 위해 반년 이상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온 그였다. 한 번 꽂히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탓에 일벌레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이지만 이번엔 만사 제치고 연휴가 낀 월요일까지 푹 쉬며 지친 심신을 달랠 생각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아이언 씨.”
말쑥한 은색 정장 차림의 제어드를 보며 아그네스 클럽의 총 매니저가 반갑게 맞았다.
“잘 지냈나, 마크?”
“덕분에. 오늘은 혼자이신가요? 아니면 나중에 일행이? 룸으로 모실까요?”
“아니, 그냥 라운지에서.”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가 제어드를 앞서 걸어갔다.
제어드는 느긋한 표정으로 넓은 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실내조명과 부드러운 재즈 선율, 세련된 실내 장식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실내는 이미 테이블이 거의 찬 상태였다.
그는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몇몇 지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교환한 후 먼저 라운지 복도 한편의 남성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손을 씻고 휴게실을 나와 몇 발짝 정도 떼었을 때였다.
세련된 붉은 원피스 차림에 굽 높은 붉은 하이힐을 신은 동양 여자 한 명이 불안한 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겠군, 하고 생각했을 때 여자의 몸이 정말 앞으로 휘청 흔들렸다.
앗, 하는 낮은 외침을 터트리며 제어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쭉 뻗어 잘록한 허리와 가는 팔을 감싸 안았다.
얇은 천 아래 유연한 곡선의 여체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끈, 열이 피오르면서 손바닥 전체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길에 여자의 몸이 즉각 얼어붙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어드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달걀 형의 얼굴 주변에 흩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갈증을 밀려온다. 다만 은은한 향수에 뒤섞인 진한 알코올 향을 감지하자 절로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술에 취한 건가?
그때였다.
여자가 한 손으로 풍성한 머리칼을 우아하게 쓸어 올리며 새침하게 고개를 튼 것은.
그 찰나의 순간 그는 투명한 흰 피부 속의 섬세한 윤곽과 까만 눈망울을 똑똑히 보았다.
쿵, 때아니게 심장이 울렸다.
촉촉한 물기로 젖은 채 영롱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마치 마법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괜찮아요? 이봐요, 아가씨?”
하지만 여자는 그의 물음을 무시한 채 가볍게 몸을 틀더니 그의 손을 밀어내 버렸다.
붉은 기가 감도는 작은 입술에서 뭐라고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꼿꼿이 허리를 든 채 한 걸음 뗀 여자가 다시 휘청 흔들렸다.
그가 다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가뿐히 그의 손을 피하면서 곧장 여성 휴게실 문을 여는 여자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자의 매끈한 뒤태로 향했다. 167 정도의 키에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글래머스한 몸매였다. 타이트한 붉은 원피스로 감싸인 모양 좋은 힙과 매끈하게 쭉 뻗은 종아리가 남자의 욕망을 자극할 만했다.
여자는 그렇게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어드는 잠시 멍한 상태로 푸른색 휴게실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순간의 환상을 본 기분이었다.
아까에 이어 다시 터져 오르는 갈증에 마른 입술까지 축였다.
“실례지만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바로 옆에서 조심스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어드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매력적인 금발 미인이 그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미소 짓고 있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여자 휴게실 문 앞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볼을 살짝 물들이며 곧장 옆으로 물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천만에요.”
라운지로 돌아와 긴 철제 스툴 의자에 앉은 후에도 제어드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스치듯 보았던 까만 눈망울이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 혹은 절망?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눈빛으로 얼룩진 검은 눈이었다.
무엇보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채…….
신기하리만치 그 찰나의 영상이 그의 심장을 비틀며 머릿속을 휘젓는다.
어둑한 실내조명 탓에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좀처럼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뜻밖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고작 술 취한 낯선 여자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 낯선 동양 여자의 존재가 각인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20대 중반의 바텐더, 빌리가 제어드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가 즐겨 마시는 고급 스카치위스키가 눈앞에 놓였을 때야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일로 좀 바쁘다 보니. 고맙군. 아그네스의 이 맛이 그리웠던 참이야. 요즘도…….”
“어머, 제어드!”
갑자기 끼어든 간드러진 여자 음성에 제어드는 잔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 리즈의 친구인 카니아 터너였다. 부잣집 외동딸이자 잘 나가는 모델이기도 한 카니아는 최근 들어 그에게 한껏 관심을 드러내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아, 카니아.”
제어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감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기회다 싶어 일부러 작정한 것인지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 끝으로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어루만지면서.
“왠지 오늘따라 여길 오고 싶더라.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던 걸까요?”
제어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지금, 이 여자는 가장 원치 않는 대화 상대였다.
