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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2화)
4 장 황보세가(2)


“화영님은 제 딸아이가 방으로 모실 것입니다. 령아야.”
“예, 아버님.”
“……!”
황보장천의 말에 다소곳이 답하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자신보다 일 척은 더 큰 키. 힘들게 고개를 젖혀 올려다본 화영은 절로 나오는 신음성을 간신히 삼켰다.
‘트, 트롤?’
예로부터 산동지방에는 호한이 많이 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황보세가라 하면 특히나 체구가 크고 뛰어난 신력(神力)을 타고나며, 예의바르고 호협(豪俠)한 기상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데…… 꼭 그런 자가 남자뿐인 것만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황보세가의 차녀, 황보령이 그랬다.
6척에 가까운 키와 얼굴까지 올라온 다부진 근육. 패력을 중시하는 황보세가의 무공에 장남인 오라비보다도 잘 맞을 것 같은 그녀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안쓰러워 보이는 작은 옷을 입고 총총거리며 다가온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화영은 언젠가 아빠가 보여 줬던 몬스터 도감이라는 것에 나오는 트롤이란 괴물을 떠올렸다.
‘그, 그건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니랬어. 피부도 녹색이고……. 그럼 이게 사람이란 말이야?!’
화영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을 때 황보장천이 껄껄껄 웃으며 멀미약으로 먹었던 소환단까지 넘어오게 하는 섬뜩한 말을 던졌다.
“이거 화영님께서 제 딸아이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사실 령아가 귀엽긴 귀엽지요. 하하하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말이 사실인지 저런 엄청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황보장천과 그에 동감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식구들을 보며 화영은 간신히 목 끝까지 올라온 신물을 삼켰다.
‘호, 혹시 무림의 미의 기준은 일반인들과 다른 건가?’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무림에서 발을 빼야겠다고 결심하는 화영이었다.
“아잉, 아빠도∼!”
퍼억!
가볍게 툭 치는 것 같았는데 소리나 반응은 전혀 아니었다. 무림고수라는 황보장천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린 것이다.
다시 한 번 식은땀을 흘리는 화영에게 황보장천이 이번엔 주먹 날아갈 소리를 내뱉었다.
“허허, 애도 앙탈은! 어떻습니까, 화영님. 화영님만 좋다면 이 아이를 화영님께 보내고 싶은데…….”
“아, 아니요! 전 절대 무림의 여자는 싫어요. 절대로!”
음흉한 눈빛을 짓는 황보장천에게 화영은 급히 손사래 치며 완강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래도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한 번 더 웃는 황보장천.
“원하신다면 이 아이만큼은 무림에서 발을 빼게 할 수도 있는데…….”
“하, 한번 무림인은 죽을 때까지 무림인이라면서요?”
“그거야 그렇지만……. 쩝! 정히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지금은 일단 쉬십시오.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령아야, 방까지 모셔다 드리거라.”
“예, 아버님. 공자, 이쪽으로.”
“아, 예.”
겨우 한숨 돌린 화영은 혹시나 무슨 소리 또 들을까 봐 재빨리 황보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화영의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귀여운 령아라면 차후에 마음이 변하실 수도 있겠지. 후후, 나중에 봅시다, 미래의 사위.”
화영은 처음으로 저 소리를 차단해 주지 않은 실프를 원망했다.

흡사 고목에 붙은 매미, 아니 그보다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모습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둘은 그리 오래 걷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최대한 그녀와 빨리 떨어지고 싶은 화영이 걸음을 서두른 덕이다. 물론 보폭의 차이가 워낙 커서 거의 황보령이 들다시피 하면서 데려온 것이지만.
“목욕물과 갈아입으실 옷은 안에 준비되어 있답니다.”
“아, 알았어요.”
“제가 씻겨 드릴까요?”
“아뇨! 절대! 제가 알아서 씻을게요.”
시비라면 모를까, 무림 세가의 여식으로서 결코 할 소리가 아니었지만 황보장천에게서 뭔가 언질을 받은 것이 있는 듯, 황보령은 치맛자락까지 슬쩍 올려 보이며 화영을 유혹했다. 그래 봐야 탄탄한 근육밖엔 없지만.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치는 화영.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황보령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묘한 눈빛으로 웃었다.
“호호호, 순진하셔라. 그럼 공자, 저녁 때 뵈요.”
흠칫!
마지막에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주는 것을 잊지 않는 황보령의 모습에 화영은 잠시 굳어 버렸다.
쿠당탕탕.
그리곤 이내 방으로, 그 안에 딸려 있는 욕실로 달려가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웩, 우웨에엑!”
한 손으론 욕조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자신의 등을 두드리던 화영은 나머지 한 알 남은 소환단을 먹어야 할지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다.
