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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7화)
5장 만물사(萬物士) 현칠(5)


적발귀왕 귀현기는 육십 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이던 전대의 대마두로서 그 시대에는 우는 아이도 그의 이름만 듣고 울음을 그칠 정도로 악명이 높았었다. 이 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강호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귀현기였지만 그동안 그의 손에 죽은 정파의 인물들만 해도 그 수가 오백 명을 넘어섰다.
정파의 사람들만을 골라 잔인하게 살해하던 그를 보다 못해 결국 무림맹에서 그를 잡기 위해 나섰지만, 마치 그런 무림맹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던 희대의 살인마가 바로 적발귀왕 귀현기였다.
그의 이름이 바로 정파의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나씨세가와 독고세가 역시 이류 문파라고는 하지만 정파에 속한 문파로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칠이었다.
“뭐야, 난 또 천하도검 십삼 위 정도로 유명한 놈인 줄 알았는데 처음 들어 보는 노인네잖아?”
현칠의 대답을 들은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사람들은 무식한 현칠을 향해 욕을 해 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적발귀왕 귀현기가 천하도검 십삼 위보다 훨씬 전대의 인물이기에 지금은 그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천하도검 십삼 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위의 삼왕에 버금가거나 아니면 천하도검 십삼 위의 맨 위 서열로 평가되는 천하오객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적발귀왕 귀현기도 더 이상 말만 많은 현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지 먼저 몸을 날리며 오른손 손가락을 세우고는 본신 무공인 조살공(爪印功)으로 현칠의 가슴팍을 노리며 들어갔다.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귀현기의 손가락이 현칠의 몸을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귀현기는 손가락에 아무런 느낌이 없자 의아해 했다.
분명 자신의 조살공으로 그의 가슴을 꿰뚫었는데 아무 느낌이 없다니? 그러자 뚫렸다고 생각한 현칠의 몸이 흐릿하게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이형환위!”
놀랍게도 현칠은 내공이 최소 이 갑자는 되어야만 펼칠 수 있다는, 경신법의 최고 경지 중의 하나인 이형환위를 시전하여 귀현기의 조살공을 피한 것이었다.
“놀랍군, 그 나이에 이형환위라니!”
귀현기는 이형환위를 구사하는 현칠을 바라보며 정말 감탄하는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그를 칭찬하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자 현칠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뭐, 이 정도로 놀라시나? 별거 아닌 걸 가지고서.”
연무대를 지켜보던 사람들 또한 현칠의 이형환위의 수법에 감탄하고 있었다.
만물사란 인물이 요즘 무림에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그 정도로는 안 되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디 한번 이것도 피해 봐라!”
귀현기 또한 전대의 마두로서 이형환위쯤은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기에 처음 현칠의 실력을 무시하고 날린 조살공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여세가 막강하고 빠르기가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조살공을 다시 한 번 펼쳤다.
그러나.
턱!
놀랍게도 현칠은 바위도 꿰뚫어 버리는 귀현기의 조살공을 너무나도 손쉽게 맨손으로 잡아냈다.
귀현기도 이번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잡힌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손은 마치 거대한 쇠기둥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가지고 어디 가서 조공이라고 할 수 있겠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칠의 조롱에 귀현기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남은 손으로 자신의 최고 절기 낭아흑풍조(狼牙黑風爪)를 십성으로 발휘하며 현칠의 머리를 향해 힘껏 박아 넣었다.
뿌드득!
또각!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번에는 십성으로 발휘한 낭아흑풍조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통을 꿰뚫지 못하고 강한 소리와 함께 오히려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경악에 겨워하는 귀현기를 향해 현칠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서히 들어 올려지는 현칠의 손이 가볍게 귀현기의 가슴을 향했지만 이미 한 손이 잡혀 있는 귀현기는 현칠의 일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현칠이 일격을 가하며 잡고 있던 귀현기의 손을 놓아 버리자 가슴을 얻어맞은 귀현기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어 발자국 밀려났다. 그러나 귀현기 역시 금세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고는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귀현기의 몸은 이미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기에 현칠의 한 수는 그의 몸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것이다.
