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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
1화
프롤로그
언제부터였을까? 조애너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을 더 깊이 숨긴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커다란 정원에는 조애너의 작은 몸을 숨길 곳은 많았으니까.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곳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뒤로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버릇처럼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커다란 정원 가득 장미꽃이 만발하고 마치 미용사가 가위질을 한 듯 모양을 낸 나무들이 장미를 지키는 기사인 양 서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그림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그곳에는 언제나 나비와 벌이 한가로이 꽃을 희롱하며 날아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나비도 벌도 숨어 버렸다. 대신에 처음 보는 아이가 청명한 웃음소리를 내며 뛰놀고 있었다. 마치 요정처럼 예쁜 아이는 곱실거리는 화사한 금발을 빨간 리본으로 묶고 앙증맞은 드레스 차림에 오즈의 마법사에 나올 듯한 빨간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순간 조애너는 오즈로 향하던 도로시가 바람의 실수로 이곳에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샘, 천천히 다녀. 그러다 또 넘어진다.”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는 아이가 뒤뚱거리자 저도 모르게 다가서려 움직이던 조애너가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곧이어 나타나 다가오는 사내아이의 얼굴에 여자아이를 보며 불안해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조애너는 그때서야 아이가 그곳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혹시나 들킬까 싶어 더욱 작은 몸을 숨기려 애쓰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아이만큼이나 화사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둘이 남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 때문에 꼬마 신사처럼 보이는 소년 역시 금발에 곧은 콧날을 지녔다.
그러나 조애너가 그들을 보고 놀란 건 외모 때문이 아니라 하늘을 닮은 듯 투명하고 예쁜 파란 눈동자 때문이었다. 마치 토파즈가 반짝이는 듯 아름다운 눈동자에 넋이 빠져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마터면 고개를 들 뻔했다.
다행히 아이가 넘어지며 터트리는 울음소리 덕에 정신을 차렸다. 처음부터 불안하더라니 넘어져 울고 있는 작은 소녀 곁으로 소년이 달려와 재빨리 일으켜 세우고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는 소년의 손길이 아이답지 않게 조심스러웠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뭐라고 하는 듯했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이 멈춰지자 소년이 등을 보이며 앉았다.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지 냉큼 아이가 업힌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을 그들이 사라진 곳에 미련이 담긴 시선을 보내던 조애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혹여 그들에게 들킬까, 너무 오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주무르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며 찌르는 듯한 저린 통증에 얼굴을 찡그린 조애너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한 번 더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주고는 다리를 절며 그곳을 벗어났다.
‘지금쯤 이모가 날 찾고 있겠군.’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조애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 얼마만큼의 매질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다시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모의 매질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 메리벨의 딸(1)
“이 더러운 잡종……. 거짓말이 얼마나 중죄인지 알아? 네 엄마도 거짓말을 밥 먹듯 했었지. 그때 제대로 벌을 줬어야 했어.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벌은 받아야지.”
타는 듯한 등의 통증에 조애너가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이모의 매질이 멈추자 조애너는 기다시피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쓰러졌다. 그 여파로 낡은 매트리스가 삐꺽거리며 먼지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이를 깨물고 흘러나오는 울음을 감추는 조애너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학교…… 얼마나 동경하던 단어인가. 적어도 학교에 가면 이모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사만다가 있었다.
조애너의 공주님, 사만다. 그러나 그곳이 또 다른 고통의 장소가 되리라고 짐작도 못 했었다. 그래도 조애너는 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비록 샘은 조애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아니, 학교의 어떤 아이들도 조애너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유난히 까만 머리에 칙칙한 회색의 긴팔 티셔츠, 낡아서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은 자신이 보아도 괴기해 보였고 또 음침해 보였다. 한여름에도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다니는 조애너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존재였다.
‘메리벨의 딸, 더러운 잡종, 매춘부의 딸.’
마을에서 조애너는 이름보다는 그렇게 불러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단순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존재였다. 자신들의 부모님이 조애너를 함부로 대했기에 아이들 역시 똑같이, 아니, 더 지독하게 괴롭혔다.
조애너가 기억하는 엄마는 화려한 미모와 환한 금발을 지닌 풍만한 체격의 여자였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핏빛처럼 새빨갛던 빨간 입술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조애너는 태어나 몇 달 안 된 기억까지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동양인 실업가와의 하룻밤의 실수라고 푸념하던 엄마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우려 했으나,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낳았다는 말을 엄마는 술에 취하면 증오하듯 되뇌곤 했었다.