“끄응,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벌써 먹어 치우면 안 되겠지.”
이 환단으로 속을 달랠 수 있다면 당장에 삼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소환단의 향만 맡고 말았다.
간신히 속을 달래고 나니 그제야 자신의 초라한 행색이 보였다.
간간이 운디네와 살라만다를 부려 빨아 입긴 했지만 여기저기 구겨진 옷들. 더구나 깔끔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의 황보세가의 황색 무복을 본 뒤라 더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일단 씻자!”
아직 어린애라 멋진 옷이 탐나긴 했지만 아빠를 닮아선지, 황 객주를 닮아선지 큰 욕심 부릴 줄 모르는 화영은 툭툭 털고 일단 목욕부터 시작했다.
혼자 물장구치며 놀기도 하고 운디네를 불러 같이 놀기도 하며 시간 보내길 무려 반 시진. 트롤 같은 황보령에 대한 안 좋은 기억과 기분을 떨쳐 버리고 나온 화영은 침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멋진 황색 무복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제남에서 황색 무복을 입었다는 것은 황보세가의 일원이라는 뜻과 일맥상통했지만 화영이 그런 걸 알 리는 없었다.
“공자, 식사시간이옵니다.”
“예, 나가요.”
허리도 대충 맞아 크게 허리띠를 졸라맬 필요도 없었고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동경을 보니 처음 써 보는 영웅건도 제법 잘 어울렸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화영. 목욕하고 난 후 시장기를 느끼던 차인지라 기분 좋게 문을 열었다.
드르르륵.
“어머, 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공자. 오호호호!”
“욱, 잠시만!”
후다다닥.
다시 재빨리 방으로 들어간 화영은 다시 한 번 욕조에 헛구역질을 해 댔다.
“공자님도 참! 부끄러워하시긴. 호호호호!”
“끄응, 설마 밥도 같이 먹어야 하는 거야?”
“공자님, 그만 부끄러워하시고 이만 나오셔요. 아버님과 손님들이 기다리신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역시나. 고개 푹 숙이고 밥만 먹고 오리라 굳게 다짐하며 다시 문을 여는 화영이었다.
‘근데 내가 벗어 놓은 옷들은 어디 갔지?’
지금 걸친 황의 무복을 입게 하기 위해 누군가 몰래 치워 놨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 화영이었다.
황보령을 따라 식당으로 가자 성대한 만찬과 함께 오직 그 하나만을 기다리는 십수 명의 무림인이 눈에 들어왔다. 화영의 등장과 함께 기립하는 일동.
그러나 고개는 화영의 황의 무복을 보자마자 황보장천에게로 홱 돌아갔다. 무서운 살기를 담아서.
“어험, 험! 그게 저, 공자께서 우리 령아를 좋게 봐 주셔서…….”
휘릭, 휙!
무슨 암기라도 날리듯 무림인들의 고개가 바람 가르는 소리까지 내며 움직였다. 화영의 옆에 서 있는 황보령을 본 뒤, 불신의 눈초리로 다시 한 번 황보장천을 바라보는 무림인들. 물음표 가득 달린 그들의 시선이 갈퀴처럼 온몸에 박히자 황보장천은 씨익 웃으며 둘에게 말을 건넸다.
“어서 인사드리고 앉거라, 령아야. 화영…… 자네도.”
“황보세가의 차녀, 황보령이 무림의 어른들께 인사 올립니다.”
“에……. 저도 인사해야 하나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자신들도 화영에게 말을 높이는데 벌써 사위 대하듯 자네라는 표현을 쓰는 황보장천의 모습과 그런 표현을 듣고도 별다른 불편한 기색을 안 보이는 화영의 모습에 무림인들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영님, 혹시 그 황의 무복이 뜻하는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설마 설마 하면서도 묘한 공황상태에 빠진 무림인들. 그중 가장 먼저 정신 차린 청성파의 고수, 장부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의미라뇨? 옷에 그런 것도 있나요?”
“아뇨. 그런 것 없습니다. 중원 천지에 흔하고 흔한 게 황의 무복이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그렇지’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무림인들.
그들이 혹시나 하는 생각 자체를 품었다는 것만 알아도 난리를 쳤을 화영이었지만 황보장천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저렇게 귀여운데 결국엔 넘어오지 않겠냐?’라는 듯이.
“자, 드시죠.”
황보장천이 권하자 화영의 얼굴에 겨우 화색이 돌았다. 특별한 욕심 없고 검소함을 즐기는 화영이지만 아직 어린애임에는 틀림없으니 맛있고 신기한 음식에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것이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가득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본디 이렇게 크게 소리 내며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나, 그 소리를 내는 것이 화영인 만큼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소리가 깨달음의 한 자락이라도 되는 듯 깊이 음미하며 식사를 즐겼다.
