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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향기 (3화)



“농림부 식품산업진흥과의 사무관이네요.”

명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김호의 명함을 확인한 후에 최 노인에게 건넸다.

“사무과안? 사무관이면 행정 고시럴 패스헌 거 아닌감? 명지야, 기여 안 기여? 남자 나이 서른에 벌써 사무관이면 고시 출신이구먼, 고시. 아이고오. 워쩐디야. 진즉에 말을 혔으면 나가 쬠 더 친절허게 대했을 틴디유. 사무관 양반이 오셨으니께 일을 일사천리루다가 진행헐 수 있는 권한이 큰 거 아닌감유? 내 소개가 늦었는디 택시 기사이자 이 마을 부녀회장의 남편인 박영식인디 넘들은 기냥 편허게 박 기사라구두 허구 부회장님이라구두 허구 그래유.”

박 기사는 명함 한 장으로 다시 김호에게 말을 높였다. 김호는 난감한 얼굴로 또다시 찻잔을 들었다. 장관이 가라 하니까 왔을 뿐 자신한테 무슨 힘이나 신념이 있을까 싶었다.

“이…… 부녀회장 남편이니께 우리 마을에서는 이 냥반을 부회장님이라구 해유.”

부여댁이 박 기사 편을 들어 주려고 한마디 거들었다.

“근디 나는 농림부 장관이 오든, 사무관이 오든 그것이 뭔 소용이 있을까 싶은디. 나야 쌀을 씨쳐서 술밥을 맨들구, 그걸 게지구 술을 빚는 거밖에는 헐 줄 아는 게 없는 늙은이라 술로 뭔 브랜드를 맨드느니 축제를 헌다느니 허는 말들이 뭔 말인가 싶기도 허고. 우리 집안 술을 가지구 농림부의 공무원덜이 뭐슬 워치케 허겠다는지가 머릿속으루 원체 들어오지 않으니께.”

“으르신 그건 벌써부텀 걱정헐 일이 아니지유. 으르신헌테는 똑똑헌 명지가 있잖어유. 명지가, 쟈가 그래두 요짝 지방이지만서두 아주 멀쩡헌 4년제를 나왔구. 아, 사무관 양반 우리 으르신네 명지가 그랴두 4년제 출신이라 여간 똑 뿌라진 게 아니유.”

박 기사는 대단한 인물을 소개한다는 얼굴로 주변을 크게 휘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요짝 여자애덜은 죄다 여상으루다 가는디 명지는 고등핵교부텀 인문계루 가구. 대핵교두 4년제루 가구. 졸업허구 양조장에서 4년 가차이 일했으니께 명지가 벌써 스물여덟이구먼. 그라니께 사무관 양반이 우리 명지랑 가찹게 붙어서 그 축제인가 뭔가를 맹글면 되겠구만.”

“웜매. 넘의 딸 나이를 그렇게 올리면 워쩐대유. 말은 바로 해야쥬. 스물일곱인디, 일곱.”

부여댁이 살짝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명지에 대한 박 기사의 부정확한 보충 설명을 수정해 주었다.

명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박 기사의 입에서 4년제니, 인문계니 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녀는 미치겠다는 얼굴로 천장을 바라봤다. 이런 촌구석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지방대를 나온 게 무슨 대단한 자랑이라고.

마치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장된 수식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비전문가가 만든 게 분명한 작은 식당의 홍보 전단지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실체를 입증할 수 없는 미사여구에 물음표가 잔뜩 떠오르면서 절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그런 촌스러운 전단지.

평소에도 누군가가 뭔가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듯 앞에서 호들갑을 떨면 그녀는 ‘정말?’ 혹은 ‘글쎄’ 하는 부정어를 내뱉는 버릇이 있었다. 명지는 감성보다는 이성이 발달한 인간 특유의 시니컬한 차분함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람이었다. 내면으로는 팔색조의 다양한 감정을 분출하지만, 겉으로는 불필요한 감정들을 싹 쳐 내고 단색조로만 표현하는.