어쩌면 엄마가 살았던 아파트 관리인 노부부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난히 엄마의 아파트에는 남자들이 자주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조애너에게 우유를 먹이고는 어두운 곳에 가뒀었다.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준 우유를 먹으면 졸음이 몰려오고 잠이 들었었다. 항상 조애너를 버려두다시피 했던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파 울다 지친 조애너를 구해 준 것이 아파트의 관리인 부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문을 뜯고 들어와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 있던 조애너를 구해 주었다. 그 뒤로 엄마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노부부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결혼 25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던 그 부부는 조애너를 정말 아껴 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보살핌을 받았던 기억은 엄마가 술과 약에 취해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조애너가 지니고 있는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누구 하나 조애너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녀를 엄마의 유일한 피붙이 이모에게 건넸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던 이모를 보고 이미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모는 조애너를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관리인 부부와 떨어지기 싫다고 매달리는 조애너를 사회사업가는 가차 없이 이모에게 넘겨주고는 사라졌다.
이모가 살고 있는 웨일즈는 작고 아담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외진 곳이라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허물없이 지내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건 그들에게 국한된 것이지 조애너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엄마의 고향이었다.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보다 이곳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고 조그마한 시골 마을 특유의 엄격한 도덕관이 있었기에 이미 조애너를 보기도 전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애너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메리벨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곳에서는 더러움의 표시였으며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역시 순탄할 리 없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은 여전했고 선생님들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애너는 샘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오늘 수학 시험 시간에 우연히 조애너와 샘은 이어진 책상에 앉았다.
얼마나 가슴이 떨리던지…….
샘은 영리하고 예쁜 아이였다.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거기다 샘의 아버지는 자작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기에 그 딸인 샘은 이미 공주님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샘의 성적이 만점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애너가 만점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었나 보다.
존즈 선생님은 처음부터 조애너가 샘의 답안을 보고 쓴 것이라고 단정했고 조애너의 성적은 무효 처리가 되었다. 아무런 질문도 없었고 확인도 필요 없었다.
아는 것을 착실히 답안지에 옮겨 적은 것뿐인데 왜 그런 결과가 나온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이모가 학교로 불려 왔다. 조애너의 의사를 묻는다거나 사정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지금 조애너는 하지도 않은 짓에 대한 벌을 받고 있었다. 생각보다 쉬웠던 문제들을 서슴없이 풀어낸 결과가 이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애너를 믿어 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경멸의 시선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던 사만다의 얼굴을 보며 처음으로 조애너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조애너가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아. 절대로.”
깨물어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작은 다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리란 결심을 하며 매를 맞아 아픈 등보다 가슴 시린 서러움에 긴 밤이 지나고 있었다.
힘들고 아프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그사이 조애너는 점차로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 갔다.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나름대로 피하는 방법도 배웠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들의 시선은 조애너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조애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장미정원으로 숨어들었다.
언제인가부터 그곳에서 더 이상 샘을 볼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런던의 유명한 사립학교로 진학해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이제 세대가 바뀌어 귀족이라는 명칭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해도 여전히 귀족의 칭호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샘의 아버지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자작의 칭호를 갖고 있었기에 이 조그만 동네에서 싱클레어가는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긴 귀족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선거 없이도 하원의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과는 상관없이 조애너에게 있어서 샘은 언제나 공주님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공주님이 갑자기 돌아왔다. 이 웨일즈로 다시…….
이 년 전 샘의 아버지인 제이슨 맥스 싱클레어 경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마비라고 했던가?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애통하게 했다.
샘이 이곳을 떠나 기숙학교로 가던 날 조애너는 작은 몸을 숨긴 채 멀리서 눈물을 삼키며 배웅했었다. 샘이 그녀만 보면 벌레 보듯 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을의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고운 눈길을 주지 않았으므로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싱클레어 경이 집 안의 묘지에 묻히던 그날도 조애너는 묘지 구석에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싱클레어 경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먼빛으로 훔쳐보던 모습이 고작이었었는데도 마치 자신의 소중한 한 부분이 사라진 듯 그렇게 슬퍼했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서 있는 레이디 캐서린의 모습과 얼굴 가득 눈물로 범벅이 되어 서 있는 샘을 지키듯 당당히 서 있던 릭을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 더욱 조애너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렇게 그 가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녀는 몸을 숨긴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었다. 그런데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샘이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싱클레어가가 재정적인 압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남편을 잃고 아예 싱클레어 저택으로 내려온 레이디 캐서린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조애너는 샘이 다시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만이 귀에 들렸다. 조애너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었으니까.
“조, 뭐 하는 거냐? 내가 분명 학교 가기 전에 앞마당 치우라고 했을 텐데.”
이모의 고함 소리에 조애너가 놀라 정신없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샘이 왔다는 소식에 흥분해서 잠을 설친 탓에 오늘은 늦잠을 자 버렸다.
