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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이야기 3화
제1장. 봄의 신부 (3)
에티엔의 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더 잔뜩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어리벙벙한 기색으로 몇 번이고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하지만 곧 서서히 눈에서부터 밝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온기가 차가운 몸 위로 번져 나가는 것처럼, 밝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에티엔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우리 사실 나이도 비슷하다니까 하는 말인데.”
클로드가 속닥거렸다. 에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머리 뒤에 뻗친 갈색 머리카락 한 가닥도 함께 기우뚱 흔들렸다. 클로드는 그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클로드는 에티엔에게 다정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절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심심하거나 성의 길을 모르겠다거나 하면 얼마든지 불러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길을 잃고 헤매서 하인들에게 구조당하는 것보다야 그게 낫잖아요?”
에티엔의 갈색 눈동자에 놀라움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가, 곧 웃음기가 환하게 퍼져 나갔다. 에티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맑고 앳된 웃음소리로, 그는 짧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그럴게요.”
클로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티엔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불쑥 내뱉었다.
“친절하시네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하고 조용한,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클로드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에티엔은 그 동그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꼭 버릇처럼, 내내 띠고 있는 연하고 희미한 미소였다. 에티엔은 곧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데요?”
베아트리스가 재촉하며 되물었다. 클로드는 시선을 위로 던졌다. 성의 북쪽 탑 꼭대기에 사자가 그려진 가문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아래로 아치형으로 뚫린 창문이 보였다. 저 너머에는 아마도, 한 소년이 거닐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소년이.
클로드는 베아트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면 그만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길래? 역시 셰니에라 싫은 거야?”
“그건…….”
베아트리스는 잠시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뤘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포기한 듯이 두 손을 들었다.
“다들 당연히 싫어하죠. 셰니에 가문 사람이잖아요. 아무리 영주님의 결정이라지만, 모두 이유가 있다지만, 그렇게 싸워 댔던 셰니에 가문 사람인데 간단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기, 베른은 말은 안 해도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을걸요.”
베아트리스는 연병장 구석을 가리켰다. 한 남자가 유달리 거칠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허리, 제멋대로 휘젓는 수준의 손놀림. 대련이라기보다는 거의 화풀이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아시잖아요. 베른의 형이 셰니에한테 살해당한 거. 그런데 셰니에 놈…… 아니, 셰니에 가문 사람이 여기 떡하니 와서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순 없어요. 도련님도 계속 툴툴거리셨잖아요. 내키지 않는다고. 이 결혼 싫다고.”
베아트리스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 가지고는, 하고 클로드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클로드는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거야 그랬지만……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셰니에 가문 기사들을 죄다 살려 준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원한이라는 건, 특히나 당사자일 때는.”
“그건…… 알지.”
클로드는 낮게 대답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한숨처럼 나직하고 작은 목소리는 때마침 불어온 봄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퍼지는 꽃향기를 맡으며 클로드는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에티엔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클로드는 잘 알고 있었다.
***
탁탁, 돌벽을 타고 발소리가 울렸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달팽이 껍질처럼 빙글빙글 호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2백 년도 전에 지어진 성인 데다, 몇 번이나 증축하고 개조한 탓에 성 안은 거의 무슨 미로 같았다. 성 안의 모든 길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영주 시그룬과 클로드, 그리고 집사장과 마르빈 경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도 서재 한번 가려고 동쪽 탑 3층까지 올라와 탑과 탑 사이를 연결하는 성벽 위 길을 지나 남쪽 탑 3층으로 들어간 다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자라난 클로드에겐 언제나처럼 당연한 일상에 불과했다.
서재는 성에서도 서쪽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클로드는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냈다. 서재는 몇몇 제한된 사람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가 서재의 열쇠를 받은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그동안, 정확히는 그의 또 다른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단 한 번도 이곳이 먼저 열려 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꽂은 열쇠가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빙글 헛도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가 먼저 온 건가? 설마 청소하러 하인이 와 있다던가……? 하지만 하인도 열쇠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을 텐데. 클로드는 머릿속으로 온갖 의문을 떠올리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밀어닥쳤다. 마치 물벼락이라도 끼얹는 것처럼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덮쳤다. 늦은 오후의 서서히 붉은빛을 띠기 시작하는 햇살 속에서, 바람이 흰 커튼을 제멋대로 까불며 펄럭였다. 활짝 열린 창문 앞, 바람의 모양을 그려 내는 커튼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커튼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 순간 햇살을 투명하게 반사하는 머리카락의 갈색 빛깔을 클로드는 볼 수 있었다.
