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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3화)
4 장 황보세가(3)
“공자님, 일어나셨사옵니까?”
“…….”
“공자님?”
“…….”
“공자님!”
“…….”
드륵.
몇 번을 불러도 묵묵부답이자 참다못한 황보령이 화영의 침실 문을 살짝 열고 훔쳐봤다.
문틈으로 보이는 정좌한 화영의 모습.
운기 중에 방해를 한 건가 하고 아차! 하며 문을 닫으려는 순간 화영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이마에 세 개의 금색 원이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어맛!”
콰당! 빠직!
부공삼매는 부공삼매인 것 같은데 머리 위에 꽃이 피지 않으니 삼화취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 위에 다섯 개의 고리가 생긴 것도 아니니 오기조원도 아니었다. 이마에 세 개의 원이, 그것도 금색의 원이 그려지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놀란 황보령은 엉겁결에 머리로 문을 받아 버렸고 그대로 쓰러진 문은 다시 산산조각 나며 여기저기로 파편이 튀었다.
확실히 그 조금 부딪혀서 박살나는 문이나, 파편에 맞고도 긁힌 자국 하나 없는 피부나. 어떤 걸 봐도 그녀의 몸이 심하게 단단하긴 했다.
“안 돼!”
문이 너무 약해서 부서진 거라고 약한 나무의 재질을 탓하던 그녀의 눈에 파편 하나가 화영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공삼매의 상황이라도 어디까지나 운기를 하고 있는 중! 작은 충격이라도 잘못 받으면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거나 죽을 수 있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보령의 비명은 진기를 가득 담은 사자후. 아니, 천마후와 같은 위력으로 장원 전체를 뒤덮었다.
텅!
그러나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화영에게 날아가던 나무토막은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혀 어디론가 간단히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무림인들의 경지상승과는 다르게 마법사, 혹은 정령사의 써클이 올라갈 때는 마나 배리어라 불리는 보호막이 생기는 덕이었다.
마나 배리어 속에서 황보령의 비명도, 수십 개의 커다란 기운들이 움직이는 것도 느끼지 못한 화영은 그저 써클을 완성하는 데만 전념했다.
“령아야, 무슨 일이냐!”
“무슨 일입니까?”
“화영님은? 화영님은 어디 계시지?”
“저, 저기!”
음공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가공할 목청에 집안 하인들이 쓰러지는 동안 기로 귀를 보호하고 달려온 무림인들과 황보장천은 서둘러 황보령을 챙기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화영의 모습.
종류는 다르지만 부공삼매가 확실한 모습에 무림인들은 또 한 번 심마와 싸워야 했다.
“자연동화경에서 또 한 번의 깨달음이라니……!”
“아직도 더 얻을 게 있단 말인가?”
“어허, 무의 끝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은 각자 한마디씩 탄성, 혹은 탄식을 자아내며 쓰린 속을 달랬다.
그러나 쉽게 끝나지 않는 화영의 부공삼매. 덕분에 화살은 황보령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보거라.”
“그게, 그러니까…….”
황보령은 차분히 자신이 이곳에 온 경위와 사건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고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뭐 하나라도 건질까 하는 생각 때문에 듣는 이들은 한없이 진지했고 보이지 않는 막에 나무토막이 튕겨 나갔다는 말에 각자 분석하느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넌 가서 기절한 식솔들을 챙기거라.”
이미 들을 것은 다 들었기에 황보령이 자리를 뜨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운기 중에 나무토막이 튕겨 나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결국,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황보장천이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슬쩍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화영에게 쏘아 냈다.
퉁!
“허어!”
모두가 보았다. 확실하게 튕겨져 나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갑자기 든 호기심에, 황보장천은 이번엔 내공까지 넣어 작은 돌을 던졌다.
투웅!
역시나 마찬가지. 단단하기 그지없는 마나 배리어는 내공이 실린 돌멩이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화영의 이마에 겹쳐지는 또 하나의 황금빛 원.
츠즈즈즈즈즛.
다른 세 개의 원과 달리 연한 빛을 띠는 그 원이 화영의 이마에 생기자 마나 배리어도 점점 힘을 잃는가 싶더니 이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화영이 소환단 두 알의 힘을 빌려, 드디어 3써클을 마스터하고 4써클 초입에 이른 것이다.
“응? 왜 다들 여기 계세요?”
“새로운 경지에 드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누군가 선창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재빨리 소리쳤다. 영문을 모르고 고개만 갸웃하는 화영.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되, 자신이 4써클에 오른 것을 축하해 주는 것임을 알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아시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게, 황보가의 여식이 공자를 모시러 왔다가 부공삼매에 빠지신 모습에 소리를 질러서 알게 되었습니다.”
황보가의 여식이란 말에 화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가 지금 여기 있나요?”
“아니오. 방금 돌려보냈습니다만…… 불러 드릴까요?”
“아뇨! 절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절대!”
황보장천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묻자 화영이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물론, 그 모습을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황보장천 혼자뿐이다.
소동이 일단락되자 무림인들은 좀 전의 상황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화영에게 질문해 댔다.
“화영님이 부공삼매 중일 때 몸 주위에 쳐진 막은 무엇입니까?”
“마나 배리어죠.”
“……?”
무림인들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화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이마를 탁 치며 말을 바꿨다.
“그냥 보호막이에요. 방금처럼 경지가 높아질 때 절 지켜주는. 그런데 부공삼매가 뭐예요?”
“깨달음을 얻을 때 그 기운을 방출시키면서 몸이 붕 뜨는 현상입니다. 좀 전에 화영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직 깨달음으로 성장하는 단계가 아닌지라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화영이었지만 몸이 뜨는 현상이 비슷하긴 했기에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마에 그려진 세 개, 아니 네 개의 원은 무엇입니까?”
