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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향기 (1화)
· 일러두기
1. 외국 인명, 지명, 작품명 및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기와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2.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1. 축제를 기획하라구요? 제가요?
2017년 9월. 오래된 주유소를 끼고 크게 우회전 한 번 했을 뿐인데, 제법 넓은 신작로 옆으로 추수를 앞두고 있는 알곡이 꽉꽉 들어찬 황금빛 논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구불구불한 논둑길 아래편에는 이미 익어 버린 성급한 첫 벼를 미리 베는 추수꾼들도 더러더러 보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워쩐디야. 솔직헌 얘기루다가 손님께서 나헌티 양조장으루 간다고 혔을 쩍에 솔찬히 멀다구 했었잖유. 이짝으루 한참을 더 가야 쓰는디. 손님들이야 길을 몰르니 깝깝시럽다구 자아꾸 재촉을 허는디 저 길이 끝두 없이 왜 저런디야 하믄서 한숨 푹 자믄 나올랑 말랑이유. 안즉 멀었슈.”
50대 중반은 족히 돼 보이는 택시 기사가 느릿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자신은 전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물댔다.
네이비색 슈트 재킷 안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파란색 줄무늬가 그려진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있던 김호는 수십 분째 펼쳐지는 논의 풍경에 지쳤는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창문을 내렸다. 제법 날카로운 가을바람이 택시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웜매. 고로케 창문을 훅 열어제끼면 쓰간디유. 요새 질루 무서운 기 감긴디. 조짝에 논 미티서 불어 제끼는 바람을 씨게 맞어 버리면 어디 당할 재간이 있간디. 환절기 감기럴 중늙은이덜이 워쳐케 당허겄슈. 감기에 걸리믄 일두 못 나가구 며칠을 공치기 십상인디. 얼매 전까정만 혀두 훅한 바람이 불었는디 날씨가 왜 저런디야.”
창문을 올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투덜거림이 김호의 귓전을 때렸다.
황금 들녘에서 불어오는 9월의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택시 기사의 누릿한 머리 냄새와 오랫동안 빨지 않은 옷에 켜켜이 밴 시큼하고 눅진한 냄새를 한순간에 몰아내고 있었다. 얼굴에 기분 좋게 와 닿는 청명한 바람 덕분에 그는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택시 기사의 투덜거림이 다시 들려올까 봐 그는 창문을 올리며 뒷머리를 좌석 등받이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 시골 마을로 갑자기 오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2개월 전, 농림부장관 집무실.
“장관님, 제가요? 제가 거기로 파견을 나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김호는 행정 고시에 합격하고 5개월간의 지루한 연수와 6개월간의 농림부 실무 수습을 마친 뒤 정식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신참내기 사무관이었다.
농림부 장관 하도식은 왼발 양말 속으로 오른손을 넣어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 사이의 골을 살살 긁고 있었다. 한동안 열심히 발가락 사이를 긁던 오른손 검지가 그의 코를 향해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인중 어딘가를 비비는 척하면서 발가락 사이를 후비던 검지 손톱의 냄새를 맡았다.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김호의 오른쪽 눈썹 끝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럼 니가 가지. 다 늙은 내가 가리?”
하 장관은 지난 반년 동안 농림부에서 사무관 시보로 수습 기간을 마친 김호를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대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에서 나오는 남다른 기획력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춘 김호는 누가 봐도 기대되는 인재였다.
방금 전 그는 김호를 농림부 장관 직속 행정 사무관으로 발령 내려던 당초의 계획에서 큰 폭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수립한 새로운 계획이 너무 만족스러워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집무실 안을 두어 바퀴 정도 성급하게 휘휘 돈 것으로도 모자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김호를 방으로 호출했다. 이 전도유망한 인재를 어디로 보내야 가장 좋은 그림이 나올지, 몇 주째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던 고민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기 때문에.
하 장관의 그 망할 오른쪽 검지가 이번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그의 숱 많은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더니 정수리 아랫부분을 신중하게 긁어 댔다. 그는 손톱 사이에 낀 돼지기름 같은 비듬을 반대편 손톱 끝으로 살살 파낸 뒤 그 허연 덩어리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동그란 공을 만들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김호는 속이 메슥거려서 장관 집무실 소파 테이블 맞은편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는 네모반듯한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짧게 자른 머리와 짙은 눈썹, 까무잡잡한 피부로 인해 그는 실제보다 더 호리호리해 보였다.
자신의 발가락 사이와 정수리 어디메를 실컷 긁은 하 장관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삼선 슬리퍼를 대충 발에 꿰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집무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사이를 능숙하게 헤집어 몇 장의 사진을 집어 들고 김호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지고 온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한 장 한 장 펼쳐 놓고 김호를 바라봤다.
