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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이야기 5화
제1장. 봄의 신부 (5)
미레트 부인이 이러는 이유야 뻔했다. 에티엔은 어리고, 셰니에 가문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로 자식을 생산할 예정이 없기 때문에 성의 진짜 안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티엔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클로드는 에티엔이 마냥 순진해 보여도 주변의 일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제 알고 있었다. 다만, 파악하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아마도 별개이리라.
에티엔은 고개를 돌린 채 강아지풀을 다시 한들한들 흔들었다. 노란 얼룩고양이는 드러누운 채 하품을 하더니 앞발을 핥았다. 에티엔은 끈질기게 다시 한번 강아지풀을 흔들어 고양이의 주의를 끌려고 시도했지만 여전히 얼룩고양이는 자기 몸을 핥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티엔은 아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강아지풀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여전히 햇빛 냄새가 나는 미소를 띤 채였다. 클로드는 에티엔의 긴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늘을, 살짝 끝이 들려 햇살을 담은 콧잔등을 바라보았다.
“에티엔.”
“네?”
에티엔이 고개를 돌렸다. 유달리 밝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가만히 그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저 고양이 이름은 개비라고 해요. 언제부턴가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렇구나. 이름 부르면 와요?”
에티엔의 물음에 클로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양이니까.”
“하긴, 고양이니까.”
에티엔이 클로드의 말을 되풀이하며 웃었다. 개비는 여전히 햇볕 내리쬐는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몸을 쭉 폈다가 다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티엔을 지켜보았다. 동그란 귓바퀴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 꼭 다문 입술.
클로드는 자신의 조언도 위로도 아마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가 바라는 것은 그냥 여기에 클로드가 같이 있어 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도. 클로드는 그래서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작은 고양이는 인간들의 속내는 조금도 모르고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2
마르빈 경이 사냥을 가야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이게 다 봄 때문이라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봄이라 하면 사슴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짝짓기를 하러 다니는 철인 데다가 날씨는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하며 해는 점점 길어지니 사냥을 하러 가지 않는 게 아쉬운 계절이긴 했다.
거기다가 마르빈 경이 사냥을 하러 가자고 제안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셰니에와의 화해 때문에 이제 할 일이 없어져 버린 기사들의 혈기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 주지 않으면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베른이 최근 술에 취해 마을의 술집을 발칵 뒤집어 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클로드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시그룬은 적당히 하고 돌아오라는 말로 허락했다. 원하던 바를 달성한 마르빈 경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물러갔다. 시그룬은 무심하게 찻잔을 들고 몸을 돌리다가 클로드가 아직도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그룬의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냐, 클로드.”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 앞에서도 예의 그 싸늘하고 무뚝뚝한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가뜩이나 큰 키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유달리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면 누구나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 점은 클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지금 꺼내려는 화제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줄행랑을 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클로드는 배 속에 기합을 단단히 주고는 말을 꺼냈다.
“어머니, 이번 사냥에 혹시 같이 가실 예정입니까?”
“아니. 이번엔 힘들 것 같다.”
“그, 그럼, 어머니. 혹시…… 에, 아니 제 새아버지……도 같이 데려가도 될까요?”
하마터면 에티엔이라고 이름을 말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클로드는 조마조마하게 시그룬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시그룬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최대한 어떻게든 담담하고 문제없는 척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왜지?”
“그게…… 저번에 사냥을 하면 같이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검은 숲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아서요.”
시그룬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홀짝거리기만 했다. 클로드의 심장이 초조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시그룬은 화내는 것도 어이없어하는 것도 아닌, 평소보다 조금 더 매서워진 눈으로 그저 클로드를 가만히 살펴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같이 있나 보더구나.”
“아, 그, 네……. 맞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만 같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다음 시그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더더욱 의외의 것이었다.
“친해졌나 보지?”
“예?”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시그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 챙겨 주도록 해라.”
이번엔 멍청한 되물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클로드는 입을 딱 벌렸다가, 자기가 벌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시 원상태로 얼굴을 되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그룬은 계속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으니.”
그 순간 클로드는 어떻게든 표정을 수습하려던 모든 노력을 멈췄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드디어 이해했으므로.
