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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소이 양,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마크. 난 아직 멀쩡해요. 정 힘들면 그때 말할게요. 오케이?”
소이는 갈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아그네스 클럽의 총 매니저인 마크 앤더슨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는 이미 한 시간째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클럽 매니저로서 점점 술에 취해가는 한심한 여성 고객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의식은 멀쩡하건만 몸은 아닌가 보다. 간간이 머리가 윙윙 울리면서 주변 사물들이 두세 개로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대로 필름이 끊긴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그 어떤 상황이든 신변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VIP 회원을 관리하는 고급 클럽이었다. 설령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해도 안전한 콜택시에 태워 집으로 무사히 보내줄 것이다.
집? 지금 집이라고 했니? 정말 그 집에 돌아가고 싶어?
지금쯤 정 회장이 보낸 사람들이 ‘그 집’이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 회장의 명의로 된 곳이니 아예 문을 따고 들어가 제멋대로 짐을 싸 귀국할 채비를 마쳤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번 파혼 소식에 정 회장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소이는 쓰디쓴 갈색 액체를 한 모금 마시며 고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눈앞에 놓인 고급 위스키병은 이미 3분의 2 가까이 동이 난 상태였다.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으로 덮인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치밀어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잊고 싶었지만 강한 알코올 기운조차 이성을 앗아가는 맹렬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돌아보면 최근 몇 달 새 수많은 증거가 있었다.
부쩍 뜸해진 안부 전화, 일과 출장으로 취소된 약속, 어쩌다 만난다 해도 턱없이 줄어든 말수와 웃음.
소이가 조금만 예민한 여자였다면 그런 작은 변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이 갑자기 결정된 결혼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정민은 그 누구보다 그녀가 믿었던 남자였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던진 여파는 그 이상으로 강력했다.
그런데도 왜 난 그를 미워할 수 없지?
아니까. 지난 6개월의 시간을 마음 약한 정민이 어떤 심정으로 보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더 그랬다.
다만 이 파혼의 결과는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3년 전, 이 일을 추진할 때부터, 이 결혼이 진양 그룹의 존속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귀가 닳도록 설명한 정 회장이었다.
그 대가로 그 지독한 인간이 자유까지 주지 않았던가.
소이가 미국에 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도 결혼을 전제로 한 약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말은 결국 결혼을 3주 남겨두고 지난 3년 동안 힘들게 쟁취한 일말의 자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정 회장이 조만간 사람을 시켜 그녀를 강제 귀국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파혼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는 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물으려 할 것이다.
두 재력가 집안을 위한 전형적인 정략결혼.
하지만 소이는 상관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랑이 아닌 정략의 형태이건, 정 회장을 비롯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건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그가 선택한 상대는 소이 역시 잘 아는 최근 건설 업계에서 막강한 별로 떠오르는 에센 그룹의 차남이었다.
이제 거의 손에 닿았다고 믿었는데…….
막을 수 없는 허탈함과 분노로 인해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소이는 이를 앙다물며 거칠게 닦아냈다.
모든 것이 끔찍했지만 물기 어린 촉촉한 검은 눈망울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우는데? 뭐가 서러워서? 남자한테 차였다고 세상이 끝나기라도 했어?
정민 오빠가 없어도 난 살 수 있어! 그저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투명한 흰 피부로 인해 유난히 두드러진 붉은 입술이 쓰게 비틀린다.
아직도 자존심은 남아 큰소리를 치며 오기를 부르는 자신이 불쌍했다. 누구보다 눈앞에 다가온 냉정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다.
소이는 빈 잔에 다시 갈색 액체를 부었다.
점점 멍해지는 의식을 자각하면서도 차라리 술에 취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제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본능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녀가 더 마시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구석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어드를 보면서 사람들이 놀란 듯 은밀한 시선을 던졌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주 흥미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시 술잔을 집어 드는 어리석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테이블에 다가서자 그는 주저 없이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 * *
헉!
갑작스러운 낯선 남자의 손길에 흠칫, 몸을 떤 소이가 자동으로 얼굴을 들었다.
고작 몇 cm도 안 된 거리에 웬 낯선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 울리며 오싹 한기가 퍼졌다.
설마, 정 회장이 보낸 사람?
“당신 뭐야?”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방어적인 쇳소리였다.
상대 남자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나 경고 어린 음성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았다. 손목을 잡은 손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간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마신 것 같은데 그쯤 하지? 내일까지 살 작정이라면 말이야.”
뭐?
잠시 그의 말에 혼란이 일었다.
