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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진은 얼이 빠져 있는 태영을 재촉해 대기하고 있는 미군에 섞여 들었다. 그들은 곧 대기하고 있던 군용 트럭에 차례차례 탑승했다. 두 사람이 트럭에 탑승하자마자 부릉거리는 시동 소리와 함께 수송차는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트럭의 움직임에 몸의 균형을 잡으려 가로로 길게 나 있는 좌석의 받침을 꽉 붙잡았다.

“설마 가는 길에 사고가 나는 건 아니겠죠?”

여전히 겁에 질린 태영이 불안함이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아마도 미군 부대로 가는 길목에서 반군에게 피습을 당할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진은 맞은편 좌석에 동승한 미군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부분의 미군은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완벽히 무장한 채였다. 그녀도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이곳 G―스탄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무장하고 있는 수십 명의 미군들과 함께였다. 아마 그들도 그녀와 태영이 낯선 땅에 도착한 당일 죽게 되는 걸 좋아하진 않을 듯했다.

골치 아픈 외교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겠지.

진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무심한 어투로 내뱉은 그 한마디에 태영이 질겁한 표정으로 바로 입을 다물었다. 태영의 소란스러운 입이 다물어지면서 다시금 생겨난 고요한 침묵을 반기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깨의 근육통이 이제는 두통으로 번지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뒤통수의 통증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사실 이 두통의 원인은 어깨의 근육통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한국에서의 사건이 떠오르자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야 이 골치 아픈 두통에서 해방이 될까? 아마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서서히 사라지겠지.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두통의 원인은 모두 한국 땅에 존재했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적대감이 지긋지긋했다.

그들은 그녀가 한국을 떠나겠노라 선포하자 모두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반색하며 먼 타국으로의 파병을 반겼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감의 눈길을 보냈다. 씁쓸했다.

한국은 그녀가 태어나 자라 온 땅이었지만 33년의 세월 동안 행복했던 순간은 거의 없는, 고통이 난무하는 땅이었다.

이젠 지쳤다. 고통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버티는 것에 신물이 났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한국 땅에서 떠나 있고 싶었다. G-스탄이 아무리 위험한 곳일지라도 그녀는 낯선 땅에서의 파병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국에서 보단 덜 고통스럽겠지…….

씁쓸하게 생각했다.



*



고개 숙인 제스 히버트 중위의 턱선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리는 외국인 전용 호텔 뒷마당의 쓰레기장과 이어진 주차장 한복판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커터 칼로 박스를 여는 그의 손가락은 마치 슬로모션 기능을 걸어 놓은 듯한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이 더해졌다.

평상시 빠릿빠릿하게 작전을 수행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릿함이었다. 그건 해병대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구성된 특수 부대 울프 팀 대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들은 어느 군인들보다도 재빠르고 날렵했다. 소리 없이 적진으로 침투하여 적들이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람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울프 팀 부대원 중 가장 날렵한 히버트 중위도 재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박스의 좁게 열린 틈 사이로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박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고물 쓰레기였다. G-스탄의 빈민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물 더미였지만 누군가에 의해 개조된 흔적이 보였다. 여러 가전에서 뜯어낸 부품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가느다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X-Ray 검색기로 박스에는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음을 이미 확인했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신중한 손길로 박스와 고물 더미를 분리했다. 몸체를 완전하게 드러낸 고물 더미는 겉보기엔 허술해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체계적인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고물 더미의 몸체를 분해했다. 나사를 푸는 손길 하나하나에 온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몸체의 뚜껑을 열자 폭탄이 장착된 뇌관이 드러났다.

「제법 머리가 좋은 놈이군.」

뇌관 주변을 작은 탄환들이 감싸고 있었다. 뇌관을 제거하려 섣불리 손을 대면 연결된 탄환이 잘 구워진 팝콘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올 것이다.

그는 폭탄의 몸체에 부착된 시계에 눈길을 줬다. 낡은 시계의 시침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정지해 있었다. 나머지 시침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초침에 의해 정지되어 있는 시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히버트는 폭탄에 이중으로 연결된 전선들을 살폈다. 이제 그의 손가락은 아까와 달리 빠르게 움직였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는 가느다란 전선들을 만지고 살피는 손길엔 한 치의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마침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의 구조를 모두 파악해 내자 망설임 없이 뇌관을 지키고 있는 탄환 더미를 제거했다.

― 아, 젠장! 여기 소풍 온 거 아닙니다.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겁니까?

무선 헤드셋을 통해 울프 팀 대원인 마이크 패튼 소위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 이러다 터지겠어요.

긴장감이 가득 어려 있는 마이크의 말에도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우라질, 그게 터지면 머리통이 날아가는 건 중위님이시지 저희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하시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마이크가 거친 입심을 자랑하며 걸쭉한 말들을 뽑아냈다. 그의 말처럼 주변은 외곽에 주차된 차들을 제외하고는 깨끗하게 비워져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울프 팀의 다른 대원들은 호텔 건물을 샅샅이 조사한 후 민간인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호텔 바깥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혹시 모를 폭탄의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껏 그가 해체하지 못한 폭탄은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폭탄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무장을 해제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자신했다.

