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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8화)
5장 만물사(萬物士) 현칠(6)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당귀문을 도와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를 공격했다는 것입니까?”
“이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나백천은 유소문의 대답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독고현이 입을 열며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저희 같은 이류 문파를 멸하면 뭐가 남는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독고현의 말 또한 맞는 말이었다.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는 무림에 있는 수백 개의 이류 문파 중의 하나인, 어찌 보면 별 볼일 없는 가문이었다. 그런데 누가 이백에 달하는 무림고수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이런 이류 문파에게 뭘 얻기 위해 전면전을 벌인단 말인가.
유소문과 현칠 또한 그에 대한 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은 무림맹에 이 사실을 보고하기로 결정을 본 후 독고현은 독고세가의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자신의 세가로 돌아갔고 사랑채에는 나백천과 유소문, 그리고 현칠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설마 유 대협과 현 대협이 요즘 유명하다는 비무신마와 만물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두 분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정말 나씨세가는 이 땅에서 이름이 없어질 뻔했으니,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대협이란 호칭으로 바꾼 나백천은 정중하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자 유소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그에게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정체를 밝혔어야 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그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불찰이라고 미안해 하는 유소문의 행동에 나백천은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세워져 있던 병풍으로 다가갔다.
나백천이 병풍이 놓인 벽을 이리저리 만지자, 기문기관에 조예가 깊은 가문답게 어느새 병풍에 가려져 있던 지하 통로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나타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나백천의 말에 따라 유소문과 현칠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그 밑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바로 나씨세가의 보물과 비급을 숨겨 두는 비밀 창고였다. 그러나 나씨세가 같은 이류 문파에 보물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방 안에는 약간의 금붙이와 책자들만 있을 뿐 별달리 눈에 뜨일 만한 물건들은 없었다.
나백천은 별로 많지도 않은 보물들 중에서 그나마 값비싸 보이는 황금으로 된 가면을 하나 집어 들더니 유소문을 향해 무턱대고 내밀었다.
“우리 가문을 지켜 준 보답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은혜이지만 마땅히 드릴 만한 것이 없어 이것으로라도 대신하고 싶군요.”
나백천이 건네준 황금으로 된 가면의 모양은 마치 아수라의 얼굴처럼 반은 천상의 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다른 반쪽은 지옥에서 온 마귀와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소문은 그런 모양조차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사양의 의사를 밝혔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귀해 보이는 이런 물건을 저희는 받을 수 없…….”
“좋아요. 그 정도에 성의야 받아 들이는 것이 예의 아니겠어요?”
정중히 거절하려는 유소문의 말을 가로챈 현칠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비싸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얼른 나백천의 손에서 가면을 빼앗아 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죠?”
가면을 이리저리 살펴본 현칠은 그저 장식품 같지만은 않은 황금 가면을 살펴보며 궁금함에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백천은 약간 난처한 기색을 띠더니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것은 저의 가문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우연히 한 동부에서 얻게 된 것인데, 애석하게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음,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냥 장식품이라는 소리네요?”
현칠은 그런 문제쯤이야 황금으로 되어 있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그 황금가면을 찾으셨을 때 가면 옆에 ‘귀면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지배하리라!’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나백천의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현칠과 유소문은 다시 한 번 황금 가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가면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앞면에 문양이 정교하다는 것 빼고는 그저 그런 장식품에 불과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현칠은 가볍게 웃음 지었다.
“에이, 그 증조할아버지가 구라 좀 치셨나 본데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천하제일은, 흐흐흐!”
그저 황금으로 된 가면이 천하를 얻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현칠은 그의 말을 우습게 넘겨들었다. 그러자 나백천의 안색이 변하더니 현칠을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은 매섭게 변했다.
“저…… 현칠 소협?”
“예?”
“구라가 무슨 뜻이죠?”
나백천의 말에 현칠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애써 얼버무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그냥 나쁜 말은 아니고요, 약간 좀 과장되게 말하셨다는 뜻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현칠의 설명에 그제야 알았다는 듯 나백천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뜻이군요. 하긴 뭐, 저희도 이 물건을 증조부님의 말씀에 따라 가문의 보물로는 간직하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니까요.”
