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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5화)
5장 만물사(萬物士) 현칠(3)


“소문아, 이번 싸움에서는 지옥도의 힘을 사용하지 마라!”
“왜?”
“저번 손불이 일도 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지옥도의 힘을 사용하게 되면 혹시 그것을 알아보거나 노리는 자들이 생길지도 몰라.”
현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유소문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리고는 다시 연무대를 향해 발을 돌렸다.
“잘 다녀와.”
연무대로 걸어가는 유소문의 등을 향해 마치 어디 놀러 가기라도 하는 양 현칠은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독고은니와 나윤정도 유소문에게 달려와 그에게 행운을 빌어 주며 그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이렇게까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노광권 대협이 올 때까지 잠시만 버텨 주게나. 아니, 위험해지면 우리는 생각하지 말고 얼른 기권을 하게나.”
나백천은 유소문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지며 말했다. 그러나 유소문은 그런 나백천을 바라보며 오히려 빙그레 웃어 주었다.
“나 문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저보다 약한 상대가 나올지도.”
연무대로 올라가는 유소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백천은 이제는 제발 그의 말대로 그보다 약한 상대가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연무대로 올라선 유소문은 장엄하게 정렬되어 있는 당귀문의 무사들을 바라보고는 이내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알기로는 당귀문은 사파의 이류 문파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저들 모두는 태양혈이 우뚝 솟아오를 정도의 고수들이 아닌가. 이거 여차해서 전부 덤벼들면 힘들겠구나.’
유소문이 잠시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당귀문의 진영에서 첫 번째 결투자인 듯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인은 9척이 넘는 키에 거대한 덩치로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장포를 입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의 눈동자가 신기하게도 검은색이 아닌 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내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진영에서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천하도검 십삼 위의 화염신마 염기영이라니!”
놀랍게도 붉은 눈동자의 중년인은 이번에 유소문이 비무 상대로 정해 두었던 바로 그 화염신마 염기영이었다.
화염신마 염기영은 천하도검 십삼 위에 속하는 인물로, 그의 절기인 화령도법(火令刀法)은 파괴적인 면에서는 십삼 위 안에서도 우위를 차지했다. 그런 그가 천하도검 십삼 위 중 말단에 있는 이유는 패도적인 공격에 비해서 방어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패도적인 도법이다 보니 그만큼 빈틈도 많이 생기는 것이 바로 화령도법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하도검 십삼 위 안에 든 고수들끼리의 이야기이지, 그는 무림 백대고수들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초고수였다.
나백천의 얼굴에는 이미 포기라는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천하도검 십삼 위라면 아무리 무림 백대고수 중의 하나인 노광권이 최고조의 기량을 뿜어 댄다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자였다.
이미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절망감에 빠져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현칠만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호! 염기영이라니, 이거 일석이조로 일이 잘 풀리는데?’
현칠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 나가자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소문이 과연 염기영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뭐가 걱정이냐는 듯 현칠은 다시금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까짓것! 소문이가 위험할 것 같으면 내가 나서면 되지, 뭐.”
현칠의 중얼거림이 작아서인지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무대에 마주한 유소문과 염기영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고는 유소문이 먼저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해 예를 갖추었다.
“고명하신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염기영은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 눈앞의 젊은이에게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를 알면서도 내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그 기개를 칭찬해 주고 싶구만. 자네의 이름이 뭔가?”
“제 이름은 유소문이라고 합니다.”
“유소문이라?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별호도 없는 무명 도객입니다.”
“뭐시라고?”
염기영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단지 무림 초출에 풋내기라는 사실에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사자 결투에 이런 무명인을 내보낸 것 자체도 어이가 없었지만 천하도검 십삼 위에 위치한 자신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니 절로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당귀문의 진영에서도 당석원과 몇몇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와 반대로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진영은 수치심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겐가?”
“아닙니다.”
“음, 자네가 어쩌다 이런 자리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도가 너무 매섭다고 원망하지는 말게나.”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요.”
