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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갑고 서늘한 칼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자를 것처럼 닿는 순간 은호의 옷을 벗기려던 사내의 손이 얼어붙었다.

칼날은 무척이나 예리해서 가져다 댄 것만으로 사내의 목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 무슨…….”

제 목에서 흐르는 피에 겁을 먹은 사내가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아녀자를 겁탈하면 태형 100대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너 같은 놈들에게는 매질도 아까우니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 줄까?”

칼날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에 사내의 간담이 내려앉았다.

“거, 겁탈이라니요.”

겁을 먹은 사내가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돌아본 곳에선 다른 일당 두 명이 바닥에 이마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무사의 차림새를 한 여러 명의 사내들이 일당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을 확인한 사내가 제게 칼을 겨누고 있는 이를 겁먹은 눈으로 쳐다봤다.

사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이는 한눈에 봐도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입고 있는 의복이나 칼에 달려 있는 장식, 그리고 눈매와 얼굴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이 평범하지 않은 사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살벌한 기백에 사내가 겁에 질렸다.

“모,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이 근방을 떠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거나 아녀자들을 겁박하는 일을 일삼는 파락호의 눈에도 제 목에 들어온 칼날과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기백은 섬뜩하리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살려 달라…….”

칼을 든 사내가 낮게 웃었다.

그 눈매가 휘어지며 입술에 번지는 미소가 서늘했다.

칠석의 더운 밤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를 본 자는 아마 오한을 느꼈을 것이다.

“살려 주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그 말과 함께 사내의 칼날이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냈다.

휘이익―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툭, 하고 겁에 질린 사내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잘린 목이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도 남은 두 명의 일당들의 목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둑한 골목 안에 순식간에 핏물이 난자하게 흩뿌려졌다.

목을 잃은 몸뚱이들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을 곁눈으로 흘깃거린 사내가 칼에 묻은 피를 후두둑 털어 냈다.

그리고 칼집 안으로 칼을 넣은 후 쓰러져 있는 은호의 곁으로 걸어갔다.

“잠시 쉴 만한 곳을 알아보거라.”

혼절한 은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그의 뒤에 서 있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사내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자마자 두 명의 사내가 그곳에서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이런 날, 이런 곳을 혼자 돌아다니면 봉변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다니.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혼절한 은호의 뺨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사내가 조용히 웃었다.

사내가 은호를 두 팔로 안아 들어 올렸다.

사내의 팔 안에서 은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으응…….”

은호가 몸을 뒤척였다.

‘아파…….’

손목과 어깨가 욱신거렸다.

‘나, 왜 아픈 거지……?’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며 은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떴지만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의 무늬였다.

저런 천장의 무늬를 은호는 알지 못한다.

‘내 방이 아니야…….’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제 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은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대체……!”

정신이 퍼뜩 들며 자신이 혼절하기 직전 일어났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나, 분명히 겁탈당할 뻔…….’

은호가 제 옷을 확인했다.

다행히 옷을 입은 채였다.

옷은 찢어진 곳도 없이 멀쩡했다.

다만 넘어질 때 부딪친 어깨와 손목이 욱신거렸다.

‘나, 당하지 않은 걸까…….’

정신을 잃은 사이에 그 사내들에게 강제로 겁탈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손으로 더듬어 보니 치마 속 속곳도 무사했다.

아직 범해진 건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그 사내들이 자신을 여기로 끌고 온 것일까?

겁을 먹은 은호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방은 온통 붉은색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의 휘장도 붉은색이고 침상의 이부자리 역시 붉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용도를 알 수 없는 물 항아리들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빈 그릇도 그 옆에 놓여 있지만 그것의 용도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온 은호가 나가는 문을 찾았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게 된다면 날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야겠어…….’

주 승상의 집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관군이라도 만나게 되면 자신이 주 승상의 딸임을 밝히고 데려가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관군과 함께 돌아가면 몰래 빠져나온 것을 들켜 부친에게 혼이 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잠기지 않았어.’

문을 손으로 밀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얼른 밖으로 나가려던 은호의 눈에 검은 옷이 들어찼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안 돼…….’

