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검은 숲 이야기 6화
제1장. 봄의 신부 (6)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사냥 중이라 잔뜩 예민해진 오감이 곧바로 반응했다. 이 숲에는 늑대가 살고 있다. 혹시라도……?! 하지만 클로드의 눈에 보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 뒤에서 누군가 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확연히 작은 몸집, 멀리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카락. 에티엔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클로드는 어느새 말의 옆구리를 차고 있었다.
에티엔은 수풀 위에 떨어졌다. 절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몸이 두어 번 수풀 위를 구르자 나뭇가지가 꺾이고 잎이 흩날렸다. 에티엔의 말이 히힝 울며 뒤로 물러섰다. 클로드는 거의 몸을 날리듯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에티엔은 마치 조약돌처럼 수풀 속에 던져져 있었다. 떨어질 때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웅크린 형태 그대로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일단 겉보기에 피가 난 곳은 없다. 클로드는 그 사실에 우선 안도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낙마할 때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잘못 부딪쳐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는 흔했다.
클로드는 우선 에티엔의 코 아래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한 다음 그의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며 급히 이름을 외쳤다. 남들 앞에선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에티엔, 정신 차려요!”
에티엔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의식을 잃었나? 클로드는 에티엔의 어깨를 두어 번 흔들며 에티엔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에티엔, 일어나요, 에티엔!”
클로드가 흔들 때마다 에티엔의 몸에 붙어 있던 나뭇잎과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후, 에티엔은 느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연한 갈색빛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갈색인 속눈썹 아래에서 드러나는 그 순간,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티엔은 멍하니 몇 번 눈을 깜작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살았네요……?”
“덕분에 저도 살았습니다. 그보다, 다친 데는 없어요? 아프다거나?”
에티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멍한 듯 느리고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아픈 덴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여기 팔하고 다리 피부가 따끔거리긴 한데, 그거야 쓸린 정도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러면서 에티엔은 버릇처럼 예의 그 연하고 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클로드는 꼭 누군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짧고 작지만 분명한 통증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이 웃을 때가 아닌데, 화내고 성질내며 길길이 날뛰어도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안심하라며 웃고 있다니.
클로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에티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티엔은 팔에 난 생채기를 보여 주며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천이 찢어져 흰 피부가 까지고 붉은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혔다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흐르고 있었다.
에티엔의 말대로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는데도,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상처도 보았는데도, 직접 사람의 목을 찔러 본 적도 있는데도. 그런데도 어쩐지 이 자그마한 상처가 무척 끔찍하게 여겨져 클로드는 시선을 돌렸다.
“누가 한 짓인지……. 당장 밝혀내 처벌하겠습니다. 기껏 사냥에 따라왔는데 이런 험한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에티엔이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드는 당황해서 “네?” 하고 되물었다.
“그냥 사고예요, 이건. 정말 괜히 소동 피우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이건 누가 봐도 일부러 한 짓이잖습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가만히 있던 말이 넘어질 이유가……!”
하지만 에티엔은 다시 한번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저 하나 때문에 기사단을 들쑤실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클로드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에티엔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제 편을 들어주시면 안 되잖아요.”
클로드는 그제야 에티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기사들은 에티엔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니 지금도 에티엔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클로드만 달려온 것이리라. 그리고 에티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모든 기사들이 다 싫어하고 있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어 봤자 향후 기사단을 이끌어야 할 클로드의 인망만 잃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쓴단 말인가. 방금 크게 다칠 뻔했던 주제에,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다고. 클로드는 그렇게 소리치며 따져 묻고 싶었다. 가슴이 부글부글하며 금방이라도 큰소리가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에티엔은 클로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그스름한 이마 위로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갈색 눈동자에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선이 둥근 볼 위로 묻은 흙과, 살짝 벌어진 연한 빛의 입술. 클로드는 아까부터 줄곧 붙잡고 있던 에티엔의 어깨에서 느리게 손을 뗐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그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에티엔의 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흥분한 콧김을 내뿜는 말을 달래듯 귓잔등을 손으로 긁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사고를 당했으니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길을 모를 테니 베아트리스에게 함께 가라 하겠습니다. 겉보기엔 가벼워 보여도 믿을 만한 녀석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서 푹 쉬시기 바랍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투였지만 에티엔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클로드는 여전히 시선을 옆으로 향한 채 손을 들어 베아트리스를 불렀다.