유소문의 대답에 또다시 당귀문의 진영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하도검 십삼 위의 염기영 앞에 서 있는 무명의 유소문은 누가 보더라도 어른과 아이에 승부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눈동자의 염기영은 자신의 애도인 광참도(狂斬刀)를 꺼내 들었다. 광참도는 그 길이만도 일 장에 달했고 둘레도 족히 1척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도였다.
그런 광참도의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반면 유소문 역시 자신의 지옥도를 꺼내 들었는데 부러진 듯한 유소문의 지옥도를 보며 이번에는 나씨세가 쪽에 사람들에게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럼 선배 된 입장으로 먼저 3초를 양보할 테니 공격해 들어오게나.”
염기영 또한 유소문의 도를 바라보고는 비웃는 양 그에게 선공을 허용했다. 그러자 차분한 표정으로 염기영을 노려보던 유소문은 지옥도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염기영을 향해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도천위룡 3식 위룡세.
돌진해 들어가던 유소문의 신형이 염기영의 눈앞에서 돌연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앞에 있던 유소문을 놓친 염기영은 머리 위로 느껴지는 광대한 기운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고, 어느새 염기영의 머리 위로 치솟은 유소문은 지옥도를 힘차게 염기영의 정수리로 내리쳤다.
지옥도에 실린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염기영은 광참도로 받아치지 않고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아깝게 허공을 가른 유소문은 도를 내리치며 생긴 원심력을 이용하여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착지한 후 그대로 몸을 비틀어 원을 그려 횡으로 베어 버렸다. 그러자 뒤로 물러났던 염기영은 재빨리 광참도를 치켜들고 자신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일도를 받아 냈다. 그러나 광참도에는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초다!’
순간 유소문의 일도가 아래에서부터 솟아 염기영의 가랑이 사이로 뻗어 올랐다.
느닷없는 한 수에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된 염기영은 삼 초를 양보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어쩔 수 없이 광참도를 뻗어 유소문의 머리를 노리고 찔러 들었다.
만약 여기서 유소문이 그대로 공격해 들어간다면 필시 염기영은 가랑이부터 머리까지 두 동강이 날 것이 분명했지만 유소문 역시 광참도에 의해 머리가 날아가게 생겼다. 할 수 없이 유소문은 공격을 돌려 광참도의 일격을 막아 내고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착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는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중 당석원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비명을 내지를 뻔했고, 반대로 나백천은 입이 찢어져라 기뻐하고 있었다.
안색이 붉어진 염기영을 바라보며 유소문은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배님, 삼 초를 양보한다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염기영은 무림 초짜라고 생각했던 유소문에게 불의에 일격을 당하자 그대로 손을 써서 그를 공격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염기영은 그가 범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네. 그대의 실력이 이렇게 출중한지 모르고 노부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
염기영은 자신이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는 듯 미안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천하도검 십삼 위가 누구인가! 강호의 수만 무림인 중에서도 상위 열세 명에 속하는 절대 고수이거늘, 그런 그가 삼 초를 양보하기로 하고도 그전에 손을 쓴 일은 그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염신마 염기영은 방금 전 유소문의 일격은 실로 매서워 어쩔 수 없이 공격할 수밖에 없었기에 명예보다는 목숨을 먼저 생각한 것이었다.
염기영은 조금 전에 방심하던 마음을 버리고 유소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보았다.
분명 그에게서 무림고수와도 같은 기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방금 전의 일 초는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 해도 무척 매서운 한 수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염기영은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러진 듯한 도를 쓰는 청년이라……. 이거, 내가 실수를 할 뻔했군. 자네가 요즘 전국을 떠돌면서 비무를 펼친다는 비무신마였구먼.”
지옥도가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던 유소문은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염기영의 입에서 비무신마란 말이 나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무신마라면 요즘 강호에서 가장 유명 인사가 아니었던가. 전국의 백대고수들과 비무를 펼치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 비무신마가 바로 유소문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유 소협이 비무신마였다니!”
독고은니 역시 놀란 토끼처럼 커다란 눈을 그저 껌뻑거리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었다. 물론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윤정 역시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제가 비무신마라……. 글쎄요.”