아, 그제야 그가 정 회장의 부하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배자 특유의 거만한 빛 때문일까.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똘마니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짓고 나자 이젠 이 낯선 남자의 참견에 헛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그녀의 갈색 눈이 역시 한층 매서워졌다.
당장 남의 손 놓고 꺼지라는 의미였지만, 남자의 눈빛 역시 만만치 않았다.
소이는 짜증이 일어 곧장 손을 잡아 뺐다. 하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험악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손 좀 놓죠?”
“그만 마시겠다면 놓아주지.”
하,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꼬였다.
대체 이 남자 뭐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런 참견을 한단 말인가.
마치 대놓고 그런 권리가 있는 양 당당히 말하는 이 남자의 거만한 말투가 거슬렸다.
“지금 나랑 놀자고 수작 부리는 건가요?”
“그래 보여?”
“미안해서 어쩌나. 그쪽,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당신 많이 취했어.”
“취했으면?”
“더 추한 꼴 보이지 않으려면 이 정도에서 멈춰야지.”
친절하게 훈계까지 한 것으로도 모자란 지 양해 한마디 없이 맞은편에 앉는 남자다.
이 남자 정말 뭐지?
너무 어이가 없으면 사람이 말이 안 나오는 법인가 보다.
소이는 상대 남자를 한참 주시했다.
클럽의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남자의 뚜렷한 윤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숱 많은 다크 브라운 머리칼, 시원한 이마에서 눈에 띄는 진한 눈썹, 매끄러운 콧날, 붉은 입술…… 넓은 어깨를 감싼 값비싼 은색 슈트 차림이 허상이 아니라면 재력을 겸비한, 여자들이 미친다 해도 놀랍지 않은 아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매서운 눈빛과 거만함, 다소 차가운 인상만 뺀다면 말이다.
한 마디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이런 우월한 타입의 남자들은 종종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는 완벽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눈앞의 이 바람둥이 역시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낯선 여자에게 다가와 이런 뻔뻔스러운 작업을 하려 들겠는가. 그녀가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보이든 말든 말이다!
소이의 평가하는 당당한 눈빛에 질세라 상대 남자도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윤곽 하나하나에 이어 그녀의 상체를 훑어내린다.
찌릿! 그 대담한 눈길에 젖가슴이 뭉치면서 따끔거리는 이상한 감각이 번졌다.
소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런 비참한 와중에 낯선 남자와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시선을 내리깔자 남자의 커다란 손아래 덮인 자신의 희고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깨닫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비틀며 반사적으로 세차게 홱 손을 잡아 뺐다.
이번에는 손이 싱거울 만큼 쑥 빠져 버렸다. 그 덕분에 잔에 담긴 알코올이 사방으로 튀면서 얼굴과 붉은 드레스 곳곳에 얼룩이 번졌다.
“뭐야, 당신 때문에 내 드레스가 엉망이 됐잖아요!”
소이는 티슈를 낚아채 얼굴과 치마를 닦아내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던졌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지.”
“하, 지금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그럼 내 잘못인가?”
“당신이 아니면 이런 일도 없었어!”
“더 추해지기 전에 도와줬으면 고마워해야지.”
소이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앙다물었다.
분해서 이를 가는 소이를 보며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 그녀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하지만 욱, 하는 감정을 간신히 자제했다. 이미 눈앞의 현실만으로 포화 상태인 지금 이런 바람둥이와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다 귀찮았다. 지금은 그저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갑자기 조용해졌군. 이제야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건가?”
「귀찮아, 저리 꺼져.」
소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국어로 내쏘았다.
남자가 검은 눈썹을 찡긋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닌 것 같군.”
“귀찮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했어요, 됐어요? 지금 기분 아주 별로니까 건들지 말아요.”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지…… 금 뭐 하는 거죠?”
남자가 허락도 없이 그녀의 잔을 홱 끌어당기더니 술을 붓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누가 멋대로 내 술을 마시라고 했는데요?”
“아, 그렇군. 양해는 구했어야 했는데. 그럼 이 술은 내가 사지. 이것으로 더는 당신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겠지?”
“당신 뭐야?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 같은…….”
“제어드. 다음부터는 최소한 이름으로 불렀으면 좋겠군.”
“다음부터? 아하, 결국 여자가 필요한 거였어요? 그것도 술 취한 여자?”
제어드의 잘생긴 얼굴이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욱, 그 표정이 다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착각하는 건 말리지 않겠는데 술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아.”
이젠 심리학 상담자까지 하시겠다고?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소이는 남자를 깨끗이 무시하곤 잔을 끌어당겨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동작을 저지했다.
