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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1화)
4 장 황보세가(1)


덜컹덜컹.
북경을 감싸고 있는 하북이기에 도로는 잘 닦여 있었다. 거기에 마차를 호위하고 가는 자들의 신분이 대단하여 거칠 것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황보세가까지는 엄연히 성을 넘어가는 먼 거리. 보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홀로 마차 안에 앉아 있는 화영은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 그게 있었지!”
마나도 모아 보고 경치 구경도 해 봤지만 여전히 심심함을 느끼던 화영은 뭔가 생각난 듯, 챙겨 온 보따리를 뒤적거렸다.
“찾았다!”
보따리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낸 화영. 책자의 제목은 속성삼재심법이었다.
“어차피 무공을 익히려면 내공이 필요할 텐데 아빠가 내공은 이걸로만 쌓으랬으니까…….”
각 문파에서 자랑하는 심법은 물론, 무림에 떠도는 대부분의 심법은 각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화산파는 목(木), 곤륜파는 풍(風), 이런 식으로. 화산파의 심법이라고 목의 속성만 있고 곤륜파의 심법이라고 풍의 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심법이란 자연의 기운을 정제해서 특정 속성을 강화하여 뽑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삼재심법은 달랐다. 삼재심법은 자연 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쌓았고 그 대신 기가 쌓이는 시간은 무척이나 느렸다. 화영이 가진 마나와 아주 흡사한, 아니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한 정순한 기였지만 축기할 때 일류의 심법이라 불리는 것들에 비해 다섯 배는 더 오래 걸리니 삼류로 분류되어 요즘에 와서는 아무도 익히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화영의 아버지는 화영에게 내공은 오직 이 삼재심법으로만 익히라는 당부를 남겼다. 기존의 삼재심법을 개량하여 축기 속도를 좀 더 높여 놓긴 했지만 여전히 여타 문파의 독문 심법에 비하면 형편없는 속도였다. 정공임에도 주화입마의 걱정이 없고 별도의 사부를 두지 않고도 익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지만 축기 속도라는 큰 차이를 메우기엔 부족한 면이 컸다.
“일단 기를 느끼라고?”
의문이 갈 법도 하건만 화영은 전혀 망설임 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통 무가에 처음 입문한 자들은 기를 느끼는 데만 2, 3년이 족히 걸리지만 화영은 이미 어릴 때부터 마나와 함께해 왔고, 일다경도 되지 않아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됐다! 이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호흡법. 호흡을 통해 단전에 기를 쌓아가는 것. 간단하지만 오래 걸리는, 더욱이 삼재심법이라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할 일이 정해지자 화영은 지체하지 않고 마차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덜컹거리긴 했지만 주화입마의 걱정이 없는 삼재심법이었고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기에 무작정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4초간 숨을 들이쉬고 4초간 숨을 멈춘다. 그리고 2초간 숨을 내쉰다. 숨이 차서 오래하기엔 다소 힘든 호흡법이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 제법 익숙해졌다.
그렇게 호흡에 열중한 지 반 시진.
화영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욱, 우욱!”
덜컹!
가부좌를 풀고 일어난 화영은 비틀대는 걸음으로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무림인들.
급히 마차를 세우자 화영이 파리한 얼굴 그대로 떨어지듯 땅으로 내려왔다.
“우우욱!”
개량한 삼재심법에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삼재심법의 효용 중 하나가 주화입마가 없는 것인데 개량하면서 그게 잘못된 것인가?
화영의 안색은 내상을 입어 금방이라도 피를 토해 낼 듯 안 좋았다.
“우웨엑!!”
마차 한 귀퉁이를 붙잡고 허리 숙인 화영의 입에서 토사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영의 상태는 주화입마가 아니라 멀미였던 것이다.
“우웩, 우웩. 헉, 헉, 헉.”
마차나 말에 타 본 일이 없는 화영인지라 지속적으로 덜컹거리는 마차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몇 차례 더 먹었던 음식을 확인한 화영은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래, 속 안 좋을 때 먹는 약이 있었지!’
눈살 찌푸리는 무림인들을 뒤로하고 다시 마차에 오른 화영은 떠나기 전 황 객주가 줬던 약들을 기억해 내고 목함을 찾아 열었다.
소환단이라는 이름의 작은 환약.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자 아직 닫히지 않은 마차 문밖에서 화영을 지켜보던 이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하의 소환단이 멀미약 대신으로 쓰일 줄이야!”
“허허허허!”
“아미타불.”
내상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먹으면 10년 내공이 절로 생긴다는 소환단이 한낱 멀미약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화영의 몸속으로 퍼진 소환단의 기운은 멀미를 잠재워 주었지만 운기를 하지 않은 탓에 전신 세맥으로 퍼졌다. 일부는 혈도에 스며들어서 운기할 때 약간의 내공 증진 효과를 보여 주겠지만 대부분의 기운은 내공 증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몸을 좀 더 튼튼하게 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하지만 10년 내공을 놓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영은 멀미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했다.
