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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이야기 1화

제1장. 봄의 신부 (1)


#1

왕국력 156년 4월 초하룻날, 결혼식이 있었다. 루에르그의 공작, 시그룬 폰 슈바르츠발트와 아르플뢰르 후작의 셋째 아들 에티엔 드 셰니에의 결혼식이었다. 오랫동안 반목하던 두 집안의 역사적인 결합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이 루에르그 성의 마구간이 모자랄 만큼 몰려들었다.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봄날, 한때 시그룬을 ‘빌어처먹을 년’이라고 일컬었던 아르플뢰르 후작은 점잖게 아들의 손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마찬가지로 아르플뢰르 후작을 ‘발정 난 똥개’라고 부르곤 했던 시그룬은 언제나처럼 딱딱한 태도로 그 손을 넘겨받았다. 그 순간 커다란 박수갈채가 객석에서 쏟아졌다. 가장 열렬한 태도로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이 결혼식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한 국왕, 페로넬 2세였다.

20년 전, 국왕 필리프 4세가 사망하고 나서 누가 그 뒤를 잇는지를 두고 슈바르츠발트 가문과 셰니에 가문은 대립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즉위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복잡하게 얽히고 뒤엉킨 친족 관계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자신이 현존하는 귀족들 중 가장 국왕의 핏줄에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는 두 가문 다 그리 가깝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진흙탕 싸움은 필리프 4세의 혼외 자식이었던 페로넬 1세를 교황이 법적으로 인정하고 왕위에 올림으로써 끝났지만 페로넬 1세가 죽고 그녀의 딸이 즉위한 이후에도 가문끼리의 반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갈등을 봉합할 이 결혼식을 성사시키기 위해 페로넬 2세는 수없이 루에르그와 아르플뢰르, 양쪽을 오가야만 했다.

“이제 국왕은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겠군.”

갑작스레 툭 공중에 나타난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슈바르츠발트 가문의 기사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 폰 슈바르츠발트가 옆에 서 있었다. 빈정거림을 언제 내뱉었냐는 듯 시원시원하고 잘생긴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베아트리스는 이건 어디까지나 남들 앞에서 짓는 대외용 표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좋은 일 아닌가요? 어쨌든 당분간은 평온할 테고……. 무엇보다, 영주님이 결정하신 일이잖습니까. 클로드 도련님도 영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아시잖아요.”

베아트리스의 말은 성 안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상을 요약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님이 잘못된 일을 할 리는 없다. 저 교활한 승냥이 떼 같은 셰니에 가문 사람이 여기 오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주님이 결정한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셨겠지. 하지만 클로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는 국왕 체면을 세워 준 거야. 두 가문이 평온해지면 좋은 건 오로지 국왕밖에 없어. 지금 셰니에 놈들이 우리 영지에 침범해서 마을을 약탈한 일도, 예전에 포로를 돌려주면서 받기로 했는데도 아직도 못 받고 있는 몸값 건도 모두 없던 일처럼 유야무야 넘어가게 생겼지.”

그러면서 클로드는 아르플뢰르 후작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는 큼직한 콧수염을 기른 동그란 얼굴 가득 미소를 빙글빙글 짓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그렇긴 하지만, 하고 얼굴을 긁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쨌든 오늘은 좋은 날인데. 적당히 기분 좋게 있으면 안 되겠냐는 말은 마음속에만 담아 두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시선을 돌리다가 한 남자가 자기 쪽을 향해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하, 누굴 보고 있는 건지 알겠다. 베아트리스는 클로드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보세요, 클로드 도련님. 에니스 드 비엔이에요. 아무래도 오늘 이따가 춤을 신청할 모양이네요.”

“관심 없어.”

빠르고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굴하지 않았다.

“에니스면 도련님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클로드 도련님은 우성 알파, 에니스는 우성 오메가, 거기다 에니스는 미인에다 집안이 좋은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베아트리스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가며 에니스의 장점을 열거했지만 클로드는 시선을 돌린 채 차갑게 대꾸했다.