“응?”
처음 보는 신기한 요리에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릴 때였다. 눈앞으로 뭔가 휙 하니 지나가더니 한 노도사의 젓가락 사이로 정확히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식사하는 노도사.
다소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 이번엔 반대편에서 음식물이 날아들었다. 한 명이 허공섭물을 이용해 식사를 하자 다른 자들도 질 수 없다는 듯 너도나도 허공섭물의 수법을 응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공섭물이 뭔지도 모르는 화영. 덕분에 엉뚱한 오해를 품기 시작했다.
‘아빠가 마법사들이 대단한 경지에 오르면 원래 친화력이 없었어도 하급 정령 정도는 부릴 수 있다고 했었는데 이 사람들도 그런 건가? 하지만 이곳에는 마법사가 없다고 했는데……. 에이, 아무렴 어때. 저 사람들도 하니까 나도 상관없겠지?’
허공섭물이라 하면 누가 봐도 감탄하는, 일류의 끝자락에 닿아야 사용해 봄직한 고매한 수법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화영은 저 사람들도 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순진하게 그들의 독특한 식사에 합류했다.
‘실프, 부탁할게.’
이미 정신의 교감만으로도 마음껏 힘을 빌릴 수 있는 실프이기에 실프가 실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정령술의 특수한 점 중 하나, 직접적인 소환 없이 정령의 힘만을 빌리는 것이었다.
직접 소환을 하는 편이 좀 더 교감도를 높이는 데 좋긴 하지만 이미 교감도는 최고를 자랑하는 실프이기에 새삼 모습까지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실프의 힘을 빌리자 화영만큼 빠르고 정확한, 그리고 현란하기까지 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그것도 직선 방향으로만 음식물을 이동시키는 무림인들과 달리 다수의 음식을 한 번에, 그것도 사방에서 가져오고 도중에 다른 사람들의 것과 부딪힐 손 싶으면 갈지(之)자를 그리며 회피해 오기까지 하니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고 화영이 먹는 것만 바라보는 것이다.
“음? 왜 안 드세요?”
“저, 저기. 실례되는 질문인 건 알지만…… 방금 그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방금 그거라뇨?”
“음식들이 날아서 그릇으로…….”
“에……? 다들 하시는 거잖아요?”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한 것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듯 화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거렸다.
사실, 화영이 보여 준 행동을 무공으로 펼치자면 이기어검쯤이어야 될까, 허공섭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공섭물은 어디까지나 직선으로 뻗어 낸 기로 특정 사물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것이지, 그걸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여러 방향에 있는 다수의 사물을 상대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대단하고 어려운 것이다. 무공이라면.
혹시, 염력이라면 또 모른다. 특정한 기공을 익혀 상단전이 열렸거나 태어날 때부터 상단전이 열린 극소수의 특이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염력이라면.
“허공섭물이라면 저희도 하겠지만…… 이기어검의 응용인 겁니까? 어떻게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전 그냥 바람에게 부탁해서…….”
“허어!”
‘바람에게 부탁한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바람 그 자체나 다름없는 ‘실프에게 부탁한다.’라는 의미였지만 무림인들은 ‘자연과 대화한다.’ 즉, 자연동화경에 이르렀다로 해석했다.
결국 얼떨결에 내뱉은 화영의 말은 그들에게 화영이 자연동화경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게 되었고 무림인들이 한 자락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바람에게 부탁한다.’라는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일순간 썰렁해진 식당.
괜히 무안해진 화영은 먹던 것만 마저 먹고 황급히 자리를 피해 방으로 돌아왔다. 밥 먹다 말고 염불하듯 중얼거리는 무림인들을 뒤로하고.
“다들 실프는 부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끄응, 그럼 내가 잘못한 건가?”
아빠가 누차 얘기했던 중급 정령을 부리기 전엔 최대한 정령을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 화영은 스스로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잘못을 인정했다.
“4써클 마스터가 되고 나오라는 말도 안 듣고, 정령도 벌써 여러 번이나 꺼내고. 난 정말 바보야.”
자신의 머리를 몇 대 더 쥐어박은 화영은 자기가 때려 놓고도 아픈지 머리를 감싸 쥐고 한동안 문질렀다. 그리곤 아픔이 가시자 툭툭 털고 침상 근처로 가, 정좌하고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하루라도 빨리 4써클 마스터가 되자! 그러면 아빠도 이해해 주실 거야.”
가벼운 자기 합리화를 끝마치고 화영은 곧장 마나 수련에 돌입했다.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고, 심장을 통해 전신에 퍼트린 후 다시 심장에서 흡수한다. 아직 조금씩 남아 있는 소환단의 기운을 쓸어 가며 천천히, 화영은 밤새도록 본신의 마나를 늘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