사냥에서 돌아오자마자 클로드는 베른을 향해 빠르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의 사정을 아는 몇몇 기사들은 일찌감치 그 근처에서 멀리 떨어진 지 오래였고, 모르고 옆에 있던 기사들도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는 움찔하며 자리를 비키는 바람에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이 길이 만들어졌다. 베른은 말에서 내려 활을 챙기다가 바로 앞에 와서 선 클로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클로드는 짓씹듯이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클로드의 낮고 성난 목소리에 모든 기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클로드의 앞에 선 베른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래도 성난 맹금류처럼 부리부리한 눈에 매부리코 덕에 언제나 유달리 거칠어 보이는 얼굴인데, 지금은 조금도 반성하는 기미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것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실수라는 변명 같은 건 하지 마. 기사라는 놈이 제 말도 못 다뤄서 사고를 냈다면 여기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클로드는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클로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멀리서 힐끔거리면서 상황을 구경하던 신참 기사들은 클로드가 화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깨닫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빈정거리거나 타박을 주며 농담처럼 넘어가곤 하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리만 안 질렀지 당장이라도 끓어오르는 화를 벌컥 터뜨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그 사람이 죽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알죠.”
걸걸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까 했죠.”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였다. 베른은 반항적으로 눈을 희게 뜨고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주위의 기사들은 다들 갑자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말의 털을 빗기거나 혹은 갑자기 잊은 물건을 가지러 가거나 생전 스스로는 안 하던 갑옷 손질을 하러 연병장을 나서거나 했다.
베른은 기가 차 입을 벌린 클로드를 향해 쏘아붙였다.
“셰니에 새끼들하고 친해져 봤자 뭐가 좋답니까? 어차피 뒤통수나 때릴 새끼들인데.”
“말조심해.”
클로드가 경고했다. 하지만 베른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 하고 비웃음을 날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작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사이좋게 지내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껏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예? 이제 친하게 지내기로 했으니 모두 다 싹 잊자 이겁니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누굴 함부로 공격할 권리는 없어!”
커다란 고함 소리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베른은 여전히 클로드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클로드는 숨을 고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금방이라도 때리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리는 손을 억지로 힘을 주어 붙잡는 모양새였다. 베른은 씨근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낮고 조용했으나 격렬했다.
“아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텐 있죠. 씨발, 세상 누가 와도, 도련님이나 영주님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셰니에 종자를 말려 버릴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착각하지 마. 너도, 네 형 루드비히도 결국 기사였어. 기사는 전쟁터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원한을 가지겠다면 네가 죽인 인간의 숫자부터 먼저 세라.”
클로드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위압적이었다. 우성 알파만이 가질 수 있는 포식자의 위압감이 몸에서, 목소리에서, 눈동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베른 역시도 알파였다. 그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차라리 그러면 다시 전쟁이라도 하지, 뭣 하러 셰니에 새끼를 여기 데려옵니까? 차라리 아까 그놈이 죽어 버렸으면 화해고 뭐고 다 엎어지고 재미났을 텐…….”
그 순간 클로드의 손이 베른의 멱살을 잡아챘다. 베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우두둑, 하고 약한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닌 척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베아트리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클로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베른을 노려보았다. 베른은 여전히 고까운 표정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그만해요, 도련님. 너무 열 내지 마시죠.”
베아트리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었다. 클로드가 마지못해 손을 떨어트리자 베른은 너덜너덜해진 옷깃을 탁탁 손으로 털어 냈다.
“자자, 도련님. 베른이 싸가지 없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요. 성질 가라앉히시고, 이 녀석 처분은 마르빈 경에게 맡기죠. 야, 베른. 넌 나랑 가자. 이제 넌 죽었어.”
베아트리스는 넉살 좋게 말하면서 양손으로 두 사람 사이를 벌렸다. 그러고는 베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같이 가자고 턱짓했다. 베른은 여전히 시건방진 눈빛이었지만 순순히 베아트리스를 따라갔다. 클로드는 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베아트리스가 조금만 더 늦었어도 어쩌면 베른을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고 클로드는 순간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까 에티엔이 죽어 버렸다면, 하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 이성이 거의 날아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윙윙거리고, 핏줄이 이마에 돋고 몸이 열기에 휩쓸려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말로 때리지 않은 게, 아니, 검을 꺼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걸까. 클로드는 잠시 낮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도 얼굴이 뜨거웠다.