“겨우 이 정도의 타격으로는 내 몸에 아무런 상처도…… 컥!”
순간 웃음 짓던 귀현기의 입에서 한 줄기의 검은 혈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귀현기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순식간에 승부가 나 버리자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숨죽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유소문과 염기영의 대결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당귀문의 이백 무사들의 눈에서도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당사자인 현칠 또한 지금 눈앞에서 피를 보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마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현칠이 방금 사용한 무공은 바로 마옥존자(魔玉尊子) 독기련의 독문 무공인 기각권(奇刻拳)의 일초인 일파경(一波涇)이었다.
일파경이란 초식은 외경과 내경을 모두 사용하는 기각권 중에서도 내가중수권에 속하는 일초로 권에 기를 실어 적의 내장을 파괴하는 무서운 한 수였다.
유소문과 함께 사룡봉에서 기연을 얻은 현칠은 유소문이 천칠갑의 도천위룡을 선택하자 자신은 독기련의 기각권을 선택해 수련했다.
독기련의 내공심법인 초마기공은 역시 마공의 심법이다 보니 속성은 빨랐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도 심한 편이었다.
초마기공의 특징은 같은 시간 동안 수련한 다른 심법보다 두 배는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초마기공을 사용할 때면 마음속에서 살심이 일어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마기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면 영혼을 잠식당하고 피를 부르는 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초마기공의 위험성이었다.
그 말인즉, 초마기공을 십이성으로 대성하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사용 중에 마인이 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색의 머리 색깔 또한 초마기공을 아직 그가 십이성까지 성취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머리 색깔이 자색으로 변한 것은 초마기공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초마기공 수련자의 머리 색깔은 십이성으로 성취하기 전까지는 그 색깔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현칠은 지금 초마기공의 사용과 눈앞의 피를 보고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심을 주체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유소문이 도천위룡을 선택하자 남이 배우는 것을 같이 배우기는 싫다고 굳이 독기련의 기각권을 연마한 현칠이었지만 수련이 더해 갈수록 심해지는 마기 때문에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신히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른 현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보고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그제야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사람들은 연무대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함성을 터트렸다.
“이겼다. 와아! 만세, 만물사 만세!”
나백천과 독고현 또한 현칠의 무위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금세 당귀문과의 대사자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에 자신들도 덩달아 크게 환성을 질렀다. 그와 반대로 천하도검 십삼 위의 염기영과 적발귀왕 귀현기 같은 무림 초고수들을 데리고 와서도 대사자 결투에 패한 당귀문의 문주 당석원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똥 씹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설마 자신들이 대사자 결투에서 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던 당석원이었기에 그가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뒤로 정렬해 있던 이백의 무사들 사이에서 검은 무복에 검은 복면을 둘러쓴 사내 하나가 천천히 당석원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복면인을 향해 당석원은 다급한 마음에 그의 팔을 붙잡으며 어찌해야 할지를 조급히 물어보았다.
“제2단주,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나 당석원은 그 다음 말을 마저 이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뽑힌 복면인의 검이 그의 목과 몸을 분리시켜 버린 것이었다.
서서히 땅으로 떨어지는 당석원의 머리를 바라보며 복면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이류 문파인 당귀문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조용히 그 말만을 남긴 복면인은 지금 이긴 기분에 들떠 당석원의 죽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를 쓱 한번 쳐다보고는 손을 들어 뒤에 대기하고 있는 이백 인의 무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쳐라!”
복면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렬해 있던 이백 명의 무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를 향해 덮쳐들기 시작했다.
설마 당귀문이 대사자 결투에서 졌다고 전면전을 벌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백천은 당귀문의 무사들이 돌진해 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적을 막아서라!”
