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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엄마.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내가 곧 넓은 곳으로 모실 테니까.”
지아는 마른 수건으로 엄마의 얼굴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며 말했다.
다행히 회사에서 후원하는 납골당이 있어 엄마를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산 아래에 있는 터라 직원 할인을 받아도 그녀의 수준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그 탓에 별수 없이 지하로 모시게 됐다. 사진과 화병, 몇 가지 엄마의 물건들을 넣으면 꽉 차는 공간이지만 이 정도가 그녀의 능력 범위였다.
액자 속 엄마는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을 많이 찍어 놓을 걸 후회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당신을 제대로 사진에 담아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러나세요.”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1층으로 올라와 천천히 로비를 가로지를 때였다. 웬 남자가 지아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지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중년의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네? 물러나라니…….”
그 순간 1층 로비의 유리벽 너머로 까만 세단 두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서는 게 보였다.
이윽고 운전석에서 머리가 흰 남자가 나오더니 서둘러 차량을 돌아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열린 공간으로 뻗는 긴 다리가 보였다.
햇살을 반사해 중후하게 빛나는 구두, 몸을 빈틈없이 감싼 까만 슈트.
차에서 내린 젊은 남자는 고고한 자태로 걸음을 옮겼다. 지아는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석고상처럼 매끈한 피부와 그린 듯이 우뚝 선 콧날, 쌍꺼풀 없이 길게 난 눈매와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좀처럼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눈동자가 스치듯 지아에게 향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지아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남자는 그렇게 그녀를 스쳐 지났고, 그제야 그의 곁에 많은 이들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
지아는 저를 막는 손이 사라졌음에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아우라에 압도당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도 저처럼 슬픔을 느낄까 궁금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후에 찾아오는 처절한 공허함을 알고 있을지. 얼굴만 봐서는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데.
저도 모르게 남자를 떠올리던 지아는 상념을 지우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바보처럼 여기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멈췄던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 남자가 걸었던 통로를 바라보았다.
통로 끝 VIP층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다. 꼭 아까의 일은 모두 꿈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납골당 밖으로 나오자 매미 소리와 도심의 소음이 섞여들었다.
잔인한 여름이었다.
* * *
두 달 후.
지아는 호화로운 로비에 들어선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콧속 깊이 들어오는 은은한 향기와 넓고 화려한 실내, 로비 한쪽에는 둥근 바와 편안해 보이는 소파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었다.
아름다운 조명과 편안한 음악, 그 사이를 오가는 직원과 고급스러운 차림새를 한 사람들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에겐 낯설기만 한 광경이었다.
‘여기만 다른 세계 같아.’
평소 그녀가 선망하던 서울의 한 유명 호텔이었다. 언젠가 하루쯤 이곳에 머물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꿈의 실현이나 다름없었다.
지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발걸음을 떼었다.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대리석 바닥과 마찰한 플랫슈즈가 딱딱 소리를 내며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렸다.
손에 지갑 하나만 들고 프런트로 향한 그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 묵고 싶습니다.”
화장기는커녕 일자로 묶은 머리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지아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직원이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현재 빈 객실이 없습니다.”
“단 하나도요?”
“스위트룸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친절함에서 멋쩍음으로 변한 미소는 말하자면 ‘어차피 당신은 스위트룸의 고객이 아니잖습니까’ 정도의 의미인 듯했다.
“주세요.”
지아는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냈다. 그러자 직원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스위트룸 말씀이십니까?”
“그것밖에 안 남았다면서요.”
자존심이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밤 반드시 선망하던 이 호텔에 묵기로 했으니까. 그 굳은 결심이 스위트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지아는 그렇게 직원에게서 검은색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대번에 VIP 고객이 되었다는 안내도 받았지만, 다시 올 일은 없기에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올라서야 객실에 도착했는데, 타인의 친절마저 성가셨던 지아는 그를 빨리 보내고 낯선 공간에 혼자 남았다.
“여기가 스위트룸이구나.”
안으로 들어선 지아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넓은 내부는 확실히 혼자서 묵기엔 사치스러웠다. 이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찾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저와는 다른 위치의 사람들일 것이다.
지아는 곧 무덤덤한 얼굴로 창가의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쿠션은 딱딱한 방바닥과는 비교할 수 없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몸을 감싸는 느낌이 집에 있는 낡아빠진 이불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돈이 좋긴 하네.”
염세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일 보던 서울의 빌딩숲도 근사한 곳에서 보니 색다르게 보였다. 해외의 야경을 보는 듯 이국적으로만 느껴졌다. 이런 게 바로 삶의 각도란 것일까 생각했다.
