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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향기 (2화)



노동 운동가 출신의 농림부 장관이 설계한 큰 그림에 떠밀려 김호는 충청남도 서천의 술 빚는 마을로 파견을 나가는 중이었다. 택시의 창문이 닫히자 기사의 노릿한 머리 냄새가 다시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살기 위해 다시 창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끝없이 이어지던 황금 들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의 두 눈에는 온 마을을 휘감고 있는 하얀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사님, 저 연기들은 다 뭡니까?”

말을 마치자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긴 뭐간디유. 삭쟁이를 싹 쓸어 노코 술밥을 짓는 연기쥬.”

“술밥 짓는 연기요?”

“전통주를 맨드는 마을 어귀에 방금 들어왔는디. 요짝부터가 바로 소곡주를 맹그는 술 빚는 마을이유. 집집마다 저런 끼다란 굴뚝이 보이쥬? 저 밥들이 술의 뭔 밑밥이 된다든디. 암턴요, 이 마을은요. 눈을 들어 어디를 뺑 둘러쳐 봐도 술밥을 짓는 요 허연 연기가 사시사철 으디서든 매냥 지천으루다 나유.”

술 빚는 마을을 설명하는 택시 기사의 얼굴엔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밥 짓는 굴뚝뿐이간디. 집집마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벌건 숯을 빵궈서 그 숯으루다 누룩을 이쁘게 띄우니께 조 미티서부터 연기가 씨게 올라오잖유. 그니께 저래 연기가 말도 못 하지유. 허연 연기가 마을을 둘러싸구 있으니께 요짝 동네를 신선이 머무는 마을이래구두 하는게 비유.”

김호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온 마을을 뒤덮고 있는 하얀 연기를 넋 놓고 바라봤다. 뭉게뭉게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가 제법 눈에 익자 드디어 술 빚는 마을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뜨거운 불에서 구운 짙은 청회색의 기와를 얹은 집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도톰한 짚으로 새끼줄을 꽈서 장방형으로 넓게 짠 멍석이 집집마다 마당에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밑술의 재료가 되는 멥쌀을 그득그득 말리는 중이었다.

청회색 기와집의 너른 마당에서 가을볕을 흠뻑 받으며 꼬들꼬들하게 말려지고 있는 하얀 쌀들의 향연. 그 하얀 쌀들을 감싸고 있는 장방형의 황토색 멍석들 가생이 사이사이로 참새들이 낱알들을 주워 먹으려고 종종대며 걸어왔다가 아주머니들의 ‘훠어이~ 훠어이~’ 소리에 풀썩거리며 날아갔다. 전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정겨운 풍경이었다.

택시는 술 빚는 마을의 기와집 중에서도 솟을대문이 가장 큰, 전통 방식으로 지은 고택 앞에 멈춰 섰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일꾼들의 숙소인 행랑채가 나오고, 넓은 마당 안으로는 커다란 ㄱ 자형의 큰 사랑채와 그 안쪽에 자리한 안채, 그리고 작은 사랑채가 이어지는 조선시대 전통 건축법으로 지은 위풍당당하고 멋들어진 고택 앞에서 김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김호가 택시에서 내려 이 아름다운 고택에 완전히 매료된 눈빛으로 높은 솟을대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택시 기사가 트렁크에서 그의 캐리어를 내려 주며 입을 열었다.

“젊은 양반. 이짝 대문 앞에서 좀 기달려유. 으르신께 인사도 좀 드리면서 서울에서 워떤 손님이 왔다구 내가 말을 전해 줄 테니께.”

기사는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고택 안으로 쑥 들어갔다.

“부여댁 아주머니. 나 잠시 들렀네유. 집 입구 논의 벼들이 이미 팍 수그러졌든디 아즉까정 안 비고 뭐 했데유? 워치케 저짝 논의 벼를 내가 줌 비 줄까유?”

“아, 일없슈. 벼를 빌 손이 모질라믄 싹 다 갈아엎어서 소나 멕이면 되쥬. 근디 바쁜 낮 시간에 우리 집에까정 워쩐 일이래유?”

“워쩐 일은유. 으르신을 쬠 빌라구 왔쥬.”

“이…… 아버님은 저 안채에서 짐 누룩 맨지구 계셔유.”

“박 기사가 워쩐 일이여?”

때마침 최 노인이 동그란 누룩 틀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며 박 기사에게 알은체를 했다.

“으르신 얼굴 비러 왔지유. 잘 계셨지유?”

“이…… 나여 별일이 있간디. 뭣 줌 마실 텨? 명지야, 여기 커피허고 뭣 줌 저기 혀. 손님이 왔는디 기냥 보낼 순 없잖여.”

“으르신 커피는 무신요. 일없슈. 진짜로 암것두 안 해두 돼유.”

“나가 서운혀서 그랴. 내 집 문짝을 넘었으면 손님인디 워치케 그랴. 명지야 뭣 줌 내와야지 뭐 허냐?”

“아 근디요, 으르신. 지가 터미널에서 손님을 태와서 왔는디 함 만나 보셔유. 아주 신수가 훤한 젊은 남자 손님인디 이 댁에 볼일이 있다고 허네유. 서울에서 왔다는디 뭔 볼일인지는 들어 봐야쥬.”