***
성 앞 마을에는 술집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큰사슴 여관이었다. 말이 여관이었지 순례자도 상인도 거의 없는 이런 동네의 여관은 으레 술을 파는 걸로 밥벌이를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이 큰사슴 여관은 동네 유일의 술집이라는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기가 막힌 벌꿀술을 내놓았기에 언제나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특히나 가을걷이가 끝난 10월이나 신년 즈음에는 발 디딜 틈도 없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창 봄, 그야말로 농번기이므로 가게 안은 한산했다.
큰사슴 여관의 주인 안나는 클로드와 베아트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걸었다.
“클로드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베아트리스 너는 외상값 언제 갚을래?”
그러면서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짐짓 위협적으로 탁탁 터는 시늉을 했다. 베아트리스는 하핫, 하고 웃으면서 시원스레 답했다.
“제가 누굽니까, 신용과 신뢰의 상징 베아트리스잖아요? 오늘 술값에다 외상값까지 몽땅 깨끗하게 털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그러면서 베아트리스는 클로드 몰래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가리키며 안나에게 찡긋 눈짓을 해 보였다.
“허이구, 저 화상.”
안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느새 손은 재빠르게 잔을 꺼내고 있었다. 클로드와 베아트리스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클로드는 억지로 끌려온 강아지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명랑하게 손뼉을 치며 클로드를 불렀다.
“자, 자, 도련님! 얼굴 풀어야죠.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찌푸리고 있으면 오메가들이 다가왔다가도 도망갈걸요?”
“그런 건 난 관심도 상관도 없어. 그리고 만일 여기 오메가가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네가 가만 놔두질 않을 거잖냐?”
농담에 빈정거림으로 대답하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악담을 들었는데도 키득거리며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 봐요, 늘 이러니 영주 아드님에 잘생겼고 키 크고 우성 알파고 검 잘 쓰는 우리 도련님이 여태껏 인기가 없죠. 그러니 도련님한테 매몰차게 딱지 맞은 사람들 기분을 제가 풀어 주러 다니느라 바쁜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베아트리스는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했다. 능숙하게 수작을 걸다가도 천진한 표정을 짓는 건 베아트리스의 특기였다. 그 특기에 홀랑 넘어간 성 안의 하녀들이 몇 명이었더라……. 일단 열 손가락을 넘어간 이후로부터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큰사슴 여관 특제 벌꿀술이 나왔다. 클로드는 대꾸하는 것을 멈추고 잔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꿀의 향기와 희미한 달콤함이 어린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조금 전까지 잔뜩 흐려져 있던 기분이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도련님, 술이 들어가니까 기분은 좀 낫죠?”
베아트리스가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었다. 클로드는 대꾸하지 않고 재차 술을 들이켰다.
“베른도 두 달 근신이니까, 그렇게까지 마음 상하지 않으셔도 돼요.”
베아트리스가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말이 클로드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곧 술잔을 내려놓고 베아트리스를 노려보았다.
“고작 두 달?”
아이쿠, 하고 베아트리스가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옆으로 슬그머니 돌렸다. 말을 잘못 꺼냈다. 클로드는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두 달이군그래. 만일 그 자식이 나나 어머니한테도 똑같은 짓을 했어도 두 달로 끝났을까? 아니지, 당장 사형당하거나 목숨만 건져서 영지에서 쫓겨났겠지!”
말하는 내내 억지로 억누르려던 감정이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벌컥 높아진 목소리에 안나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베른이 와서 뒤집어 놓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베아트리스는 손을 슬쩍 들어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는 클로드를 달래기 시작했다.
“물론 터무니없이 약한 벌인 건 저도 알죠. 그런데 도련님, 좀 이해는 해 주셔야 해요. 우린 20년 가까이 셰니에와 적대했어요. 아르플뢰르에서 난 건 포도주조차 안 마시겠다 영주님이 공언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래서 우린 그 유명하다는 아르플뢰르 포도주를 저번 결혼식이 열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못 대 봤잖아요. 애초에 셰니에는 썩을 놈들이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배우고 자란 놈들한테 갑자기 사이좋게 잘 대해 주라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죠. 시간이 필요해요. 적응할 시간이.”