유소문은 이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잡아떼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자 염기영은 곧 그 말을 실력으로 알아내 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광참도를 쓸어 올렸다.
“좋아! 무인은 승부의 결과에 승복하면 되는 거지. 자네의 정체는 승부가 끝나고 물어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고민하던 유소문 역시 그의 말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에 자신도 지옥도를 고쳐 들고 자세를 잡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뿐, 기다리는 게 성미에 안 맞는지 먼저 움직인 염기영이었다.
염기영의 신형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광참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쇠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염기영의 절기인 화령도법이 펼쳐졌다는 것을 뜻하는 바이기도 했다.
―화령도법 일초식 화령일추.
새빨갛게 달궈진 광참도가 마치 허공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더니 빠른 속도로 유소문의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안면까지 날아 들어온 광참도를 지옥도로 맞받아친 유소문은 얼굴로 전해지는 화끈한 열기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염기영은 자신의 일격이 유소문에게 저지당하자 재빨리 광참도를 회수하여 치켜들고는 왼쪽 대각선으로 연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유소문은 강맹한 힘이 담긴 염기영의 연속 공격을 힘으로 받아 낼 자신이 없어 신형을 틀어 몸을 피하고는 비어 있는 염기영의 허리춤을 노렸다.
그러나 염기영 역시 광참도의 도 자루를 이용하여 그의 공격을 받아 내더니 횡으로 도를 돌려 몸통을 찔러 반격했다.
방금 전에 펼친 염기영의 한 수는 화령도법의 이초식인 화령강으로, 몸통을 공격하고 들어가는 일격은 겉으로는 그 힘이 약해 보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받아 냈을 경우, 그 안에 깃든 엄청난 잠력에 타격을 입게 되는 수법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유소문은 자신의 몸을 찔러 오는 광참도를 지옥도로 받아쳤다. 그러자 약해 보이던 염기영의 찌르기는 오히려 엄청난 힘을 뿜어내며 지옥도를 튕겨 내고 가속하여 유소문을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유소문은 순간 단전의 기를 모아 위룡신공의 비기인 위룡공을 발산했다.
“갈(喝)!”
음공이 실린 유소문의 목소리에 찔러 들어오던 일격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소문은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염기영은 자신의 일격이 통했다고 생각한 순간 목소리에 실린 기에 의해 몸이 잠시 멈칫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친 것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면서도 내심 유소문의 실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유소문 역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는 염기영의 무위에 실로 감탄하고 있었다.
다시 그 둘은 서로 손을 섞어 상대를 향해 도를 날렸지만 쉽게 승부가 결정 나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의 승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감탄의 음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백천과 독고현은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백 초가 넘게 맞싸우던 유소문과 염기영은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간격을 둔 유소문과 염기영은 더 이상 시간을 끌어 봐야 서로의 기력만 낭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유소문은 천하도검 십삼 위의 염기영을 상대로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날이 새도 승부를 볼 수 없을 것 같군. 서로의 절초로 승부하는 것이 어떻겠나?”
“바라는 바입니다.”
염기영의 말에 유소문도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이제 그 둘은 서로 최후의 일격만을 남기고 있었고 그 한 수로 승부는 갈라질 것이었다.
염기영은 서서히 자신의 최고 오의인 화룡비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새빨갛게 달궈진 광참도에서 놀랍게도 서서히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그 유명한 염기영의 화룡비라는 것을 알고는 숨죽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소문도 불타오르는 광참도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지옥도를 도집에 집어넣고는 발도술 자세를 취했다.
광참도가 드디어 거대한 불길을 내뿜자 염기영은 불꽃의 광참도를 유소문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광참도의 불길은 불꽃의 바다를 이루며 유소문을 향해 덮쳐 왔다.
살아 움직이는 듯 연무장을 메운 광참도의 불꽃이 유소문을 덮치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유소문의 손에서 발도술이 펼쳐졌다.
―도천위룡 오의 일섬(一剡).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새 유소문을 덮치던 불길이 파도가 갈라지듯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유소문의 신형이 도를 내지른 자세로 어느새 염기영의 뒤쪽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