클로드는 한 걸음 내디뎠다. 또다시 커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순간 내려깐 긴 속눈썹이, 집중한 듯 오므린 입술이, 그리고 책장을 붙잡은 흰 손가락이 드러났다.
또다시 향기가 난다. 그때 맡았던 맑고 청량한, 그러면서 어딘가 달콤한 향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바람길 속에서 한 줄기 향이,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인기척을 느꼈는지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라,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여기에……?”
에티엔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본 것과 동시에 황급히 책을 손으로 덮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에 사람이 올 줄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듯 허둥지둥하는 몸짓에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만류하려 팔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냥 여기 있으셔도 되는데…….”
“아, 아뇨. 제가 방해한 것 같아서…….”
“그건 아닌데, 저기, 일단 좀 앉아서 말할까요?”
클로드가 손을 저으며 앞으로 다가가자 에티엔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자신이 아직도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단 나가려면 책은 꽂고 나가야 한다. 에티엔은 서둘러 서가에 책을 꽂으려 팔을 쭉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가죽 장정 위에 쓰인 제목이 햇빛에 언듯 드러났다. 클로드는 길고 긴 제목 가운데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에티엔이 까치발을 들자 머리 위의 나무 서가에 책 끄트머리가 간신히 닿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밀어 넣으려는 순간…… 책이 떨어졌다.
“악!”
짧은 비명 소리, 그리고 책이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 클로드는 서둘러 에티엔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책 모서리에 정통으로 찍혔으니 보통 아픈 게 아닐 테다. 에티엔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구부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클로드가 다가가자 에티엔은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향기. 클로드는 조금 전에 맡았던 냄새가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티엔은 살짝 젖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햇빛에 부드럽게 빛나는 꿀색 눈동자. 창피함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티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정말로.”
에티엔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말로 창피하다는 듯 연신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클로드는 가능한 친근하게, 에티엔이 민망해하지 않게 일부러 농조로 말을 던졌다.
“이렇게 당황하시다니, 설마 제가 뭘 방해한 건 아니겠죠?”
에티엔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방해라면 제가 했죠. 제가 괜히 여기 있어서 화나신 것 같던데…….”
“아니…….”
그럴 리가 있나요, 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까 클로드가 저도 모르게 왜 여기 있냐고 중얼거렸더랬다. 클로드는 짧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그건 그냥 단순히 놀라서였어요. 여긴 지금껏 저 말고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거든요. 정말로 당신이 있어서 불쾌했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제…….”
클로드는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였다.
“에티엔 당신 집이잖아요. 당연히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됩니다. 안 될 거야 없잖아요? 그런 걸로 불쾌해하는 게 이상한 거죠.”
“그런가요.”
친절한 클로드의 말에 에티엔은 마음을 놓은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꼭 햇빛에 바짝 말린 지푸라기처럼 따스하고 바삭이는 감촉의 미소였다.
“서재엔 웬일이신가요?”
클로드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에티엔 근처로 다가섰다. 에티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책 읽으려고요. 원래 집에서도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심심하기도 해서 집사장에게 부탁해서 이렇게 온 거예요. 클로드 님…… 아니, 클로드도 책 읽으러 오신 거죠?”
“네. 별일 없으면 매일 이 시간쯤에 여기 와요.”
클로드는 계속해서 펄럭이는 커튼을 손으로 걷어 냈다. 그러자 확 트인 시야 속으로 드넓은 풍경이 펼쳐졌다. 회색 외벽과 방어탑 너머로 해자의 찰랑이는 파란 물빛과 도개교, 봄의 물 푸른 연두색을 띤 초원이 완만한 구릉을 이루며 한없이 이어졌다.
풀밭에 목화꽃이 돋아난 것처럼 희고 동그란 양 떼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 푸른 강물은 둥그런 형태로 성이 자리 잡은 언덕배기를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가느다란 리본을 펼쳐 놓은 것 같은 강은 천천히, 조용히 반원을 그리며 흘러 이 풍경의 반대편, 성의 동쪽이자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닿을 것이다. 강물 너머 끄트머리에는 짙은 녹색 숲이 그 머리를 가만히 들이밀고 있었다.