그녀는 어찌 됐든 표면적으로는 에티엔에게 어떤 형태로든 친애의 감정을 드러낼 생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에티엔이 감정이 상하거나 해서 이 결혼이 어긋나는 것도 원치 않으니 잘 지켜보고 신경 쓰라는 의미였다. 어찌 됐든 비슷한 나이고, 어찌 됐든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 클로드가. 이해했다. 이해는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단은 어머니가 최근 클로드의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증거니, 아니 오히려 허락한다고 봐도 좋으니 기뻐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에티엔을 성가신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건 옳지 않았다. 에티엔은 전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떼를 쓰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는데…….
아, 그렇다. 클로드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만한 단어를 찾아냈다. 부당하다.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시그룬은 이만하면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는지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약초 냄새가 나는 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고 그녀는 영지의 소작농 숫자와 예상 수입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목각 인형 같은 모습. 클로드는 이따금 왜 아네테가 시그룬을 사랑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밝고, 모두에게 햇살을 뿌리는 것처럼 쾌활하던 아네테는 왜 이런 시그룬을 사랑했을까. 클로드는 그 두 사람의 아이인데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러면, 어쨌든 사냥에 그……분을 데려가는 건 허락하시는 거죠.”
클로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재차 확인했다. 시그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클로드는 짧게 목례하고 자리를 나섰다.
***
하늘은 쨍한 파란색이었다. 뭉게구름이 지평선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새 떼는 까만 실루엣으로 줄지어 날아갔다. 그새 햇살은 제법 뜨거워져 피부에 닿는 감촉이 따가웠다. 한 달 전만 해도 바싹 마른 회갈색이던 풀밭은 이제 완연한 초록빛에다 흰색 들꽃도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풀잎에는 물이 잔뜩 올라 수십 개의 말발굽이 밟고 지나가는데도 바스락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기분이 유쾌해져 휘파람을 불었다. 사냥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다른 기사들도 오랜만의 사냥에 잔뜩 들떠 있었다. 어찌 됐든 가짜 검으로 투닥거리는 대련이나 하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날 며칠을 그러고 있노라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미 적의 목을 베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희열을 알아 버린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오늘은 전투에 나가는 것이 아니니 무거운 갑옷 대신 간단한 가죽 보호구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저번에 내가 몇 마리는 잡았는지 알기는 하냐? 다섯 마리였거든, 다섯 마리? 넌 하나도 못 잡고 완전 허탕 치고 있었잖아!”
“누가 들으면 늑대 다섯 마리 잡은 줄 알겠네. 베른 네가 잡은 건 고작해야 토끼였잖냐. 무슨 주먹만도 못한 개구리 같은 놈들만 줄줄이 잡아 놓고는 자랑질이야? 그 정도는 저기 라텐 강에서 노는 애들도 30분이면 잡아!”
“너는 그런 개구리라도 잡아 본 적 있냐?”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높고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베아트리스는 뒤를 힐끔 눈짓했다. 베른이 게렌과 킬킬거리며 농을 주고받고 있었다. 며칠 전 술집을 발칵 뒤집어 놓아 징계를 받은 일 때문에 골이 나 있더니, 지금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베아트리스는 오늘 사냥 때 베른과 이야기해 보라고 클로드에게 말을 붙이려 말고삐를 잡아당겼다가, 이런, 하고 중얼거렸다. 클로드와 에티엔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클로드는 최근 부쩍 에티엔과 자주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그 사실에 대해 집사장 미레트 부인에게 넌지시 일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클로드는 에티엔이 여기 적응하게 도와주는 데 책임감 같은 걸 갖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클로드와 신생아 때부터 함께 자라 왔던 베아트리스의 의견은 달랐다.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어딘가 수상했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예쁜 베타 시녀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는 일화의 주인공이자 성 안에서 제일가는 바람둥이 알파로서 감히 단언하건대 뭔가 촉이 삐용삐용 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미레트 부인도 어딘가 수상한 걸 눈치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닭 없이 확신했다.
클로드는 지금도 에티엔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입가에는 평소엔 잘 보여 주지 않는 엷은 미소까지 띠고서. 에티엔은 어려 보이는 그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며 듣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슬쩍 그들 뒤꽁무니 가까이 붙었다. 클로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아르플뢰르에 비하면 추운 곳이죠. 겨울이면 눈이 잔뜩 쌓여서 밖에 나다니기 힘들 정도니까요. 하루 종일 눈만 치울 때도 있어요.”
“그렇구나. 전 눈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특히나 쌓인 건 더. 잔뜩 온다니 궁금하네요. 보고 싶어요.”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봤을 텐데. 3월 초까지는 간혹 눈이 와요. 그때쯤 되면 쌓이진 않지만.”