나백천 역시 귀면갑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기에 더는 해 줄 이야기가 없었다.
“어쨌든 우선은 주시는 것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현칠은 혹시라도 나백천이 딴소리를 할까 봐 재빨리 귀면갑을 자신의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현칠의 행동에 유소문은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 더 이상 그의 행동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현칠 또한 대사자 결투에 참여한 당사자였기에 유소문이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보물 창고를 빠져나온 유소문과 현칠은 혹시 모를 당귀문의 재공격을 대비하여 이곳에서 칠 일을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칠 일이라는 시간을 나씨세가에서 더 머무는 동안 뜻밖에도 유소문과 독고은니의 사이가 각별해졌다.
사실 처음부터 유소문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던 독고은니는 그가 요즘 무림에 망명 높은 비무신마라는 사실과 또한 자신의 가문을 지켜 주었다는 이유로 이제는 그에게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유소문 또한 예쁘고 단아한 성품의 독고은니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 둘은 더욱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서로에 대해 알아 가기에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칠 일 후 사건 조사를 위해 나서겠다는 무림맹의 밀서를 전해 받은 나씨세가에 더 이상 유소문과 현칠이 머물 수가 없었다.
아직은 공식적으로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유소문과 현칠이었기에 밀서를 전해 받은 다음 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 밤, 유소문과 독고은니는 장원을 나와 마을에 있는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달빛에 반사된 강물이 잔잔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말이 없는 두 사람, 고요한 적막감과 함께 그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고요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독고은니였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아쉬워하는 독고은니의 말에 유소문은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시면 다시는 못 보는 건가요?”
“다시는 못 보다니요, 인연이 있다면 또다시 만나겠지요.”
어찌 들으면 매정한 뜻한 유소문의 대답에 독고은니는 살며시 유소문의 소매를 붙잡았다.
“조금 더 머물다 떠나시면 아니 되시나요?”
갑작스런 독고은니의 행동에 놀란 유소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다행히도 어둠에 가려 독고은니가 볼 수 없었다.
유소문 또한 이곳에서 조금 더 머물며 독고은니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힘을 길러 마을 사람들의 복수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먼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독고은니가 아쉬운 듯 말을 잇지 못하자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럼 하시는 일을 끝내고 다시 이곳에 들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람의 마음을 녹여 버릴 것만 같은 애절한 독고은니의 음성에 순간 유소문은 그녀를 안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간신히 충동을 참아 낸 유소문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독고은니를 향해 말했다.
“그럼 물론이지요. 일이 끝나면 내 이곳으로 꼭 다시 돌아오리다.”
유소문의 대답에 그나마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인 독고은니는 수줍은 듯 살짝 유소문의 등에 기대어 얼굴을 묻었다.
6장 어둠은 혼돈 속으로(1)
다음 날 아침, 유소문과 현칠은 다음 목표로 잡은 광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라고 해 봐야 유소문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또다시 비무를 떠나는 것으로, 이번 대전 상대는 광동에 있는 하오문(下午門)의 문주 청풍대벽(靑風大劈) 정달서였다.
광동에 위치한 하오문은 소매치기, 도둑질, 매춘업 등에 종사하는 최하류 인생들로 구성된 문파로서 문파원 모두가 밑바닥 인생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주워듣는 것이 많아 빠르게 유통되는 정보망을 가진 조직적인 문파였다.
