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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0년 후, 서울.



“서로 인사하렴. 이쪽은 류지혁. 그리고 여긴 류지수. 아저씨 아들, 딸이란다. 이제부터 진이 네 오빠고 언니야. 친하게 지낼 수 있지?”

류 중령의 질문에 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눈앞의 소녀가 내뿜고 있는 적개심에 주눅이 들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을 바라보다가 더러운 운동화의 발끝 부분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하곤 이 순간 변할 수만 있다면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을 티끌보다 작은 개미로 변해 그 구멍으로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적개심 어린 눈엔 혐오감이 가득했다.

그녀의 몰골을 보는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이미 해질 대로 해진 낡은 교복은 아무리 열심히 손빨래를 해도 도통 깨끗해지지 않았다. 누렇다 못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교복은 볼품없이 초라했다. 키는 또래의 여자애들보다 컸지만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앙상한 몸 때문에 여분이 넘쳤다.

먼저 학교를 졸업한 선배의 낡은 교복을 물려 입은 그녀는 교복을 자신의 몸 치수에 맞게 줄일 돈이 없었기에 그대로 입고 다녀야 했다. 사실 조금 전까진 지금의 낡은 교복이 문제로 여겨지진 않았다. 이 교복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새로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교복도 입지 못한 상태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낡은 교복이나마 무료로 얻었을 때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 소녀와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엔 이 더럽고 낡은 교복이 커다란 문제로 느껴졌고 동시에 부끄러운 감정마저도 들었다. 더불어 구멍 난 운동화는 그 창피함을 배로 증폭시켰다. 그녀의 몰골은 한마디로 구질구질했으며 가난함 그 자체였다.

“거지 같아!”

소녀의 날카로운 힐난에 진은 몸을 움찔거렸다. 몸 안의 모든 열기가 얼굴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저 옷이랑 신발 좀 봐. 벼룩이나 빈대가 있는 거 아냐?”

“류지수!”

류 중령이 엄하게 꾸짖는 음성이 크게 울렸다.

“버릇없게 굴지 말라고 했지.”

“난 절대 저 거지 같은 애랑 가족이 되지 않을 거야! 너 나한테 언니라고 불렀단 봐, 가만 안 둬!”

류 중령의 경고에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분노에 찬 고함을 거칠게 내지르고는 몸을 돌려 요란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쾅 하는 불만이 가득 섞인 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아직 철이 없어 저러는 거니 진이 네가 이해해 주렴.”

딸을 향한 따뜻한 변호에 진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대신 사과할게.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류 중령 곁에 서 있던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아저씨의 아들이자 방으로 사라진 소녀의 오빠. 그리고 재혼한 어머니의 의붓아들이었다.

“동생 말은 마음에 두지 마. 한창 반항적인 시기거든. 사춘기라고 하지. 아참! 너도 비슷하겠구나. 지수랑 한 살 차이라고 들었는데. 너도 이유 없는 반항심에 물들어 있을 열여섯 살이잖아.”

남자는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씩 웃었다. 그 깨끗함에 눈이 부셨다. 남자의 치아는 더러움이라곤 없었다. 새하얀 도자기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만들어 내고 있는 웃음도 깨끗했다. 그녀의 악마가 짓곤 하던 비틀린 적개심이 담긴 조소와는 달랐다.

“너무 썰렁한 농담이었나?”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진은 당황했다.

“…….”

남자의 말에 대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함에 손가락만 비틀었다.

“예쁜 여동생이 생겨서 기뻐. 가족이 된 걸 환영해.”

눈부신 햇살이었다. 류지혁의 미소는 환한 햇살 같다고 진은 다시 멍하니 생각했다. 한 치의 더러움도 없는 순수한 밝음. 그 밝고 선명한 흰색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지혁이 먼저 손을 내밀어 자신의 손을 잡자 진은 화들짝 놀랐다. 주눅 든 긴장감이 짙게 밴 육체는 오랜 습관대로 타인의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을 위협으로 느끼고는 고개와 양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지혁의 손길은 그가 짓고 있는 웃음만큼이나 따스한 온기가 서려 있었고 또 한없이 부드러웠다. 악수를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진정됨을 느꼈다.

류 중령의 차를 타고 낯선 서울로 오는 시간 동안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악마와 다를 바 없던 아버지가 마침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지독한 두려움이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 올 낯선 서울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그녀는 류 중령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적개심으로 가득 찬 의붓언니와 대면한 후엔 두려움은 절망과 후회로 번졌다. 결코,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이곳은 자신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불청객이자 이방인이었고 어둠의 존재였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어울리는 시골의 산골짜기 집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악마와 살았던 그곳.

오직 고통만이 존재했던 그곳.

