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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이야기 2화

제1장. 봄의 신부 (2)


환영 인사라기엔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다. 하지만 시그룬의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녀가 다정하고 상냥한 말을 내뱉거나 혹은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 주거나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아들, 클로드와는 전혀 다르게.

에티엔은 조금 전 연회장에서 만난 청년을 떠올렸다. 자기 어머니처럼 키가 크고 균형 잡힌 몸을 가졌지만 인상은 정반대였다. 잘생긴 얼굴에 생기 넘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들이 계속 그 청년만 주시하고 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이것저것 말 돌릴 것 없이,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그게 피차 편할 테니까.”

시그룬은 그렇게 말하며 가죽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 에티엔의 시선이 저절로 시그룬의 손을 따라갔다. 그녀는 주머니를 풀어 헤치더니 엄지손톱만 한 녹색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약초를 으깨어 뭉쳐 만든, 일종의 환약이었다. 에티엔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건 오메가의 발정기를 가라앉히는 약이다. 무척 희귀한 약초로 만든 거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마 이런 건 처음 봤겠지.”

말 그대로였다. 에티엔은 주춤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룬이 에티엔에게 약을 건넸다. 에티엔은 얼떨결에 받아들이고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걸 먹어라.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주기를 맞춰 왔을 테니.”

에티엔의 눈이 커졌다가, 잠시 후 아, 하고 소리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해했다. 그는 입술을 조용히 깨물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시그룬은 그런 에티엔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나에겐 장성한 후계자가 이미 있다.”

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여기서 괜히 새로 난처한 일을 만들어 후계자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특히나, 셰니에가 관련될 일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아.”

차갑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오늘 결혼한 배우자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에티엔은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은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낫겠지.”

그러므로 나는 너와 동침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유는 명확하고, 말하는 바는 단순명료하다. 에티엔은 모든 것을 납득했다. 납득했으나…… 이상하게도 눈 주변이 뜨거워, 에티엔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표정을 고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른 다음 에티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그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 결혼한 그의 배우자를 향해, 그의 알파를 향해. 그 눈을 들여다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해했습니다.”

시그룬은 잠시 에티엔의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굳은 입매에 희미하게 흡족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오늘은 피곤할 테니 다른 곳에서 자도록 해라. 저기, 저 문을 통해 나가면 내…… 예전 아내가 쓰던 방이 있다. 그곳에서 자면 될 거다.”

시그룬이 가리킨 곳을 향해 에티엔은 고개를 돌렸다. 자그마한 나무문이 보였다. 영주의 침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양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저건 본래 저곳에 달려 있던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퍼뜩 그의 머리를 스쳤다. 에티엔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그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시그룬이 에티엔을 불렀다.

“가져가라.”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의 가죽 주머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티엔은 말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방 안에는 해묵은 냉기가 감돌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에도 마치 방금 이 방의 주인이 나간 것처럼 침대도 물건도 모두 깨끗하게 제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반쯤 완성된 자수용 틀과 실마저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이었을, 이 성의 본래 안주인이었던 시그룬의 전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조금 전에도 여기 있었던 것처럼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티엔은 시그룬의 눈을 떠올렸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그저 차갑게 명령을 내리던 그 눈. 사무적이던 목소리. 왜 그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에티엔은 가지런하게 정리된 침구 위로 몸을 던졌다. 폭신한 깃털 이불이 에티엔의 몸을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피부에 와 닿는 차갑고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느끼며 에티엔은 눈을 감았다. 길고, 피곤한 하루였다.



***



연병장은 오랜만에 소란스러웠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몇 날 며칠 동안 피로연이 이어진 탓이었다. 그동안 기사들은 당연하게도 훈련은커녕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내 한자리에 붙박이로 서서 장식품처럼 서 있어야만 했으므로 평소보다 소란함이 좀 더 지나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덤벼 봐, 이 닭 부랄 같은 놈아! 그것도 검이라고 들고 왔냐? 이쑤시개로 쓰면 딱 알맞겠네!”

“개새끼야, 네 배때지가 이 이쑤시개로 쑤셔져도 그딴 소리가 나오나 볼까?”

평소보다 조금 더 과격한 언사-라고 해도 평소에도 그다지 고운 말 바른 말은 쓰지 않는 자들이었지만-가 오가는 연병장에서 클로드는 헤르미네와 게렌의 말다툼을 지켜보면서도 말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아니 저렇게 퍼붓는 악담으로 서로의 대한 애정을 증명한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돈의 팔촌까지 들먹이면서 상대의 인성을 시험하는 말을 내뱉던 둘은 곧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검을 들어 마침내 대련을 시작했다. 클로드는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몸을 풀 수 있게 되어 들뜬 모양인지 기사들은 여기저기서 헤르미네와 게렌 못지않게 시끄럽게 대련을 하고 있었다. 칼과 칼,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 웃음소리가 마구 뒤섞여 널찍한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식 내내 근사한 장식품이 되어야만 했던 기사들 이야기고, 클로드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물론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결혼식에 초대된 귀족들은 다들 자기네 영지에서는 왕과 같이, 아니 왕보다 더 떵떵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잘난 듯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대접하고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문의 가장 연장자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 연장자가 결혼한 당사자였으므로 졸지에 아들인 클로드가 그 모든 일을 해내야만 했다.