“소이 양,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마크. 난 아직 멀쩡해요. 정 힘들면 그때 말할게요. 오케이?”
소이는 갈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아그네스 클럽의 총 매니저인 마크 앤더슨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는 이미 한 시간째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클럽 매니저로서 점점 술에 취해가는 한심한 여성 고객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의식은 멀쩡하건만 몸은 아닌가 보다. 간간이 머리가 윙윙 울리면서 주변 사물들이 두세 개로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대로 필름이 끊긴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그 어떤 상황이든 신변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VIP 회원을 관리하는 고급 클럽이었다. 설령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해도 안전한 콜택시에 태워 집으로 무사히 보내줄 것이다.
집? 지금 집이라고 했니? 정말 그 집에 돌아가고 싶어?
지금쯤 정 회장이 보낸 사람들이 ‘그 집’이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 회장의 명의로 된 곳이니 아예 문을 따고 들어가 제멋대로 짐을 싸 귀국할 채비를 마쳤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번 파혼 소식에 정 회장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소이는 쓰디쓴 갈색 액체를 한 모금 마시며 고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눈앞에 놓인 고급 위스키병은 이미 3분의 2 가까이 동이 난 상태였다.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으로 덮인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치밀어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잊고 싶었지만 강한 알코올 기운조차 이성을 앗아가는 맹렬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돌아보면 최근 몇 달 새 수많은 증거가 있었다.
부쩍 뜸해진 안부 전화, 일과 출장으로 취소된 약속, 어쩌다 만난다 해도 턱없이 줄어든 말수와 웃음.
소이가 조금만 예민한 여자였다면 그런 작은 변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이 갑자기 결정된 결혼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정민은 그 누구보다 그녀가 믿었던 남자였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던진 여파는 그 이상으로 강력했다.
그런데도 왜 난 그를 미워할 수 없지?
아니까. 지난 6개월의 시간을 마음 약한 정민이 어떤 심정으로 보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더 그랬다.
다만 이 파혼의 결과는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3년 전, 이 일을 추진할 때부터, 이 결혼이 진양 그룹의 존속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귀가 닳도록 설명한 정 회장이었다.
그 대가로 그 지독한 인간이 자유까지 주지 않았던가.
소이가 미국에 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도 결혼을 전제로 한 약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말은 결국 결혼을 3주 남겨두고 지난 3년 동안 힘들게 쟁취한 일말의 자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정 회장이 조만간 사람을 시켜 그녀를 강제 귀국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파혼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는 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물으려 할 것이다.
두 재력가 집안을 위한 전형적인 정략결혼.
하지만 소이는 상관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랑이 아닌 정략의 형태이건, 정 회장을 비롯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건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그가 선택한 상대는 소이 역시 잘 아는 최근 건설 업계에서 막강한 별로 떠오르는 에센 그룹의 차남이었다.
이제 거의 손에 닿았다고 믿었는데…….
막을 수 없는 허탈함과 분노로 인해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소이는 이를 앙다물며 거칠게 닦아냈다.
모든 것이 끔찍했지만 물기 어린 촉촉한 검은 눈망울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우는데? 뭐가 서러워서? 남자한테 차였다고 세상이 끝나기라도 했어?
정민 오빠가 없어도 난 살 수 있어! 그저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투명한 흰 피부로 인해 유난히 두드러진 붉은 입술이 쓰게 비틀린다.
아직도 자존심은 남아 큰소리를 치며 오기를 부르는 자신이 불쌍했다. 누구보다 눈앞에 다가온 냉정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다.
소이는 빈 잔에 다시 갈색 액체를 부었다.
점점 멍해지는 의식을 자각하면서도 차라리 술에 취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제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본능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녀가 더 마시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구석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어드를 보면서 사람들이 놀란 듯 은밀한 시선을 던졌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주 흥미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시 술잔을 집어 드는 어리석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테이블에 다가서자 그는 주저 없이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 * *
헉!
갑작스러운 낯선 남자의 손길에 흠칫, 몸을 떤 소이가 자동으로 얼굴을 들었다.
고작 몇 cm도 안 된 거리에 웬 낯선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 울리며 오싹 한기가 퍼졌다.
설마, 정 회장이 보낸 사람?
“당신 뭐야?”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방어적인 쇳소리였다.
상대 남자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나 경고 어린 음성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았다. 손목을 잡은 손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간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마신 것 같은데 그쯤 하지? 내일까지 살 작정이라면 말이야.”
뭐?
잠시 그의 말에 혼란이 일었다.