시시한 내용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잔뜩 달아올랐던 흥미가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슬쩍 클로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에티엔과 눈을 맞추며 상냥하고 성실하게 이 고장의 날씨에 대해 계속 설명해 주고 있었다. 클로드는 으레 다른 귀족들 앞에서 그러하듯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레트 부인이 말했던 대로 단순히 책임감을 느껴 잘해 주나 보다. 이 도련님은 친한 사람들 앞에선 입만 열면 불평을 늘어놓는 주제에 묘하게 성실한 구석이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그렇게 결론짓고 그들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때, 앞에서 계속 이어지던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 다른 기사들의 소란한 말소리, 새 울음소리에 묻혀 티조차 나지 않은 짤막한 침묵이었다. 그 순간 베아트리스는 클로드의 시선을 보았다.
에티엔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멈췄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적당한 다정함도, 예의도, 무관심도, 호기심도, 혐오도 아닌 무엇. 베아트리스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클로드가 누군가를 저렇게 바라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에티엔이 검은 숲에 대해서 무어라 물어보며 클로드에게 다시 얼굴을 돌렸다. 클로드는 조금 전과 똑같이 웃으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뭐였을까. 그냥 잘못 본 것이었으면 좋겠다. 베아트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의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우와…….”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올렸다. 클로드가 설명한 대로, 검은 숲 안은 정말로 나무로 빽빽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여기 버티고 서서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자라난 것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엇갈리듯 하늘을 막아선 가지와 뾰족뾰족하고 사철 푸른 이파리들 앞에선 봄 햇살도 맥을 못 추고 그 빛을 잃었다.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그늘 아래서 몇백 년 전부터 숲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여 만들어진 좁다란 길을 따라 일렬로 걸었다. 어둡고, 오래되고, 습한 냄새가 빠져나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바람에 실려 맴돌고 있었다.
에티엔은 예상보다 훨씬 어둡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뒤에 있는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정말…….”
하지만 에티엔은 말을 하려다 멈췄다. 클로드는 에티엔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검은색 눈썹,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는 파란 눈동자. 언제 꺼냈는지 어느새 시위를 메기고 있는 활과 화살.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로드는 처음 보았다. 평소 능숙하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사냥감을 노려보며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그야말로 맹수에 가까운 모습.
어느새 그는 알파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베타에 가까우리만치 완벽하게 페로몬을 감추고 있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맹수가 몸을 낮추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숨죽인 긴장과 위압감이 페로몬에 실려 형태를 갖추고 어른거렸다.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배경 음악처럼 내내 시끄럽던 기사들의 말소리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에티엔은 그 순간 말로만 듣던 루에르그의 강철 기병이 드디어 무엇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루에르그의 강철 기병. 전원 알파로 구성되어 있는 소수정예의 기사들. 가볍고 튼튼하기로 유명한 루에르그 강철 갑옷을 입고 일당백의 용맹을 휘두른다고 한다. 셰니에와 슈바르츠발트 가문이 영지 변경에서 계속 충돌할 때 셰니에의 기사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루에르그 놈을 만나서 팔이 잘려 돌아왔다면 특진을 시켜 줘야 한다. 목이 잘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빠르게 치고 빠지는 야습 작전을 택하곤 했었다. 아마 그 때문에 루에르그 기사들이 셰니에를 더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에티엔은 그들이 얼마나 용맹한지,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저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십수 명의 단련된 알파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 무리처럼 사냥감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일한 오메가인 에티엔은 압도되다 못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데, 온몸이 눌리는 것 같아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저, 숨어서 살아남기만을 기원해야 하는 사냥감이 된 것만 같다.
그 순간 어디선가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풀잎과 풀잎이 부자연스럽게 몸을 비비며 부닥치는 소리. 십수 명의 눈길이 동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단 하나의 소리. 그리고 이어진 정적. 사냥꾼과 사냥감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는 시간. 누가 먼저 움직일지 서로의 기척을 응시하는 시간. 이윽고 침묵은 깨어졌다. 먼저 움직인 건 사슴이었다. 수풀 사이로 귀와 짤막한 뿔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을 들어 올리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로 몰아!”
“앞으로 가!”
“달려!”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이 얽혔다. 달리는 몸에 부딪친 나뭇가지들이 부러졌다. 기사들은 어느새 사슴을 바짝 뒤쫓고 있었다. 사슴의 발굽이 필사적으로 땅을 박찰 때마다 흙먼지가 튀었다.