클로드는 어찌 됐든 간에 비엔 백작과 슈피겔 공작이 서로를 죽이지 않고 각자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며 연병장 구석 그늘진 자리에서 피곤한 눈을 감았다.

겨울의 한기가 온전히 물러간 봄날, 오후의 햇살은 딱 좋을 정도로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작고 여린 새순이 투명한 연두색으로 빛나고, 바닥에는 희고 동그란 꽃잎이 점점이 무늬를 그리며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가 클로드 곁으로 다가왔다.

“베아트리스.”

클로드가 이름을 부르자 베아트리스는 엷은 미소를 띠면서 옆에 앉았다.

“다들 시끄럽네요, 정말로.”

밝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마냥 가볍고 까불거리는 몸짓으로 그녀는 클로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나 밝고 농담을 즐겨 하는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마르빈 경과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았다. 딱 하나, 닮은 점이라고 한다면 둘 다 알파라는 것 정도일까.

“뭐, 다들 오랜만에 몸을 푸는 거니까. 이 정도는 봐줘야지. 솔직히 요즘 일도 없고 심심했잖아. 어디 도적이라도 출몰하면 한바탕 두들기러 가 볼 텐데 이제 곧 농번기니 그럴 리도 없고.”

“그리고 오늘은 영주님이 연습을 보러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베아트리스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시그룬의 앞에서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다들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울 테지만, 지금이야 영주님도 뭣도 없으니 시정잡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웃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클로드는 피식 웃으면서 동의했다.

“그렇지. 그리고 마르빈 경도 없고.”

“두 분 다 결혼식으로 바쁘셨으니까요. 그리고 도련님도.”

“나야 뭐 한 거 있나. 그런데, 뭘 물어보려는 거야?”

베아트리스가 하핫, 하고 멋쩍은 듯이 웃었다. 클로드는 베아트리스가 단순히 한담이나 나누려고 오진 않았다는 걸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본론을 꺼냈다.

“저기, 그게. 궁금해서요. 아니, 다들 궁금해해요. 셰니에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어땠어요?”

클로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게 다였다. 어차피 다들 물어보리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으니 질문 자체가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클로드는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댓바람부터 북적거리며 시끄러운 소란을 만들어 내던 손님들도 모두 떠나고, 오랜만에 고요한 아침이었다. 오로지 새 울음소리만이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시간, 클로드는 햇살을 피해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이 한참 지난 데다, 이미 잠은 깬 지 오래다. 평소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벼운 몸 풀기 겸 검술 훈련을 한 다음 씻고 방을 나섰을 테다. 하지만 오늘 클로드는 조금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면 아침 식사를 하러 가야 하고, 그럼 ‘부모님’을 보아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클로드는 좀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자기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남자 오메가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머니는 결혼을 한 거야……라고 투덜거렸다. 물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자기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침대에 아직 누워 있을 때는 이 정도 불평은 해도 될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그 에티엔과 결혼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클로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지금 어찌 됐든 간에 루에르그의 영주는 시그룬이다. 클로드는 어디까지나 후계자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없다. 단순히 나이 차가 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독신인 영주를 내버려 두고 영주 아들과 결혼시킨다는 건 셰니에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다.

그들은 이 결혼, 아니 거래를 통해 루에르그를 통제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하게도 에티엔은 시그룬과 결혼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클로드는 베갯잇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 사람은 결코 이 모든 것을 원치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 모든 거래와 이해득실과 수 싸움에서, 그저 이리저리 밀치며 던져지고 건네지는 그 사람. 조금도 이 모든 난장판에 어울리지 않는, 맑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러 온 시종이었다. 클로드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나갈 테니까 들어오지 마!”

다급한 목소리에 시종이 멈추는 기색이 느껴졌다. 클로드는 뺨을 두 손으로 몇 번 때렸다. 정신 차려야지. 어찌 됐든 간에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고 이제 그는 적응해야만 한다.

기다란 식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클로드는 당황해서 어라, 하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아침이란 간단하게 먹는 식사고, 반드시 같이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제멋대로 앉았다 제멋대로 떠나도 상관이 없는 자리긴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시그룬은 언제나 아침에 일찍 와 있곤 했었다. 클로드는 식탁에 앉으면서 옆에 서 있던 집사장 미레트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아지셨나? 최근 약을 바꿔 많이 좋아지셨다 들었는데 혹시…….”

집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지?”

클로드가 재차 묻자 성내의 모든 살림을 총괄하는 집사장 미레트 부인의 얼굴에 살짝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도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지워 낸 말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본인 아침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영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련님과…….”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에티엔 님은, 알아서 식사하시라고…….”