“김 담당아(5급 사무관의 호칭 중 하나) 니가 그거 담당해 보면 어떨까? 청와대에서 우리 쪽으로 내려온 그 미션 말이야.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 요 사진 좀 봐라.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얼마나 멋있냐. 우리도 이런 거 좀 한번 해 보자!”
“장관님, 여긴 독일입니다. 맥주의 나라 독일이요.”
“옘병. 밥 먹고, 싸고, 자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독일 사람들은 뭐, 뇌에 금테 두르고, 맥주에 마약 탔다니. 우리도 할 수 있어. 우리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안 빠지는 전통주 축제 하나 아주 멋들어지게 기획할 수 있다니까.”
하 장관은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옥토버페스트 사진을 한 장 들어 올린 뒤 김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넌 오늘부로 농림부 식품산업진흥과의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김 담당이다. 식품산업진흥과에서 문화유산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 전통주에 대한 관리와 육성을 좀 더 디테일하게 하니까 넌 내일부터 거기로 출근해. 두 달 정도 팀 사람들이랑 얼굴 좀 익히고 바로 충남 서천의 소곡주 마을로 내려가면 될 거야.”
김호가 황당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 하 장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참에 술의 명인이 사는 전통주 마을로 내려가서 한국을 대표하는 소곡주에 관해 집요하게 들이파 봐. 소곡주를 주제로 해서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의 사이즈를 확 키워 보는 거야. 마치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처럼 신명 나게 말이지. 내가 도지사한테는 미리 전화해 놓을게. 김 담당아, 서천에는 언제 내려갈래? 말 나온 김에 날짜 먼저 박자.”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시골 마을 전통주를 가지고 세계적인 옥토버페스트를 만들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부임 2년 차를 맞고 있는 농림부 장관은 젊은 시절부터 지역 단위로 경제 공동체를 조직하며 농촌 사회의 자립에 힘써 온 지역 노동 운동의 대부 같은 사람이었다. 노동 운동가 출신답게 고위 공무원들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가 깊은 하 장관은 부임하자마자 5급 사무관들의 호칭을 전부 담당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장관실을 주민들을 위한 열린 도서관으로 바꾸고 작은 회의실 한쪽을 막아 장관실로 꾸몄다.
하 장관은 권위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농림부에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다. 그는 나라에서 주는 출퇴근용 차량도 마다한 채 낡은 자전거 한 대를 휘휘 끌고 다녔다. 누군가에게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좁쌀만큼도 없는 것은 참으로 존경할 만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었다. 공무원이라면, 게다가 나라에서 중책을 맡기는 고시 출신 고위 공무원이라면 뭔가 크게 기여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183cm의 훤칠한 키에 남자답게 잘생긴 엘리트 김호가 농림부에서 실무 수습을 하기 위해 장관실 문을 열고 인사 왔을 때, 하 장관의 눈에 그가 단번에 들어왔다. 이 낡은 조직 전체를 새롭게 바꿀 젊은 피가 수혈된 느낌이었다.
농림부 주관하에 지방 자치 단체별로 소소하게 진행되는 지역 특산물 축제는 해가 거듭될수록 영 지지부진했다. 일부 공무원들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용을 썼다.
사실 지역 축제란 건 주관 부서에서 노력과 열정과 아이디어를 몽땅 쏟아부어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재밌는 볼거리와 깊은 감동을 주며 진행해도 성공할까 말까이건만. 다양한 지역 축제들이 전임 팀장들에게서 물려받은 문서의 내용만 조금씩 수정한 기획안으로 매년 별반 다르지 않게 반복되는 게 현실이었다.
하 장관은 매년마다 비슷하게 의무 방어전 치르듯 지역 행사를 진행한 후에 몇 장의 결과 보고서로 마무리되는 이 부분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런 고민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그즈음, 농림부에 제법 큰 사이즈의 중대 미션이 떨어졌다.
사라져 가는 전통주의 명맥을 잇고,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에 대한 호기심을 해외에서도 끌어올 수 있도록 외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전통주 축제를 큰판으로 열어 보라는 미션이었다.
이 미션은 이미 늙어 버린 하 장관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세계인의 흥겨운 잔치판이 자꾸 이미지로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끝 지점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렸다. 새롭게 떨어진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김호 사무관을 세우기로.
전통주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수립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축제를 열어 외국인 관광객까지 유치해야 하는 이런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에 타성에 젖어 있는 나이 든 공무원들이 아무리 나서 봤자 그럴듯한 아웃풋이 절대 안 나온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특별한 감각을 바탕으로 풍부한 아이디어와 추진력까지 겸비한 김호 같은 젊은 두뇌가 역시나 제격이었다.