“비엔 집안의 사람과 결혼해 봐. 슈피겔 공작이 거품을 물고 반대할걸. 오늘도 여기 파티에 둘 다 왔지? 내가 에니스와 손이라도 잡고 스텝이라도 한번 밟는 그 순간 슈피겔 공작이 자기 딸하고 결혼하자고 끼어들 거다. 공작 딸은 고작 다섯 살이지만 상관없을걸. 어찌 됐든 비엔 가문이 잘되는 꼴은 못 보는 인간이니까.”

베아트리스는 쳇, 하고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맨날 그런 식으로 따지니까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오늘 에니스는 분명 클로드 도련님께 춤을 신청할 거라고요. 그것만은 확실해요. 아니지, 에니스만이 아니겠죠. 도련님하고 춤 한 번만이라도 춰 보고 싶어 안달 난 오메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아무리 도련님이 그런 거에 관심 없다 해도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걸요.”

“네 마창 실력이 그대로인 이유를 알겠군. 기사란 놈이 그런 데만 신경 쓰니까 그런 거 아냐.”

클로드는 짧은 핀잔으로 베아트리스의 입을 막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흰 꽃잎이 섞인 바람이 그들 사이로 불어왔다. 투구를 쓰는 데 적합하도록 짧게 다듬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정말이지 날씨만큼은 지나치게 좋았다.

결혼식이 끝나자 연회가 이어졌다. 악사들은 즐겁게 최근 유행하는 흥겨운 춤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쌍쌍이 서서 빙글빙글 손을 마주 잡고 돌며 스텝을 밟았다. 오늘 막 결혼한 신랑 신부도 연회장 중앙에서 가볍게 춤을 추었다.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허리가 꼿꼿한 시그룬은 언제나처럼 재미라고는 모르는 엄격한 표정으로 상대 에티엔을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는 베아트리스가 일찍이 경고한 대로 자신에게 춤을 신청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에니스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찌감치 도망쳤을 텐데,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러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클로드를 노리고 있는 이는 에니스 한 명이 아니었다. 클로드는 마치 사자 무리에 둘러싸인 사슴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새삼 생각했다. 이제 곧 음악이 끝나고 잠깐 파트너를 바꾸는 구간이었다. 함께 온 자기 아버지와 춤을 추고 있던 에니스가 점점 더 클로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이 멎었다. 에니스의 걸음이 자신을 똑바로 향했다. 망했군. 클로드는 재빠르게 연회장 안을 훑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함께 춤을 춰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오메가가…….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괜찮을까, 하고 클로드가 망설이는 사이 에니스가 어느새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무어라 말할 듯이 달싹이는 입술이 보이는 거리였다. 한번 춤을 신청하면 결코 거절할 수 없다. 함부로 귀족 오메가의 춤을 거절하는 것만큼 크나큰 모욕은 없다. 신청하기 전에, 다른 누구와 춤을 춰야만 한다……! 클로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클로드가 짧게 속삭였다. 상대의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에니스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나서야 클로드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상대는 바로 그의 새로운 아버지, 에티엔 드 셰니에였다. 악사가 류트를 다시 뜯기 시작했다. 음악을 따라 발걸음이 움직였다. 상대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허둥지둥 클로드에게 스텝을 맞췄다.

에티엔은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닮아 전나무처럼 크다는 평을 듣는 클로드에겐 아담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키였다. 체격도 얇고 조그마해서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동그랗게 내려다보이는 갈색 머리는 결이 좋아 보였다. 정략결혼이긴 해도 어쨌든 이제 가족이니 인사도 없이 춤만 추는 것도 그렇다. 클로드는 잠깐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하셨겠습니다.”

에티엔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클로드는 자신이 오늘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시그룬과 아르플뢰르 후작 사이의 기류를 살피느라 정작 그 결혼 당사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턱선은 갸름하고, 얼굴은 희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의 모양새가 단정했다. 거기다 크고 동그란 갈색 눈은 생기 있는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맑고, 순하다.

뒤이어 꺼내려던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클로드는 당황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에티엔은 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 편하게 마차만 타고 왔는걸요.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죠. 덕분에 그렇게 피곤하진 않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아직도 소년티가 남아 있는, 앳되다고도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전해 듣기로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고 했다. 클로드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나이였다. 클로드는 그렇군요, 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무뚝뚝한 대답을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음악의 박자가 빨라졌다. 팔짱을 끼고 돌았다가, 자리를 서로 바꾸었다가 다시 복잡하게 발이 엉키듯 스텝을 밟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부분이었다.