말발굽 소리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누가 지시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 무리는 사슴의 뒤를 바짝 뒤쫓고 나머지 두 무리는 사슴을 옆에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에티엔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얼결에 같이 달리긴 했는데 지금은 세 무리 중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는 기사도 아니고, 구색 맞추기로 가져온 활과 화살은 꺼내지도 못하고 메어 놓기만 한 상태였다. 애초에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것 자체가 훈련을 해야만 가능한 일인데, 오메가인 에티엔이 그런 걸 배웠을 리가 만무했다.
에티엔은 결국 뒤로 빠지는 쪽을 택했다. 여기서 그는 그냥 걸림돌일 뿐이었다. 방해가 되느니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낫다. 에티엔은 말의 속도를 늦추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말머리를 홱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에티엔의 말을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말끼리 충돌하고, 몸이 흔들리고, 하늘이 뒤집혔다. 몸이 위로 크게 떠오른다. 시야가 거꾸로 돌아가고 손안에서 말고삐가 빠져나가는 바로 그 순간, 에티엔은 보았다.
자신을 친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이윽고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느끼며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클로드는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힘을 잔뜩 머금은 팽팽한 줄이 입술을 짓눌렀다. 내달리는 속도만큼 거세게 맞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의 눈은 부릅뜬 채로 사냥감의 뒤를 끈질기게 쫓았다. 사슴이 수풀을 뛰어넘고 갈색 둥치 너머로 달린다. 머뭇거리는 것도 멈추는 것도 하나 없었다. 오로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달리기 위해 태어난 짐승다웠다. 그리고 그 짐승들의 숨통을 끊는 것이 바로 포식자 알파의 역할이다. 길이 없던 오른쪽에서 베아트리스가 불쑥 나타났다. 사슴의 발굽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클로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껏 계속 좇았던 한 점, 사슴의 목덜미를 향해 클로드는 활시위를 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화살이 빠져나고 화살 깃이 공기를 갈랐다. 화살은 거침없이 날아가 사슴의 목을 꿰뚫는다. 사슴의 몸이 쓰러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1장. 봄의 신부 (5)
미레트 부인이 이러는 이유야 뻔했다. 에티엔은 어리고, 셰니에 가문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로 자식을 생산할 예정이 없기 때문에 성의 진짜 안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티엔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클로드는 에티엔이 마냥 순진해 보여도 주변의 일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제 알고 있었다. 다만, 파악하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아마도 별개이리라.
에티엔은 고개를 돌린 채 강아지풀을 다시 한들한들 흔들었다. 노란 얼룩고양이는 드러누운 채 하품을 하더니 앞발을 핥았다. 에티엔은 끈질기게 다시 한번 강아지풀을 흔들어 고양이의 주의를 끌려고 시도했지만 여전히 얼룩고양이는 자기 몸을 핥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티엔은 아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강아지풀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여전히 햇빛 냄새가 나는 미소를 띤 채였다. 클로드는 에티엔의 긴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늘을, 살짝 끝이 들려 햇살을 담은 콧잔등을 바라보았다.
“에티엔.”
“네?”
에티엔이 고개를 돌렸다. 유달리 밝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가만히 그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저 고양이 이름은 개비라고 해요. 언제부턴가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렇구나. 이름 부르면 와요?”
에티엔의 물음에 클로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양이니까.”
“하긴, 고양이니까.”
에티엔이 클로드의 말을 되풀이하며 웃었다. 개비는 여전히 햇볕 내리쬐는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몸을 쭉 폈다가 다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티엔을 지켜보았다. 동그란 귓바퀴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 꼭 다문 입술.
클로드는 자신의 조언도 위로도 아마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가 바라는 것은 그냥 여기에 클로드가 같이 있어 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도. 클로드는 그래서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작은 고양이는 인간들의 속내는 조금도 모르고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2
마르빈 경이 사냥을 가야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이게 다 봄 때문이라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봄이라 하면 사슴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짝짓기를 하러 다니는 철인 데다가 날씨는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하며 해는 점점 길어지니 사냥을 하러 가지 않는 게 아쉬운 계절이긴 했다.
