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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4화)
4 장 황보세가(4)


“크읏?”
“이, 이건?”
갑작스런 기의 폭풍에 각자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던 자들이 황보장천의 변화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일제히 소리 높였다.
“부공삼매!”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였다.
“허허허!”
“팽 시주에 이어 황보 시주까지……. 아미타불! 과연 대단하십니다.”
화영이 말하는 사소한 이치를 깊이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얻은 기연이었지만 무림인들은 화영이 핵심을 짚어 깨달음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물론, 팽위천과 황보장천. 둘은 자신이 가진 내공의 진정한 속성을 깨달으며 큰 변화를 겪었고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화영의 도움을 받았으니 어찌 보면 화영이 대단한 걸 수도 있지만.
“우리 황보세가의 권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 몰랐다니 내가 그동안 무공을 헛배웠구나. 하하하하!”
“감축드리오.”
“감축드립니다. 가주!”
황보장천이 깨달음을 모두 소화하고 운신이 가능해지자 주변 무림인들은 물론, 황보세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근처에 있었던지, 어느새 달려온 황보령이 황보장천에게 뛰어 안겼다. 그 모습이 심히 괴이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두 부녀는 주위 시선쯤은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아버지, 축하드려요!”
“하하! 고맙다, 령아야. 이게 다 화영님 덕분이란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감사의 인사를 못 드렸군요. 제자들의 무공을 일견하신 것만으로 저희 세가 무공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다니, 이 황보모가 화영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는 황보장천.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화영도 덩달아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황보령이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화영 공자∼.”
아주 사랑스런, 그러나 듣는 사람은 괴로운 목소리로 화영을 부르는 황보령. 다소 공포스런 그 모습에 화영은 누군지 모를 무림인의 등 뒤로 재빨리 숨었다.
“공자도 참. 부끄러워하시긴!”
“저, 저기. 전 여기에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원래는 최소 삼 일을 머무셔야 합니다만 지금이라면 화영님이 원하시는 즉시 다음 문파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떠나시겠습니까?”
“네. 가능하면 빨리요!”
화영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장부현은 전면을 향해 갈무리했던 기도를 개방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화영님께서 이동할 뜻을 밝히셨소. 모두 다음 문파로 떠날 채비를 하시오!”
“크음! 하지만 화영님은 아직 저희 세가의 무공비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 각 문파끼리 조율한 결과 한 문파에서 최소 3일을 머물되 최대 한 달을 넘기면 안 되고 깨달음이 전해졌을 경우 3일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기에 화영의 이동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때문에 떠날 채비를 하는 무림인들을 황 객주와의 약속인 ‘무공비급 한 가지를 볼 수 있게 하라.’를 들먹여 붙잡는 황보장천.
청성파 고수인 장부현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힘을 얻었는지 이번엔 황보령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공자님. 저희 가문의 무공을 더 보셔야죠. 요염함으로 상대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저의 뇌살권도 보여 드릴게요.”
“헉!”
그 말은 물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는 황보령의 행동은 막대한 공격력을 가진 정신 공격이 되어 화영을 비롯한 근처의 고수들에게 구토 증세를 일으켰다.
“돼, 됐어요. 전 이미 여기에서 배울 책을 골라 놨어요!”
“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떤?”
“오행권(五行拳)!”
“오행…… 권이요?”
오행권을 택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황보장천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예상한 비급은 황보세가 무공의 정수인 천왕삼권(天王三拳)이나 태산십팔반장(泰山十八盤掌). 그런데 오행권은 일반 제자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지만 그들조차 보지 않는 하급의 무공인 것이다.
“네, 오행권!”
“끄응, 가져오너라!”
“예, 아버지.”
쿵 쿵 쿵.
비급을 가지러 가는 황보령이 뛸 때마다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다. 매 걸음마다 천근추를 시전하면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할 때, 충격적인 황보장천의 말이 들려왔다.