“같은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달라지지.”
다정하게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엄마는 어려운 집안 탓에 교육은 받지 못하셔도 살아생전 지아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알려 주셨다.
“이것 봐. 앞에서 보면 둥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금만 기울여도 뾰족해지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불행에 매몰되면 끝까지 불행한 삶을 살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어 보면 그 안에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지아에게 유일한 행복은 바로 엄마였다.
고달픈 삶이라도 엄마의 눈을 빌리면 세상이 그리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허탈감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 나 보여?”
지아는 소파에 반쯤 몸을 묻은 채 까맣기만 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엄마 말대로 한번 살아 보려고.”
엄마의 유언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 건 49재를 마친 후였다.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잠든 날, 처음으로 엄마의 꿈을 꿨다.
엄마는 빛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러다 지아를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엄마의 뜻이 전해져 왔다.
남은 인생에서는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라고. 너무 참고 견디기만 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일단 뭘 누릴 수 있는지 볼까.”
그래서 하룻밤만이라도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내일부턴 평소의 손지아로 돌아갈지언정 오늘만큼은 남들처럼 자유롭게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모든 걸 정리한 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리라.
엄마와 함께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하루하루 견디는 것도 힘에 부치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생각을 멈춘 그녀가 직원이 두고 간 팸플릿을 펼쳤다. 그곳에는 VIP 고객이 누릴 수 있는 시설과 서비스에 대해 자세히 안내돼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피트니스나 수영장뿐 아니라, 기대보다 더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루프톱 바였다. 특히 VIP 고객에게는 칵테일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안내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이제 와 돈을 아끼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무상으로 제공받을 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좋았다. 살면서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루프톱 바로 향하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그녀는 곧 직원이 했던 것을 떠올리며 카드를 꺼냈다. 센서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Rooftop Bar’라고 적힌 층을 눌렀다. 부드럽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금세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내리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밝고 호화로웠던 로비와 달리 이곳은 어둡고 모던한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곳이었다. 사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서울의 전경이 발밑에 펼쳐진 듯했고, 경쾌한 팝이 쿵쿵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직원이 지아를 발견하곤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았느냐 묻기에 손에 쥐고 있던 까만 카드를 내밀며 대답했다.
“칵테일 마시러 왔는데요.”
그러자 직원은 지아의 카드를 확인하더니 곧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안내했다.
“엄마.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내가 곧 넓은 곳으로 모실 테니까.”
지아는 마른 수건으로 엄마의 얼굴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며 말했다.
다행히 회사에서 후원하는 납골당이 있어 엄마를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산 아래에 있는 터라 직원 할인을 받아도 그녀의 수준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그 탓에 별수 없이 지하로 모시게 됐다. 사진과 화병, 몇 가지 엄마의 물건들을 넣으면 꽉 차는 공간이지만 이 정도가 그녀의 능력 범위였다.
액자 속 엄마는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을 많이 찍어 놓을 걸 후회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당신을 제대로 사진에 담아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러나세요.”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1층으로 올라와 천천히 로비를 가로지를 때였다. 웬 남자가 지아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지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중년의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네? 물러나라니…….”
그 순간 1층 로비의 유리벽 너머로 까만 세단 두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서는 게 보였다.
이윽고 운전석에서 머리가 흰 남자가 나오더니 서둘러 차량을 돌아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열린 공간으로 뻗는 긴 다리가 보였다.
햇살을 반사해 중후하게 빛나는 구두, 몸을 빈틈없이 감싼 까만 슈트.
차에서 내린 젊은 남자는 고고한 자태로 걸음을 옮겼다. 지아는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석고상처럼 매끈한 피부와 그린 듯이 우뚝 선 콧날, 쌍꺼풀 없이 길게 난 눈매와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좀처럼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눈동자가 스치듯 지아에게 향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지아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남자는 그렇게 그녀를 스쳐 지났고, 그제야 그의 곁에 많은 이들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
지아는 저를 막는 손이 사라졌음에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아우라에 압도당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도 저처럼 슬픔을 느낄까 궁금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후에 찾아오는 처절한 공허함을 알고 있을지. 얼굴만 봐서는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데.
저도 모르게 남자를 떠올리던 지아는 상념을 지우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바보처럼 여기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멈췄던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 남자가 걸었던 통로를 바라보았다.
통로 끝 VIP층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다. 꼭 아까의 일은 모두 꿈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납골당 밖으로 나오자 매미 소리와 도심의 소음이 섞여들었다.
잔인한 여름이었다.
* * *
두 달 후.
지아는 호화로운 로비에 들어선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콧속 깊이 들어오는 은은한 향기와 넓고 화려한 실내, 로비 한쪽에는 둥근 바와 편안해 보이는 소파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었다.