· 일러두기
1. 외국 인명, 지명, 작품명 및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기와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2.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1. 축제를 기획하라구요? 제가요?
2017년 9월. 오래된 주유소를 끼고 크게 우회전 한 번 했을 뿐인데, 제법 넓은 신작로 옆으로 추수를 앞두고 있는 알곡이 꽉꽉 들어찬 황금빛 논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구불구불한 논둑길 아래편에는 이미 익어 버린 성급한 첫 벼를 미리 베는 추수꾼들도 더러더러 보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워쩐디야. 솔직헌 얘기루다가 손님께서 나헌티 양조장으루 간다고 혔을 쩍에 솔찬히 멀다구 했었잖유. 이짝으루 한참을 더 가야 쓰는디. 손님들이야 길을 몰르니 깝깝시럽다구 자아꾸 재촉을 허는디 저 길이 끝두 없이 왜 저런디야 하믄서 한숨 푹 자믄 나올랑 말랑이유. 안즉 멀었슈.”
50대 중반은 족히 돼 보이는 택시 기사가 느릿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자신은 전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물댔다.
네이비색 슈트 재킷 안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파란색 줄무늬가 그려진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있던 김호는 수십 분째 펼쳐지는 논의 풍경에 지쳤는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창문을 내렸다. 제법 날카로운 가을바람이 택시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웜매. 고로케 창문을 훅 열어제끼면 쓰간디유. 요새 질루 무서운 기 감긴디. 조짝에 논 미티서 불어 제끼는 바람을 씨게 맞어 버리면 어디 당할 재간이 있간디. 환절기 감기럴 중늙은이덜이 워쳐케 당허겄슈. 감기에 걸리믄 일두 못 나가구 며칠을 공치기 십상인디. 얼매 전까정만 혀두 훅한 바람이 불었는디 날씨가 왜 저런디야.”
창문을 올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투덜거림이 김호의 귓전을 때렸다.
황금 들녘에서 불어오는 9월의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택시 기사의 누릿한 머리 냄새와 오랫동안 빨지 않은 옷에 켜켜이 밴 시큼하고 눅진한 냄새를 한순간에 몰아내고 있었다. 얼굴에 기분 좋게 와 닿는 청명한 바람 덕분에 그는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택시 기사의 투덜거림이 다시 들려올까 봐 그는 창문을 올리며 뒷머리를 좌석 등받이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 시골 마을로 갑자기 오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2개월 전, 농림부장관 집무실.
“장관님, 제가요? 제가 거기로 파견을 나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김호는 행정 고시에 합격하고 5개월간의 지루한 연수와 6개월간의 농림부 실무 수습을 마친 뒤 정식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신참내기 사무관이었다.
농림부 장관 하도식은 왼발 양말 속으로 오른손을 넣어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 사이의 골을 살살 긁고 있었다. 한동안 열심히 발가락 사이를 긁던 오른손 검지가 그의 코를 향해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인중 어딘가를 비비는 척하면서 발가락 사이를 후비던 검지 손톱의 냄새를 맡았다.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김호의 오른쪽 눈썹 끝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럼 니가 가지. 다 늙은 내가 가리?”
하 장관은 지난 반년 동안 농림부에서 사무관 시보로 수습 기간을 마친 김호를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대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에서 나오는 남다른 기획력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춘 김호는 누가 봐도 기대되는 인재였다.
방금 전 그는 김호를 농림부 장관 직속 행정 사무관으로 발령 내려던 당초의 계획에서 큰 폭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수립한 새로운 계획이 너무 만족스러워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집무실 안을 두어 바퀴 정도 성급하게 휘휘 돈 것으로도 모자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김호를 방으로 호출했다. 이 전도유망한 인재를 어디로 보내야 가장 좋은 그림이 나올지, 몇 주째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던 고민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기 때문에.
하 장관의 그 망할 오른쪽 검지가 이번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그의 숱 많은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더니 정수리 아랫부분을 신중하게 긁어 댔다. 그는 손톱 사이에 낀 돼지기름 같은 비듬을 반대편 손톱 끝으로 살살 파낸 뒤 그 허연 덩어리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동그란 공을 만들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김호는 속이 메슥거려서 장관 집무실 소파 테이블 맞은편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는 네모반듯한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짧게 자른 머리와 짙은 눈썹, 까무잡잡한 피부로 인해 그는 실제보다 더 호리호리해 보였다.
자신의 발가락 사이와 정수리 어디메를 실컷 긁은 하 장관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삼선 슬리퍼를 대충 발에 꿰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집무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사이를 능숙하게 헤집어 몇 장의 사진을 집어 들고 김호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지고 온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한 장 한 장 펼쳐 놓고 김호를 바라봤다.