“여기 경치를 좋아해서요. 거기다 저 말고는 아무도 안 오니 조용하기도 하고.”
“왜죠? 그래도 영주님이라든가, 신부님이라든가 올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는 여기 안 오세요. 제 다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저희 교구 신부님은 마을의 성당에 사시고.”
에티엔은 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리깐 눈빛에서 괜한 질문을 했다는 자책이 느껴지는 것 같아 클로드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르플뢰르 성에도 서재가 있을 테죠? 거긴 어때요? 여기보다 커요, 작아요?”
“여기가 훨씬 커요. 책장 숫자부터가 여기 반절밖에 안 되는걸요. 그리고 그마저도 누가 훔쳐 갈까 봐 죄다 자물쇠로 꽁꽁 잠가 놨고요.”
귀족의 서재에서는 보통 책을 열쇠로 여닫는 책장에 보관한다. 거기에 추가로 자물쇠를 채우기도 한다. 책은 워낙 고가품이라 훔쳐 갈 염려가 큰 데다가 파손될 위험도 큰 물품이니 그렇게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재에 책이 자유로이 꽂혀 있는 것이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예전에, 저희 다른 어머니, 그러니까 아네테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셨거든요. 책장을 잠가 두면 책을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없고 번거롭다나, 그러면서 질색하셔서.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놔두고 있어요. 어차피 서재 열쇠야 저하고 집사장만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클로드는 열쇠를 꺼내 보였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황동색 열쇠가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렸다. 에티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다가, 클로드는 대뜸 에티엔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세요.”
“네?”
“생각해 보니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원래 책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올 때마다 집사장한테 열어 달라고 하는 것도 번거롭고. 그러니까 에티엔도 하나 갖고 있어야죠.”
“하지만 그러면 클로드는…….”
“전 집사장이 갖고 있는 열쇠를 받으면 돼요. 어차피 서재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안 온다고 했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클로드가 끈질기게 밀어붙이자 결국 에티엔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에티엔에게 열쇠를 건넸다. 에티엔은 두 손으로 열쇠를 받아 들고는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클로드는 창문에 걸터앉았다. 풀냄새가 섞인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뺨을 어루만지듯 따스하고 아주 옅은 귤색 빛이 맴도는 햇볕에 클로드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 순간, 에티엔이 불쑥 내뱉었다.
“혹시 절 동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네?”
클로드는 멍하니 되물었다.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어안이 벙벙한 클로드와 달리, 에티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크고 동그란 눈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또렷이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 아래로 얇고 붉은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전 괜찮아요. 혹시라도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잘해 주는 거라면 정말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 클로드는 살짝 입을 벌렸다. 멍청한 놈. 클로드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에티엔의 말이 맞았다. 그는 에티엔이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저 도구로만 이용당하고, 배우자에겐 푸대접받고, 성 안의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를. 하지만 동정이란 결국 위에서 내려다볼 때 성립하는 감정이다. 아무리 순진해 보인다고 해도 귀족 자제이며 일단은 이 성의 안주인이 된 사람이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동정을 베풀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외인 것은 지금 자신을 쳐다보는 에티엔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유순하고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소년처럼 보였지만, 그는 지금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자존심인지, 혹은 의지인지 알 수 없는 단단한 무언가를 품고서.
심장이 조금 찌릿거리는 것 같았다. 잘못했다는 생각, 의외라는 생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 뒤엉켰다. 잠시 말문이 막히고, 클로드는 천천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그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미안합니다.”
스스로도 조악하고 질 낮은 사과라고 느끼면서도 마땅한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평소라면 속내야 어떻든 간에 예의에 맞는 사과를 적당히 늘어놓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에티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그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분위기를 바꿀 말을 꺼냈다.
“그래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동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호의라고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앞으로 계속 함께 얼굴을 보아야 하는 사이니까, 데면데면한 것보다는 친한 편이 훨씬 낫잖습니까. 방금 그것도 그냥 단순한 서로가 편하기 위해서 베푼 호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거절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가요.”
생각보다 순순한 대답이었다. 아니, 다시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기까지 했다. 클로드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에티엔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잘됐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티엔.”
클로드가 장난처럼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구부리는 궁정식 인사를 하자 에티엔이 하핫,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침에 들었던 것처럼 맑고 싱그러운 웃음소리였다.