하지만 그의 침묵을 허락으로 오해하며 굳이 한쪽 끝에 놓인 스툴 의자까지 끌어와 뻔뻔스럽게 바싹 붙어 앉는 여자다.
“빌리, 난 늘 마시는 베일리스 한 잔…….”
“자리 많아.”
“네?”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주춤하며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술 마시고 싶으면 다른 자리 찾으라고.”
그의 직선적인 말에 카니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제어드의 표정은 얼음이라도 얼릴 것 같이 싸늘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여자라 해도 그 무언의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에이, 왜 그래요, 제어드. 우리 오랜만이잖아요.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그럴 생각 없어.”
이번에는 어두운 조명 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띌 만큼 붉어졌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난 벌써 세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아니면 내가 일어날까?”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매몰찬 어조였다.
그제야 카니아도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자각한 것 같았다.
모욕감과 분노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입술을 깨문다. 모든 남자가 흠모할 만한 완벽한 미모라도 천하의 제어드 아이언 앞에서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것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어드는 거부의 냉기를 팍팍 풍기며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카니아가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남은 진한 향수의 잔향에 절로 콧등을 찡그렸다.
카니아 같은 타입은 조금만 틈을 주면 금세 달라붙는 스타일이기에 처음부터 단호히 자를 필요가 있었다.
불나방처럼 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여느 여자들처럼…….
제어드는 피식 입술을 꼬며 갈색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깊고 진한 기운이 민감한 혀를 감싸며 몸 안으로 스며들자 나른한 만족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잊고 있던 동양 여자의 존재가 떠오른 것과 동시에 본능에 이끌리듯 라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 그의 시야 속에 아까 휴게실 앞에서 마주쳤던 그 동양 여자가 들어왔다.
바지직, 갑자기 심장이 바싹 조여들더니 낯선 통증을 유발했다.
더 웃긴 것은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었다.
거만하게 작은 턱을 치켜든 도도한 표정으로 구석진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는 어둑한 실내조명 속에서도 단연 시선을 끌었다.
우아하면서도 불안한 걸음걸이였다.
당연히 라운지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은밀히 그녀를 좇았다. 개중 어떤 남자는 여자의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먹이를 만난 듯이.
제어드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굳혔다. 왜 저들의 시선이 거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저런 식으로 자신을 무방비 상태에 방치한 저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녀가 허리 높이의 칸막이 구석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위치에서 여자가 크리스털 잔에 술을 기울이는 모습이 반쯤 보였다.
놀랍게도 10분이 지나도록 그녀의 테이블에는 누구도 동석하지 않았다.
제어드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회원제로 관리하는 고급 클럽이었다. 철저히 개인신상을 파악하기에 아무나 쉽게 회원이 될 수 없지만, 종종 직원의 백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전에도 그렇게 신분 상승을 꿈꾸며 술에 취한 척 부자 남자들을 노리는 노련한 여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도 그런 부류 중 하나인가?
제어드는 곧장 그 가정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하기에 동양 여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거만한 품위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귀티가 흐르는 데다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친 듯 술을 마실 뿐이다.
제어드가 고개를 돌려 손짓을 보내자 바텐더, 빌리가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저 동양 여자에 대해 아나?”
제이드의 손짓에 따라 구석진 테이블을 바라본 빌리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개인 신상정보라 잠시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키며 대답을 기다리자 그래도 오랜 시간 알아온 제어드라면 괜찮다 싶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연 빌리였다.
“네. 소이 양이라고 보통 함께 오시는 남자분이 계셨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이른 저녁에 혼자 오셔서 계속 저렇게 마시기만 하시네요. 그다지 술이 센 것 같진 않은데…….”
남자?
제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애인에게 차여서 저렇게 퍼마신다고?
이유가 무엇이든 이런 고급 클럽에서 여자 혼자, 그것도 마시고 죽기라도 할 것처럼 무식하게 들이켜는 여자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직접 나서 못 마시게 막기라도 하시게?
다가오는 여자도 귀찮아서 뿌리친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제어드 아이언. 저 여자는 너하고 아무 상관 없어.
그는 어이없는 자신의 모습을 향해 쓴 비소를 날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오늘 밤 이곳에 온 이유는 업무로 시달린 무거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처음 계획대로 가볍게 한잔을 하고 돌아가 푹 쉬면 그만이다. 특별히 세상 끝난 것처럼 무식하게 술을 퍼마시는 여자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제어드는 고집스럽게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스카치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시선은 다시 구석진 테이블로 향했다.
매끈한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새 잔은 비워지고 여자가 다시 술을 따르는 것이 보인 탓이었다.
젠장,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