베아트리스의 말은 조곤조곤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클로드는 잠시 침묵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스는 참을성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베른도 지금 한 철만 저렇게 난리치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그러지도 않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서 그런 것도 있어요. 원래 셰니에 죽일 생각만 하고 살던 애들이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어버린 셈이잖아요? 심심하니 행패도 부리고 싶고 그런 거죠. 베른도 어디 변방 보내서 몇 달 뺑이 치면 괜찮아질 겁니다. 화 푸세요.”
“그런 게 아냐, 내가 화난 건…….”
클로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탁자의 나뭇결과 나사못에 못 박혀 있었다. 오래 써서 사이사이로 때가 끼고 꺼멓게 변색된, 휘몰아치는 나뭇결. 마치 클로드의 마음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클로드는 마침내 꺼냈다. 줄곧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그 말을.
“이 성에서 왜 나만, 그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느냔 말이야.”
억지로 심장에서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 평소에는 그럴듯한 울림이던 목소리가 지금은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을 무시하지. 그건…… 그건 아냐, 옳지 않아.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애초에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잖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건 그렇다 쳐도…….”
“도련님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네요.”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한테 결혼은 사랑이랑 상관없잖아요?”
클로드의 목소리가 멈췄다. 베아트리스는 정말로 이해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은 가문끼리의 결합이잖아요.”
클로드는 그렇다고, 베아트리스의 말이 맞다고 대답해야 했다. 정말로 귀족들의 결혼은 사랑의 유무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오로지 가문을 위한 것이므로 서로의 조건만이 중요했다. 그럼에도, 클로드는 평민들이 그러하듯이 서로 좋아해서, 마음에 들어서 함께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낭만적이라거나 유치하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해서 지금껏 결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클로드는 잠깐 침묵하더니 아까의 대화를 모두 지워 버리려는 듯 보다 큰 목소리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1장. 봄의 신부 (6)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사냥 중이라 잔뜩 예민해진 오감이 곧바로 반응했다. 이 숲에는 늑대가 살고 있다. 혹시라도……?! 하지만 클로드의 눈에 보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 뒤에서 누군가 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확연히 작은 몸집, 멀리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카락. 에티엔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클로드는 어느새 말의 옆구리를 차고 있었다.
에티엔은 수풀 위에 떨어졌다. 절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몸이 두어 번 수풀 위를 구르자 나뭇가지가 꺾이고 잎이 흩날렸다. 에티엔의 말이 히힝 울며 뒤로 물러섰다. 클로드는 거의 몸을 날리듯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에티엔은 마치 조약돌처럼 수풀 속에 던져져 있었다. 떨어질 때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웅크린 형태 그대로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일단 겉보기에 피가 난 곳은 없다. 클로드는 그 사실에 우선 안도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낙마할 때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잘못 부딪쳐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는 흔했다.
클로드는 우선 에티엔의 코 아래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한 다음 그의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며 급히 이름을 외쳤다. 남들 앞에선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에티엔, 정신 차려요!”
에티엔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의식을 잃었나? 클로드는 에티엔의 어깨를 두어 번 흔들며 에티엔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에티엔, 일어나요, 에티엔!”
클로드가 흔들 때마다 에티엔의 몸에 붙어 있던 나뭇잎과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후, 에티엔은 느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연한 갈색빛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갈색인 속눈썹 아래에서 드러나는 그 순간,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티엔은 멍하니 몇 번 눈을 깜작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살았네요……?”
“덕분에 저도 살았습니다. 그보다, 다친 데는 없어요? 아프다거나?”
에티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멍한 듯 느리고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아픈 덴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여기 팔하고 다리 피부가 따끔거리긴 한데, 그거야 쓸린 정도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러면서 에티엔은 버릇처럼 예의 그 연하고 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클로드는 꼭 누군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짧고 작지만 분명한 통증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이 웃을 때가 아닌데, 화내고 성질내며 길길이 날뛰어도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안심하라며 웃고 있다니.