아름다운 조명과 편안한 음악, 그 사이를 오가는 직원과 고급스러운 차림새를 한 사람들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에겐 낯설기만 한 광경이었다.
‘여기만 다른 세계 같아.’
평소 그녀가 선망하던 서울의 한 유명 호텔이었다. 언젠가 하루쯤 이곳에 머물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꿈의 실현이나 다름없었다.
지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발걸음을 떼었다.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대리석 바닥과 마찰한 플랫슈즈가 딱딱 소리를 내며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렸다.
손에 지갑 하나만 들고 프런트로 향한 그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 묵고 싶습니다.”
화장기는커녕 일자로 묶은 머리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지아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직원이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현재 빈 객실이 없습니다.”
“단 하나도요?”
“스위트룸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친절함에서 멋쩍음으로 변한 미소는 말하자면 ‘어차피 당신은 스위트룸의 고객이 아니잖습니까’ 정도의 의미인 듯했다.
“주세요.”
지아는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냈다. 그러자 직원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스위트룸 말씀이십니까?”
“그것밖에 안 남았다면서요.”
자존심이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밤 반드시 선망하던 이 호텔에 묵기로 했으니까. 그 굳은 결심이 스위트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지아는 그렇게 직원에게서 검은색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대번에 VIP 고객이 되었다는 안내도 받았지만, 다시 올 일은 없기에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올라서야 객실에 도착했는데, 타인의 친절마저 성가셨던 지아는 그를 빨리 보내고 낯선 공간에 혼자 남았다.
“여기가 스위트룸이구나.”
안으로 들어선 지아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넓은 내부는 확실히 혼자서 묵기엔 사치스러웠다. 이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찾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저와는 다른 위치의 사람들일 것이다.
지아는 곧 무덤덤한 얼굴로 창가의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쿠션은 딱딱한 방바닥과는 비교할 수 없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몸을 감싸는 느낌이 집에 있는 낡아빠진 이불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돈이 좋긴 하네.”
염세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일 보던 서울의 빌딩숲도 근사한 곳에서 보니 색다르게 보였다. 해외의 야경을 보는 듯 이국적으로만 느껴졌다. 이런 게 바로 삶의 각도란 것일까 생각했다.
“같은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달라지지.”
다정하게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엄마는 어려운 집안 탓에 교육은 받지 못하셔도 살아생전 지아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알려 주셨다.
“이것 봐. 앞에서 보면 둥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금만 기울여도 뾰족해지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불행에 매몰되면 끝까지 불행한 삶을 살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어 보면 그 안에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지아에게 유일한 행복은 바로 엄마였다.
고달픈 삶이라도 엄마의 눈을 빌리면 세상이 그리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허탈감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 나 보여?”
지아는 소파에 반쯤 몸을 묻은 채 까맣기만 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엄마 말대로 한번 살아 보려고.”
엄마의 유언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 건 49재를 마친 후였다.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잠든 날, 처음으로 엄마의 꿈을 꿨다.
엄마는 빛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러다 지아를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엄마의 뜻이 전해져 왔다.
남은 인생에서는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라고. 너무 참고 견디기만 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일단 뭘 누릴 수 있는지 볼까.”
그래서 하룻밤만이라도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내일부턴 평소의 손지아로 돌아갈지언정 오늘만큼은 남들처럼 자유롭게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모든 걸 정리한 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리라.
엄마와 함께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하루하루 견디는 것도 힘에 부치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생각을 멈춘 그녀가 직원이 두고 간 팸플릿을 펼쳤다. 그곳에는 VIP 고객이 누릴 수 있는 시설과 서비스에 대해 자세히 안내돼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피트니스나 수영장뿐 아니라, 기대보다 더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루프톱 바였다. 특히 VIP 고객에게는 칵테일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안내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이제 와 돈을 아끼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무상으로 제공받을 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좋았다. 살면서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루프톱 바로 향하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그녀는 곧 직원이 했던 것을 떠올리며 카드를 꺼냈다. 센서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Rooftop Bar’라고 적힌 층을 눌렀다. 부드럽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금세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내리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밝고 호화로웠던 로비와 달리 이곳은 어둡고 모던한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곳이었다. 사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서울의 전경이 발밑에 펼쳐진 듯했고, 경쾌한 팝이 쿵쿵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직원이 지아를 발견하곤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았느냐 묻기에 손에 쥐고 있던 까만 카드를 내밀며 대답했다.
“칵테일 마시러 왔는데요.”
그러자 직원은 지아의 카드를 확인하더니 곧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