그 사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내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은호의 앞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키가 6척은 될 것 같은 사내였다.

몸을 휘감은 검은 옷이 주는 위압감과 서늘한 눈매에 깃든 기백에 은호가 왈칵 겁을 먹었다.

그 사내들은 아니었지만 이 사내도 누군지 모르는 낯선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구해 주었더니 인사도 없이 도망치려고 했나?”

뒷걸음질 치던 은호의 다리가 침상에 걸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구, 구해 주신 것은 감사드리지만…… 저, 저는 빨리 돌아가야 해서…….”

구해 주었다니. 그러면 이 사내가 그 무뢰한들에게서 자신을 구해 준 것일까.

그렇다면 마땅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지만 지금 은호는 모든 것이 다 무서웠다.

“구해 주신 것에 대한 사례는 하겠습니다. 저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가 주시면 제 부친께서 큰 사례를 하실 겁니다.”

“사례? 큰 사례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사례를 말하는 거지?”

“그건…… 금이나 은으로…….”

“미안하지만 난 금도 은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어서 더는 필요 없는데 어떡하지? 내가 원하는 사례는 다른 것인데. 내가 원하는 것으로도 사례를 해 주나?”

이 사내가 원하는 사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사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집으로…….”

“내가 원하는 사례를 한다고 말했으니, 그럼 일단 사례부터 받도록 해 볼까? 구해 준 것에 대한 사례 말이다.”

사내가 은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무, 무슨……!”

난데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에 놀란 은호가 뒤로 물러나려다 말고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뒤로 쓰러지려는 그녀의 허리에 사내의 팔이 감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허리에 사내의 팔이 감기며 그의 얼굴이 은호의 얼굴에 바짝 가까워졌다.

숨결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은호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외간 사내와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숨결이…….’

사내가 내쉬는 숨이 제 얼굴에 번지는 것을 느끼며 은호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등에 닿아 있는 손도 뜨거웠다.

“이것으로 사례를 대신하지.”

사내가 속삭이며 은호의 입술을 물어뜯듯이 삼켰다.

“흡……!”

사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덮는 순간 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뜨겁고 사나운 입술이었다.

그 뜨거움에 은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은호의 입술을 벌리고 파고든 사내의 혀가 안으로 도망치던 혀를 휘감았다.

부드러운 점막을 휘감고 거칠게 빨며 그녀의 입 안을 훑었다.

혀를 빼앗기고 숨결을 빼앗겼을 뿐인데 은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후들거리는 몸을 사내의 손이 떠받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그녀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으응…… 응…….”

은호가 사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약하게 신음했다.

사내의 뜨거운 혀가 집요하게 얽히며 서로의 타액이 진득하게 얽혔다.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사내의 숨결과 타액을 은호가 꿀떡꿀떡 삼켰다.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액이 섞이며 쩍, 쩍, 젖은 소리가 입술의 빈틈으로 새어 나왔다.

난잡하고 음란한 소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가 입술을 떼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은호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집요하게 빨린 탓에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벌린 채로 가쁜 숨을 내쉬는 은호의 허리를 사내가 놓아주었다.

“겨우 입맞춤에 이렇게 되어 버리면 더한 것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더한 것?

사내의 말에 은호가 파르르 떨었다.

이 사내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자신은 그 무뢰한들에게서 구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짐승에게 사로잡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나는 승상 주이염의 딸이오. 내게 손을 대면 내 부친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 은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부친의 이름이었다.

이 사내는 옷차림이 평범하지 않다.

단순히 시정잡배가 아니라는 뜻이다.

관리나 귀족이라면 자신의 부친에 대해 한 번쯤 들어 봤을 테고, 그러면 후환이 두려워서 라도 저를 보내 주리라는 희망을 은호가 간절하게 붙들었다.

“주 승상의 딸이었나?”

사내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들어는 봤지. 주 승상의 딸이 경국지색의 미인이라는 소문은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 말과 함께 사내가 쓰러진 은호의 위로 올라탔다.

육중한 사내의 무게에 짓눌리며 은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녀와 마주친 사내의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의 그것과도 흡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