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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20화)
6장 어둠은 혼돈 속으로(3)
궁금해 하는 나윤정에게는 내일 독고은니와 함께 설명해 주겠다고 말한 후, 그제야 모두들 고단한 하루를 쉬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윤정은 잠이 오지 않는지 각자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홀로 객점 지붕 위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윤정아, 절대로 네가 나씨세가의 여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이곳에서 같이 싸우겠어요.”
“멍청한 것! 너라도 살아남아서 우리 모두의 한을 달래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아버님…… 흑흑!”
“이제 강호에 나가서는 절대 울어서는 안 되느니라. 남자의 몸으로도 힘든 것이 강호이거늘, 너는 여자의 몸이지만 더욱 남자보다 굳세어야 한다. 명심해라. 이제부터 절대로 네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당부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며 어느덧 나윤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남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눈물이 이제야 그녀의 뺨에 흐르는 것이었다.
“아버님, 이것이 정녕 소녀가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 것입니다. 기필코 우리 가문의 복수는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나윤정은 다시는 보지 못할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마지막 눈물을 남몰래 흘려야만 했다.
날이 밝자 어제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보이는 독고은니와 나윤정을 데리고 현칠은 만통선사를 찾아갈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현칠의 설명을 들은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황당함에 그저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던지는 돌멩이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 만통선사가 나온다는 소리야?”
“빙고!”
나윤정은 그런 현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쯧쯧! 내가 누군지 또 까먹은 것 같은데 내가 바로 만물사야! 그 위대한 이름의 만! 물! 사!”
그제야 나윤정은 현칠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주는 무림의 유명한 만물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그럼 그냥 너의 능력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어?”
기대의 찬 눈빛으로 물어보는 나윤정을 향해 현칠은 어깨를 한 번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그건 무리야.”
“뭐야, 쳇! 그러고도 네가 만물사냐? 흥!”
콧방귀를 뀌어 대는 나윤정을 바라보며 현칠은 어이가 없었지만 더 이상 걸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전에 기연을 얻기 위해 갈 때보다 조금 더 체계화된(?) 방법을 연구한 현칠은 간만에 공책과 만년필을 꺼내고는 뭐라 적기 시작했다.
―만통선사가 호남에 있다면 돌멩이가 왼쪽으로, 아니면 오른쪽으로 튕겨라.
툭!
“아니군!”
―만통선사가 광서에 있다면 돌멩이가 왼쪽으로, 아니면 오른쪽으로 튕겨라.
툭!
“아니군.”
―만통선사가 하남에 있다면 돌멩이가 왼쪽으로, 아니면 오른쪽으로 튕겨라.
툭!
남이 보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것 같은 행동을 그렇게 수십 번 반복하던 현칠의 얼굴에 드디어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찾았다!”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향해 현칠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청해로!”
그렇게 하여 현칠 일행은 손쉽게(?) 만통선사를 찾기 위해 우선은 청해로 그 첫발을 내딛었다.
7장 일양왕(一攘王) 금훈(1)
광동에서 청해까지는 말을 타고도 한 달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현칠 일행이 광동을 출발한 지도 벌써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처음 나윤정과 독고은니를 뒤쫓던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더 이상 그들을 추격해 오지 않았다.
보름 동안 말을 타고 급하게 달려온 덕분에 일행은 어느덧 사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천에 위치한 유림성에 도착한 일행은 장기간의 여정으로 쌓인 피로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먼저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사천에서도 유명하다는 금화각이 맞겠지?”
인상 좋아 보이는 점소이에게 현칠이 물어보았다.
“헤헤! 그러믄입죠. 이곳이 바로 사천에서 가장 맛있는 맛집으로 소문난 금화각이 맞습니다요.”
싹싹한 점소이의 행동이 맘에 드는지 현칠은 메뉴판을 바라보며 맛있다고 소문난 최고급 요리들로만 가져오라고 시켰다.
“저…… 현칠 소협,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요?”
독고은니는 그가 최고급 요리들로만 주문을 하자 음식 값이 걱정되는 듯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현칠은 별거 아니라는 듯 한번 웃어 보였다.