진은 바로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몇 초 후 다시 새롭게 바뀌었다. 바로 류지혁의 손을 맞잡은 그 짧은 순간에, 환하게 웃는 지혁의 선한 웃음에서 온기를 발견한 그 놀라운 설렘의 순간에. 오늘부터 그들은 한 가족이 된 거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던 친근함이 싹튼 순간 산골짜기 집으로는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난생처음 자신을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혹은 악의가 가득 담긴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는 선량한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친절함이 가득 스며 있는 웃음은 순결했다. 아무런 불순물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그 따뜻함에 끌렸다. 그래서 남고 싶었다. 류지혁이라는 사람이 있는 이곳에.

그리고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어머니가 있는 이곳에. 과거에서 빠져나간 어머니의 변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절망만이 가득 차 있던 두 눈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허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침내 잃었던 영혼을 되찾은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기도했다. 집을 나간 어머니의 영혼이 평안을 되찾기를,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비록 어린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난 어머니였을지라도…….

원망은 없었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어머니의 고통은 그녀로 인해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고통이 난무하던 그 암흑의 시절 힘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녀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악마의 폭력에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어린아이는 단 한 번도 잔인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어머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모른 척했다. 악마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어머니의 멍든 모습을, 악마의 폭력에 울부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흐느낌을 외면했다. 귀를 틀어막고 못 들은 척했다. 자발적인 귀머거리가 되었다.

어렸던 아이는 나약했고 무기력했으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악마의 폭력이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숨기만 했다. 어렸던 그녀는…… 나쁜 아이였다. 어머니를 옭아매는 족쇄였다. 악마의 도구였다. 악마에게 숱하게 얻어맞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마음속엔 늘 무거운 죄책감이었다.

자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자유를 찾아 떠나지 못하고 억압당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린 자식은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무거운 죄책감은 하루하루 그 몸집을 불려 나가며 아이의 작은 어깨를 짓눌렀다. 마침내 어머니가 도망쳤을 때 그녀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숨 막히는 죄책감에는 짓눌리지 않아도 되기에.

스스로 족쇄를 끊어 내고 자유를 향해 달려 나간 어머니가 행복하길 바랐다. 악마에게 빼앗긴 영혼을 되찾길 바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침내 그녀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어 주었다. 영혼을 되찾은 어머니는 행복해 보였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곳에 남으면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도 찾게 될 수 있을까? 하고.

“제 이름은…… 진……입니다. 김진.”

진은 잔뜩 주눅이 든 음성으로 여전히 햇살보다 더 환한 웃음을 보여 주고 있는 지혁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1.


17년 후, 고르스탄.



5분 후면 도착이었다. 좁은 좌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진은 뻐근하게 뭉친 어깨 근육을 손으로 주무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된 비행으로 그녀의 온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단 1초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이송기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불어 바로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로 들어가 고된 비행으로 욱신거리는 이 미칠 듯한 근육통을 잠재우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생각까지.

하지만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기까진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5분 후 지금 타고 있는 수송기에서 지친 몸을 끌어 내리면 또다시 트럭을 타고 오랜 시간 먼지 덮인 땅을 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그럭저럭 간신히 견뎌 내더라도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녀가 가는 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모래뿐인 사막 위에 자리한 미군 부대였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사치스러운 욕조 따위는 결코 없을 거였다. 운이 좋다면 뜨거운 물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샤워 칸막이가 전부일 것이다. 혹은 운이 나쁘다면 그마저도 없을 수도 있었다. 진은 욕조는 고사하더라도 제발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개인 샤워 시설만은 있길 간절히 빌었다. 지금 그녀에겐 뜨거운 물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이 지끈거리는 근육통을 잠재우기 위해선 말이다.

“대위님 도착했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상상하며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데 머리맡 위에서 그녀만큼이나 지친 기색이 역력한 투박한 음성이 울렸다. 평소와 다르게 활기 없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막 간호장교 2년 차에 접어든 태영의 얼굴엔 낯선 땅에 도착한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싹 얼어 있는 듯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네.”

그녀도 그처럼 마음이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밝게 대꾸했다.

「내리십시오.」

그들 곁으로 미군 한 명이 다가와 안내했다. 진과 태영은 미군의 뒤를 쫓아 비행기에서 내렸다. 같은 수송기를 타고 왔던 다른 미군들은 이미 비행장에 4열종대로 반듯하게 서 있었다.

수송기에서 한국인은 그녀와 태영뿐이었다. 두 사람은 G―스탄에 주둔해 있는 미군부대로 파병해 왔다.

그녀는 온전히 본인 자유의지로 이곳에 자원했다. 내전을 겪고 지금도 테러로 인한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곳 G―스탄에.

그만큼 절박했다.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원했다.

하지만 태영은 달랐다. 본인의 자유의지보다는 고속 진급을 보장한다는 선임 장교의 달콤한 유혹에 파병을 신청했다. 그랬기에 막상 낯선 땅에 도착하자 그녀보다 더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겁에 질린 표정을 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