“그래서…… 궁금한 건 없어요? 여기 루에르그에 대해서, 우리 슈바르츠발트 가문에 대해서.”
둘은 창틀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이제 완연히 주홍빛이 된 햇볕 속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어요.”
“뭔데요?”
“이 성에선 시그룬 님을 아무도 공작님이라고 안 부르더라고요. 그냥 영주님이라고만 부르지. 왜 그런가요?”
“그건 간단해요. 저희는 작위를 받기도 전에 이곳의 영주였으니까.”
에티엔은 클로드의 대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클로드는 웃으며 보충 설명을 했다.
“저희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 루에르그를 다스렸죠. 제국이 망하고 조각조각 날 때부터였을 겁니다. 때로는 이 나라에, 때로는 저 나라에 복속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슈바르츠발트가 3백 년 동안 꾸준히 다스려 왔어요. 그러니 공작이라는 작위는 국왕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루에르그의 영주라는 지위는 가문의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편할까요. 그래서 저희는 영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공작님이 아니라. 이 정도면 이해되셨나요?”
에티엔은 아하, 하고 가벼운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됐어요. 그런데 말을 듣자니 꼭…….”
에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보다도 자신의 가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국왕의 귀에 들어가면 안 좋겠죠. 뭐, 지금 국왕이라면 알아도 별수 없겠지만. 잘 이해는 안 되시죠? 셰니에 가문은 또 다를 테니까.”
“맞아요. 저희 가문의 선조는 본래 왕의 가신이었고, 그래서 왕에게 영지를 수여받은 것으로 시작한 가문이거든요. 아르플뢰르를 다스리기 시작한 건 겨우 50년이 조금 넘었던가. 그래서인가 여긴 처음 왔을 때…….”
에티엔은 손으로 성벽을 어루만졌다. 거칠거칠한 화강암의 재질이 그대로 느껴지는 벽이었다.
“정말로,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기하다고 느껴질 만큼.”
에티엔의 목소리는 작고 나른해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 햇빛이 발그스름하게 통과하는 동그란 귓바퀴와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 느리고 천천히, 마치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처럼 벽을 훑는 발간 손끝. 어쩐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다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순간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제1장. 봄의 신부 (3)
에티엔의 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더 잔뜩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어리벙벙한 기색으로 몇 번이고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하지만 곧 서서히 눈에서부터 밝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온기가 차가운 몸 위로 번져 나가는 것처럼, 밝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에티엔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우리 사실 나이도 비슷하다니까 하는 말인데.”
클로드가 속닥거렸다. 에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머리 뒤에 뻗친 갈색 머리카락 한 가닥도 함께 기우뚱 흔들렸다. 클로드는 그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클로드는 에티엔에게 다정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절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심심하거나 성의 길을 모르겠다거나 하면 얼마든지 불러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길을 잃고 헤매서 하인들에게 구조당하는 것보다야 그게 낫잖아요?”
에티엔의 갈색 눈동자에 놀라움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가, 곧 웃음기가 환하게 퍼져 나갔다. 에티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맑고 앳된 웃음소리로, 그는 짧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그럴게요.”
클로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티엔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불쑥 내뱉었다.
“친절하시네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하고 조용한,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클로드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에티엔은 그 동그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꼭 버릇처럼, 내내 띠고 있는 연하고 희미한 미소였다. 에티엔은 곧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데요?”
베아트리스가 재촉하며 되물었다. 클로드는 시선을 위로 던졌다. 성의 북쪽 탑 꼭대기에 사자가 그려진 가문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아래로 아치형으로 뚫린 창문이 보였다. 저 너머에는 아마도, 한 소년이 거닐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소년이.
클로드는 베아트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면 그만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길래? 역시 셰니에라 싫은 거야?”
“그건…….”
베아트리스는 잠시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뤘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포기한 듯이 두 손을 들었다.
“다들 당연히 싫어하죠. 셰니에 가문 사람이잖아요. 아무리 영주님의 결정이라지만, 모두 이유가 있다지만, 그렇게 싸워 댔던 셰니에 가문 사람인데 간단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기, 베른은 말은 안 해도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을걸요.”