“내가 좀 미식가라서 말이지, 흐흐!”
이윽고 일행에 자리로 나온 사천의 음식들이 탁자를 모두 채우자 현칠은 평소의 행동과는 달리 음식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품위 있는 행동으로 먹기 시작했다.
독고은니와 나윤정은 그런 현칠의 모습을 처음 보는 듯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니 놀라운걸!”
나윤정은 실로 현칠의 행동에 놀라워하며 조소가 아닌 진심 어린 말투로 감탄했다.
사실 현칠은 먹는 것에 관해서는 까다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부터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유달리 맛을 고집하는 그였기에 처음 무림 세계로 왔을 때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무척 적응하기 힘들었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로 나가 계시니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운 적이 많았던 그는 그 맛이 싫어 일찍부터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서 먹을 정도로 유독 맛에 집착했다.
금화각은 소문 그대로 맛집이었다. 간만에 자신의 입을 만족시킨 음식에 현칠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계산서를 받아 든 순간.
“은자 10냥이라니, 이런 바가지가 어딨어!”
청구되어 나온 엄청난 금액에 놀란 나윤정이 말도 안 된다며 소리치자, 계산서를 들고 온 점소이는 그녀를 비웃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손님, 이곳이 처음인가 본데 이곳은 고급 음식점이라서 가격이 다 이 정도 합니다.”
점소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윤정은 다시 그에게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순간 현칠이 나서며 품 안에서 은자를 꺼내 점소이에게 넘겨주었다.
“자, 여기 은자 15냥이니 계산하고 나머지는 용돈이나 하게.”
그러자 점소이는 다시금 심할 정도로 비굴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현칠의 씀씀이에 놀란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잠시 멍하니 현칠을 바라보았다.
은자 10냥이면 일반적인 세 식구가 한 달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런 거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 값으로 치른 현칠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사실 현칠은 돈에 관해서는 그리 쩨쩨한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낭비가 심하다고 할 정도로 헤펐다. 현실 세계에 있을 때도 가난한 살림살이를 사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술만 먹으면 술값을 계산하고 다녔고,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기죽지 않기 위해 돈을 쓰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만물사로 행세하며 여기저기 긁어모은 돈이 엄청났기에 그의 씀씀이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현칠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된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독고은니는 그의 낭비처럼 보이는 돈의 씀씀이에 뭐라 한마디 하려 하다가 자기 돈 쓰는데 뭐라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음식점을 나온 일행은 아직 정오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피로를 생각하여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금화각에서 가까운 객점에 짐을 푼 현칠 일행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이른 시간이기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현칠이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올라가자 남은 세 사람은 무엇을 할까 논의하다가 오늘이 이곳 유림성의 축제라는 것을 알고는 성안을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매년 8월이면 열리는 이곳 유림 축제로 시가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특히나 길 곳곳에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와! 저거 봐요, 유 소협! 정말 예쁘지 않나요?”
“예쁘군요.”
“호호! 저기 봐요. 저 원숭이 정말 귀엽네요.”
“하하! 정말 그렇네요.”
가문을 잃은 아픔을 겪고 그동안 잘 웃지 않던 독고은니와 나윤정의 얼굴에 간만에 웃음이 피어나자 곁에 있던 유소문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거리에서 축제를 구경하는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들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이제 가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자 유소문 역시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을 여기저기를 구경하러 다니다 문득 어느 작은 술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소문은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독고은니와 나윤정을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길을 간신히 헤치며 앞으로 다가온 유소문과 일행은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름 아닌 싸움 구경이라 실망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인으로서는 매일 겪다시피 하는 것이 싸움이었기에 오늘 같은 날 싸움 구경을 한다는 것이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싸움은 한 중년인과 5명의 거한이 벌이고 있었다.
서생 차림의 중년인은 단아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매로 보아 전형적인 문사의 모습이었고, 시비 걸고 있는 다섯 명의 거한들은 껄렁껄렁한 모습이 전형적인 삼류 건달이었다.