일찌감치 행정 고시에 패스하고 탄탄한 출셋길로 막 접어든 저 멀끔하게 생긴 서울 남자한테 박 기사 아저씨가 대단한 것처럼 치켜세우는 4년제가 무슨 대수겠는가.

명지는 자신을 너무나 그럴싸하단 듯이 포장한 인문계와 4년제란 두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 떠다녀서 오른손으로 한쪽 목을 긁으며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김호는 택시 기사가 방금 자신의 파트너로 붙여 준 명지 쪽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어서 그런지 각진 곳 하나 없는 계란형의 얼굴이 얼핏 도회적으로 보였다. 비록 매우 헐렁하고 낡아 보이는 멜빵바지를 입은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콧날은 오뚝하지만 고집 있어 보이고, 소녀처럼 귀여운 느낌을 살짝 주는 땡그란 두 눈에는 세상과 쉽게 타협할 것 같지 않은 강인함이 서려 있었다.

김호는 자신을 여기로 보낸 하도식 장관이 다시 한번 원망스러웠다. 전통주를 빚는 술의 명가에 오긴 왔는데 고집스러워 보이는 70대 노인과 며느리로 보이는 아주머니, 그리고 만만치 않아 보이는 손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오지랖이 구만리는 넘어 보이는 웬 택시 기사까지. 농림부 행정 사무관인 자신이 이들과 손을 잡고 과연 <전통주 축제 활성화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은 제가 술 빚는 과정을 좀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요? 전통주 축제에 대한 기획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제가 술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서요. 먼저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디 젊은이, 내가 그짝을 뭐라구 불러야 쓸까. 사무관이라구 불러야 허는 게 기지?”

김호는 최 노인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그냥 김 담당이라고 불러 주세요.”

합격 초반에는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부러움 섞인 축하 전화와 대단한 인물이 나왔다며 기뻐하는 집안 어른들의 반응에 흠뻑 취해서 행시 패스가 개인의 대단한 성취인 것처럼 마냥 들떠 있었던 시기가 그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김호는 자신의 신분이 고시생에서 사무관으로 일순간에 달라졌다고 해서 일상적인 삶 한가운데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갑자기 윗단계의 어느 지점으로 점프시켜 놓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혼자서 막연하게 기대했던 공직 사회의 이미지들은 수습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여러 이미지로 변주되어 그에게 다가왔다. 부푼 꿈을 안고 갓 들어간 조직에서 사회 초년생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씩은 겪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어그러진 균열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위계질서에 의해 생성되는 대부분의 업무 지시에 대해 절대 토를 달 수 없는 공직 사회의 경직성이 예민한 그를 자꾸 구석으로 몰았다. 정부 정책으로 포장되는 여러 가지 허울 좋은 사업들에 대한 약간의 회의와 조직에 대한 냉소가 섬세한 그의 감수성 사이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는 사무관이라고 불리는 것에 꽤나 의미를 두며 목에 힘을 주려 하는 자신의 동기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뭐시여. 김 담당은 또 뭔겨. 그른 우슨 호칭두 있는규? 허허허…….”

박 기사가 다시 참견하기 시작했다.

“요새는 담당이나 팀장이라고 많이들 부릅니다. 그냥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그랴? 그르면 김 팀장이라구 불러야 허는 게 맞을 성싶은디. 암턴 김 팀장이 술에 대해 옆에서 슬쩍슬쩍 곁눈질루다 지켜보믄서 공부를 허겠다구 접근허면 이건 좀 많이 힘들겨. 나는 그려. 솔직헌 얘기루다가 김 팀장이 우리 집 술을 개지구 뭔 지역 축제를 맨든다 했을 띠 시상 일이 워찌 그래 쉽게 풀리간디. 시상이 워떤 시상인디.”