베아트리스는 연병장 구석을 가리켰다. 한 남자가 유달리 거칠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허리, 제멋대로 휘젓는 수준의 손놀림. 대련이라기보다는 거의 화풀이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아시잖아요. 베른의 형이 셰니에한테 살해당한 거. 그런데 셰니에 놈…… 아니, 셰니에 가문 사람이 여기 떡하니 와서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순 없어요. 도련님도 계속 툴툴거리셨잖아요. 내키지 않는다고. 이 결혼 싫다고.”
베아트리스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 가지고는, 하고 클로드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클로드는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거야 그랬지만……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셰니에 가문 기사들을 죄다 살려 준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원한이라는 건, 특히나 당사자일 때는.”
“그건…… 알지.”
클로드는 낮게 대답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한숨처럼 나직하고 작은 목소리는 때마침 불어온 봄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퍼지는 꽃향기를 맡으며 클로드는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에티엔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클로드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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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돌벽을 타고 발소리가 울렸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달팽이 껍질처럼 빙글빙글 호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2백 년도 전에 지어진 성인 데다, 몇 번이나 증축하고 개조한 탓에 성 안은 거의 무슨 미로 같았다. 성 안의 모든 길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영주 시그룬과 클로드, 그리고 집사장과 마르빈 경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도 서재 한번 가려고 동쪽 탑 3층까지 올라와 탑과 탑 사이를 연결하는 성벽 위 길을 지나 남쪽 탑 3층으로 들어간 다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자라난 클로드에겐 언제나처럼 당연한 일상에 불과했다.
서재는 성에서도 서쪽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클로드는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냈다. 서재는 몇몇 제한된 사람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가 서재의 열쇠를 받은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그동안, 정확히는 그의 또 다른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단 한 번도 이곳이 먼저 열려 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꽂은 열쇠가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빙글 헛도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가 먼저 온 건가? 설마 청소하러 하인이 와 있다던가……? 하지만 하인도 열쇠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을 텐데. 클로드는 머릿속으로 온갖 의문을 떠올리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밀어닥쳤다. 마치 물벼락이라도 끼얹는 것처럼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덮쳤다. 늦은 오후의 서서히 붉은빛을 띠기 시작하는 햇살 속에서, 바람이 흰 커튼을 제멋대로 까불며 펄럭였다. 활짝 열린 창문 앞, 바람의 모양을 그려 내는 커튼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커튼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 순간 햇살을 투명하게 반사하는 머리카락의 갈색 빛깔을 클로드는 볼 수 있었다.
클로드는 한 걸음 내디뎠다. 또다시 커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순간 내려깐 긴 속눈썹이, 집중한 듯 오므린 입술이, 그리고 책장을 붙잡은 흰 손가락이 드러났다.
또다시 향기가 난다. 그때 맡았던 맑고 청량한, 그러면서 어딘가 달콤한 향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바람길 속에서 한 줄기 향이,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인기척을 느꼈는지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라,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여기에……?”
에티엔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본 것과 동시에 황급히 책을 손으로 덮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에 사람이 올 줄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듯 허둥지둥하는 몸짓에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만류하려 팔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냥 여기 있으셔도 되는데…….”
“아, 아뇨. 제가 방해한 것 같아서…….”
“그건 아닌데, 저기, 일단 좀 앉아서 말할까요?”
클로드가 손을 저으며 앞으로 다가가자 에티엔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자신이 아직도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단 나가려면 책은 꽂고 나가야 한다. 에티엔은 서둘러 서가에 책을 꽂으려 팔을 쭉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가죽 장정 위에 쓰인 제목이 햇빛에 언듯 드러났다. 클로드는 길고 긴 제목 가운데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에티엔이 까치발을 들자 머리 위의 나무 서가에 책 끄트머리가 간신히 닿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밀어 넣으려는 순간…… 책이 떨어졌다.
“악!”
짧은 비명 소리, 그리고 책이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 클로드는 서둘러 에티엔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책 모서리에 정통으로 찍혔으니 보통 아픈 게 아닐 테다. 에티엔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구부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클로드가 다가가자 에티엔은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향기. 클로드는 조금 전에 맡았던 냄새가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티엔은 살짝 젖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햇빛에 부드럽게 빛나는 꿀색 눈동자. 창피함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티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정말로.”
에티엔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말로 창피하다는 듯 연신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클로드는 가능한 친근하게, 에티엔이 민망해하지 않게 일부러 농조로 말을 던졌다.