1화
프롤로그
언제부터였을까? 조애너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을 더 깊이 숨긴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커다란 정원에는 조애너의 작은 몸을 숨길 곳은 많았으니까.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곳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뒤로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버릇처럼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커다란 정원 가득 장미꽃이 만발하고 마치 미용사가 가위질을 한 듯 모양을 낸 나무들이 장미를 지키는 기사인 양 서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그림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그곳에는 언제나 나비와 벌이 한가로이 꽃을 희롱하며 날아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나비도 벌도 숨어 버렸다. 대신에 처음 보는 아이가 청명한 웃음소리를 내며 뛰놀고 있었다. 마치 요정처럼 예쁜 아이는 곱실거리는 화사한 금발을 빨간 리본으로 묶고 앙증맞은 드레스 차림에 오즈의 마법사에 나올 듯한 빨간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순간 조애너는 오즈로 향하던 도로시가 바람의 실수로 이곳에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샘, 천천히 다녀. 그러다 또 넘어진다.”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는 아이가 뒤뚱거리자 저도 모르게 다가서려 움직이던 조애너가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곧이어 나타나 다가오는 사내아이의 얼굴에 여자아이를 보며 불안해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조애너는 그때서야 아이가 그곳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혹시나 들킬까 싶어 더욱 작은 몸을 숨기려 애쓰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아이만큼이나 화사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둘이 남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 때문에 꼬마 신사처럼 보이는 소년 역시 금발에 곧은 콧날을 지녔다.
그러나 조애너가 그들을 보고 놀란 건 외모 때문이 아니라 하늘을 닮은 듯 투명하고 예쁜 파란 눈동자 때문이었다. 마치 토파즈가 반짝이는 듯 아름다운 눈동자에 넋이 빠져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마터면 고개를 들 뻔했다.
다행히 아이가 넘어지며 터트리는 울음소리 덕에 정신을 차렸다. 처음부터 불안하더라니 넘어져 울고 있는 작은 소녀 곁으로 소년이 달려와 재빨리 일으켜 세우고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는 소년의 손길이 아이답지 않게 조심스러웠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뭐라고 하는 듯했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이 멈춰지자 소년이 등을 보이며 앉았다.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지 냉큼 아이가 업힌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을 그들이 사라진 곳에 미련이 담긴 시선을 보내던 조애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혹여 그들에게 들킬까, 너무 오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주무르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며 찌르는 듯한 저린 통증에 얼굴을 찡그린 조애너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한 번 더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주고는 다리를 절며 그곳을 벗어났다.
‘지금쯤 이모가 날 찾고 있겠군.’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조애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 얼마만큼의 매질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다시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모의 매질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 메리벨의 딸(1)
“이 더러운 잡종……. 거짓말이 얼마나 중죄인지 알아? 네 엄마도 거짓말을 밥 먹듯 했었지. 그때 제대로 벌을 줬어야 했어.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벌은 받아야지.”
타는 듯한 등의 통증에 조애너가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이모의 매질이 멈추자 조애너는 기다시피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쓰러졌다. 그 여파로 낡은 매트리스가 삐꺽거리며 먼지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이를 깨물고 흘러나오는 울음을 감추는 조애너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학교…… 얼마나 동경하던 단어인가. 적어도 학교에 가면 이모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사만다가 있었다.
조애너의 공주님, 사만다. 그러나 그곳이 또 다른 고통의 장소가 되리라고 짐작도 못 했었다. 그래도 조애너는 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비록 샘은 조애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아니, 학교의 어떤 아이들도 조애너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유난히 까만 머리에 칙칙한 회색의 긴팔 티셔츠, 낡아서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은 자신이 보아도 괴기해 보였고 또 음침해 보였다. 한여름에도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다니는 조애너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존재였다.
‘메리벨의 딸, 더러운 잡종, 매춘부의 딸.’
마을에서 조애너는 이름보다는 그렇게 불러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단순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존재였다. 자신들의 부모님이 조애너를 함부로 대했기에 아이들 역시 똑같이, 아니, 더 지독하게 괴롭혔다.
조애너가 기억하는 엄마는 화려한 미모와 환한 금발을 지닌 풍만한 체격의 여자였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핏빛처럼 새빨갛던 빨간 입술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조애너는 태어나 몇 달 안 된 기억까지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동양인 실업가와의 하룻밤의 실수라고 푸념하던 엄마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우려 했으나,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낳았다는 말을 엄마는 술에 취하면 증오하듯 되뇌곤 했었다.