최 노인은 길이 잘 든 대청마루의 움푹하게 팬 부분을 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냥 술을 함 지대로 맹글어 봐야지 허는 맘으루다가 덤벼야 혀. 소곡주를 맹글어 보지두 않구선 무신 홍보를 허구, 축제를 허겄어. 세상 이치가 그렇지는 않어. 내 맴속으루다 이것이 쫌이라두 션찮아 보이구, 이게 참말로 가치가 있는 그런 귀한 술이 진짜루 긴지 안 긴지 막 헷깔리구, 기냥 위에서 시키니까 억지루다 내가 이것을 헌다 허면 절대 좋은 뭐시기가 암것두 나올 수가 없는겨.”

나무 바닥을 바라보던 최 노인의 시선이 김호에게로 이동했다.

“이 소곡주가 진짜루 이쁘고 좋아야 혀. 막 이것에 빠져들어서 내가 쬠이라두 미치야 혀. 글지 않구서는 절대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겨. 내가 감동허지두 않는디 뭔 수루다가 남을 감동시킬 수가 있간디.”

박 기사는 최 노인의 말에 ‘옳지, 옳지’ 추임새 넣듯 자신의 무릎을 쳐 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호는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최 노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최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아무 의욕도 없이 억지로 이곳에 온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들켜 버린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김호는 느릿느릿 말을 건네는 최 노인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채 숨을 죽였다. 최 노인은 자신의 물러진 눈가를 두어 번 문지르며 김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니께 내일부텀 우리 집으루다 출근혀서 나헌티 술을 함 배와 봐.”

최 노인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김호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몸을 맡겨 버려야겠다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이 양조장에서 술을 배워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명지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니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조소가 옅게나마 담긴 것 같아서 김호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근디 묵을 데는 아즉 안 정한 거쥬? 양조장으루다 출근을 헐라믄 가차운 데서 묵어야 할 거인디. 워치케 허는 게 맞을랑가유, 아버님.”

부여댁이 마치 해결해 달란 눈빛으로 최 노인을 바라봤다.

“이…… 암만 묵을 곳이 중허제. 우리 집서 묵으면 참말로 좋은디 내 아들놈을 몇 해 전에 병으로 보내 불고 집안에 장정 같은 남자가 어디 있간디. 명지 쟈 밑으루다 남동생이 하나 있긴 허는디. 아즉 고등핵교 댕겨서 장정이라구 헐 수도 없고. 나 가턴 노인과 손주들만 있는 집서 젊은 청년을 묵으라 허는 게 남덜이 보믄 숭할 수도 있으니께.”

최 노인은 박 기사 쪽을 흘깃 바라봤다.

“내 맴대루 정허는 거 같어서 쬠 미안허긴 한디. 그랴두 우리 마을에 외지인이 오믄 부녀회장 집에서 묵는 거를 우리는 젤루 큰 대접으루 치니께 그짝에 짐을 풀면 이짝으루다 왕래도 가찹고 피차간에 좋긴 좋을 틴디.”

“아닙니다. 어르신. 저는 시내 쪽에 있는 모텔에 머물면 됩니다. 그 편이 더 좋구요.”

“이…… 그건 김 팀장이 양조장 일을 잘 몰라서 허는 말이유. 새벽겉이 이짝으루다 매일매일 나와야 쓰는디 시내 쪽에서 워치케 댕길라구 혀. 이른 시간에 버스가 으데서 스간? 천상 으르신 말씀대루 우리 집서 묵는 게 젤루 나을규. 언네 걸음으루다 쳐두 예서 몇 걸음이면 우리 집이 금방이니께. 우리 마누라헌티는 빈방을 치아 놓으라구 내가 전화를 넣을규. 명지가 이 양반을 우리 집으루다 좀 안내를 혀 주면 쓰겄다. 나는 시방 일하러 시내루다 나가야 쓰니께.”

김호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에겐 발언권도 결정권도 없어 보였다, 이 술 빚는 마을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