마이크의 재촉에도 히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폭탄을 해체해 나갔다. 탄환이 제거된 자리에 수많은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가느다란 전선을 일일이 살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 뒤 선을 잘랐다. 그다음 전선 아래 폭탄과 연결되어 있는 뇌관을 뽑아내자 59초를 남겨 두고 낡은 시계의 초침과 시침이 움직임을 멈췄다.

「폭탄 해체 완료.」

그는 낮은 음성으로 상황 종료를 알렸다.

― 휴우, 중위님 때문에 스트레스성 위장병이 생길 판입니다.

상황 종료 알림에 마이크가 또다시 거친 욕설과 함께 웃음을 터트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의 말에 울프 팀의 다른 대원들 모두 킥킥거리는 웃음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엄살떠는 소리는 그쯤 해 두고 폭탄이나 수거해. 다들 부대 복귀 안 할 건가?」

마이크의 투덜거림에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고 답했다.

― 이봐요. 미스터 침착! 정말이지 단 한 번이라도 그 빌어먹을 자제력을 잃어 본 적이 있기는 한 겁니까? 제발 그 모습 좀 보고 싶네요.

― 하하. 마이크, 꿈 깨라고. 아마 부처도 중위님 앞에선 산만할걸.

마이크의 말을 에릭 크리스텐슨 중사가 끼어들어 가로채며 소리쳤다.

― 젠장, 설마 데이트할 때도 지금처럼 무뚝뚝한 건 아니겠죠? 입 꾹 다물고 있는 남자를 참아 줄 여자는 없다고요.

에릭의 참견에도 마이크의 관심은 오로지 히버트에게 있었다.

― 중위님은 너처럼 매너 없지 않아. 신사 중의 신사지.

― 뭘 모르시네. 요즘 여자들은 따분한 신사보다는 야성미 넘치는 거친 짐승남을 좋아하는 법이야.

계속되는 에릭의 깐죽거림에 마이크가 툴툴대며 말을 받아쳤다.

― 아니, 여자들은 돈 많은 부자를 더 좋아해. 내 여자 친구가 날 차 버린 것도 그 이유였거든.

또 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참여했다. 울프 팀의 공식 운전병인 리차드 스캇 병장이었다. 길거리 레이서 출신인 그는 핸들과 바퀴가 달린 거라면 종류의 구분 없이 무엇이든지 다 몰 수 있었다.

― 글쎄, 과연 그 이유뿐이었을까? 네 운전 실력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장거리 주행을 해야 했는데 단거리 주행밖에 안 됐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최근 실연을 당해 침울해 있는 처량한 리처드의 말에도 마이크는 낄낄대는 걸 멈추지 않고 깐죽거렸다.

― 내 운전 실력은 아무 문제 없었고, 주행도 언제나 장거리였어!

마이크의 말에 리차드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 그렇다면 부실한 건 엔진이었나 보네.

― 푸흡.

― 크크큭. 킥킥.

숨죽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 연애와 주행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운전 실력이 연애에 무슨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팀의 저격수인 힐 하퍼 상병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로 물었다.

― 멍청아, 비유라고, 비유!

마이크의 투덜거림에 힐을 제외한 울프 팀 대원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다들 조용히 하고 일들이나 해. 수다나 떨라고 보급해 준 장비가 아니야.」

―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에요. 지금 새겨듣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걸요? 중위님의 외형이 아무리 짐승남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알맹이가 짐승이 아니면 말짱 꽝이라고요. 여자들에겐 알맹이가 중요하거든요.

히버트의 핀잔에도 마이크는 전혀 기죽지 않으며 계속해서 열띤 주장을 펼쳤다.

― 중위님은 겉과 속 모두 짐승입니다. 장정 셋을 어깨에 지고도 달릴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힐의 찬양에 팀원들의 관심은 다시 히버트에게로 향했다.

― 그 괴력을 작전 때만 쓰니 문제인 거지.

마아크가 끌끌 혀를 차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 중위님, 여자와 단둘이 있을 때도 괴력 좀 발휘해 봐요. 그러면 절대 먼저 차일 일은 없을 겁니다. 차이기는커녕 도리어 여자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을지도 모른다고요. 아니지, 진짜 신이 되는 거죠.

― 마이크 입조심하라고. 중위님에게 네 말은 신성 모독으로 들릴 테니까.

― 어이쿠, 실수했네. 비유였습니다, 비유. 위대하신 중위님의 힘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결코 신이 될 순 없죠.

「다들 그만! 부대에 돌아가 근무 태만으로 얼차려 받고 싶지 않다면 헛소리는 그쯤에서 끝내도록 해. 그리고 제발 상사를 존중하는 태도 좀 보일 순 없나?」

마이크의 계속되는 농담에 울프 팀 대원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히버트는 최후의 수단으로 협박이 다분히 담긴 말을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