“이번엔 마나를…….”
반 시진의 호흡으로 좁쌀만 한 내공이나마 모였으니 이번엔 마나 수련을 할 차례였다. 가부좌는 아니지만 마차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각을 열어 주위의 마나를 느껴 갔다. 마나를 끌어들인다는 생각을 하며 마나들을 심장으로 몰아넣자 심장에 그려진 세 개의 원을 따라 마나가 순환했다. 돌고 돌던 마나가 어느 순간 전신 세맥을 따라 몸 전체로 퍼졌다. 전신 세맥을 휘감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 마나. 혈액과도 같은 마나는 다시금 심장에 그려진 세 개의 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모인 마나는 여느 때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은 운기를 하지 않아 세맥으로 퍼졌던 소환단의 기운이 마나에 쓸려 마나 증진 효과를 일으킨 것이었으나 소환단이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화영으로선 의아할 따름이었다.
전신 세맥을 휘돌면서 몸에 쌓이기도 한 탓에 십 년 내공에 해당하는 만큼의 기운도 아니었고 내공보다는 마나 쪽이 훨씬 많은 양의 기운을 모으기 때문에 생각처럼 폭발적으로 마나가 증가한 것도 아니었으나 마나가 상당히 늘었다는 것은 어쨌든 기쁜 일이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에이, 모르겠다. 마나가 늘면 좋지 뭐.”
다른 영약이었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기운 때문에 도리어 화영에겐 독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환단, 대환단, 태을신단은 자연 기 그대로를 담은 영약이었고 소환단의 기운은 화영의 마나와 전혀 상충되지 않았다.
때문에 화영은 마나 증진의 이유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저 마나가 불어나는 재미에 계속해서 마나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약 보름이 지나는 동안 단전은 동그란 만두만 해졌고 마나는 3써클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중간에 한 번 더 멀미약 대신 소환단을 복용한 덕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황보세가에 도착했다.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물이 풍부한 대도시이자 철도의 요충인, 대단히 번화한 곳이었다. 황도와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시장과 집들.
이런 걸 본 적 없는 화영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창밖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구파라면 모를까 오대세가 정도라면 한두 곳쯤 더 있어도 될 듯하다고 생각해 보는 화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잘 모르기에 하는 말.
‘그 사건’을 겪으면서 좀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쪽은 구파였기에 은거고수와 제자 수의 차이 정도일까, 현재 구파와 오대세가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한 가장 큰 세력이 황보세가이다 뿐이지 제남에 다른 무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남에서 황보세가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제남에 들어오기 전부터 성대한 환영인파와 안내원들이 줄을 지어 그들을 맞이했고 분주하기 그지없는 상인들도 그들이 지나갈 때만큼은 모두 손을 놓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물론 황보장천이 화영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미리 손을 써놓은 것도 있었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보세가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른 문파의 고수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무공의 특성상 오대세가 중에서도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던 황보세가였기에 질 수 없다는 경쟁심리가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하튼 그들이 황보세가의 장원으로 진입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꽃가루가 뿌려지고 제남성 가득 음악이 울려 퍼졌다.
물론 그런 환영인파 중 누구도 화영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아직은 화영에 대한 모든 것이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화영의 존재가 알려진 하북지방에도 화영의 머리색이 붉은색이다, 파란색이다 하는 등 거짓 정보를 무수히 흘려 놓은 덕분에 머지않아 화영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기억 속에서 잊히거나 도깨비처럼 모호한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종국에 가서는 화영을 기억하는 황 객주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황보장천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앞장서서 장원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황보세가의 식솔들이 말끔한 옷을 갖춰 입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황보세가의 장남인 황보장한이 얼른 달려와 마차 문을 열고 화영을 영접했다.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리는 화영.
그런 그를 향해 황보세가의 식솔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황보세가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보세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장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 뒤에 황보장천의 부드러운 환영 인사가 덧붙었다. 호위로 따라온 다른 무림인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화영은 마냥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너희는 이만 물러가거라.”
“예!”
수십 명의 장한이 일제히 소리치며 절도 있게 사라져 갔다. 그 모습에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화영과 감탄하는 무림인들.
그들은 개개인이 대단한 경지에 올랐기에 사라지는 세가 식솔들의 경지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황보세가를 포함한 오대세가들은 가전무공이 중심이기에 일반 제자들의 무공 수위는 선택된 몇몇을 제하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상상 이상이다.
자리에 남은 것은 황보장천의 혈육들과 십여 명의 시비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실 것이다.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모시도록!”
“예, 가주.”
십여 명의 시비가 일제히 흩어져서 무림인들 앞에 섰다. 다가서는 보법이 모두 제법. 패력을 중시하기에 남성 무인만 있는 줄 알았더니 시비들의 무공도 제법 뛰어난지라 무림인들은 황보세가를 경시하던 마음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