클로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어머니의 태도는 놀라울 만큼 명확했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결혼했을 뿐이니 그 이상의 어떤 감정적, 신체적 접촉도 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건,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미리 알아서 잘 알고 행동하라는.

클로드는 식탁에 앉았지만 이미 식욕은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건 명백하게 모욕이다. 에티엔이 화가 나서 아르플뢰르로 돌아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클로드는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클로드의 어깨를 건드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 클로드가 이미 한 번 들은 적이 있던 그 목소리였다. 클로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에티엔이 식탁 건너편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아니면 아침 햇살 아래이기 때문일까.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말갛고, 조금은 부스스했다. 살짝 뻗친 뒷머리가 특히나 그랬다. 스무 살이 아니라 열여섯이라고 해도 믿겠다.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티엔을 바라보았다. 큼지막하고 동그란, 연한 갈색빛 눈동자가 클로드의 시선을 받았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빛.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까?

“그…… 네.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납니다.”

클로드는 헛기침을 하며 에티엔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여기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덜 모욕적이고 덜 공격적으로 들릴지를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그냥 거짓말을 해? 하지만 결국 나중에 들통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클로드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다음번엔 굳이 여기까지 안 나오셔도 돼요.”

에티엔이 조용하게 말했다. 클로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티엔은 언제나처럼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조금은 난처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차피 영주님도 아침 식사는 이제 방에서 들겠다 하셨잖아요. 저도 내일부터는 그럴까 싶어서요. 오늘은 혹시 클로드…… 님이 놀라실까 봐.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누가 누굴 위로하고 사정을 설명하는 건지.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클로드는 살짝 놀라 입을 벌렸다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뇨.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방금 이야기를 들어서…… 아니,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모욕당했다는 거잖아요. 클로드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뛰쳐나올 뻔한 그 말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어질 다른 말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저기, 그, 이제, 뭐냐, 하여튼, 가족인데, 그냥 클로드라고 부르세요. 님 같은 거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보다도 나이도 많고…….”

“저기, 일단 제 아버지가 되었다는 건 이해하고 있으신 거죠? 베타들 이야기 들어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보면 야, 너, 이 자식, 하고 부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제가 이런 건 잘 몰라요. 어머니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잘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자식을 둔다는 건 그런 거죠.”

클로드는 애써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티엔이 가볍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처음으로 그가 소리 내어서 웃는 것을 들었다’고 클로드는 문득 생각했다.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구슬처럼, 마치 그때 품 안에서 피어오르던 그 향기처럼.

“그냥 클로드, 라고 이름을 불러도 됩니다.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하고 좋잖아요.”

“그럼 저한테도 그냥 이름을 불러 주세요. 저도 그게 좋아요.”

클로드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평민들도 그러진 않을걸요. 거기다 어머니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경을 칠 겁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성격에 맞지도 않는 농담을 지껄이다 보니 그만 너무 호들갑스럽게 말해 버렸다. 하지만 에티엔은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의 얼굴에 아주 살짝,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클로드는 아차, 하고 깨달았다. 아마 어머니는 지금 이 앞에 앉아 있는 오메가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결혼한 상태이기만 하다면 그가 어떤 식으로 불리든 말든,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클로드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일단 음식을 먹자고 말했다. 에티엔도 수긍했고 식사는 시작되었다. 어색한 고요 속에서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멍하니 울렸다. 그리고 클로드는 지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손을 움직여서 뭔가 먹고 있긴 한데, 제대로 씹어 삼키는지 맛은 어떻게 되는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대신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앞에 보이는 저 살짝 숙여서 동그랗게 보이는 갈색 머리와, 그 아래에서 그가 짓고 있을 표정. 방금 전에 똑똑히 보았던, 아주 잠깐이었지만 스쳐 지나가던 쓸쓸한 눈빛. 아니, 어쩌면 서글픔과 체념.

이제 막 결혼한 사람에겐 가장 어울리지 않던 표정.

결국 클로드는 못 참고 식사하던 손을 내려놓았다.

“저, 그럼 말이죠.”

“네?”

갑작스러운 말에 에티엔이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종이 식탁 주위에 서서 호시탐탐 시중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클로드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외쳤다.

“이봐, 우유병에 파리가 빠져 있는데? 당장 새걸로 바꿔 오지 그래.”

“이거 방금 새로 가져온 건데 파리가 빠져 있다고요?”

시종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클로드는 막무가내였다.

“진짜야, 내가 방금 이 녀석이 풍덩 하고 여기 뛰어드는 걸 봤다고.”

파리가 눈이 안 달린 것도 아니고 멀쩡한 우유에 왜 미쳤다고 뛰어든다는 건지. 시종은 자기도 모르게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숙련된 시종답게 가타부타 대꾸하는 대신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 시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클로드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는 속닥거렸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서로 이름을 부르죠.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고,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