거기다가 마르빈 경이 사냥을 하러 가자고 제안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셰니에와의 화해 때문에 이제 할 일이 없어져 버린 기사들의 혈기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 주지 않으면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베른이 최근 술에 취해 마을의 술집을 발칵 뒤집어 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클로드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시그룬은 적당히 하고 돌아오라는 말로 허락했다. 원하던 바를 달성한 마르빈 경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물러갔다. 시그룬은 무심하게 찻잔을 들고 몸을 돌리다가 클로드가 아직도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그룬의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냐, 클로드.”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 앞에서도 예의 그 싸늘하고 무뚝뚝한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가뜩이나 큰 키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유달리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면 누구나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 점은 클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지금 꺼내려는 화제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줄행랑을 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클로드는 배 속에 기합을 단단히 주고는 말을 꺼냈다.
“어머니, 이번 사냥에 혹시 같이 가실 예정입니까?”
“아니. 이번엔 힘들 것 같다.”
“그, 그럼, 어머니. 혹시…… 에, 아니 제 새아버지……도 같이 데려가도 될까요?”
하마터면 에티엔이라고 이름을 말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클로드는 조마조마하게 시그룬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시그룬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최대한 어떻게든 담담하고 문제없는 척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왜지?”
“그게…… 저번에 사냥을 하면 같이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검은 숲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아서요.”
시그룬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홀짝거리기만 했다. 클로드의 심장이 초조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시그룬은 화내는 것도 어이없어하는 것도 아닌, 평소보다 조금 더 매서워진 눈으로 그저 클로드를 가만히 살펴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같이 있나 보더구나.”
“아, 그, 네……. 맞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만 같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다음 시그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더더욱 의외의 것이었다.
“친해졌나 보지?”
“예?”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시그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 챙겨 주도록 해라.”
이번엔 멍청한 되물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클로드는 입을 딱 벌렸다가, 자기가 벌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시 원상태로 얼굴을 되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그룬은 계속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으니.”
그 순간 클로드는 어떻게든 표정을 수습하려던 모든 노력을 멈췄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드디어 이해했으므로.
그녀는 어찌 됐든 표면적으로는 에티엔에게 어떤 형태로든 친애의 감정을 드러낼 생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에티엔이 감정이 상하거나 해서 이 결혼이 어긋나는 것도 원치 않으니 잘 지켜보고 신경 쓰라는 의미였다. 어찌 됐든 비슷한 나이고, 어찌 됐든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 클로드가. 이해했다. 이해는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단은 어머니가 최근 클로드의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증거니, 아니 오히려 허락한다고 봐도 좋으니 기뻐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에티엔을 성가신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건 옳지 않았다. 에티엔은 전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떼를 쓰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는데…….
아, 그렇다. 클로드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만한 단어를 찾아냈다. 부당하다.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시그룬은 이만하면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는지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약초 냄새가 나는 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고 그녀는 영지의 소작농 숫자와 예상 수입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목각 인형 같은 모습. 클로드는 이따금 왜 아네테가 시그룬을 사랑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밝고, 모두에게 햇살을 뿌리는 것처럼 쾌활하던 아네테는 왜 이런 시그룬을 사랑했을까. 클로드는 그 두 사람의 아이인데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러면, 어쨌든 사냥에 그……분을 데려가는 건 허락하시는 거죠.”
클로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재차 확인했다. 시그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클로드는 짧게 목례하고 자리를 나섰다.
***
하늘은 쨍한 파란색이었다. 뭉게구름이 지평선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새 떼는 까만 실루엣으로 줄지어 날아갔다. 그새 햇살은 제법 뜨거워져 피부에 닿는 감촉이 따가웠다. 한 달 전만 해도 바싹 마른 회갈색이던 풀밭은 이제 완연한 초록빛에다 흰색 들꽃도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풀잎에는 물이 잔뜩 올라 수십 개의 말발굽이 밟고 지나가는데도 바스락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기분이 유쾌해져 휘파람을 불었다. 사냥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다른 기사들도 오랜만의 사냥에 잔뜩 들떠 있었다. 어찌 됐든 가짜 검으로 투닥거리는 대련이나 하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날 며칠을 그러고 있노라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미 적의 목을 베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희열을 알아 버린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오늘은 전투에 나가는 것이 아니니 무거운 갑옷 대신 간단한 가죽 보호구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저번에 내가 몇 마리는 잡았는지 알기는 하냐? 다섯 마리였거든, 다섯 마리? 넌 하나도 못 잡고 완전 허탕 치고 있었잖아!”