클로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에티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티엔은 팔에 난 생채기를 보여 주며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천이 찢어져 흰 피부가 까지고 붉은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혔다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흐르고 있었다.
에티엔의 말대로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는데도,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상처도 보았는데도, 직접 사람의 목을 찔러 본 적도 있는데도. 그런데도 어쩐지 이 자그마한 상처가 무척 끔찍하게 여겨져 클로드는 시선을 돌렸다.
“누가 한 짓인지……. 당장 밝혀내 처벌하겠습니다. 기껏 사냥에 따라왔는데 이런 험한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에티엔이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드는 당황해서 “네?” 하고 되물었다.
“그냥 사고예요, 이건. 정말 괜히 소동 피우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이건 누가 봐도 일부러 한 짓이잖습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가만히 있던 말이 넘어질 이유가……!”
하지만 에티엔은 다시 한번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저 하나 때문에 기사단을 들쑤실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클로드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에티엔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제 편을 들어주시면 안 되잖아요.”
클로드는 그제야 에티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기사들은 에티엔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니 지금도 에티엔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클로드만 달려온 것이리라. 그리고 에티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모든 기사들이 다 싫어하고 있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어 봤자 향후 기사단을 이끌어야 할 클로드의 인망만 잃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쓴단 말인가. 방금 크게 다칠 뻔했던 주제에,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다고. 클로드는 그렇게 소리치며 따져 묻고 싶었다. 가슴이 부글부글하며 금방이라도 큰소리가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에티엔은 클로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그스름한 이마 위로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갈색 눈동자에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선이 둥근 볼 위로 묻은 흙과, 살짝 벌어진 연한 빛의 입술. 클로드는 아까부터 줄곧 붙잡고 있던 에티엔의 어깨에서 느리게 손을 뗐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그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에티엔의 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흥분한 콧김을 내뿜는 말을 달래듯 귓잔등을 손으로 긁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사고를 당했으니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길을 모를 테니 베아트리스에게 함께 가라 하겠습니다. 겉보기엔 가벼워 보여도 믿을 만한 녀석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서 푹 쉬시기 바랍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투였지만 에티엔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클로드는 여전히 시선을 옆으로 향한 채 손을 들어 베아트리스를 불렀다.
사냥에서 돌아오자마자 클로드는 베른을 향해 빠르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의 사정을 아는 몇몇 기사들은 일찌감치 그 근처에서 멀리 떨어진 지 오래였고, 모르고 옆에 있던 기사들도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는 움찔하며 자리를 비키는 바람에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이 길이 만들어졌다. 베른은 말에서 내려 활을 챙기다가 바로 앞에 와서 선 클로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클로드는 짓씹듯이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클로드의 낮고 성난 목소리에 모든 기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클로드의 앞에 선 베른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래도 성난 맹금류처럼 부리부리한 눈에 매부리코 덕에 언제나 유달리 거칠어 보이는 얼굴인데, 지금은 조금도 반성하는 기미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것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실수라는 변명 같은 건 하지 마. 기사라는 놈이 제 말도 못 다뤄서 사고를 냈다면 여기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클로드는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클로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멀리서 힐끔거리면서 상황을 구경하던 신참 기사들은 클로드가 화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깨닫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빈정거리거나 타박을 주며 농담처럼 넘어가곤 하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리만 안 질렀지 당장이라도 끓어오르는 화를 벌컥 터뜨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그 사람이 죽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알죠.”
걸걸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까 했죠.”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였다. 베른은 반항적으로 눈을 희게 뜨고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주위의 기사들은 다들 갑자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말의 털을 빗기거나 혹은 갑자기 잊은 물건을 가지러 가거나 생전 스스로는 안 하던 갑옷 손질을 하러 연병장을 나서거나 했다.
베른은 기가 차 입을 벌린 클로드를 향해 쏘아붙였다.
“셰니에 새끼들하고 친해져 봤자 뭐가 좋답니까? 어차피 뒤통수나 때릴 새끼들인데.”
“말조심해.”
클로드가 경고했다. 하지만 베른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 하고 비웃음을 날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작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사이좋게 지내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껏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예? 이제 친하게 지내기로 했으니 모두 다 싹 잊자 이겁니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누굴 함부로 공격할 권리는 없어!”