김호는 자신을 대문 앞에 세워 두고 훌쩍 들어가 버린 택시 기사가 언제쯤 다시 나타날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구두에 묻은 하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이쪽 길은 전부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흙길이라 그의 광나는 구두에 자꾸 흙먼지들이 내려앉았다.

그때 솟을대문이 열리더니 기사의 너부데데한 얼굴이 드디어 나무 대문 사이를 쑥 비집고 나왔다.

“서울 양반, 이짝으루 들어와유. 으르신이 기달리시는디 언능 오슈.”



2. 우리 양조장에 자네가 일꾼으로 들어오게


자신과 똑같이 손님으로 온 줄 알았던 택시 기사는 마치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김호를 불렀다. 그는 슈트 재킷의 주름을 펴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 맨 뒤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입성의 김호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고택의 차분한 분위기와 기품 있어 보이는 그의 단정한 외모가 마치 서로에게 화답하는 한 쌍의 새처럼 어우러졌다. 사랑채에 앉아 있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의 얼굴을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김호가 마당을 지나 사랑채로 들어서자, 들기름칠을 해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고색창연한 짙은 고동색의 대청마루에 개량 한복을 입은 70대 노인과 그의 며느리로 보이는 50대 초반의 풍채 좋은 여성과 자신을 태워 온 택시 기사가 동그란 찻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기사는 김호를 향해 이쪽으로 냉큼 올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김호는 마루 앞까지 걸어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농림부에 근무하는 김호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이…… 농림부에 근무허면 공무원이구먼, 공무원. 으르신 공무원인가 보네유. 근디 농림부 공무원이 뭐 헌다고 요기 술 빚는 마을의 으르신을 벨라구 온규?”

김호는 최학영 명인을 보고 이야기해야 할지, 택시 기사를 보고 용건을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선을 건넸다. 그러자 최 노인이 그의 난처함을 이해했다는 눈빛으로 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요 마을에서 대대로 술을 빚는 최학영인디. 나랏일 허는 젊은 공무원이 나 같은 늙은이헌티 뭔 볼일이 있어서 서울서부텀 요기까지 왔을까 싶은디? 그라구 섰지 말구 요기 마루로 올라와서 찬찬히 말을 해 보믄 좋컸구만.”

김호는 구두를 벗고 안주인이 어찌나 정성스럽게 기름 바른 걸레질을 해 댔는지 햇빛을 받아 윤기가 자르르 감도는 대청마루에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최 노인의 며느리 부여댁은 183cm의 훤칠한 키가 마루로 쑥 들어오자 아들 바라보듯 대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김호가 대청마루 끝에 살짝 걸쳐 서서 무릎을 꿇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하고 있는 사이, 그걸 눈치챈 부여댁이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아이고오. 그 끝 짝에 그래 불편허게 앉지 말구 쬠 들어와서 편히 앉어유. 먼 길 왔는디 편히 앉어야쥬.”

김호는 그제서야 주춤주춤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까지 방문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농림부에서는 대대로 전해 오는 지방의 전통주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각계 전문가들과 논의해 본 바, 대한민국을 대표할 전통주로 <한산소곡주>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소곡주를 브랜드화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술로 더 많이 홍보하고, 아울러 지역 축제까지 크게 연계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제안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기여? 그 말이 참말로 기여? 그라믄 이건 보통 일이 아닌디. 으르신네 소곡주가 엄청 유명해지는 거 아닌감유. 워치케 이런 경사시런 일이. 근디 이런 중차대한 일을 제안허려면 좀 힘이 있는 높은 양반이 와야 허는 거 아녀유? 젊은 양반은 나이가 으뜨케 되간디? 아즉 새파랗게 젊어 뵈는디 농림부 공무원이라 했으니께 한 9급이유? 아니믄 7급?”

“저는 올해 서른입니다.”

김호가 자신의 나이만 겨우 말하고 뭔가를 고민하는 사이, 마당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 노인의 손녀 명지가 찻잔이 놓인 나무 쟁반을 들고 마루로 올라왔다. 머리를 하나로 낮게 묶은 최명지는 김호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인사를 하며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짝은 우리 으르신네 손녀여, 손녀.”

택시 기사 박 씨는 자신의 나이를 서른이라고 밝힌 김호를 향해 편하게 말을 놨다.

명지가 김호를 찬찬히 뜯어봤다. 김호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날렵하게 내리꽂히는 그녀의 시선이 좀 당황스러워 얼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기로운 찻물이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며 속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여러 인물들을 오롯이 혼자 상대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 내는 이 어색함을 찻잔이 제법 기특하게 해결해 주었다. 어색함이 그를 짓누를 때마다 찻잔이라도 들어서 얼굴을 좀 가리면 되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녕하세요, 최명지라고 합니다. 명함이 있으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를 빤히 쳐다보던 시선의 뒤를 이어 그녀의 질문이 제법 날카롭게 들어왔다. 김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명함도 안 꺼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속으로 아차차 싶었다.

그는 재빨리 찻잔을 내려놓고 슈트 상의 안쪽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들었다. 최 노인에게 공손히 한 장 건네려는 순간 옆자리의 명지가 그의 명함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로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