어깨가 스치고, 가슴이 맞닿을 듯 맞닿지 않는다. 몸이 성큼 품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클로드는 당혹스러워졌다.

향이 난다.

맑고 청량하고, 동시에 희미한 달콤함이 어려 있는 향기. 난생처음 맡아 보는 종류의 향이었다. 오메가들이 흔히 페로몬인 양 꾸미려 뿌리는 사향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가볍고 투명한데 향긋하다. 지금껏 맡아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무엇으로 비유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몸이 교차하고, 자리를 바꾸며 에티엔의 몸이 멀어졌다. 향기 또한 성큼 멀어졌다. 그제야 클로드는 자신이 무얼 맡았는지 알아차렸다. 페로몬이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결혼할 때면 결혼식 날짜를 오메가의 발정기가 곧 다가올 때를 골라잡는다. 그래야 각인이 빨리 되고 임신 역시 수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에티엔은 열성 오메가라 들었는데, 발정기가 다가와서인지 그래도 나름 페로몬이 나오나 보다. 클로드는 스스로에게 애써 그렇게 납득시켰다.

춤이 끝나자마자 시녀가 에티엔에게 와서 무어라 속삭였다. 이제 침실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이만 가 봐야겠네요.”

에티엔은 클로드의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즐거웠어요.”

그러고는 그대로 시녀를 따라 걸어갔다. 클로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손안에 그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클로드는 벽에 기댄 채 포도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클로드를 호시탐탐 노리던 승냥이 떼도 이제는 포기한 듯 다른 상대를 골라 춤을 추고 있었다. 눈부신 촛불 빛에 잔의 테두리가 금빛으로 어룽졌다. 잔을 몇 번 흔들자 진한 포도주 향이 피어올랐다. 마치, 아까 그때 품 안에서 피어오르던 그 향기처럼.

“연회가 지루하신가 봅니다.”

딱딱한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클로드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르빈 경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마르빈 경은 언제나처럼 엄숙함 그 자체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편자처럼 입꼬리가 내려간 채 꾹 다물린 입가와 단단하고 네모난 턱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미소라는 걸 머금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무뚝뚝하고 차갑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신의 주인인 영주 시그룬과 닮아 있어 이따금 사람들은 개와 그 주인은 닮는다는 오래된 속설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클로드도 마찬가지였으나 그 속설을 믿는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만일 그의 어머니가 죽고 마르빈 경의 주인이 클로드 자신이 된다면, 그렇다면 자신도 저렇게 무뚝뚝해질까? 혹은 그 반대로 마르빈 경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클로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고 더는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더랬다.

“저도 즐길 때는 즐깁니다.”

마르빈 경의 굵고 낮은, 그러나 모든 재미가 이 세상에서 멸종해 버리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와 내용의 부조화에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마르빈 경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사제 뺨치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보니 에니스 드 비엔을 피하시더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화 주제에 클로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척, 뺨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귀찮아지니까요. 경도 알지 않습니까?”

“알죠.”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답답한 침묵 사이로 경쾌한 음악이 끼어들었다. 클로드는 마르빈 경과 나란히 서서 한참 동안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빙글빙글 돌았다가, 팔짱을 꼈다가, 발을 굴렀다가…… 어느 순간, 마르빈 경이 입을 열었다.

“이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클로드는 곁눈질로 마르빈 경의 안색을 살폈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에는 어떤 의도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무뚝뚝하고 엄숙한 노인으로만 보였지만 클로드는 그가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부하이자 기수이며, 루에르그의 이름 높은 강철 기병을 이끄는 이였다. 결국 클로드는 떠보거나 말을 빙빙 돌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별수 없죠. 어차피 선택지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국왕이 저렇게나 동동거리며 매달리는데 어쩌겠습니까. 그 이상 무시했다간 불충의 증거가 되어 트집을 잡힐 판이었죠.”

“애초에 왜 국왕이 셰니에와 슈바르츠발트의 화합을 꾀하는지, 그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클로드는 대충 이제 마르빈 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짧게 반문했다.

“역시…… 아셀바르드 때문입니까?”