커다란 고함 소리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베른은 여전히 클로드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클로드는 숨을 고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금방이라도 때리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리는 손을 억지로 힘을 주어 붙잡는 모양새였다. 베른은 씨근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낮고 조용했으나 격렬했다.
“아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텐 있죠. 씨발, 세상 누가 와도, 도련님이나 영주님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셰니에 종자를 말려 버릴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착각하지 마. 너도, 네 형 루드비히도 결국 기사였어. 기사는 전쟁터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원한을 가지겠다면 네가 죽인 인간의 숫자부터 먼저 세라.”
클로드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위압적이었다. 우성 알파만이 가질 수 있는 포식자의 위압감이 몸에서, 목소리에서, 눈동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베른 역시도 알파였다. 그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차라리 그러면 다시 전쟁이라도 하지, 뭣 하러 셰니에 새끼를 여기 데려옵니까? 차라리 아까 그놈이 죽어 버렸으면 화해고 뭐고 다 엎어지고 재미났을 텐…….”
그 순간 클로드의 손이 베른의 멱살을 잡아챘다. 베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우두둑, 하고 약한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닌 척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베아트리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클로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베른을 노려보았다. 베른은 여전히 고까운 표정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그만해요, 도련님. 너무 열 내지 마시죠.”
베아트리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었다. 클로드가 마지못해 손을 떨어트리자 베른은 너덜너덜해진 옷깃을 탁탁 손으로 털어 냈다.
“자자, 도련님. 베른이 싸가지 없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요. 성질 가라앉히시고, 이 녀석 처분은 마르빈 경에게 맡기죠. 야, 베른. 넌 나랑 가자. 이제 넌 죽었어.”
베아트리스는 넉살 좋게 말하면서 양손으로 두 사람 사이를 벌렸다. 그러고는 베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같이 가자고 턱짓했다. 베른은 여전히 시건방진 눈빛이었지만 순순히 베아트리스를 따라갔다. 클로드는 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베아트리스가 조금만 더 늦었어도 어쩌면 베른을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고 클로드는 순간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까 에티엔이 죽어 버렸다면, 하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 이성이 거의 날아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윙윙거리고, 핏줄이 이마에 돋고 몸이 열기에 휩쓸려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말로 때리지 않은 게, 아니, 검을 꺼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걸까. 클로드는 잠시 낮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도 얼굴이 뜨거웠다.
***
성 앞 마을에는 술집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큰사슴 여관이었다. 말이 여관이었지 순례자도 상인도 거의 없는 이런 동네의 여관은 으레 술을 파는 걸로 밥벌이를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이 큰사슴 여관은 동네 유일의 술집이라는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기가 막힌 벌꿀술을 내놓았기에 언제나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특히나 가을걷이가 끝난 10월이나 신년 즈음에는 발 디딜 틈도 없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창 봄, 그야말로 농번기이므로 가게 안은 한산했다.
큰사슴 여관의 주인 안나는 클로드와 베아트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걸었다.
“클로드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베아트리스 너는 외상값 언제 갚을래?”
그러면서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짐짓 위협적으로 탁탁 터는 시늉을 했다. 베아트리스는 하핫, 하고 웃으면서 시원스레 답했다.
“제가 누굽니까, 신용과 신뢰의 상징 베아트리스잖아요? 오늘 술값에다 외상값까지 몽땅 깨끗하게 털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그러면서 베아트리스는 클로드 몰래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가리키며 안나에게 찡긋 눈짓을 해 보였다.
“허이구, 저 화상.”
안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느새 손은 재빠르게 잔을 꺼내고 있었다. 클로드와 베아트리스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클로드는 억지로 끌려온 강아지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명랑하게 손뼉을 치며 클로드를 불렀다.
“자, 자, 도련님! 얼굴 풀어야죠.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찌푸리고 있으면 오메가들이 다가왔다가도 도망갈걸요?”
“그런 건 난 관심도 상관도 없어. 그리고 만일 여기 오메가가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네가 가만 놔두질 않을 거잖냐?”