나백천의 외침에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당귀문의 무사들을 상대로 검을 들고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씨세가의 무인들은 기껏해야 50여 명이 되지 않았고 독고세가 역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7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숫자에서 밀리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나씨세가나 독고세가의 사람들의 무공에 비해 공격해 들어오는 당귀문의 이백 무사들의 실력이 월등히 그들을 앞서고 있었다.
그나마 부상당한 유소문과 현칠이 가담하여 싸움은 어느 정도 맞수를 이룰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씨세가와 독고세가의 사상자들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전세가 기우는 것을 느낀 나백천은 서둘러 세가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귀문기관(鬼門機關)을 작동시켜라!”
나백천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막 당귀문의 한 무사를 베어 쓰러뜨린 독고현 역시 독고세가의 사람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천부독(千腐毒)을 사용하라!”
나백천과 독고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씨세가의 사람들은 최후의 방어 기관인 귀문기관을 작동시키기 위해 본가 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독고세가의 사람들 역시 독고현의 명령에 따라 가주의 허락이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절독인 천부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부독이란 이류 문파인 독고세가를 지금껏 독가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가문의 절독으로, 순간적인 독성이 강해 모든 물체를 단번에 부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독고세가의 사람들이 천부독을 이용하여 당귀문의 무사들을 막아서고 있는 사이에 나씨세가의 사람들은 서둘러 본가로 돌아와 귀문기관의 진을 작동시켰다.
나씨세가의 절대 방어 기관인 귀문기관은 기관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나씨세가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방어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기관이었다.
나씨세가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진을 형성하여 귀문기관을 작동시키자 복면인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돌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귀문의 무사들이 빠른 속도로 후퇴하며 진영을 갖추었다.
‘나씨세가의 귀문기관이 작동했다면 더 이상 들어가기는 힘들겠군. 어쩔 수 없이 귀면갑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말인가.’
복면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돌아가면 상관의 문책을 받을 것이 분명했지만 나씨세가의 방어 기관인 귀문기관의 무서움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로서는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것이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죽을 각오로 돌파해 들어간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무공 수위를 알 수 없는 현칠과 유소문이 있기에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그의 행동은 빨랐다. 그의 손짓에 당귀문의 무사들은 빠른 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는 차마 뒤쫓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짧은 전투로 나씨세가의 식솔 십오 명이 사망하고 중상자가 여덟 명에 이르렀으며, 독고세가는 귀문기관을 펼치기 위해 적들을 막아 내느라 그런지 이십오 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당귀문이 물러가고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한 나백천은 유소문과 현칠, 그리고 세가의 중요 인물들을 사랑채에 모이게 하고는 이번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원래는 대사자 결투에서 이긴 기념으로 지금쯤 크나큰 잔치를 벌이고 있어야 하지만 당귀문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로 분위기가 무거우니 이렇게 조촐하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백천은 가문을 지켜 준 유소문과 현칠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오늘 목숨을 잃은 세가 식솔들에 대한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설마 당귀문이 전면전을 벌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유소문의 말에 모두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오늘처럼 무림에서 대사자 결투를 벌이고서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문파가 멸문을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무림에서 문파를 건 대사자 결투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 무림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과 같이 생각되어 모든 무림인들을 적으로 두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파나 사파나 생각하는 바가 같았기에 오늘 당귀문의 행동은 미처 그들로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더러운 당귀문에서 그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독고현 역시 죽어 간 식솔들을 생각하니 억울함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칠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당귀문의 무사들이 맞는 것일까요?”
현칠의 뜻밖의 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유소문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칠의 말에 동의하는 듯 그의 말에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당귀문의 무사들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실력이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당귀문이 어느새 그런 세력을 거느리게 되었는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고요. 또한 그들이 사라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신을 모두 독으로 태워 버린 것도 이상합니다. 당귀문의 짓임을 다 아는 사실인데 일부러 증거를 없애 버린다는 것은 뭔가 감춰야 할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유소문의 설명을 들은 나백천과 독고현은 생각해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 말 같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당귀문을 도와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