“아시는군요.”

마르빈 경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애초에 국왕은 두 가문 사이의 반목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국왕 자리를 넘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새삼스레 이제 와서 친하게 지내라 윽박지르겠습니까.”

“아셀바르드의 아서가 침략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3년 전, 아서라는 젊고 야심찬 알파가 아셀바르드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사자처럼 사납고 호전적이며 여우처럼 교활하고 이리처럼 잔인하다고들 했다. 고작 26세의 나이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진압하고 왕 자리를 스스로 탈취한 자니 그런 평가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자가 왕이 된 이후로 페로넬 2세에게 불면증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처럼 귀족들 사이를 떠돌았다. 바로 옆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녀의 왕국이 아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리라는 생각에 시달린다고 했다.

“단순히 침략만이면 문제가 아닐 테죠. 문제는 침략의 방법입니다. 침략자가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은 바로 내분에 휩싸인 나라죠. 자기들끼리 서로 증오해서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적이라고 해도 손을 잡을 그런 이들이 가득하다면, 침략이야 쉬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이야기하시는 거죠?”

클로드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말 그대로였다. 클로드는 이미 무슨 상황인지 다 알고 있었다. 외부의 침략자 때문에 강제로라도 반목하던 귀족 가문을 화해시키기로 결심한 국왕. 그리고 거기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 자신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이야기하려는 걸까.

“이 결혼은 일종의 자물쇠 같은 겁니다.”

마르빈 경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묵직한 쇳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셰니에와 슈바르츠발트, 그리고 국왕을 묶고 있는 자물쇠죠. 이 결혼이 성립하는 동안 두 귀족 중 어느 누구도 아서와 손잡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맹세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결혼이 깨진다면…….”

“우리도 셰니에도, 국왕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겠죠.”

“배신이 아닙니다.”

마르빈 경이 고개를 내저으며 클로드의 말을 정정했다.

“우린 선택하는 겁니다. 어느 편에 설지를요. 지금껏 그래 왔듯이요.”

클로드는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언이자, 경고였다. 이 영지의 후계자에게 보내는, 앞으로 그들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한. 클로드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된 그 오메가를 떠올렸다. 맑고 순한 눈을 크게 뜨고 있던, 그저 도구에 불과한 누군가를.



***



에티엔은 시녀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곳, 루에르그 성은 그가 본래 살던 곳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나무와 도자기로 만든 섬세한 장식이 이곳저곳을 꾸미고 있는 아르플뢰르 성과는 달리, 대부분이 직선으로 날카롭게 각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석회를 발라 전체적으로 희고 깨끗한 아르플뢰르 성과는 정반대로 여긴 어둡고 거친 질감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울리는 소리도 어쩐지 낮고 둔탁하게 들렸다.

성은 여러 번 증축을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좁고 가파른 계단과 불쑥불쑥 나타나는 방인지 통로인지 모를 공간, 탑과 탑을 연결하는 성벽 위 길을 한참 동안 걸었다. 연회의 시끌벅적한 기운은 어느샌가 희미해지고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시그룬의 침실은 성의 가장 안쪽 꼭대기에 있었다.

시녀가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짧은 응답이 들려왔다.

“들어와.”

결혼식 내내 딱 한 번 들었던-결혼식을 주관한 사제의 말에 ‘네’라고 대답한 그 한마디- 바로 그 목소리였다. 시녀는 말없이 문을 열고는 물러섰다. 그 뒤로는 이제 에티엔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시그룬은 벽난로 옆에 서 있었다. 널찍한 침실 한 켠에는 큼지막한 침대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모피로 만든 깔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을 장식하고 있는 큼지막한 방패와 교차되어 걸린 창과 검이 벌건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용맹과 전투력으로 이름 높은 ‘강철 기병’의 고장답다는 생각이 문득 에티엔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그룬은 술잔을 들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카락, 훤칠한 키와 마르고 균형 잡힌 몸이 꼭 흰 눈이 쌓인 전나무 같았다. 그녀의 날카롭고 주름진 눈매가 에티엔을 향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손을 잡고서 결혼 맹세를 했지만, 심지어 연회에서 춤도 한번 추었지만, 마치 에티엔을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예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그룬은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제부터 여기 살게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