“누가 들으면 늑대 다섯 마리 잡은 줄 알겠네. 베른 네가 잡은 건 고작해야 토끼였잖냐. 무슨 주먹만도 못한 개구리 같은 놈들만 줄줄이 잡아 놓고는 자랑질이야? 그 정도는 저기 라텐 강에서 노는 애들도 30분이면 잡아!”
“너는 그런 개구리라도 잡아 본 적 있냐?”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높고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베아트리스는 뒤를 힐끔 눈짓했다. 베른이 게렌과 킬킬거리며 농을 주고받고 있었다. 며칠 전 술집을 발칵 뒤집어 놓아 징계를 받은 일 때문에 골이 나 있더니, 지금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베아트리스는 오늘 사냥 때 베른과 이야기해 보라고 클로드에게 말을 붙이려 말고삐를 잡아당겼다가, 이런, 하고 중얼거렸다. 클로드와 에티엔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클로드는 최근 부쩍 에티엔과 자주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그 사실에 대해 집사장 미레트 부인에게 넌지시 일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클로드는 에티엔이 여기 적응하게 도와주는 데 책임감 같은 걸 갖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클로드와 신생아 때부터 함께 자라 왔던 베아트리스의 의견은 달랐다.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어딘가 수상했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예쁜 베타 시녀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는 일화의 주인공이자 성 안에서 제일가는 바람둥이 알파로서 감히 단언하건대 뭔가 촉이 삐용삐용 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미레트 부인도 어딘가 수상한 걸 눈치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닭 없이 확신했다.
클로드는 지금도 에티엔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입가에는 평소엔 잘 보여 주지 않는 엷은 미소까지 띠고서. 에티엔은 어려 보이는 그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며 듣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슬쩍 그들 뒤꽁무니 가까이 붙었다. 클로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아르플뢰르에 비하면 추운 곳이죠. 겨울이면 눈이 잔뜩 쌓여서 밖에 나다니기 힘들 정도니까요. 하루 종일 눈만 치울 때도 있어요.”
“그렇구나. 전 눈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특히나 쌓인 건 더. 잔뜩 온다니 궁금하네요. 보고 싶어요.”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봤을 텐데. 3월 초까지는 간혹 눈이 와요. 그때쯤 되면 쌓이진 않지만.”
시시한 내용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잔뜩 달아올랐던 흥미가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슬쩍 클로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에티엔과 눈을 맞추며 상냥하고 성실하게 이 고장의 날씨에 대해 계속 설명해 주고 있었다. 클로드는 으레 다른 귀족들 앞에서 그러하듯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레트 부인이 말했던 대로 단순히 책임감을 느껴 잘해 주나 보다. 이 도련님은 친한 사람들 앞에선 입만 열면 불평을 늘어놓는 주제에 묘하게 성실한 구석이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그렇게 결론짓고 그들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때, 앞에서 계속 이어지던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 다른 기사들의 소란한 말소리, 새 울음소리에 묻혀 티조차 나지 않은 짤막한 침묵이었다. 그 순간 베아트리스는 클로드의 시선을 보았다.
에티엔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멈췄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적당한 다정함도, 예의도, 무관심도, 호기심도, 혐오도 아닌 무엇. 베아트리스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클로드가 누군가를 저렇게 바라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에티엔이 검은 숲에 대해서 무어라 물어보며 클로드에게 다시 얼굴을 돌렸다. 클로드는 조금 전과 똑같이 웃으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뭐였을까. 그냥 잘못 본 것이었으면 좋겠다. 베아트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의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우와…….”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올렸다. 클로드가 설명한 대로, 검은 숲 안은 정말로 나무로 빽빽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여기 버티고 서서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자라난 것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엇갈리듯 하늘을 막아선 가지와 뾰족뾰족하고 사철 푸른 이파리들 앞에선 봄 햇살도 맥을 못 추고 그 빛을 잃었다.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그늘 아래서 몇백 년 전부터 숲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여 만들어진 좁다란 길을 따라 일렬로 걸었다. 어둡고, 오래되고, 습한 냄새가 빠져나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바람에 실려 맴돌고 있었다.
에티엔은 예상보다 훨씬 어둡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뒤에 있는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정말…….”
하지만 에티엔은 말을 하려다 멈췄다. 클로드는 에티엔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검은색 눈썹,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는 파란 눈동자. 언제 꺼냈는지 어느새 시위를 메기고 있는 활과 화살.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로드는 처음 보았다. 평소 능숙하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사냥감을 노려보며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그야말로 맹수에 가까운 모습.