아, 그제야 그가 정 회장의 부하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배자 특유의 거만한 빛 때문일까.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똘마니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짓고 나자 이젠 이 낯선 남자의 참견에 헛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그녀의 갈색 눈이 역시 한층 매서워졌다.
당장 남의 손 놓고 꺼지라는 의미였지만, 남자의 눈빛 역시 만만치 않았다.
소이는 짜증이 일어 곧장 손을 잡아 뺐다. 하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험악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손 좀 놓죠?”
“그만 마시겠다면 놓아주지.”
하,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꼬였다.
대체 이 남자 뭐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런 참견을 한단 말인가.
마치 대놓고 그런 권리가 있는 양 당당히 말하는 이 남자의 거만한 말투가 거슬렸다.
“지금 나랑 놀자고 수작 부리는 건가요?”
“그래 보여?”
“미안해서 어쩌나. 그쪽,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당신 많이 취했어.”
“취했으면?”
“더 추한 꼴 보이지 않으려면 이 정도에서 멈춰야지.”
친절하게 훈계까지 한 것으로도 모자란 지 양해 한마디 없이 맞은편에 앉는 남자다.
이 남자 정말 뭐지?
너무 어이가 없으면 사람이 말이 안 나오는 법인가 보다.
소이는 상대 남자를 한참 주시했다.
클럽의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남자의 뚜렷한 윤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숱 많은 다크 브라운 머리칼, 시원한 이마에서 눈에 띄는 진한 눈썹, 매끄러운 콧날, 붉은 입술…… 넓은 어깨를 감싼 값비싼 은색 슈트 차림이 허상이 아니라면 재력을 겸비한, 여자들이 미친다 해도 놀랍지 않은 아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매서운 눈빛과 거만함, 다소 차가운 인상만 뺀다면 말이다.
한 마디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이런 우월한 타입의 남자들은 종종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는 완벽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눈앞의 이 바람둥이 역시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낯선 여자에게 다가와 이런 뻔뻔스러운 작업을 하려 들겠는가. 그녀가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보이든 말든 말이다!
소이의 평가하는 당당한 눈빛에 질세라 상대 남자도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윤곽 하나하나에 이어 그녀의 상체를 훑어내린다.
찌릿! 그 대담한 눈길에 젖가슴이 뭉치면서 따끔거리는 이상한 감각이 번졌다.
소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런 비참한 와중에 낯선 남자와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시선을 내리깔자 남자의 커다란 손아래 덮인 자신의 희고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깨닫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비틀며 반사적으로 세차게 홱 손을 잡아 뺐다.
이번에는 손이 싱거울 만큼 쑥 빠져 버렸다. 그 덕분에 잔에 담긴 알코올이 사방으로 튀면서 얼굴과 붉은 드레스 곳곳에 얼룩이 번졌다.
“뭐야, 당신 때문에 내 드레스가 엉망이 됐잖아요!”
소이는 티슈를 낚아채 얼굴과 치마를 닦아내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던졌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지.”
“하, 지금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그럼 내 잘못인가?”
“당신이 아니면 이런 일도 없었어!”
“더 추해지기 전에 도와줬으면 고마워해야지.”
소이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앙다물었다.
분해서 이를 가는 소이를 보며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 그녀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하지만 욱, 하는 감정을 간신히 자제했다. 이미 눈앞의 현실만으로 포화 상태인 지금 이런 바람둥이와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다 귀찮았다. 지금은 그저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갑자기 조용해졌군. 이제야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건가?”
「귀찮아, 저리 꺼져.」
소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국어로 내쏘았다.
남자가 검은 눈썹을 찡긋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닌 것 같군.”
“귀찮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했어요, 됐어요? 지금 기분 아주 별로니까 건들지 말아요.”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지…… 금 뭐 하는 거죠?”
남자가 허락도 없이 그녀의 잔을 홱 끌어당기더니 술을 붓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누가 멋대로 내 술을 마시라고 했는데요?”
“아, 그렇군. 양해는 구했어야 했는데. 그럼 이 술은 내가 사지. 이것으로 더는 당신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겠지?”
“당신 뭐야?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 같은…….”
“제어드. 다음부터는 최소한 이름으로 불렀으면 좋겠군.”
“다음부터? 아하, 결국 여자가 필요한 거였어요? 그것도 술 취한 여자?”
제어드의 잘생긴 얼굴이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욱, 그 표정이 다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착각하는 건 말리지 않겠는데 술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아.”
이젠 심리학 상담자까지 하시겠다고?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소이는 남자를 깨끗이 무시하곤 잔을 끌어당겨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동작을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