농담에 빈정거림으로 대답하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악담을 들었는데도 키득거리며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 봐요, 늘 이러니 영주 아드님에 잘생겼고 키 크고 우성 알파고 검 잘 쓰는 우리 도련님이 여태껏 인기가 없죠. 그러니 도련님한테 매몰차게 딱지 맞은 사람들 기분을 제가 풀어 주러 다니느라 바쁜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베아트리스는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했다. 능숙하게 수작을 걸다가도 천진한 표정을 짓는 건 베아트리스의 특기였다. 그 특기에 홀랑 넘어간 성 안의 하녀들이 몇 명이었더라……. 일단 열 손가락을 넘어간 이후로부터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큰사슴 여관 특제 벌꿀술이 나왔다. 클로드는 대꾸하는 것을 멈추고 잔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꿀의 향기와 희미한 달콤함이 어린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조금 전까지 잔뜩 흐려져 있던 기분이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도련님, 술이 들어가니까 기분은 좀 낫죠?”
베아트리스가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었다. 클로드는 대꾸하지 않고 재차 술을 들이켰다.
“베른도 두 달 근신이니까, 그렇게까지 마음 상하지 않으셔도 돼요.”
베아트리스가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말이 클로드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곧 술잔을 내려놓고 베아트리스를 노려보았다.
“고작 두 달?”
아이쿠, 하고 베아트리스가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옆으로 슬그머니 돌렸다. 말을 잘못 꺼냈다. 클로드는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두 달이군그래. 만일 그 자식이 나나 어머니한테도 똑같은 짓을 했어도 두 달로 끝났을까? 아니지, 당장 사형당하거나 목숨만 건져서 영지에서 쫓겨났겠지!”
말하는 내내 억지로 억누르려던 감정이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벌컥 높아진 목소리에 안나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베른이 와서 뒤집어 놓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베아트리스는 손을 슬쩍 들어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는 클로드를 달래기 시작했다.
“물론 터무니없이 약한 벌인 건 저도 알죠. 그런데 도련님, 좀 이해는 해 주셔야 해요. 우린 20년 가까이 셰니에와 적대했어요. 아르플뢰르에서 난 건 포도주조차 안 마시겠다 영주님이 공언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래서 우린 그 유명하다는 아르플뢰르 포도주를 저번 결혼식이 열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못 대 봤잖아요. 애초에 셰니에는 썩을 놈들이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배우고 자란 놈들한테 갑자기 사이좋게 잘 대해 주라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죠. 시간이 필요해요. 적응할 시간이.”
베아트리스의 말은 조곤조곤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클로드는 잠시 침묵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스는 참을성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베른도 지금 한 철만 저렇게 난리치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그러지도 않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서 그런 것도 있어요. 원래 셰니에 죽일 생각만 하고 살던 애들이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어버린 셈이잖아요? 심심하니 행패도 부리고 싶고 그런 거죠. 베른도 어디 변방 보내서 몇 달 뺑이 치면 괜찮아질 겁니다. 화 푸세요.”
“그런 게 아냐, 내가 화난 건…….”
클로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탁자의 나뭇결과 나사못에 못 박혀 있었다. 오래 써서 사이사이로 때가 끼고 꺼멓게 변색된, 휘몰아치는 나뭇결. 마치 클로드의 마음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클로드는 마침내 꺼냈다. 줄곧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그 말을.
“이 성에서 왜 나만, 그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느냔 말이야.”
억지로 심장에서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 평소에는 그럴듯한 울림이던 목소리가 지금은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을 무시하지. 그건…… 그건 아냐, 옳지 않아.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애초에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잖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건 그렇다 쳐도…….”
“도련님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네요.”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한테 결혼은 사랑이랑 상관없잖아요?”
클로드의 목소리가 멈췄다. 베아트리스는 정말로 이해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은 가문끼리의 결합이잖아요.”
클로드는 그렇다고, 베아트리스의 말이 맞다고 대답해야 했다. 정말로 귀족들의 결혼은 사랑의 유무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오로지 가문을 위한 것이므로 서로의 조건만이 중요했다. 그럼에도, 클로드는 평민들이 그러하듯이 서로 좋아해서, 마음에 들어서 함께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낭만적이라거나 유치하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해서 지금껏 결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클로드는 잠깐 침묵하더니 아까의 대화를 모두 지워 버리려는 듯 보다 큰 목소리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