그때 덩치 큰 거한들 중 얼굴에 길게 검상이 그어져 있는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험한 인상을 지어 보였다.
“이게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시비야? 우리가 바로 사천에서는 우는 아이도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그친다는 막가파 5형제야! 그런 우리에게 시비를 걸다니,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검상이 그어진 사내는 앞에 서 있는 문사 차림의 중년인을 향해 그의 커다란 주먹을 올려 보이며 위협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허허! 내가 사천 사람이 아니라서 그대들의 위명은 들어 보지 못했소만, 음식을 먹었으면 음식 값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중년인은 사내의 위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당당하게 내뱉었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소문은 검상의 사내가 낯익다고 생각하던 중, 막가파 5형제라는 소리를 하자 그제야 그들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7년 전 섬서성에서 처음 현칠을 만난 날, 그곳에서 한 소녀를 추행하던 건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 당시에는 유소문의 무공이 그들보다 낮아 비 오는 날 먼지 날만큼 맞았지만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유소문의 생각대로 이들은 그때의 막가파 3형제가 맞았다.
7년 전, 유소문을 때려눕힌 지 얼마 후에 막가파 3형제는 두 명의 형제(?)를 영입하고는 섬서성은 물이 작다며 이곳 사천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지도 5년이나 지났는데, 오늘 우연히 이렇게 유소문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유소문의 머릿속에 약간은 사악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가 그들에게 개처럼 맞고 얼마나 서러웠던가. 잊고 있던 그날의 일들이 떠오르자 은근슬쩍 열이 받은 유소문은 마침 잘 걸렸다고 생각하며 막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검상의 사내가 중년인을 향해 자신의 거대한 주먹을 내뻗었다.
연약한 중년인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한 사내의 주먹이 중년인을 향해 뻗어 나가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걱정하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유소문 또한 아차 하는 사이에 벌이진 일이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구경하던 사람들은 입이 찢어질 만큼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사내의 주먹이 뻗쳐 오는 것을 놀랍게도 중년인은 단지 한 손가락으로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주먹을 내지른 검상의 사내 또한 지금 자신의 주먹이 더 이상 뻗쳐 나가지 못하고 중년인의 손가락에 걸려 있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허! 이거 젊은 사람이 성격이 급하구만.”
“미, 믿을 수 없어. 이건 사술이다!”
검상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질렀던 주먹을 거두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사내가 검을 뽑아 들자, 중년인의 인자하던 표정이 돌연 정색을 띠었다.
“싸움 중에 무기를 뽑아 든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느냐?”
갑작스레 바뀐 중년인의 기도에 놀란 검상의 사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그 뒤에 있던 나머지 형제들 중에서 난쟁이 똥자루만 한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건 내 대사인데…….”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일순 난쟁이 똥자루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모두 다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미친놈!’
검상의 사내 또한 잠시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난쟁이 똥자루만 한 사내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나머지 형제들을 향해 소리쳤다.
“죽여 버려!”
그러자 잠시 주춤하던 나머지 사내들은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지 난쟁이 똥자루를 무지막지하게 패기 시작했다.
“이 바보들아! 걔 말고 저 새끼 말야!”
검상의 사내는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난쟁이만 한 사내를 패는 나머지 사내들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자신들이 그의 말을 오해했다는 것을 안 사내들은 손을 거두었지만 이미 난쟁이만 한 사내는 피똥을 싸며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검상의 사내는 다시 한 번 사내들을 향해 소리치며 중년인을 향해 덤벼들었다.
“죽여!”
사내의 검이 크게 원을 그리며 중년인을 덮쳐 들어가자 중년인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사내의 검을 피하더니 오른손의 검지로 검을 잡은 사내의 손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검을 휘두르던 사내의 몸이 검을 휘두르는 반동으로 인해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고는 그대로 얼굴부터 땅에 처박히며 나가떨어졌다.
뒤이어 공격해 들어오던 나머지 사내들 또한 중년인의 기묘한 손가락 수법에 모두 다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은 중년인의 신기에 놀라워하며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