어느새 그는 알파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베타에 가까우리만치 완벽하게 페로몬을 감추고 있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맹수가 몸을 낮추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숨죽인 긴장과 위압감이 페로몬에 실려 형태를 갖추고 어른거렸다.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배경 음악처럼 내내 시끄럽던 기사들의 말소리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에티엔은 그 순간 말로만 듣던 루에르그의 강철 기병이 드디어 무엇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루에르그의 강철 기병. 전원 알파로 구성되어 있는 소수정예의 기사들. 가볍고 튼튼하기로 유명한 루에르그 강철 갑옷을 입고 일당백의 용맹을 휘두른다고 한다. 셰니에와 슈바르츠발트 가문이 영지 변경에서 계속 충돌할 때 셰니에의 기사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루에르그 놈을 만나서 팔이 잘려 돌아왔다면 특진을 시켜 줘야 한다. 목이 잘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빠르게 치고 빠지는 야습 작전을 택하곤 했었다. 아마 그 때문에 루에르그 기사들이 셰니에를 더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에티엔은 그들이 얼마나 용맹한지,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저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십수 명의 단련된 알파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 무리처럼 사냥감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일한 오메가인 에티엔은 압도되다 못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데, 온몸이 눌리는 것 같아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저, 숨어서 살아남기만을 기원해야 하는 사냥감이 된 것만 같다.
그 순간 어디선가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풀잎과 풀잎이 부자연스럽게 몸을 비비며 부닥치는 소리. 십수 명의 눈길이 동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단 하나의 소리. 그리고 이어진 정적. 사냥꾼과 사냥감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는 시간. 누가 먼저 움직일지 서로의 기척을 응시하는 시간. 이윽고 침묵은 깨어졌다. 먼저 움직인 건 사슴이었다. 수풀 사이로 귀와 짤막한 뿔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을 들어 올리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로 몰아!”
“앞으로 가!”
“달려!”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이 얽혔다. 달리는 몸에 부딪친 나뭇가지들이 부러졌다. 기사들은 어느새 사슴을 바짝 뒤쫓고 있었다. 사슴의 발굽이 필사적으로 땅을 박찰 때마다 흙먼지가 튀었다.
말발굽 소리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누가 지시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 무리는 사슴의 뒤를 바짝 뒤쫓고 나머지 두 무리는 사슴을 옆에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에티엔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얼결에 같이 달리긴 했는데 지금은 세 무리 중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는 기사도 아니고, 구색 맞추기로 가져온 활과 화살은 꺼내지도 못하고 메어 놓기만 한 상태였다. 애초에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것 자체가 훈련을 해야만 가능한 일인데, 오메가인 에티엔이 그런 걸 배웠을 리가 만무했다.
에티엔은 결국 뒤로 빠지는 쪽을 택했다. 여기서 그는 그냥 걸림돌일 뿐이었다. 방해가 되느니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낫다. 에티엔은 말의 속도를 늦추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말머리를 홱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에티엔의 말을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말끼리 충돌하고, 몸이 흔들리고, 하늘이 뒤집혔다. 몸이 위로 크게 떠오른다. 시야가 거꾸로 돌아가고 손안에서 말고삐가 빠져나가는 바로 그 순간, 에티엔은 보았다.
자신을 친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이윽고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느끼며 에티엔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클로드는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힘을 잔뜩 머금은 팽팽한 줄이 입술을 짓눌렀다. 내달리는 속도만큼 거세게 맞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의 눈은 부릅뜬 채로 사냥감의 뒤를 끈질기게 쫓았다. 사슴이 수풀을 뛰어넘고 갈색 둥치 너머로 달린다. 머뭇거리는 것도 멈추는 것도 하나 없었다. 오로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달리기 위해 태어난 짐승다웠다. 그리고 그 짐승들의 숨통을 끊는 것이 바로 포식자 알파의 역할이다. 길이 없던 오른쪽에서 베아트리스가 불쑥 나타났다. 사슴의 발굽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클로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껏 계속 좇았던 한 점, 사슴의 목덜미를 향해 클로드는 활시위를 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화살이 빠져나고 화살 깃이 공기를 갈랐다. 화살은 거침없이 날아가 사슴의 목을 꿰뚫는다. 사슴의 몸이 쓰러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