어쩌면 엄마가 살았던 아파트 관리인 노부부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난히 엄마의 아파트에는 남자들이 자주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조애너에게 우유를 먹이고는 어두운 곳에 가뒀었다.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준 우유를 먹으면 졸음이 몰려오고 잠이 들었었다. 항상 조애너를 버려두다시피 했던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파 울다 지친 조애너를 구해 준 것이 아파트의 관리인 부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문을 뜯고 들어와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 있던 조애너를 구해 주었다. 그 뒤로 엄마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노부부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결혼 25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던 그 부부는 조애너를 정말 아껴 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보살핌을 받았던 기억은 엄마가 술과 약에 취해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조애너가 지니고 있는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누구 하나 조애너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녀를 엄마의 유일한 피붙이 이모에게 건넸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던 이모를 보고 이미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모는 조애너를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관리인 부부와 떨어지기 싫다고 매달리는 조애너를 사회사업가는 가차 없이 이모에게 넘겨주고는 사라졌다.
이모가 살고 있는 웨일즈는 작고 아담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외진 곳이라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허물없이 지내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건 그들에게 국한된 것이지 조애너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엄마의 고향이었다.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보다 이곳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고 조그마한 시골 마을 특유의 엄격한 도덕관이 있었기에 이미 조애너를 보기도 전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애너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메리벨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곳에서는 더러움의 표시였으며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역시 순탄할 리 없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은 여전했고 선생님들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애너는 샘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오늘 수학 시험 시간에 우연히 조애너와 샘은 이어진 책상에 앉았다.
얼마나 가슴이 떨리던지…….
샘은 영리하고 예쁜 아이였다.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거기다 샘의 아버지는 자작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기에 그 딸인 샘은 이미 공주님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샘의 성적이 만점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애너가 만점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었나 보다.
존즈 선생님은 처음부터 조애너가 샘의 답안을 보고 쓴 것이라고 단정했고 조애너의 성적은 무효 처리가 되었다. 아무런 질문도 없었고 확인도 필요 없었다.
아는 것을 착실히 답안지에 옮겨 적은 것뿐인데 왜 그런 결과가 나온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이모가 학교로 불려 왔다. 조애너의 의사를 묻는다거나 사정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지금 조애너는 하지도 않은 짓에 대한 벌을 받고 있었다. 생각보다 쉬웠던 문제들을 서슴없이 풀어낸 결과가 이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애너를 믿어 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경멸의 시선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던 사만다의 얼굴을 보며 처음으로 조애너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조애너가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아. 절대로.”
깨물어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작은 다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리란 결심을 하며 매를 맞아 아픈 등보다 가슴 시린 서러움에 긴 밤이 지나고 있었다.
힘들고 아프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그사이 조애너는 점차로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 갔다.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나름대로 피하는 방법도 배웠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들의 시선은 조애너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조애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장미정원으로 숨어들었다.
언제인가부터 그곳에서 더 이상 샘을 볼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런던의 유명한 사립학교로 진학해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이제 세대가 바뀌어 귀족이라는 명칭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해도 여전히 귀족의 칭호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샘의 아버지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자작의 칭호를 갖고 있었기에 이 조그만 동네에서 싱클레어가는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긴 귀족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선거 없이도 하원의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과는 상관없이 조애너에게 있어서 샘은 언제나 공주님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공주님이 갑자기 돌아왔다. 이 웨일즈로 다시…….
이 년 전 샘의 아버지인 제이슨 맥스 싱클레어 경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마비라고 했던가?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애통하게 했다.
샘이 이곳을 떠나 기숙학교로 가던 날 조애너는 작은 몸을 숨긴 채 멀리서 눈물을 삼키며 배웅했었다. 샘이 그녀만 보면 벌레 보듯 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을의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고운 눈길을 주지 않았으므로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싱클레어 경이 집 안의 묘지에 묻히던 그날도 조애너는 묘지 구석에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싱클레어 경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먼빛으로 훔쳐보던 모습이 고작이었었는데도 마치 자신의 소중한 한 부분이 사라진 듯 그렇게 슬퍼했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서 있는 레이디 캐서린의 모습과 얼굴 가득 눈물로 범벅이 되어 서 있는 샘을 지키듯 당당히 서 있던 릭을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 더욱 조애너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렇게 그 가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녀는 몸을 숨긴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었다. 그런데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샘이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싱클레어가가 재정적인 압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남편을 잃고 아예 싱클레어 저택으로 내려온 레이디 캐서린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조애너는 샘이 다시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만이 귀에 들렸다. 조애너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었으니까.
“조, 뭐 하는 거냐? 내가 분명 학교 가기 전에 앞마당 치우라고 했을 텐데.”
이모의 고함 소리에 조애너가 놀라 정신없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샘이 왔다는 소식에 흥분해서 잠을 설친 탓에 오늘은 늦잠을 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