“이렇게 당황하시다니, 설마 제가 뭘 방해한 건 아니겠죠?”
에티엔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방해라면 제가 했죠. 제가 괜히 여기 있어서 화나신 것 같던데…….”
“아니…….”
그럴 리가 있나요, 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까 클로드가 저도 모르게 왜 여기 있냐고 중얼거렸더랬다. 클로드는 짧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그건 그냥 단순히 놀라서였어요. 여긴 지금껏 저 말고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거든요. 정말로 당신이 있어서 불쾌했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제…….”
클로드는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였다.
“에티엔 당신 집이잖아요. 당연히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됩니다. 안 될 거야 없잖아요? 그런 걸로 불쾌해하는 게 이상한 거죠.”
“그런가요.”
친절한 클로드의 말에 에티엔은 마음을 놓은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꼭 햇빛에 바짝 말린 지푸라기처럼 따스하고 바삭이는 감촉의 미소였다.
“서재엔 웬일이신가요?”
클로드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에티엔 근처로 다가섰다. 에티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책 읽으려고요. 원래 집에서도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심심하기도 해서 집사장에게 부탁해서 이렇게 온 거예요. 클로드 님…… 아니, 클로드도 책 읽으러 오신 거죠?”
“네. 별일 없으면 매일 이 시간쯤에 여기 와요.”
클로드는 계속해서 펄럭이는 커튼을 손으로 걷어 냈다. 그러자 확 트인 시야 속으로 드넓은 풍경이 펼쳐졌다. 회색 외벽과 방어탑 너머로 해자의 찰랑이는 파란 물빛과 도개교, 봄의 물 푸른 연두색을 띤 초원이 완만한 구릉을 이루며 한없이 이어졌다.
풀밭에 목화꽃이 돋아난 것처럼 희고 동그란 양 떼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 푸른 강물은 둥그런 형태로 성이 자리 잡은 언덕배기를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가느다란 리본을 펼쳐 놓은 것 같은 강은 천천히, 조용히 반원을 그리며 흘러 이 풍경의 반대편, 성의 동쪽이자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닿을 것이다. 강물 너머 끄트머리에는 짙은 녹색 숲이 그 머리를 가만히 들이밀고 있었다.
“여기 경치를 좋아해서요. 거기다 저 말고는 아무도 안 오니 조용하기도 하고.”
“왜죠? 그래도 영주님이라든가, 신부님이라든가 올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는 여기 안 오세요. 제 다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저희 교구 신부님은 마을의 성당에 사시고.”
에티엔은 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리깐 눈빛에서 괜한 질문을 했다는 자책이 느껴지는 것 같아 클로드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르플뢰르 성에도 서재가 있을 테죠? 거긴 어때요? 여기보다 커요, 작아요?”
“여기가 훨씬 커요. 책장 숫자부터가 여기 반절밖에 안 되는걸요. 그리고 그마저도 누가 훔쳐 갈까 봐 죄다 자물쇠로 꽁꽁 잠가 놨고요.”
귀족의 서재에서는 보통 책을 열쇠로 여닫는 책장에 보관한다. 거기에 추가로 자물쇠를 채우기도 한다. 책은 워낙 고가품이라 훔쳐 갈 염려가 큰 데다가 파손될 위험도 큰 물품이니 그렇게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재에 책이 자유로이 꽂혀 있는 것이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예전에, 저희 다른 어머니, 그러니까 아네테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셨거든요. 책장을 잠가 두면 책을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없고 번거롭다나, 그러면서 질색하셔서.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놔두고 있어요. 어차피 서재 열쇠야 저하고 집사장만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클로드는 열쇠를 꺼내 보였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황동색 열쇠가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렸다. 에티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다가, 클로드는 대뜸 에티엔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세요.”
“네?”
“생각해 보니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원래 책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올 때마다 집사장한테 열어 달라고 하는 것도 번거롭고. 그러니까 에티엔도 하나 갖고 있어야죠.”
“하지만 그러면 클로드는…….”
“전 집사장이 갖고 있는 열쇠를 받으면 돼요. 어차피 서재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안 온다고 했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클로드가 끈질기게 밀어붙이자 결국 에티엔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에티엔에게 열쇠를 건넸다. 에티엔은 두 손으로 열쇠를 받아 들고는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클로드는 창문에 걸터앉았다. 풀냄새가 섞인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뺨을 어루만지듯 따스하고 아주 옅은 귤색 빛이 맴도는 햇볕에 클로드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 순간, 에티엔이 불쑥 내뱉었다.