원래는 정파와 사파의 모든 무림으로부터 배척받는 하류의 문파였지만 30년 전 무시 받던 하오문을 무림 제일의 정보 조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바로 청풍대벽 정달서였다. 그 또한 천하도검 십삼 위의 일인으로, 고아로 태어나 일찍이 하오문에 발을 들이면서 어린 나이에 기연을 얻어 하오문의 최고 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천하도검 십삼 위라는 명예와 함께 하오문을 지금까지 훌륭하게 키워 놓았다. 그러나 그런 정달서를 찾아 광동까지 온 현칠과 유소문은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벌써 광동에 도착한 지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비무를 벌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하오문의 문주 정달서가 무림맹의 초청을 받아 한 달 전 무림맹으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씨세가가 있던 강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광동으로 길을 잡았던 현칠과 유소문은 정달서의 부재로 인해 다른 인물을 찾아야 하나 고심하다가 내린 결론은 어차피 싸울 놈인데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기울어서 하루 이틀 기다린 것이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 달 동안의 지루함으로 인해 이제 현칠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현칠은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하오문을 멸문시켜 버리겠다고 매일 발악을 하며 설쳐댔고 유소문은 매일매일 그런 현칠을 말려야만 했다.
보름 전부터 계속되는 현칠의 발작을 잠재우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객점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며 현칠을 달래던 유소문은 마침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무슨 얘기?”
“나씨세가와 독고세가 그리고 당귀문이 벌인 대사자 결투 말일세.”
“아, 그 얘기? 들었지. 이류 문파인 그곳에서 대사자로 비무신마와 천하도검 십삼 위의 화염신마 염기영이 붙어 비무신마가 이겼다는 소문 아닌가?”
“그래, 맞네. 잘 알고 있구만. 그런데 대사자 결투에서 진 당귀문이 전면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나?”
“그럼, 들었지! 대사자 결투에서 진 당귀문이 전면전을 벌여 지금 전 무림의 공적이 되어 있지 않은가?”
“허허! 이 사람, 소문도 빠르군그래. 그렇다면 나씨세가와 독고세가가 멸문했다는 소리도 들었는가?”
순간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유소문은 크게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전 이야기를 하던 사내의 멱살을 잡아 들어 버렸다.
“바, 방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켁켁! 뭐야? 이거, 갑자기…….”
“방금 그 말이 사실이냐고요!”
사내는 유소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며 그의 무례함에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유소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에서 나오는 강한 살기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어느새 존칭으로 바뀐 사내의 말투에 유소문은 재촉하듯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사내가 꺼낸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나씨세가와 독고세가가 멸문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대사자 결투가 있은 지 보름 후 다시 쳐들어온 당귀문에 의해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는 멸문하고 당귀문 역시 그때 같이 자멸했다고 합니다.”
순간 유소문의 얼굴에 절망감이 그려졌다.
나씨세가와 독고세가가 멸문을 하다니, 자신이 떠나온 후 그런 일이 일어나자 유소문은 왠지 모를 자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린 유소문은 현칠과 함께 그 사실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서둘러 다시 강서로 향하게 되었다.
***
마의 계곡이라 불리는 극악산. 험한 산세 때문에 무림고수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며 또한 들어선 자는 아무도 살아 나갈 수 없다고 전해지는 이곳 극악산은 수백 장에 달하는 절벽과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험한 산속에 거대한 성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곳에는 거대한 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수백 장에 이르는 절벽 위에 세워진 이 성의 위엄은 마치 천연의 자연과 동화된 듯 거대하고 웅장했다.
지금 그 성안에 있는 수백 개의 방 중에서 최상위 층의 사람들만이 기거하는 최고급 대전 안에서 한 사내가 오체복지하고 있었다.
“속하 지옥천마 군단장 강청휘가 대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자신을 지옥천마 군단장이라고 밝힌 사내는 지금 눈앞에 대공자라 불린 인물에 대해 최대한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대공자라 불린 인물은 한 이십대는 되었을까,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순진하게 생긴 청년으로 강청휘가 대전 안으로 들어오자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강청휘 군단장님이 오셨군요.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기는 대공자의 모습에 오히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는 강청휘였다. 벌써 대공자를 모신 지가 6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는 그로서는 대공자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이렇게 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나씨세가에 관한 일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귀면갑이 드디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겠군요?”
“그게 저…….”
대공자가 먼저 귀면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강청휘는 잠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러자 대공자는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강청휘를 재촉했다.
“뭘 그리 꾸물대시는 건가요? 어서 얘기해 주세요. 설마 이번 일을 실패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순간 강청휘는 싸늘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