“써클…… 아니, 제 힘을 나타내 주는 일종의 증표죠.”
그 말에 무림인들은 금빛 써클을 삼화취정, 오기조원과 같은 무공의 경지로 인식해 버렸다.
“왜 하필이면 원입니까?”
“왜라니요? 그야 원이 힘의 근원이니까 그런 거죠.”
아빠에게 배운 대로, 당연하게 말하는 화영이었지만 무림인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삼화취정이나 오기조원에서도 각 꽃이나 고리들은 각자의 의미가 있는데 화영의 이마에 그려진 원의 의미가 힘의 근원이라니, 그렇다면 화영의 무공이 모든 힘의 근원, 즉 무공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신음성을 토한 무림인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비들이 어지러워진 방을 정리하고 나간 뒤, 화영은 따로 청해 방에서 식사를 마쳤다. 아무리 충격을 받은 상태라도 화영의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듣기 위해 무림인들은 식당에 나와 있었지만 황보령 보기가 무서운 화영이 고집을 피운 것이다.
그 결과, 다행히 황보령과 마주칠 일은 없었고 점심때는 몰래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합! 합! 합!”
“하앗!”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는 나왔으되, 갈 곳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은 화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기합성을 쫓아갔다.
“제일초, 패력일경!”
파방!
진각 밟는 소리가 연무장 가득 요란하게 퍼지며 수십 명의 장한이 일제히 주먹을 내뻗었다.
사뭇 대단한 기세.
그들의 기백과 절도 있는 동작에 매료돼, 화영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화영님. 언제 오셨습니까?”
황보장천이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정신이 팔려 있는 화영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화영이 연무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연기하며 말을 걸었다.
기실 아무리 중요한 객이라고는 해도 남의 문파에 와서 연무장을 훔쳐보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는 일. 황보장천이 멀리서 알아보고, 문을 지키는 자들에게 전음을 보내지 않았으면 마주치지도 못했을 터였다.
“아! 안녕하세요. 밖에 나왔다가 기합 소리가 들려서 와 봤는데 여기들 계셨네요.”
사위 대하듯 편하게 말을 바꿨던 황보장천이 다시 말을 높인 이유. 그것은 지금 그의 뒤로 서 있는 십수 명의 무림인들이 각기 살기를 담은 협박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화영이 웃으며 인사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는 무림인들. 연무장의 주인인 황보장천을 떠밀며 뭔가 무리(武理)를 말하게 하도록 압박했다.
“예. 여기서 제자들의 무공 수련을 좀 봐 주고 있었죠. 화영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저희 황보세가의 무공이. 물론, 가전 무공이 중심인 만큼 저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혹시나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봐서인지 황보장천은 뒷말을 붙이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멋있고 세 보여요! 저같이 덩치가 작은 사람은 흉내 내기 힘들겠지만.”
“험, 허엄!”
멋있고 세 보인다는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지던 황보장천은 뒷말에서 뭔가를 깨달고 헛기침을 해 댔다.
그랬다. 황보세가의 무공 역시 팽가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힘을 중시하는 타입. 타고난 신력이 없으면 성취를 보기 힘들다는 단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화영이 그런 것을 알고 꼬집으려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찔리는 게 있으니 황보장천을 위시한 무림인들에겐 비꼬는 말로 들린 것이다.
“사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약한 자를 위해 쓰기는 하지만 강한 자들이 익히기 위한 무공으로 남지 않을지…….”
황보장천도 제법 말재주가 있던 것일까? 교묘하게 말을 비틀어서 황보세가의 무공을 높여 놓았다. 무림인들은 그게 못마땅하고 우스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화영은 담담하기만 했다.
“땅의 기운?”
황보세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패권(覇拳)의 제사초식, 패력무강(敗力武强)을 펼칠 때, 비로소 화영이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팽가 도법을 보고 번개라고 반문하던 것과 같음을 알고 재빨리 말을 받는 황보장천.
“예, 맞습니다. 저희 황보세가의 내공은 토(土)기가 중심입니다. 제자들이 익히는 것과 저희 식구가 익히는 심법은 서로 다르지만 토기를 중심으로 한 것은 분명하죠. 수미천왕신공에서 비롯된 토기로 패력적인 권을 구사하는 것이 저희 황보세가입니다.”
자부심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 이면에는 팽위천과 같은 기연을 얻길 희망하는 크디큰 기대감이 묻혀 있었다.
“땅의 힘과 패력?”
그의 설명을 듣고 둘의 연관성을 찾기 시작하는 화영. 그 조그만 입에서 한마디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림인들은 내상에 가까운 초조함으로 속이 타 들어갔다.
‘땅의 단단한 기운으로 몸을 강하게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세게 때린다는 건가? 흐음!’
“하지만 단단한 땅만 있는 게 아닌데…….”
화영의 머릿속에선 비 온 뒤의 질척질척한 땅과 푹신하고 보드라운 땅의 감촉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땅의 성질만을 생각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이미 화영을 신처럼 생각하는 무림인들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고 있었다.
‘단단한 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의미지? 단단하다는 건 강맹하다는 의민가? 아니면 철벽같은 수비?’
그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운 건 얘기를 들은 황보장천, 본인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이긴 한데 조급한 마음에 쉽사리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무리를 듣고 다른 사람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라도 하면 그 같은 망신이 또 없었기에 황보장천은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지. 그는 좀 전까지 진기에 대해 말했고, 수미천왕신공을 땅의 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기 그 자체에 대한 말일 텐데…….’
“아!”
하지만 다행히,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고 되짚어 가며 생각하자 실마리가 잡혔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잔잔하고, 폭풍 같고, 칼날 같고 부드러운 여러 기운이 서서히 풀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