“김 담당아(5급 사무관의 호칭 중 하나) 니가 그거 담당해 보면 어떨까? 청와대에서 우리 쪽으로 내려온 그 미션 말이야.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 요 사진 좀 봐라.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얼마나 멋있냐. 우리도 이런 거 좀 한번 해 보자!”
“장관님, 여긴 독일입니다. 맥주의 나라 독일이요.”
“옘병. 밥 먹고, 싸고, 자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독일 사람들은 뭐, 뇌에 금테 두르고, 맥주에 마약 탔다니. 우리도 할 수 있어. 우리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안 빠지는 전통주 축제 하나 아주 멋들어지게 기획할 수 있다니까.”
하 장관은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옥토버페스트 사진을 한 장 들어 올린 뒤 김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넌 오늘부로 농림부 식품산업진흥과의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김 담당이다. 식품산업진흥과에서 문화유산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 전통주에 대한 관리와 육성을 좀 더 디테일하게 하니까 넌 내일부터 거기로 출근해. 두 달 정도 팀 사람들이랑 얼굴 좀 익히고 바로 충남 서천의 소곡주 마을로 내려가면 될 거야.”
김호가 황당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 하 장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참에 술의 명인이 사는 전통주 마을로 내려가서 한국을 대표하는 소곡주에 관해 집요하게 들이파 봐. 소곡주를 주제로 해서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의 사이즈를 확 키워 보는 거야. 마치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처럼 신명 나게 말이지. 내가 도지사한테는 미리 전화해 놓을게. 김 담당아, 서천에는 언제 내려갈래? 말 나온 김에 날짜 먼저 박자.”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시골 마을 전통주를 가지고 세계적인 옥토버페스트를 만들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부임 2년 차를 맞고 있는 농림부 장관은 젊은 시절부터 지역 단위로 경제 공동체를 조직하며 농촌 사회의 자립에 힘써 온 지역 노동 운동의 대부 같은 사람이었다. 노동 운동가 출신답게 고위 공무원들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가 깊은 하 장관은 부임하자마자 5급 사무관들의 호칭을 전부 담당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장관실을 주민들을 위한 열린 도서관으로 바꾸고 작은 회의실 한쪽을 막아 장관실로 꾸몄다.
하 장관은 권위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농림부에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다. 그는 나라에서 주는 출퇴근용 차량도 마다한 채 낡은 자전거 한 대를 휘휘 끌고 다녔다. 누군가에게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좁쌀만큼도 없는 것은 참으로 존경할 만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었다. 공무원이라면, 게다가 나라에서 중책을 맡기는 고시 출신 고위 공무원이라면 뭔가 크게 기여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183cm의 훤칠한 키에 남자답게 잘생긴 엘리트 김호가 농림부에서 실무 수습을 하기 위해 장관실 문을 열고 인사 왔을 때, 하 장관의 눈에 그가 단번에 들어왔다. 이 낡은 조직 전체를 새롭게 바꿀 젊은 피가 수혈된 느낌이었다.
농림부 주관하에 지방 자치 단체별로 소소하게 진행되는 지역 특산물 축제는 해가 거듭될수록 영 지지부진했다. 일부 공무원들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용을 썼다.
사실 지역 축제란 건 주관 부서에서 노력과 열정과 아이디어를 몽땅 쏟아부어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재밌는 볼거리와 깊은 감동을 주며 진행해도 성공할까 말까이건만. 다양한 지역 축제들이 전임 팀장들에게서 물려받은 문서의 내용만 조금씩 수정한 기획안으로 매년 별반 다르지 않게 반복되는 게 현실이었다.
하 장관은 매년마다 비슷하게 의무 방어전 치르듯 지역 행사를 진행한 후에 몇 장의 결과 보고서로 마무리되는 이 부분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런 고민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그즈음, 농림부에 제법 큰 사이즈의 중대 미션이 떨어졌다.
사라져 가는 전통주의 명맥을 잇고,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에 대한 호기심을 해외에서도 끌어올 수 있도록 외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전통주 축제를 큰판으로 열어 보라는 미션이었다.
이 미션은 이미 늙어 버린 하 장관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세계인의 흥겨운 잔치판이 자꾸 이미지로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끝 지점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렸다. 새롭게 떨어진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김호 사무관을 세우기로.
전통주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수립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축제를 열어 외국인 관광객까지 유치해야 하는 이런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에 타성에 젖어 있는 나이 든 공무원들이 아무리 나서 봤자 그럴듯한 아웃풋이 절대 안 나온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특별한 감각을 바탕으로 풍부한 아이디어와 추진력까지 겸비한 김호 같은 젊은 두뇌가 역시나 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