“기본은 탄탄해 보이니 이제 저 아이에게도 무공을 가르쳐야겠군. 새로 깨달은 바를 적용시키면 저 아이에게 맞는 부드러운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저 아이에게 맞는 부드러운’이라는 대목도 걸렸지만 아직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아직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바닥에 깔린 청강석을 모조리 박살 내며 어지간한 경공보다도 빠르게 달려간 건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괴물이군.’
모두의 뇌리에 각인된 생각이었다.
좀 더 많은 수련을 하라는 의미에서 연무장과 제자들의 생활공간을 거의 붙여 놨기에 황보령이 비급을 들고 돌아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급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은 화영.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그의 마음은 초인적인 암기력을 만들어 냈고, 한 식경 후. 화영은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화영님,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요. 아직 중원오악 중 하나인 태산도 가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하루쯤 더 머무시고 내일 제 여식과 함께 태산에 오르시지요.”
“아뇨! 전 산에서 오래 살아서 산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마지막으로 만류해 보는 황보장천이었지만 역효과가 나도 심하게 날 소리였다. 서둘러 마차에 오르는 화영. 문이 굳게 닫힌 마차에 대고 황보령이 소리쳤다.
“공자님, 제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셔요! 기다릴게요!”
“으악! 실프, 소리 좀 차단해 줘!”
황보령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차 안에서 귀를 틀어막고 실프까지 부르는 화영이었다.
그렇게, 무림의 여인에 대한 안 좋은 인상만을 남기고 황보세가는 멀어져 갔다.
화영이 가고 난 뒤, 쓰레기 취급받던 오행권이 비전 무공으로 탈바꿈되었지만 황보세가에서 오행권으로 대성한 사람은 후세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차의 다음 행선지는 안휘성 회남지방, 남궁세가였다.


5 장 남궁세가(1)


덜커덩 덜커덩.
황도에서 조금 떨어져서인지 길이 조금 험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하기야, 벌써 지친다면 정말 험해질 청해에 가서는 버텨 내질 못할 테니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다행히 마차의 덜컹거림에 익숙해졌는지 화영은 용케도 나머지 소환단 한 알을 복용하지 않고 있었다.
“손을 이렇게 하던가?”
보통 익숙해진 것이 아닌 걸까? 이젠 기억을 더듬어 무공까지 익히는 화영이었다.
그가 펼치는 손동작은 황보세가의 비급에 있던 오행권.
오행의 기운을 동작으로 표현한 이 권법은, 본래 황보세가의 것이 아니었으나 우연한 경로로 황보세가에 들어와 오랫동안 자리 잡은 무공이었다. 단, 이 무공은 오행의 기운을 고루 쓰는데 황보세가 식솔들의 진기는 토기가 유독 강해서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무공 자체가 그리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오행의 기운을 표현하는 권법이라서인지 화영은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유독 이 무공이 끌렸다. 마나를 가지고, 각 속성의 정령을 부리는 화영과 이 무공이 공명했달까?
좋게 표현하면 그랬다.
“음, 생각보다 어렵네.”
아무리 쉽고 간단한 무공이라도 기초가 부족한 화영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그나마 각 속성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게 도움이 됐지만 동작마다 부분부분 막히긴 매한가지다.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화영은 그 동작을 잠시 포기하고, 다른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 왔습니다. 회남입니다!”
회남에 들어서자 황보세가 때와 같은 성대한 환영식이 열리진 않았지만 대신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벽이 발 벗고 달려 나와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서 장원으로 가시죠.”
남궁벽이 앞장서서 길을 열자 거리가 금방 뚫어 놓은 것처럼 한산해졌다. 그만큼 남궁세가의 신망이 두텁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길은 뚫렸어도 거리는 어쩔 수 없기에 한참을 다시 움직이는 동안, 화영은 보따리를 뒤져 한 권의 책을 꺼냈다.