“혹시 절 동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네?”
클로드는 멍하니 되물었다.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어안이 벙벙한 클로드와 달리, 에티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크고 동그란 눈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또렷이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 아래로 얇고 붉은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전 괜찮아요. 혹시라도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잘해 주는 거라면 정말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 클로드는 살짝 입을 벌렸다. 멍청한 놈. 클로드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에티엔의 말이 맞았다. 그는 에티엔이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저 도구로만 이용당하고, 배우자에겐 푸대접받고, 성 안의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를. 하지만 동정이란 결국 위에서 내려다볼 때 성립하는 감정이다. 아무리 순진해 보인다고 해도 귀족 자제이며 일단은 이 성의 안주인이 된 사람이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동정을 베풀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외인 것은 지금 자신을 쳐다보는 에티엔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유순하고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소년처럼 보였지만, 그는 지금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자존심인지, 혹은 의지인지 알 수 없는 단단한 무언가를 품고서.
심장이 조금 찌릿거리는 것 같았다. 잘못했다는 생각, 의외라는 생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 뒤엉켰다. 잠시 말문이 막히고, 클로드는 천천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그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미안합니다.”
스스로도 조악하고 질 낮은 사과라고 느끼면서도 마땅한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평소라면 속내야 어떻든 간에 예의에 맞는 사과를 적당히 늘어놓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에티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그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분위기를 바꿀 말을 꺼냈다.
“그래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동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호의라고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앞으로 계속 함께 얼굴을 보아야 하는 사이니까, 데면데면한 것보다는 친한 편이 훨씬 낫잖습니까. 방금 그것도 그냥 단순한 서로가 편하기 위해서 베푼 호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거절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가요.”
생각보다 순순한 대답이었다. 아니, 다시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기까지 했다. 클로드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에티엔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잘됐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티엔.”
클로드가 장난처럼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구부리는 궁정식 인사를 하자 에티엔이 하핫,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침에 들었던 것처럼 맑고 싱그러운 웃음소리였다.
“그래서…… 궁금한 건 없어요? 여기 루에르그에 대해서, 우리 슈바르츠발트 가문에 대해서.”
둘은 창틀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이제 완연히 주홍빛이 된 햇볕 속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어요.”
“뭔데요?”
“이 성에선 시그룬 님을 아무도 공작님이라고 안 부르더라고요. 그냥 영주님이라고만 부르지. 왜 그런가요?”
“그건 간단해요. 저희는 작위를 받기도 전에 이곳의 영주였으니까.”
에티엔은 클로드의 대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클로드는 웃으며 보충 설명을 했다.
“저희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 루에르그를 다스렸죠. 제국이 망하고 조각조각 날 때부터였을 겁니다. 때로는 이 나라에, 때로는 저 나라에 복속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슈바르츠발트가 3백 년 동안 꾸준히 다스려 왔어요. 그러니 공작이라는 작위는 국왕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루에르그의 영주라는 지위는 가문의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편할까요. 그래서 저희는 영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공작님이 아니라. 이 정도면 이해되셨나요?”
에티엔은 아하, 하고 가벼운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됐어요. 그런데 말을 듣자니 꼭…….”
에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보다도 자신의 가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국왕의 귀에 들어가면 안 좋겠죠. 뭐, 지금 국왕이라면 알아도 별수 없겠지만. 잘 이해는 안 되시죠? 셰니에 가문은 또 다를 테니까.”
“맞아요. 저희 가문의 선조는 본래 왕의 가신이었고, 그래서 왕에게 영지를 수여받은 것으로 시작한 가문이거든요. 아르플뢰르를 다스리기 시작한 건 겨우 50년이 조금 넘었던가. 그래서인가 여긴 처음 왔을 때…….”
에티엔은 손으로 성벽을 어루만졌다. 거칠거칠한 화강암의 재질이 그대로 느껴지는 벽이었다.
“정말로,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기하다고 느껴질 만큼.”
에티엔의 목소리는 작고 나른해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 햇빛이 발그스름하게 통과하는 동그란 귓바퀴와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 느리고 천천히, 마치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처럼 벽을 훑는 발간 손끝. 어쩐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다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순간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