“남궁세가. 안휘성 회남지방에 위치. 귀신도 곡할 기관진식과 용병술로 유명하다. 특히 기관진식은 제갈세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 쾌검과 중검이 적절히 결합된 검공을 사용하며 오대세가 중 수좌를 차지하고 있음. 구파의 검법과 비교해 우위를 보였으면 보였지 밀리진 않는다? 와, 뭔진 모르지만 대단하네?”
화영이 꺼낸 것은 하오문에서 만든 각 문파에 대한 설명집이었다. 이미 몇 번 훑어보긴 했지만 다시 읽어 보니 새삼 대단해 보이는 남궁세가. 쭉 읽어 내려가던 화영은 세가 인물 구성이라 적힌 부분에서 멈칫했다.
“남궁성아? 여자 이름인데 설마…….”
무림의 미의 기준이 황보령과 같다고 착각하는 화영이었기에 등줄기에 오싹함을 느꼈다.
이미 황보령의 모습은, 화영에게 공포로 각인되어 있었다.
“으으, 삼 일 동안 방 안에서만 생활해야겠다.”
이미 규칙에 대해서 들은 화영이기에 숙식을 모두 방 안에서만 해결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한 식경쯤 더 지나서야 도착한 남궁세가. 돌아서 오는 바람에 보름 하고도 이틀이나 걸린 힘든 여정이었다.
“내리시지요.”
마차 문이 열리자 화영이 보따리 하나를 품에 꼬옥 안고 내렸다. 소소객잔에서부터 가져온 보따리. 뭔가 대단한 것이 들었을 거라 추측하며 한 번쯤 몰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무림인들이었지만 감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황보세가에서처럼 남궁세가의 식솔 및 제자, 무사들이 일제히 정중하게, 그러나 웅장한 목소리로 환영인사를 건넸다.
“남궁세가에 잘 오셨습니다!”
“남궁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벽이라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더 화영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 남궁벽은 새삼스레 자기소개를 하는 수고스러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는데……. 저기, 저 쉬고 싶은데 인사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물론 다음을 기약할 뿐,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화영이었지만 자리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무시당한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상했지만 허허 웃으며 잘 받아넘기는 남궁벽.
“꽤 오랫동안 이동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이 남궁모가 주책을 떨었군요. 그럼 일단 쉬십시오. 너희는 어른들을 모시거라!”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무림인들을 대동하고 배정된 방으로 멀어져 갔다.
남은 것은 화영뿐.
안내는 당연히 남궁세가의 식구들 중 한 명의 차지였다.
“화영님의 안내는 성아가 하거라.”
“예, 아버님.”
공손히 읍하고 앞으로 나서는 여인. 그런데,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체구는 무척 작고 갸름했다.
‘혹시 얼굴이 코볼트처럼 생긴 거 아니야?’
매 시대마다 있는 무림사미란 이름을 어린 나이에도 당당히 물려받은 남궁성아였지만 무림의 여인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가지게 된 화영으로선 다가오는 것조차 두렵기만 할 따름이었다.
“제가 공자를 모시겠습니다.”
가까이 와서야 가렸던 얼굴을 드러낸 남궁성아. 별다른 치장 없는 모습이었지만 과연 그녀의 모습은 무림사미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황홀했다.
“에, 엘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남궁성아의 얼굴을 본 화영은 두근대는 심장을 제어할 수 없었다. 신성하면서도 황홀한 느낌이 들게 하는 미녀, 그게 남궁성아인 것이다. 오죽하면 화영이 미의 화신이라는 엘프를 떠올렸을까.
그녀가 금발이 아님과 귀가 뾰족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화영은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변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남궁성아의 뒤를 졸졸졸 쫓아갔다.
위세라면 황보세가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압도하는 남궁세가였지만 검소함을 덕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장원이 그리 크지 않았다. 덕분에 숙소까진 금방이었고 화영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여기입니다, 공자. 편히 쉬세요.”
“네, 네!”
숫기라도 조금 있었으면 말이라도 건네 보련만, 화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도 못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피식.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남궁성아는 공손히 잘 모시라는 아버지의 당부도 잊고 귀여운 동생 보는 듯한 눈으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